메아리를 받아칠 땅이 없었다. 샤모스는 다시 한번 크게 소리 질렀다. 창밖으로 뭉게구름이 떠다녔지만 구름은 함성에 화답하는 방법을 몰랐다.
나머지는 시푸른 창공이었다. 창공은 소리를 받아치긴커녕 오히려 집어삼켰다. 깊숙이 얼어붙은 호수를 들여다 봐도 저 아래 어떤 생물이 헤엄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는 것처럼.
샤모스의 목소리가 흩어지고 가라앉았다. 정적이 찾아왔을 때에도 그는 창틀에 두 손을 댄 채 먼 풍경을 보고 있었다. 장애물 없이 달려온 바람이 샤모스의 머리카락과 옷을 휘날렸다. 그는 두툼한 털 외투의 목 부분을 여몄다.
엘미나는 샤모스의 곁에 가 설지, 아니면 자기 옆에 있는 여신상을 볼지 고민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한 뒤 결정했다. 샤모스가 자기를 쳐다보거나 이름을 부른다면 그의 곁에 가기로. 그 전까지는 여신상을 관찰하기로 했다.
원형으로 솟은 탑은 내부 중앙에 있는 곧은 기둥을 중심으로 계단이 나선형으로 나 있었다. 중간중간 쉬고 가라는 듯 넓은 층계가 나타났는데, 여신상은 바로 그 층계에 있었다.
엘미나가 아는 여신의 모습은 아니었다. 아마도 탑을 지었던 인간들이 숭배했을 이름 모를 여신이거나, 또는 지혜의 여신을 직접 본 적 없는 그들이 상상으로 지어낸 모습일 수 있었다. 무엇이 됐든 요정인 엘미나가 아는 여신은 아니었다.
회백색 돌을 통째로 깎아 만든 여신상은 엘미나의 두 배나 되는 높이였다.
신전의 돌기둥을 닮은 물건을 의자 삼아 앉은 여신은 두 발을 덮고도 한참 더 흘러내리는 나풀나풀한 옷을 입고 있었다. 곱슬거리는 장발이 여신의 허리까지 내려왔다. 탑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여신의 머리가 흩날리지 않는 것이 순간 당황스러울 정도로, 조각상의 묘사는 생생했다.
수백 년 전 인간들에게 이만한 석조 기술과 예술적 감수성이 있었다는 사실이 엘미나는 낯설게 느껴졌다.
그다음으로 시선을 끄는 것은 여신의 두 날개였다. 새처럼 수북한 깃털이 달린 날개는 몇 군데 금이 가고 깨어지기도 했지만, 여신상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컸다.
여신은 날개를 접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라도 날아오를 것처럼 부드러운 긴장감을 어깨에서 날개 끝까지 흘려보내고 있었다.
엘미나는 다시 순간적인 당황을 느꼈는데, 자신의 등 뒤에 달린 얇고 반투명한 날개가 갑자기 초라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봤자 인간의 창조물이었다. 여신을 마주한 적도 없는 존재들이, 첫 번째가 되겠다는 그릇된 욕망에 빠져 만들어낸 태작에 불과했다.
엘미나의 날개가 파르르 떨렸다. 바람 때문이었다. 여전히 샤모스가 마주한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엘미나가 입은 털 외투 속으로 서늘한 감촉이 훑고 지나갔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더 추워질 것이었다.
엘미나는 샤모스에게 다가갔다. 천장 없이 솟은 탑 내부에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샤모스에게 가까워질수록 바람이 거세져서 엘미나의 검은 머리카락이 자꾸 눈을 가렸다.
그녀가 머리를 손으로 한 번 쓸며 다가가자 샤모스가 고개를 돌렸다. 샤모스의 금색 머리카락도 그의 눈과 코를 찌르고 있었다. 일 년 동안 한 번도 자르지 않은 머리였다. 탑을 오를 때는 손에 머리카락이 잡히지도 않을 만큼 짧았지만, 지금은 어깨에 나앉은 뒷머리가 굴곡을 그리며 위로 치솟았다.
“소리 질러 볼래요?” 샤모스가 입꼬리를 올린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아.” 엘미나가 말했다.
그녀는 유리도 쇠창살도 없이 뻥 뚫린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너무 파랗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만들어질 때, 신의 용광로에서 막 꺼내어 식지 않은 하늘이 이런 색깔일 것 같았다. 아직 한 마리의 새도 질주하지 않았을, 비와 눈의 추락도 허락되지 않은, 너무 맑아서 요정인 자신조차 지저분하다고 여겨지는 순수의 청색이었다.
