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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 빅뱅 전 팬소설) 메이플스토리: 황야의 메아리 1화

누가퍼갔냐
조회: 105
2026-09-06 21:28:56



메이플스토리: 황야의 메아리 1화
1장 귀환의 꿈 (1)



그가 마법을 처음 본 것은 어떤 마법사 여행자에게서였다고 한다. 당시 그는 샤레니안 왕국의 점령하에 있던 북부 폰토스 고원의 정착지에서 살고 있었다.

정착지, 라고 인간들은 말하지만, 폰토스 원주민과의 오랜 전쟁 탓에 왕국의 영토는 날마다 조금씩 바뀌었고, 국경 가까이에 자리 잡은 마을들은 언제 공격을 받을지 모를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가 살았던 정착지라는 것은, 사방에서 온 피난민들이 이곳저곳에 막집을 지은 것에 가까웠다.

누군가는 집과 생계를 잃었고, 누군가는 가족을 잃었겠지만, 대부분은 모든 것을 잃은 자들이 내몰린 비루한 거처였다. 어린 소년이었던 그는 겨우 목숨만을 붙이며 살고 있었을 때였다.

왕국 변방에까지 발을 들인 마법사는 분명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대단할 것 없는 마법사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사람들 앞에서 보인 기초적인 마법은 허공에 빛을 만들어내는 시각적 경이를 선사했고, 특히 그의 마음에는 마법사가 보인 마법보다 더 밝고 뜨거운 불을 지피는 데 성공했다.

사람들이 마법사에게 박수를 치는 동안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자신을 감동시킨 이 놀라운 힘을 손에 넣어야겠다고.

― 『마법사 이야기』 1장 中





메아리를 받아칠 땅이 없었다. 샤모스는 다시 한번 크게 소리 질렀다. 창밖으로 뭉게구름이 떠다녔지만 구름은 함성에 화답하는 방법을 몰랐다.

나머지는 시푸른 창공이었다. 창공은 소리를 받아치긴커녕 오히려 집어삼켰다. 깊숙이 얼어붙은 호수를 바라보아도 저 아래 어떤 생물이 헤엄치고 있을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샤모스의 내지른 소리가 흩어지고 사라졌다. 사라지고 나서도 샤모스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장애물 없이 달려온 바람이 창문을 넘어와 샤모스의 머리카락과 옷을 휘날렸다. 그는 추운 듯, 두툼한 털 외투의 목 부분을 여몄다.
 
엘미나는 샤모스의 곁에 가 설지, 아니면 자기 옆에 있는 여신상을 계속 바라볼지 고민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한 뒤 결정했다. 샤모스가 자기를 쳐다보거나 이름을 부른다면 그의 곁에 가기로. 그 전까지는 여신상을 관찰하기로 했다.
 
원형으로 높이 솟은 탑은 내부 중앙에 있는 돌기둥을 중심으로 계단이 나선형으로 나 있었다. 중간중간 쉬고 가라는 듯 넓은 층계가 나타났는데, 여신상은 바로 그 층계에 있었다.
 
엘미나가 아는 여신의 모습은 아니었다. 아마도 탑을 지었던 인간들이 숭배했을 이름 모를 여신이거나, 또는 지혜의 여신을 직접 본 적 없는 그들이 상상으로 지어낸 모습일 수 있었다. 무엇이 됐든 요정인 엘미나가 아는 여신은 아니었다.
 
회백색 돌을 통째로 깎아 만든 여신상은 엘미나의 두 배나 되는 높이였다.

어느 신전의 기둥을 참조한 듯한 돌기둥 위에 앉은 여신은 두 발을 덮고도 한참 더 흘러내리는 나풀나풀한 옷을 입고 있었다. 곱슬거리는 장발이 여신의 허리까지 내려왔다. 탑 안으로 새어드는 바람에 여신의 머리가 날리지 않는 것이 순간 당황스러울 정도로, 여신상의 묘사는 생생했다.

수백 년 전 인간들에게 이만한 석조 기술과 예술적 감수성이 있었다는 것이 엘미나는 낯설었다.
 
