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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 [메이플 자작 소설] 빛의 그늘 - 3

택론즈
댓글: 1 개
조회: 168
2026-09-21 02:37:54
챙-!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강렬한 불꽃이 튀었다. 훈련장의 차가운 흙먼지 위로 묵직한 거구가 앞으로 튕겨 나가듯 짓쳐 들어갔다.

"크윽…!"

귀족 가의 자제이자 신전 정식 검술 도장의 수석, 제론이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화려한 실크 상의는 이미 흙먼지로 더러워져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 맞은편에 서 있는 사내는, 도저히 기사 선발전에 어울리지 않는 거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검은 가죽 갑옷 사이로 드러난 목줄기와 팔뚝에는 징그러울 정도로 빽빽한 흉터들이 가득했다. 칼에 베인 자국, 불에 덴 자국, 그리고 야생 짐승의 뼈로 그어놓은 듯한 깊은 상처들. 빛을 보지 못하고 자란 태생적 단점을 압도적인 근육과 거친 생명력으로 덮어버린 사내.

엘란이었다.

"천한놈이… 감히...! 흙바닥이나 구르던 빈민촌 고아 따위가 감히 이 거룩한 신전의 검을 더럽히려 드느냐!"

제론이 분노에 차 검을 내지르며 소리쳤다. 하지만 엘란의 눈동자는 맹수의 그것처럼 서늘하고 정적에 잠겨 있었다.

어릴 적 가냘팠던 소년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손목에 빽빽하게 감겨 있는, 피와 땀에 바랜 붉은 머리카락만이 그가 누구인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말이 많군."

엘란이 낮게 읊조리며 검을 비스듬히 낮추었다. 순간, 제론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저 자세는…?!'

그것은 거친 밑바닥의 막싸움이 아니었다. 아스완 신전 기사단에만 내려오는 정통 정면 돌파 검술의 기수였다.

지하 뒷골목의 고아가 사용할 수 있는 검술이 아니었다. 제론이 당황하여 검끝을 흔드는 그 짧은 찰나, 엘란의 신형이 벼락처럼 파고들었다.

콰앙-!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무거운 상단 베기. 제론은 반응조차 하지 못한 채 검을 놓쳐버렸고, 이어지는 엘란의 묵직한 발차기가 제론의 가슴팍을 정통으로 걷어찼다.

"거기까지!"

심사위원 석에 앉아있던 기사단장이 번개같이 일어서며 소리쳤다. 제론은 돌바닥을 구르며 피를 토했고, 엘란은 차갑게 검을 거두어 칼집에 꽂아 넣었다.

"최종 대련 승자, 엘란! 이 시간부로 아스완 신전 수습기사로 임명한다!"

귀족 후보생들의 경악 어린 중얼거림 속에서, 엘란은 홀로 단상 쪽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지독한 무력감에 바닥을 구르며 눈물 흘리던 그날로부터 수년. 마침내 그녀가 있는 성벽의 첫 번째 문이 열린 순간이었다.

정식 입단을 하루 앞둔 밤. 엘란은 제복 대신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치고 아스완 지하 가장 깊은 곳, '쥐구멍'이라 불리는 음습한 뒷골목으로 향했다.

기름때와 썩은 술 냄새가 진동하는 아지트 모퉁이. 한쪽 다리가 기괴하게 비틀린, 술병을 기울이던 사내가 엘란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한때 신전 기사단의 촉망받는 교관이었으나, 사제들의 권력 싸움에 휘말려 다리를 잃고 쫓겨나 지금은 양아치 무리의 대장을 맡고 있는 사내이자 엘란의 스승, '바란'이었다.

"왔냐, 맹랑한 꼬맹이 녀석."

바란이 비틀거리는 몸을 벽에 기대며 탁한 침을 뱉었다.

"소문 들었다. 귀족 나으리 자제놈 갈비뼈를 분질러놓고 수습기사 자리를 따냈다고 여기까지 시끄러웠다. 내가 가르쳐준 신전 검술을 그렇게 대놓고 써먹을 줄은 몰랐다."

"대장님 덕분입니다. 대장님이 아니었다면 전 기사 시험장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길바닥에서 맞아 죽었을 겁니다."