엘미나는 후회했다. 탑을 걸어 내려가는 게 아니었다. 샤모스의 부탁을 들어주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샤모스는 입 주변에 손을 동그랗게 모았다. 가슴이 부풀도록 숨을 마시더니 곧 소리 질렀다. 야호―.
엘미나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샤모스의 부탁을 들어주길 잘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인간들이 메아리를 듣기 위해 뱉는 저 말을 한동안 듣지 못했을 것이다.
돌아오는 소리는 없었다.
엘미나가 말했다. “조금만 더 내려가서 해보렴. 여긴 너무 높아.”
“몇 층이죠?” 샤모스가 물었다.
“8층.” 엘미나가 대답했다. 꼭대기를 제외하면 천장이 없는 탑에는 층이라 부를 것도 없었다. 하지만 님프 요정들은 탑에 있는 스무 개의 여신상을 기준으로 탑을 20층으로 나누었다. 방금 엘미나가 본 것이 위에서부터 열두 번째 여신상이었다.
샤모스가 몸을 돌렸다.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원만한 나선을 그리며 펼쳐졌다. 샤모스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등에 멘 두툼한 가방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샤모스를 따라가려던 엘미나는 이상한 시선을 느껴 여신상을 쳐다보았다. 여신상은 아까와 똑같은 자세와 크기로 서 있었다. 여신은 눈을 감고 있었다. 입은 바람에 닳은 것인지 원래 그렇게 조각한 것인지 형태가 희미했다.
엘미나는 여신상이 있는 쪽에서 시선을 느꼈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신상 주위를 돌아다녔다. 아무것도 없었다. 탑의 층계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혼자 덩그러니 선 여신상이 불경한 침입자로 보였다.
엘미나는 샤모스를 쫓아 계단을 내려갔다. 다시 여신상 쪽에서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7층까지 왔을 때 해가 졌다. 하루에 2개 층 조금 안 되게 내려오고 있었다.
여신상이 보이자 샤모스는 층계 위에 가방을 풀어 침낭을 꺼냈다. 탑을 올라갈 때는 없었던 짐이다. 샤모스가 탑을 걸어 내려가겠다고 말했을 때, 님프 요정들이 준비해 준 것들이었다.
탑의 1층과 꼭대기를 한 번에 이동하게 해주는 마법석이 만들어진 후로 탑을 걸어서 오르내리는 사람은 없었지만, 님프 요정들은 필요한 물건과 시간에 대해 기억하고 있다며 직접 짐가방을 챙겨주었다.
탑을 내려가려면 12일 정도가 걸린다고 요정들은 말했다. 하루에 최대 두 개 층씩. 그 이상 움직이면 지혜의 여신에게 미움을 산다고도 말했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요정이 인간보다 더 독실하다는 생각.”
샤모스가 층계 바닥에 얇은 종이 한 장을 깔았다. 원 안에 갖가지 도형과 문자가 그려진 종이였다.
“요정은 먼 옛날부터 여신들과 함께였으니까.”
엘미나는 침낭에 몸을 넣고 앉아 있었다. 넓은 잎 둥글게 말아 만든 잔을 손에 쥐고, 조금씩 그 안에 담긴 이슬을 마시고 있었다. 탑의 창틀에서 수확한 저녁 이슬이었다.
샤모스는 바닥에 깐 종이에 지팡이 끝을 몇 번 두드렸다. 입으로 외우는 주문이 이어지자, 종이에 새겨진 마법진에서 서서히 빛이 났다. 샤모스가 지팡이를 거두자마자 불이 피었다. 하룻밤은 거뜬히 타오를, 연기 없이 빛과 열만 내는 모닥불이었다.
뒤로 물러난 샤모스가 침낭 안에 몸을 넣고 앉았다. 두 손을 펼쳐 불에 쪼였다.
샤모스가 말했다. “왜 이 탑이 지어졌는지 이해가 돼요.”
“그렇니?” 엘미나가 말했다.
창문으로 황혼의 마지막 붉은빛이 들어왔다. 엘미나의 잔에 담긴 이슬도 붉게 달아올랐다.
샤모스가 말했다. “인간들이 지었다면서요. 적게 잡아도 사백 년 전에요. 전쟁이 끝나고 여신들이 강림했던 게 대략 오백 년 전이고, 인간들은 그때 처음 신의 존재를 목격했던 거잖아요? 그 전까지 여러 지역에서 믿었던 토착신들은 모두 거짓된 신들로 판명 났고요.”