그다음으로 시선을 끄는 것은 여신의 두 날개였다. 새처럼 수북한 깃털이 달린 날개는 몇 군데 금이 가고 깨어지기도 했지만, 여신상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컸다.

여신은 날개를 접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라도 날 수 있을 것처럼 약간의 긴장을 날개 곳곳에 순환시키는 듯했다.
 
엘미나는 다시 순간적인 당황을 느꼈는데, 자신의 등 뒤에 달린 얇고 반투명한 날개가 갑자기 초라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봤자 인간의 창조물이었다. 여신을 마주한 적도 없는 자격 없는 자들이, 첫 번째가 되겠다는 그릇된 욕망에 빠져 만들어낸 태작에 불과했다.
 
엘미나의 날개가 파르르 떨렸다. 바람 때문이었다. 여전히 샤모스가 서 있는 창밖으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엘미나가 입은 털 외투 속으로 서늘한 감촉이 훑고 지나갔다. 아래층으로 내려갈수록 더 추워질 것이었다.
 
엘미나는 샤모스에게 다가갔다. 천장 없이 솟은 탑 내부에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샤모스에게 가까워질수록 바람이 거세져서 엘미나의 검은 머리카락이 자꾸 눈을 가렸다.

그녀가 앞머리를 한 손으로 살짝 누르고 옆에 섰을 때 샤모스가 고개를 돌렸다. 샤모스의 금색 머리카락도 그의 눈과 코를 찌르고 있었다. 일 년 동안 한 번도 자르지 않은 머리였다.
 
“소리 질러 볼래요?” 샤모스가 물었다.
 
“괜찮아.” 엘미나가 말했다.
 
그녀는 유리도 쇠창살도 없이 뻥 뚫린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너무 파랗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만들어질 때, 신의 용광로에서 막 꺼낸 하늘이 이런 색깔일 것 같았다. 아직 한 마리의 새도 질주하지 않은, 비와 눈의 추락도 허락하지 않은, 너무 맑아서 요정인 자신조차 지저분하다고 여겨지는 하늘이었다.

엘미나는 후회했다. 탑을 걸어 내려가는 게 아니었다. 샤모스의 부탁을 들어주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샤모스는 입 주변에 손을 동그랗게 모았다. 가슴이 부풀도록 숨을 마시더니 곧 소리 질렀다. 야호―.

엘미나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샤모스의 부탁을 들어주길 잘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인간들이 메아리를 듣기 위해 뱉는 저 말을 한동안 듣지 못했을 것이다.
 
돌아오는 소리는 없었다.
 
엘미나가 말했다. “조금만 더 내려가서 해보렴. 여긴 너무 높아.”
 
“몇 층이죠?” 샤모스가 물었다.
 
“8층.” 엘미나가 대답했다. 이 탑에 층이라 부를 것은 없지만, 님프 요정들은 탑에 있는 스무 개의 여신상을 기준으로 탑을 20층으로 나누었다. 방금 엘미나가 본 것이 꼭대기 기준으로 열두 번째 여신상이었다.
 
샤모스가 몸을 돌렸다.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원만한 나선을 그리며 펼쳐졌다. 샤모스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등에 멘 가방이 좌우로 흔들렸다.
 
샤모스를 따라가려던 엘미나가 이상한 시선을 느껴 여신상을 쳐다보았다. 여신상은 아까와 똑같은 자세와 크기로 서 있었다. 여신은 눈을 감고 있었다. 입은 바람에 닳은 것인지 원래 그렇게 조각한 것인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엘미나는 여신상이 있는 쪽에서 시선을 느꼈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신상 주위를 돌아다녔다. 아무것도 없었다. 탑의 층계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어서 혼자 덩그러니 선 여신상이 불경한 침입자로까지 보였다.

엘미나는 샤모스를 쫓아 계단을 내려갔다. 다시 여신상 쪽에서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7층까지 왔을 때 해가 졌다. 층계 위 여신상이 보이자 샤모스는 가방을 풀어 침낭을 꺼냈다. 탑을 올라갈 때는 없었던 짐이다. 샤모스가 탑을 걸어 내려가겠다고 말했을 때, 님프 요정들이 준비해 준 것들이었다.
 