엘란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할 거 없다. 난 그저 귀족놈들끼리 즐기는 그 가식적인 시합에 똥물 한 바가지 엎어버리고 싶었을 뿐이니까."

바란이 독한 술을 한 거푸 마시며 서늘하게 경고했다.

"명심해라, 엘란. 신전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깨끗한 곳이 아니다. 겉으로는 신을 모신다 어쩐다 하지만, 속은 권력과 욕망에 미친 사제놈들의 굴이야. 네가 찾는 그 붉은 머리 소녀… 그 아이가 가진 힘이 강해질수록 사제들은 그 아이를 철저히 이용하며 놔주지 않으려 할거다."

"알고 있습니다."

엘란이 손목의 붉은 매듭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전 그저… 그녀를 지키는 칼이 될 겁니다. 그 누구도 다시는 그녀를 빼앗지 못하게."

바란은 엘란의 눈빛에서 거스를 수 없는 단단함을 읽고는, 허탈한 듯 풋 웃음을 터뜨렸다.

"미친놈. …가봐라. 다시는 이 썩은 지하 골목으로 내려오지 마라."

"감사했습니다. 스승님.."

"..."

그렇게 뒷골목을 떠난 엘란은 다시금 제복으로 갈아입고, 신전으로 들어갔다.

 

신전 수습기사로서의 삶은 지옥의 연장이었다. 밑바닥 출신이라는 이유로 상급 기사들의 기합과 온갖 잡일이 밀려들었지만, 엘란은 단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저 남들의 세 배에 달하는 훈련을 군말 없이 해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전 중앙 대광장에서 대규모 치유 의식이 열렸다.

수많은 병자와 사제들이 인산인해를 이룬 광장 중심. 화려한 은빛 로브를 입은 무녀들이 향로를 들고 서 있었고, 그 중앙에 한 소녀가 서 있었다.

어느덧 자라나 소년의 기억보다 훨씬 아름답고 고결한 자태를 풍기는 소녀. 힐라였다.

그녀의 작은 손길이 닿을 때마다 죽어가던 환자들이 숨을 내쉬었고, 시들어가는 아스완의 식물들이 아지랑이 같은 신성력을 받아 소생했다. 사제들은 그녀를 '신이 내린 보물'이라 부르며 찬양했다.

엘란은 광장 외곽을 호위하는 수습기사들의 맨 뒷줄에 서 있었다. 투구 깊숙이 눈을 가린 채, 그저 멀리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힐라….'

가슴이 터질 듯 벅차올랐지만, 엘란은 이빨을 깨물며 감정을 눌렀다.

지금의 자신은 그저 이름 없는 하급 수습기사일 뿐.

그때, 치유를 마치고 신전 내전으로 걸어가던 힐라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수많은 기사와 사제들, 쏟아지는 환호성 속에서… 그녀의 시선이 무심코 외곽에 서 있는 한 수습기사에게 머물렀다.

투구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투구 사이로 삐져나온 굳은 선, 그리고 갑옷 소매 끝으로 살짝 드러난 핏빛으로 바랜 붉은 머리카락 팔찌.

"……!"

힐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주변의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사제들도, 호위 기사들도 그저 대무녀의 후계자로 지목받는 무녀 힐라가 잠시 숨을 고르는 것으로만 여겼다.

힐라는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아냈다. 저 사내가 누구인지, 저 흉터 투성이의 사내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떤 지옥을 구르고 이곳까지 찾아왔는지… 오직 그녀만이 알아채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다.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그 짧은 찰나의 눈빛 속에서 수년 간의 그리움과 약속이 폭발하듯 교차했다.

'기다려줘, 힐라.'

'응… 기다릴게, 엘란.'

힐라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려 내전 깊은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날 이후, 엘란의 목표는 더욱 명확해졌다.

광장 치유 의식에서 눈빛으로 서로를 알아보았지만, 두 사람은 당장 서로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엘란은 투구를 눌러쓴 하급 수습기사였고, 힐라는 대무녀 후계자로 지목받으며 감시받는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전의 서늘한 대리석도, 사제들의 집요한 눈길도 두 사람의 열망을 완전히 막아서지는 못했다.