엘미나는 자기 앞에 있는 7층의 여신상으로 눈길을 주었다. 여신상은 그녀에게 등 돌린 채 날개만 보여주었다.
샤모스가 말을 이었다. “여신들은 직접 전쟁의 영웅들을 치하하고 악을 징벌했죠. 그리고는 어디로 갔겠어요? 생명의 여신은 어디로 향했는지 아무도 못 봤다고 하지만, 지혜의 여신과 시간의 여신은 하늘로 올라갔잖아요. 만약 제가 그 시대를 살았던 인간이라면, 저도 여신을 만나기 위해 하늘로 올라갔을 거예요. 실제로 당시 많은 인간들이 그랬고요.”
“적진 않았지.” 엘미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 탑은 지혜의 여신을 만나기 위해 인간 마법사들이 지은 탑이죠? 지혜의 여신은 구름보다 높은 오르비스의 신전으로 돌아갔으니, 날개 달린 요정들 외에는 아무도 다시 만날 기회가 없었겠죠.”
“나도 만날 기회는 없었는걸.” 엘미나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황혼빛이 물든 그녀의 날개는 하늘을 날기에 턱없이 작고 연약했다. 샤모스가 말한 날개 달린 요정은 새처럼 깃털 날개를 가진 님프 요정들을 말했다.
“저도 알아요.” 샤모스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어두컴컴해진 탑 안에 메아리처럼 퍼졌다. “제가 말하고 싶었던 건, 인간들이 처음으로 신을 보았는데 신들이 곧바로 모습을 감춘 게 불공평했다는 거예요. 인간들은 탑을 지을 수밖에 없었어요. 지혜의 여신이 탑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거나, 심지어 분노에 차 탑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해도요. 그 외에는 여신을 만날 방법이 없잖아요? 아, 물론 시간의 여신의 경우는 달랐지만······.”
엘미나는 샤모스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하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샤모스의 음성에만 몰두하면서 잔에 담긴 마지막 이슬 한 모금을 마셨다. 오르비스 탑에 대해 말하는 샤모스와 함께 있을수록, 그가 인간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선명해졌다.
해가 완전히 졌을 때 샤모스와 엘미나는 나란히 누웠다. 샤모스의 고른 숨소리를 듣고 있던 엘미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탑을 내려온 이레 동안 잠을 설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샤모스가 말한 탑에 관한 이야기들은 엘미나도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그녀가 더 많이 알았다.
오백여 년 전 대전쟁이 끝나고 세 여신이 지상에 강림했을 때, 인간들이 신의 존재를 처음 목격한 것도 사실이었다. 지혜의 여신이 오르비스의 신전으로 돌아가자 인간들이 탑을 지은 것도 사실이었다. 여신이 인간들의 탑 건설을 오히려 기뻐했다는 것도, 덕분에 인간들은 백 년 가까이 여신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는 것도, 모두 사실이었다.
샤모스는 말을 이렇게 끝맺었었다. 이제 지혜의 여신은 인간을 만나주지 않는다고, 여신은 다시 님프 요정들의 신이 되었다고 말이다. 부분적으로는 사실이지만, 샤모스가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지혜의 여신은 님프 요정들 또한 만나지 않았다. 여신은 사라졌다. 사백여 년 전에. 대전쟁 때 강림했던 세 여신을 만날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샤모스는 그 사실을 몰랐고, 오르비스에 가면 지혜의 여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만나지 못한다면, 적어도 여신을 섬기는 님프 요정들에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일 년 전, 샤모스가 오르비스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고 말한 이유가 이것이었다. 엘미나는 그때부터 알고 있었다. 오르비스 탑을 지어 올렸던 인간 마법사들의 욕망과, 지금 오르비스에 가겠다 말하는 샤모스의 욕망은 같다고.
샤모스의 간청은 우선 엘미나에게 받아들여졌고, 숲의 요정들과 장로에게도 곧 받아들여졌다. 엘미나가 동행하기로 했다. 오랫동안 지상과 왕래하지 않은 님프 요정들에게 샤모스 혼자만 보낼 수 없었다. 구름보다 높은 하늘, 낮과 밤의 구분 없이 검푸른 하늘로 둘러싸인 세상의 꼭대기에 오르비스가 있었다.