탑의 1층과 꼭대기를 한 번에 이동하게 해주는 마법석이 만들어진 후로 탑을 걸어서 오르내리는 사람은 없었지만, 님프 요정들은 필요한 물건과 시간에 대해 기억하고 있다며 직접 짐가방을 챙겨주었다.

탑의 꼭대기에서 지상까지는 열흘 조금 넘게 걸린다고 요정들이 말했다. 하루에 두 개 층씩. 그 이상 움직이면 지혜의 여신에게 미움을 산다고도 말했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요정이 인간보다 더 독실하다는 생각.”
 
샤모스가 층계 바닥에 얇은 종이 한 장을 깔았다. 원 안에 갖가지 도형과 문자가 새겨진 종이였다.
 
“요정은 먼 옛날부터 여신들과 함께였으니까.”
 
엘미나는 침낭에 몸을 넣고 앉아 있었다. 큰 이파리를 둥글게 말아 만든 잔을 손에 쥐고, 조금씩 그 안에 담긴 이슬을 마시고 있었다. 탑의 창틀에서 수확한 저녁 이슬이었다.
 
샤모스는 바닥에 깐 종이에 대고 세심하게 손가락을 펴 움직였다. 종이에 새겨진 마법진에서 서서히 빛이 났다. 샤모스가 손을 거두자 종이에서 불이 피어올랐다. 하룻밤은 거뜬히 타오를, 연기 없이 빛과 열만 내는 모닥불이었다.
 
뒤로 물러난 샤모스가 엘미나처럼 침낭 안에 몸을 넣고 앉았다.
 
샤모스가 말했다. “왜 이 탑이 지어졌는지 알 것 같아요.”
 
“그렇니?” 엘미나가 말했다.
 
창문으로 황혼의 마지막 붉은빛이 들어왔다. 엘미나의 잔에 담긴 이슬도 붉게 달아올랐다.
 
샤모스가 말했다. “인간들이 지었다면서요. 적게 잡아도 사백 년 전에요. 전쟁이 끝나고 여신들이 강림했던 게 대략 오백 년 전이니까, 인간들은 그때 처음 신의 존재를 목격했던 거죠. 그 전까지 여러 지역에서 믿었던 토착신들은 모두 거짓된 신들로 판명 났고요.”
 
엘미나는 자기 앞에 있는 7층의 여신상을 살폈다. 여신상은 그녀에게 등 돌린 채 날개만 보여주었다.
 
샤모스가 말을 이었다. “여신들이 직접 전쟁의 영웅들을 치하하고 악을 징벌했다면서요. 그다음에 어디로 갔겠어요? 생명의 여신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못 봤다고 하지만, 지혜의 여신과 시간의 여신은 하늘로 올라갔잖아요? 만약 제가 그 시절을 살았다면, 저도 여신들을 좇아서 하늘로 향했을 것 같아요. 실제로 그때 많은 인간들이 그랬고요.”
 
“적진 않았지.” 엘미나가 작게 말했다.
 
“이 탑은 지혜의 여신을 만나기 위해 인간 마법사들이 지은 탑이죠? 지혜의 여신은 구름보다 높은 오르비스의 신전으로 돌아갔으니, 날개 달린 요정들 외에는 아무도 다시 만날 기회가 없었겠죠.”
 
“나도 만날 기회는 없었는걸.” 엘미나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황혼빛이 물든 그녀의 날개는 하늘을 날기에 턱없이 작고 연약했다. 샤모스가 말한 날개 달린 요정은 새처럼 깃털 날개를 가진 님프 요정들을 말했다.
 
“저도 알아요.” 샤모스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어두컴컴해진 탑 안에 낮게 울려 퍼졌다. “제가 말하고 싶었던 건, 인간들이 처음으로 신을 봤는데 그 신들이 곧바로 모습을 감춘 게 불공평했다는 거예요. 인간들은 탑을 지을 수밖에 없었어요. 지혜의 여신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거나, 심지어 분노에 가득 차 탑을 무너뜨릴지 몰라도요. 그러지 않으면 여신을 만날 방법이 없잖아요? 아, 물론 시간의 여신의 경우는 좀 달랐지만······.”
 