깊은 밤, 신전 전체가 정적에 잠기면 엘란은 늘 호위 순찰을 핑계로 내전 외곽, 힐라가 머무는 높은 기도실 창 밑을 지켰다. 사제들의 눈을 피해야 하는 위험한 밤이었지만, 그곳은 두 사람이 유일하게 서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창문은 너무 높았고 차가운 석벽은 두껍다. 손을 뻗어도 온전히 다다를 수 없는 거리.

하지만 엘란은 사제들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마다 높은 창살 밑으로 작은 들꽃 한 송이나, 밤새 정성스레 깎아 만든 작은 나무 물고기 조각을 살포시 올려두었다.

달빛을 받으며 창가로 다가온 힐라는 그 조각을 품에 꼭 안았다. 차가운 벽에 이마를 댄 채, 창 밑에 서 있는 엘란을 향해 나직하게 속삭였다.

"엘란… 아래에 있어?"

"응. 항상 여기 있어."

석벽 너머로 전해져 오는 묵직하고 서늘한 목소리. 힐라는 손가락 끝을 창살 틈으로 바짝 밀어 넣었고, 엘란은 발꿈치를 들고 손을 뻗어 그녀의 작은 손끝에 자신의 손가락을 가만히 맞댔다.

손바닥 전체를 감싸쥘 수도, 마주 안아줄 수도 없는 조그마한 온기. 하지만 굳은살투성이인 엘란의 손끝과, 신성력을 쥐어짜이느라 경련하는 힐라의 손끝이 맞닿는 그 짧은 순간만큼은 숨이 막힐 듯한 고통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사제들이 너를 괴롭히진 않아?"

"괜찮아. 이제는 나도 쉽게 무너지지 않아. …너야말로 밤마다 훈련하느라 몸이 온통 상처투성이잖아."

"이까짓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야. 힐라, 조금만 더 기다려줘. 내가 곧 너를 가로막는 저 높은 단상 위로 올라갈 테니까."

"응… 응, 엘란. 조심해야 해. 꼭 살아남아야 해."

높은 석벽을 사이에 두고 나누는 아슬아슬하고 애틋한 밤의 속삭임.

신전의 차가운 눈을 피해 키워간 그들의 비밀스러운 사랑은, 엘란이 성장하는 강력한 원동력이자, 두 사람이 단 하나뿐인 구원임을 증명하는 깊은 약속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힐라의 신성력은 아스완 역사상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에 이르렀고, 마침내 그녀는 아스완 전체의 생존을 책임지는 대무녀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영광과 함께 피비린내 나는 모략도 찾아왔다.

대사제 자카리아를 비롯한 신전의 권력자들은 대무녀가 된 힐라의 권력이 자신들을 위협할 정도로 커지자, 그녀를 완벽히 통제하기 위해 비밀리에 '전속 호위기사 선발 비무'를 개최했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귀족 기사를 힐라의 곁에 붙여 감시하려는 수작이었다.

하지만 그 수작은 피투성이가 되어 난입한 한 사내에 의해 깨끗이 부서졌다.

모든 귀족 기사들을 차례로 쓰러뜨리고, 단상 아래에 피 묻은 검을 꽂아 넣은 사내.

수많은 흉터를 훈장처럼 달고, 오직 대무녀 힐라만을 바라보며 한쪽 무릎을 꿇은 기사. 엘란이었다.

"대무녀님. 아스완 신전 기사단 소속 상급 기사 엘란, 대무녀님의 안위를 위해 제 목숨을 바칠 것을 서약합니다."

자카리아와 사제들은 그 가문도 없는 흉악한 사내의 등장에 당황하며 반대하려 했으나, 높다란 단상 위에 앉아있던 대무녀 힐라가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엄숙했다.

"이 자를 내 전속 수호기사로 명한다. 그 누구도 이 결정에 토를 달 수 없다."

마침내, 어둡고 습했던 지하 석굴의 두 아이가 아스완 가장 높은 곳에서 다시 만났다.

지켜야 할 무녀와, 그녀를 위해 세상 모든 것과 싸울 준비가 된 기사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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