오르비스는 예로부터 천체에 관한 지식이 해박했고 그 힘을 다루는 마법에도 능통했다. 십 년 동안 숲에서 살아온 샤모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물론 님프 요정들은 좋은 선생이 아니었다. 샤모스를 가르치기를 대놓고 거부하기도 모자라, 자기들끼리 골탕을 먹이려는 듯 샤모스에게 잘못된 지식을 가르치고 나중에 혼을 내는 일까지 있었다. 참다못한 엘미나의 경고가 있고 난 뒤에야 님프 요정들은 샤모스를 그나마 가르치는 척이라도 했다.
샤모스는 일 년 동안의 공부를 마치고 오르비스를 떠났다. 님프 요정들에게 언제나 눈엣가시인 오르비스 탑을 샤모스가 걸어서 내려가겠다고 말했을 때 요정들은 순순히 필요한 짐을 준비해 주었다. 엘미나의 경고 때문이 아니었다.
샤모스는 오르비스가 수만 년 동안 탐구했던 천체의 지식과 마법을 모두 습득했다. 일 년 만에. 처음엔 샤모스를 무시하고 조롱했던 요정들도, 반년이 지나자 샤모스를 두려운 존재로 여겼다. 그즈음 샤모스가 지혜의 여신을 만나고 싶다고 밝혔을 때, 엘미나는 님프 요정들의 얼굴을 늘어뜨리는 절망을 보았다. 말리고 싶었다. 저들도 여신을 만나지 못해, 여신은 떠났어, 요정들조차 버리고 떠났어, 저들을 괴롭히지 마, 제발 그러지 마.
눈을 뜬 엘미나가 몸을 옆으로 돌렸다. 샤모스가 똑바로 누워 자고 있었다. 처음 지필 때처럼 잘 타오르는 모닥불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샤모스가 낮에 오르비스 탑에 대해 말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분명 샤모스는 고민하고 있었다. 왜 일 년 동안 오르비스에 머물면서도 여신을 만날 수 없었을까. 님프 요정들은 왜 여신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기피했을까. 늘 곁에 있던 엘미나 자신은, 이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을 조금도 설명해 주지 않았을까, 하고.
하지만 샤모스는 속마음을 털어놓는 일이 드물었다.
바람 한 자락이 샤모스의 머리를 넘겼다. 코끝에 걸친 머리카락 한 올이 모닥불에 반사되어 빛났다. 엘미나는 침낭에서 손을 빼내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겨주었다.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진 오래된 반지에도 불빛이 반사되었다.
그녀는 몸을 똑바로 눕혔다. 그러자 천장 없는 탑이 심연의 아가리처럼 눈앞에 솟아났다. 탑의 목구멍에서 시린 입김이 그녀의 얼굴을 내리눌렀다. 계단 하나하나가 소용돌이의 이빨이었다. 한 점으로 수렴되는 탑의 끝은 칠흑의 어둠, 빛보다 먼저 있었을 태고의 어둠이었다.
아니다. 어둠은 인간의 작품이 아니었다. 신이 만든 자연의 질서와 조화가 인간들의 조잡한 형상에 덧씌워진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왜 옛날의 인간들이 탑의 어둠까지 지어 올린 것처럼 보이는 걸까. 어쩌면 인간들은 여신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 어둠을 구현하기 위해 탑을 세운 것이 아닐까. 엘미나는 몇 가지 질문을 더 떠올렸지만 잠결에 잊어버렸다.
6층에 이르렀을 때 지상이 보였다. 샤모스는 창밖으로 몸을 쑥 내밀었고 깜짝 놀란 엘미나가 조심하라고 소리쳤다.
샤모스가 아래를 보면서 말했다. “눈밭이에요. 작년에 왔을 때랑 똑같아요.”
엘미나도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탑의 창문은 세 사람이 나란히 서도 될 만큼 컸다. 그리고 탑은 창문 서른 개 둘레만큼 컸다. 샤모스의 말대로 지상이 보였다. 하얬다. 탑이 선 땅은 언덕 없는 평지였다. 나무들도 쉽사리 가까이 오지 못했고, 안개에 취한 평탄한 눈밭이 곧장 보였다.
사방으로 숲이 보였다. 머리에 눈더미를 이고 있는 나무들은 검정에 가까운 녹색 이파리를 꼿꼿이 매달고 있었다. 숲이 머금은 어둠이 그 아래 쌓인 눈을 서늘하게 태웠다.