엘미나는 샤모스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하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샤모스의 음성에만 몰두하면서 잔에 담긴 마지막 이슬 한 모금을 마셨다. 오르비스탑에 대해 말하는 샤모스와 함께 있을수록, 그가 인간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선명해졌다.
 
샤모스와 엘미나는 침낭에 나란히 누웠다. 샤모스의 고른 숨소리를 듣고 있던 엘미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탑을 내려온 이레 동안 잠을 설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샤모스가 말한 탑에 관한 이야기들은 엘미나도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그녀가 더 많이 알았다.

오백여 년 전 대전쟁이 끝나고 세 여신이 지상에 강림했을 때, 인간들이 신의 존재를 처음 목격한 것도 사실이었다. 지혜의 여신이 님프 요정들의 공중섬인 오르비스로 돌아가자 지상의 인간들이 탑을 지은 것도 사실이었다. 여신이 인간들의 탑 건설을 오히려 기뻐했다는 것도, 덕분에 인간들은 백 년 가까이 여신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는 것도, 모두 사실이었다.
 
샤모스는 자신의 말을 이렇게 끝맺었었다. 이제 지혜의 여신은 인간들을 만나주지 않는다고, 여신은 다시 님프 요정들의 신이 되었다고 말이다. 그 말도 부분적으로는 사실이지만, 샤모스가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지혜의 여신은 님프 요정들 또한 만나지 않았다. 여신은 사라졌다. 사백여 년 전에. 대전쟁 때 강림했던 세 여신을 만날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샤모스는 그 사실을 몰랐고, 오르비스에 가면 지혜의 여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만나지 못한다면, 적어도 여신을 섬기는 님프 요정들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일 년 전, 샤모스가 오르비스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고 말한 이유가 이것이었다. 엘미나는 그때부터 알고 있었다. 오르비스탑을 지어 올렸던 인간 마법사들의 욕망과, 자기 앞에서 오르비스에 가겠다 말하는 샤모스의 욕망은 같다고.
 
샤모스의 간청은 우선 엘미나에게 받아들여졌고, 숲의 요정들과 장로에게도 곧 받아들여졌다. 엘미나가 동행하기로 했다. 오랫동안 지상과 왕래하지 않은 님프 요정들에게 샤모스 혼자 보낼 순 없었다. 구름보다 높은 하늘, 낮과 밤의 구분 없이 검푸른 하늘로 둘러싸인 세상의 꼭대기에 오르비스가 있었다.
 
공중섬 오르비스는 예로부터 천체에 관한 연구가 탁월했고, 십 년 동안 숲에서 살아온 샤모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물론 님프 요정들은 좋은 선생이 아니었다. 샤모스를 가르치기를 대놓고 거부하기도 모자라, 자기들끼리 골탕을 먹이려는 듯 샤모스에게 잘못된 지식을 가르치고 나중에 혼을 내는 일까지 있었다. 참다못한 엘미나의 경고가 있고 난 뒤에야 님프 요정들은 샤모스를 그나마 가르치는 척이라도 할 수 있었다.
 
샤모스는 일 년 동안의 공부를 마치고 오르비스를 떠났다. 님프 요정들에게 언제나 눈엣가시인 오르비스탑을 샤모스가 걸어서 내려가겠다고 말했을 때 요정들은 순순히 필요한 짐을 준비해 주었다. 이는 엘미나의 경고 때문이 아니었다.
 
샤모스는 오르비스가 수만 년 동안 탐구했던 천체의 지식과 마법을 모두 습득했다. 일 년 만에. 처음엔 샤모스를 무시하고 조롱했던 요정들도, 반년이 지나자 샤모스를 두려운 존재로 여겼다. 그즈음 샤모스가 지혜의 여신을 만나고 싶다고 밝혔을 때, 엘미나는 님프 요정들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말리고 싶었다. 저들도 지혜의 여신을 만나지 못해, 여신은 떠났어, 요정들조차 버리고 떠났어, 저들을 괴롭히지 마, 제발 그러지 마.
 
엘미나는 몸을 옆으로 돌렸다. 샤모스가 똑바로 누워 자고 있었다. 모닥불은 처음과 같이 잘 탔다. 마법이 지펴낸 열기가 두 사람의 몸을 추위로부터 지켰다.
 
샤모스가 낮에 오르비스탑에 대해 말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분명 샤모스는 고민하고 있었다. 왜 일 년 동안 오르비스에 머물면서도 여신을 만날 수 없었을까. 님프 요정들은 왜 여신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기피했을까. 늘 곁에 있던 엘미나 자신은, 이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을 한마디도 설명해 주지 않았을까, 하고.

하지만 샤모스는 속마음을 털어놓는 일이 드물었다.
 
바람 한 자락이 샤모스의 머리를 넘겼다. 코끝에 걸친 머리카락 한 올이 모닥불에 반사되어 빛났다. 엘미나는 침낭에서 손을 빼내 샤모스의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겨주었다.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진 오래된 반지에도 불빛이 반사되었다.
 
그녀는 몸을 똑바로 눕혔다. 천장 없는 탑이 심연의 소용돌이처럼 눈앞에 솟아났다. 계단 하나하나가 소용돌이의 이빨 같았다. 한 점으로 수렴되는 탑의 끝은 칠흑의 어둠, 빛보다 먼저 있었을 태고의 어둠이었다.

이건 인간의 작품이 아니었다. 신이 만든 자연의 질서와 조화가 인간들의 조잡한 탑에 덧씌운 형상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왜 옛날의 인간들이 탑의 어둠까지 지어 올린 것처럼 보일까. 어쩌면 인간들은 오르비스에 있는 여신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 어둠을 구현하기 위해 탑을 지었던 것이 아닐까. 엘미나는 몇 가지 질문을 더 떠올렸지만 잠결에 잊어버렸다.





6층에 이르렀을 때 지상이 보였다. 샤모스는 창밖으로 몸을 쑥 내밀었고 깜짝 놀란 엘미나가 조심하라고 소리쳤다.
 
샤모스가 아래를 보면서 말했다. “눈밭이에요. 작년에 왔을 때랑 똑같아요.”
 
엘미나도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탑의 창문은 세 사람이 나란히 서도 될 만큼 컸다. 샤모스의 말대로 어렴풋이 지상이 보였다. 하얬다. 눈 덮인 나무들은 옆에 드리운 그림자로만 구분되었다. 탑 주변은 언덕 없는 평지였고 겨울을 잘 견디는 나무들이 점거한 상태였다.
 
해가 뜬 방향을 보아 두 사람은 동쪽으로 나 있는 창문에 있었다. 날씨가 맑으면 멀리 엘나스 마을이 보이겠지만, 눈안개에 가려 풍경은 탑의 회백색 돌처럼 반질반질했다. 하늘에도 눈구름이 몰려 있었다. 어제 봤던 8층의 하늘과 딴판이었다.
 
샤모스가 몸을 들어 정면을 보고 있었다. 눈안개 사이로 엘나스 산맥의 봉우리들이 머리를 치켜올렸다. 엘미나는 샤모스가 왜 메아리를 듣기 위해 소리치지 않나 싶었다.
 
그녀의 마음을 알아챈 것인지 샤모스가 말했다. “여기서 하면 재미없잖아요.”
 
“왜 재미가 없니?” 엘미나가 물었다.
 
샤모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를 향해 웃어 보이기만 했다. 엘미나도 웃었다.

눈송이가 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솜뭉치처럼 굵고 우둘투둘한 눈송이 하나가 창틀에 얹은 샤모스의 왼쪽 손등에 내려앉았다. 추운 날씨 탓에 곧바로 녹지 않았다. 엘미나는 말없이 샤모스의 손등에 자신의 오른손을 얹었다. 곧이어 엘미나의 반지 가까운 곳에도 눈송이가 떨어졌다.
 
“엘미나.” 샤모스가 말했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들어볼게.” 엘미나가 말했다.
 
“지혜의 여신은 왜 사라진 거예요?” 샤모스가 물었다.
 