두 사람은 동쪽으로 나 있는 창문에 있었다. 날씨가 좋으면 멀리 마을이 보이겠지만, 눈안개에 가려 풍경은 탑의 회백색 돌처럼 반질반질했다. 하늘에도 구름이 짙어 해가 보이지 않았다. 눈이 솔솔 왔다. 어제 봤던 8층의 하늘과 딴판이었다.
샤모스가 몸을 들어 정면을 보았다. 저 멀리 엘나스 산맥의 봉우리들이 눈안개를 부드럽고 찢고 솟아나 있었다. 엘미나는 샤모스가 왜 메아리를 듣기 위해 소리치지 않나 싶었다.
그녀의 마음을 알아챈 것인지 샤모스가 말했다. “여기서 하면 재미없잖아요.”
“왜 재미가 없니?” 엘미나가 물었다.
샤모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를 향해 웃어 보이기만 했다. 엘미나도 웃는 표정을 지었다.
바람이 탑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눈이 두 사람을 향해 날렸다. 솜뭉치처럼 굵고 우둘투둘한 눈송이 하나가 창틀에 얹은 샤모스의 왼쪽 손등에 내려앉았다. 추운 날씨 탓에 녹지 않았다. 엘미나는 말없이 샤모스의 손등에 자신의 오른손을 얹었다. 곧이어 엘미나의 반지 가까운 곳에도 눈송이가 떨어졌다.
“엘미나.” 샤모스가 말했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들어볼게.” 엘미나가 말했다.
“지혜의 여신은 왜 사라진 거예요?” 샤모스가 물었다.
엘미나는 손을 오므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샤모스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샤모스가 말을 이었다. “오르비스의 어떤 요정에게서도 여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어요. 물어보고 싶어도, 마치 제가 물어보리라는 걸 아는 것처럼, 겁먹은 얼굴로 저를 피했어요. 그래서 제가 직접 알아내야 했어요.”
“네가 알아냈다니?”
엘미나가 오른손에 힘을 줬다. 눈발이 세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눈송이가 툭툭 부딪쳤다.
샤모스가 말했다. “오르비스 도서관에 갔어요. 가서, 요정들이 들어가지 말라고 한 방에 몰래 들어갔어요. 찾는 데 시간이 제법 걸렸지만, 요정들이 여신과 만났던 기록이 적힌 책을 찾았어요. 마지막 장에 이렇게 적혀 있더라고요. 여신이 갑자기 사라졌다, 여신의 탑이 보이지 않는다, 여신은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그게 언제 기록인지 알아요, 엘미나?”
“사백칠 년 전.” 엘미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맞아요.” 샤모스가 말했다.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전 요정들이 여신을 감춰놓고 있는 줄 알았어요. 인간들이 신을 만나는 일을 용납할 수 없어서, 저들끼리만 아는 곳에 신을 숨긴 줄 알았어요.”
“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겠지.” 엘미나가 말했다. “그렇게 하기도 전에, 여신은 사라진 거야. 자기를 섬기기 위해 요정들이 하늘에 건설한 신전도 버리고 말이다.”
“그래서 신전이 버려져 있었군요.” 샤모스가 말했다. “크리엘 외에는 아무도 신전에 가지 않았어요. 바보라도 그건 알 수 있거든요. 그리고 제가 바보는 아니고요.”
“바보는 네가 아니라 크리엘 같은 요정들이겠지. 아직도 인간을 얕잡아보고, 너 같은 총명한 사람이 여신의 부재를 눈치채지 못할 거라 믿은 거란다.”
“당신도요?”
엘미나가 샤모스에게서 손을 뗐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했다. 샤모스가 침묵에 잠긴 동안, 엘미나는 오르비스를 떠나기 직전 크리엘이 해준 말을 떠올렸다. 언제나 샤모스를 향해 냉엄한 낯빛을 보이던 크리엘이었다.
‘샤모스는 우리 전부를 합친 것보다 뛰어나요. 가까이하지 말아요. 샤모스는 자기보다 뛰어난 자를 찾기 전까지 갈증에 시달릴 테고, 그 갈증이 당신을 삼키려 들 거예요.’
엘미나가 입을 열었다. “네가 묻지 않았잖니.”
“맞아요.” 샤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비스에 여신이 사라진 거냐고 물었다면 나는 대답했을 거다. 넌 그러지 않았고, 님프 요정들이 출입을 불허한 곳에 들어가 책을 뒤적였어. 함부로.”
샤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미나가 말했다. “돌아가서도 그럴 거니? 숲의 도서관에 들어가, 나와 장로님이 허락하지 않은 방의 문을 열어서, 우리의 비밀마저도 들춰낼 거니?”