엘미나는 손을 오므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샤모스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샤모스가 말을 이었다. “오르비스의 어떤 요정에게서도 여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어요. 물어보고 싶어도, 마치 제가 물어보리라는 걸 아는 것처럼, 저를 피하거나 겁먹은 표정을 지었어요. 그래서 저 스스로 알아내야 했어요.”
 
“스스로 알아냈다니?”
 
엘미나는 오른손에 힘을 줬다. 눈발이 조금씩 세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눈송이가 툭툭 부딪쳤다.
 
샤모스가 말했다. “오르비스 도서관에 갔어요. 가서, 요정들이 들어가지 말라고 한 방에 몰래 들어갔어요. 찾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요정들이 여신과 만났던 기록이 적힌 책을 찾았어요. 마지막 장에 이렇게 적혀 있더라고요. 여신이 갑자기 사라졌다, 여신의 탑이 보이지 않는다, 여신은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그게 언제 기록인지 알아요, 엘미나?”
 
“사백칠 년 전.” 엘미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맞아요.” 샤모스가 말했다. 목이 잠긴 듯했다. “전 요정들이 여신을 감춰놓고 있는 줄 알았어요. 오르비스탑을 지었을 사백 년 전의 인간들에게도, 일 년 동안 공부했던 저에게도 말이에요. 인간들이 신을 만나 그 말씀을 듣는 걸 용납할 수 없어서, 그들끼리만 아는 곳에 신을 숨겨놓은 줄 알았어요.”
 
“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겠지.” 엘미나가 말했다. “그렇게 하기도 전에, 여신은 사라진 거야. 자기를 섬기기 위해 요정들이 하늘에 지어놓은 신전을 버리고 말이다.”
 
“그래서 신전이 버려져 있었군요.” 샤모스가 말했다. “크리엘 외에는 아무도 신전에 가지 않았어요. 바보라도 그건 알 수 있거든요. 그리고 제가 바보는 아니고요.”
 
“바보는 네가 아니라 크리엘 같은 요정들이겠지. 아직도 인간을 얕잡아보고, 너 같은 총명한 사람이 여신의 부재를 알아내지 못할 거라 믿은 거란다.”
 
“당신도요?”
 
샤모스가 엘미나에게서 손을 뺐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했다. 샤모스가 침묵에 잠긴 동안, 엘미나는 오르비스를 떠나기 직전 크리엘이 해준 말을 떠올렸다.
 
‘샤모스는 우리 전부를 합친 것보다 뛰어나요. 가까이하지 말아요. 샤모스는 자기보다 뛰어난 자를 찾기 전까지 갈증에 시달릴 테고, 그 갈증이 당신까지 삼킬 거예요.’
 
엘미나가 입을 열었다. “네가 묻지 않았잖니.”
 
“맞아요.” 샤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비스에 여신이 사라진 거냐고 물었다면 나는 대답했을 거다. 넌 그러지 않았고, 님프 요정들이 출입을 불허한 곳에 들어가 책을 펼쳤어. 함부로.”
 
샤모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미나가 말했다. “돌아가서도 그럴 거니? 숲의 도서관에 들어가, 나와 장로님이 허락하지 않은 방에 들어가서, 우리의 비밀마저도 들춰낼 거니?”
 
“아뇨.” 샤모스가 말했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약속하렴.”
 
“약속해요. 앞으로는 당신에게 먼저 말할게요.”
 
엘미나는 샤모스를 앞질러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샤모스가 뒤를 따랐다. 탑의 창문으로 들어온 눈송이들이 흰 벌레처럼 떠돌고 있었다. 엘미나는 털 외투를 여몄다. 그리고 왼손으로, 오른손에 낀 반지를 더듬었다.





지상으로 내려오기까지 사흘이 더 걸렸다. 샤모스는 걸음을 빨리했고 마지막 날에는 하루에 세 개 층을 내려왔다.

두 사람 간에 대화는 많지 않았다. 엘미나는 탑에서 벗어나 어서 숲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더 이상 여신상들도 그녀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오르비스탑의 일 층 밑바닥에 이르자 닫힌 나무문이 보였다. 샤모스가 문을 밀어보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탑 내벽에는 거미줄처럼 엉겨 붙은 눈과 얼음이 가득해서 설산의 동굴에 들어온 것 같았다. 나무문에도 흰 얼음조각이 곰팡이처럼 퍼져 있었다.
 
“밖에 눈이 쌓였나봐요.” 샤모스가 문에서 물러나며 말했다.
 
“창문으로 넘어가자.”
 
엘미나가 탑 반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쪽에서 눈발이 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눈 밟는 소리인가 싶더니 곧이어 문이 흔들거렸다. 푸석한 눈더미를 헤치는 소리가 들렸다. 샤모스가 다시 문에 몸을 대고 밀기 시작했다.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누가 당기고 있어요.” 샤모스가 엘미나에게 말했다.
 
엘미나도 문으로 다가가 함께 밀었다. 정말로 문 반대편에서 누군가 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사람 한 명 지나갈 만한 틈이 생겼을 때, 엘미나는 그 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눈더미를 밟고 밖으로 나왔다.

뿌연 눈안개, 하얗게 질린 나무들, 눈벌판 한가운데 서 있는 세 필의 말.
 
“로웬!” 샤모스의 목소리였다.
 
문 반대편에서 당기던 이는 로웬이었다. 그녀는 하얀 털 외투로 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다. 옅은 무늬가 새겨진 로웬의 날개가 등 뒤에서 파르르 떨렸다.
 
로웬이 샤모스에게 말했다. “머리 많이 길렀네. 잘 지냈니?”
 
샤모스가 웃으며 그렇다고 말했다. 로웬은 샤모스의 머리에 쌓인 눈을 손으로 털어주다가 엘미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로웬이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엘미나. 설마 탑을 걸어서 내려온 거예요?”
 
“응.” 엘미나가 말했다. “샤모스가 그러자고 했어.”
 
로웬이 샤모스를 보며 말했다. “무모한 일을. 네 스승님을 얼마나 졸랐길래 허락하신 거니.”
 
“그런 일 없어요. 엘미나도 좋다고 했어요.” 샤모스가 말했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듣자. 얼른 돌아가야 해.” 로웬이 말했다.
 
“그래요. 하인즈는 잘 지낸대요?” 샤모스가 물었다.
 
그 말에 로웬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엘미나는 눈 맞고 서 있는 세 필의 말을 쳐다보고 있었다. 샤모스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로웬은 입을 열지 않았다.

엘미나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돌린 뒤 말했다.
 
“로웬. 무슨 일인지 간략하게만 말해줘요.”
 
엘미나와 샤모스는 여기서 멀지 않은 엘나스 마을로 가 휴식을 취하고, 거기서 말을 구해 서쪽으로 달리면 되었다. 로웬이 말을 끌고 왔다는 건, 최대한 빨리 숲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는 의미였다.
 
샤모스와 엘미나를 번갈아 보던 로웬이 입을 열었다.
 
“엘미나, 숲에서 당신의 결정을 필요로 해요.”
 
“하인즈한테 무슨 일 있어요?” 샤모스가 물었다.
 
로웬은 샤모스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인즈가 숲에서 흑마법 실험을 했단다. 그를 추방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엘미나와 장로님이 결정해야 해.”
 
로웬이 저 말을 눈물 흘리지 않으며 끝맺을 수 있을 만큼 얼마나 연습했을지, 엘미나는 짐작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샤모스가 눈물 흘리는 것은 짐작하지 못한 일이었다.





각주:

1) 오르비스 탑에 관한 배경 설정은 원작에서 파편적으로 설명됩니다. 오르비스의 이지 병장은 오르비스 탑을 보고 “이곳은 묘한 곳인걸? 오래 전에 버려진 듯한 탑이로군...”이라고 말합니다. 스톤볼 몬스터북 설정에서는 오르비스 탑을 “오르비스 근처 오래된 탑”이라 말하며 “누군가 탑의 방어를 목적으로” 스톤볼을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스톤볼의 불/물 속성과 레이저 공격 방식을 보아 스톤볼과 오르비스 탑 제작의 주체가 마법사(또는 연금술사)라고 추측했습니다. 파티 퀘스트 〈여신의 흔적〉에서 얻을 수 있는 아이템 ‘여신의 일기장’에는 “인간들이 나를 위해 높은 탑을 세우고 나를 본뜬 석상을 만들어주었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종합하여 오르비스 탑은 인간 마법사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고, 미네르바 여신에게 바치는 선물이자 동시에 오르비스 공역에 있는 여신을 만나기 위해 만들어졌으리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지금은 탑의 건설자들조차 기억되지 않을 만큼 오랫동안 방치된 것으로 보입니다.