“아뇨.” 샤모스가 말했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엘미나는 뒤늦게 자기가 '우리'라는 말을 썼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표정과 어조를 그대로 하며 말했다. “약속하렴.”
“약속해요. 앞으로는 당신에게 먼저 말할게요.”
엘미나는 샤모스를 앞질러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샤모스가 뒤를 따랐다. 탑 안에 들어온 눈송이들이 날벌레처럼 허공을 맴돌았다. 엘미나는 털 외투를 여몄다. 그리고 왼손으로, 오른손에 낀 반지를 더듬었다.
지상으로 내려오기까지 사흘이 더 걸렸다. 샤모스는 걸음을 빨리했고 마지막 날에는 하루에 세 개 층을 내려왔다.
두 사람 간에 대화는 많지 않았다. 엘미나는 어서 숲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더 이상 여신상들도 그녀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오르비스 탑 일 층 밑바닥에 이르자 닫힌 나무문이 보였다. 샤모스가 문을 밀어보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탑 내벽에는 거미줄처럼 엉겨 붙은 눈과 얼음이 가득해서 설산의 동굴에 들어온 것 같았다. 나무문에도 흰 얼음조각이 곰팡이처럼 퍼져 있었다.
샤모스가 문에서 물러나며 말했다.
“밖에 눈이 쌓였나봐요.”
“창문으로 넘어가자.”
엘미나가 탑 반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쪽에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눈 밟는 소리인가 싶더니 곧이어 문이 흔들거렸다. 푸석한 눈더미를 헤치는 소리가 들렸다. 샤모스가 다시 문에 몸을 대고 밀기 시작했다.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누가 당기고 있어요.” 샤모스가 엘미나에게 말했다.
엘미나도 문으로 다가가 함께 밀었다. 정말로 문 반대편에서 누군가 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사람 한 명 지나갈 만한 틈이 생겼을 때, 엘미나는 그 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눈더미를 밟고 밖으로 나왔다.
뿌연 안개. 하얗게 질린 나무들. 눈벌판 한가운데 서 있는 세 필의 말. 거기서부터 탑까지 이어진 발자국 한 줄.
“로웬!” 샤모스의 목소리였다.
문 반대편에서 당기던 이는 로웬이었다. 그녀는 하얀 털 외투로 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다. 옅은 무늬가 새겨진 로웬의 날개가 등 뒤에서 사라락 움직였다.
로웬이 샤모스에게 말했다. “머리 많이 길렀네. 잘 지냈니?”
샤모스가 웃으며 그렇다고 말했다. 로웬은 샤모스의 머리에 쌓인 눈을 손으로 털어주다가 엘미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로웬이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엘미나. 설마 탑을 걸어서 내려온 거예요?”
“응.” 엘미나가 말했다. “샤모스가 그러자고 했어.”
로웬이 샤모스를 보며 말했다. “무모한 일을. 네 스승님을 얼마나 졸랐길래 허락하신 거니.”
“그런 일 없어요. 엘미나도 좋다고 했어요.” 샤모스가 말했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듣자. 얼른 돌아가야 해.” 로웬이 말했다.
“그래요. 하인즈는 잘 지내요?” 샤모스가 물었다.
그 말에 로웬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엘미나는 눈 맞고 서 있는 세 필의 말을 바라보았다. 모두 세 사람이 숲에서 기르는 타는 말들이었다.
샤모스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로웬은 입을 열지 않았다.
엘미나가 로웬을 보며 말했다.
“로웬. 무슨 일인지 간략하게만 말해줘요.”
엘미나와 샤모스는 여기서 멀지 않은 마을에서 휴식을 취하고, 시장에서 말을 구해 보름 정도 달리면 숲에 도착할 수 있었다. 로웬이 말을 끌고 왔다는 건, 최대한 빨리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는 의미였다.
샤모스와 엘미나를 번갈아 보던 로웬이 입을 열었다.
“엘미나, 숲에서 당신의 결정을 필요로 해요.”
“하인즈한테 무슨 일 있어요?” 샤모스가 물었다.
로웬은 샤모스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인즈가 우리 몰래 흑마법을 연구했단다. 그를 추방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엘미나와 장로님이 결정해야 해.”
로웬이 저 말을 눈물 흘리지 않으며 끝맺을 수 있을 만큼 얼마나 연습했을지, 엘미나는 짐작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샤모스가 눈물 흘리는 것은 짐작하지 못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