2) 오르비스는 날개 달린 님프 요정(‘님프’는 엄연히 빅뱅 이후의 설정입니다)의 공중 도시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메이플스토리 홈페이지의 〈1.2.29 패치 그림으로 미리보기〉 (2006.07.21)에서는 오르비스를 “고대 여신들의 문명이 그대로 남아 있는 오르비스”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오르비스의 시각적 모티브가 고대 그리스의 도시와 신전임을 비추어 볼 때, 오르비스는 여신(특히 미네르바 여신)을 섬기는 지역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현재는 오르비스 곳곳에서 석조 신전의 기둥이 무너지고 덩굴이 자란 모습이 확인되고, 〈여신의 흔적〉에서 ‘여신의 일기장’이 “벌써 몇백 년 전에 썼던 것”이라 언급되므로, 오르비스의 미네르바 여신 신앙은 몇백 년 전부터 쇠퇴하고 명맥이 끊겨 신전이 폐허가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3) 엘미나는 퀘스트 〈고대의 책을 찾아서…〉에서 딱 한 번 호명된 것이 전부인 인물입니다. 다만 해당 퀘스트에서는 다음과 같은 정보가 확인됩니다. 첫째, 엘미나는 고대의 책을 오르비스 탑 여신상에 숨기고 그 위치가 적힌 지도의 조각을 빅토리아 아일랜드의 전직관들에게 전한 인물입니다. 둘째, 고대의 책을 얻기 위한 키 아이템인 ‘오래된 반지’는 엘미나의 물건입니다. 셋째, 엘미나의 무덤은 엘나스 차디찬 벌판에 있습니다. 넷째, 오르비스의 헬라로 대표되는 ‘고대의 책 저자의 후손’에 엘미나가 포함되어 있거나 또는 엘미나가 고대의 책의 저자로 추측됩니다. 다섯째, 엘미나는 주먹펴고 일어서가 “엘미나님”이라고 부를 정도의 인물입니다. 원작에서 얻을 수 있는 엘미나에 관한 정보는 이것이 전부입니다. 본작의 엘미나의 성별, 종족, 출신, 그 외 배경 설정은 모두 원작 정보에 기반하여 창작한 것입니다.

4) 샤모스의 출신은 마법사 4차 스킬 퀘스트 〈샤모스의 과거〉에서 “작은 마을”이라고만 언급됩니다. 하지만 샤모스가 마법을 배우기 위해 찾아간 곳이 하필이면 엘리니아라는 점, 만약 “작은 마을”이 빅토리아 아일랜드가 아닌 다른 지역에 있었다면 “시골 소년”인 샤모스가 먼 엘리니아까지 찾아가기 어렵다는 점, “예전에는 훨씬 폐쇄적”인 요정들에게 가서 마법을 배우기 위해 굳이 먼 길을 갈 이유가 없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샤모스의 출신인 “작은 마을”이 빅토리아 아일랜드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북부 폰토스 고원 출신이라는 본작의 설정은 원작 정보에 근거하지 않는 창작입니다.

5) 엘미나, 로웬 등의 숲 요정들이 얇고 반투명한 날개를 갖고 있다는 설정은 어디까지나 세 개의 요정 분파(엘프, 실프, 님프)를 구분하기 위해 본작에서 강화한 설정입니다. 원작에서 엘리니아 요정들 중 이러한 날개를 가진 이는 윙이 유일하지만, 빅뱅 이후 테마던전인 〈요정학원 엘리넬〉에서는 대부분의 요정 NPC들이 윙과 같은 날개를 가집니다.

6) 본작의 핍진성을 위해 원작 몬스터들의 등장은 극히 제한됩니다. 예로 오르비스 탑의 몬스터인 스톤볼은 본작에서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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