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완의 태평성대를 축하하는 최대 축제날, 황금빛 연회장 중심에 기묘한 유랑 학자이자 마법사인 노인, 아카이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화려한 비단 로브를 휘날리며 국왕과 고위 귀족들 앞에서 아스완의 신성력으로만 가능했던 일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비술을 선보였다. 시들어버린 식물에 생기를 불어넣고, 황량한 공기 중에서 맑고 깨끗한 물줄기를 자아내는 그의 능력에, 가뭄과 질병에 시달리며 늘 신전의 눈치를 보던 국왕은 깊이 매료되었다.
"대무녀의 신성력에만 의존하던 이 나라에 이런 위대한 자가 찾아오다니!"
국왕은 즉시 아카이럼을 궁정 최고 고문으로 추대했다. 탄탄대로를 걸으며 권력의 중심에 선 아카이럼은, 이후 밤마다 은밀히 국왕의 귓가에 뱀처럼 서늘한 속삭임을 내뱉기 시작했다.
"전하, 사제들이 신성력을 독점하여 왕권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궁정의 힘을 키워 저 오만한 사제들을 통제하셔야 합니다. 힘들다면 적어도 대무녀에게 권력을 줘 신전의 권력을 분산시켜야 합니다."
동시에 그는 대사제 자카리아와 사제들에게도 접근하여 왕실이 신전을 폐지하고 외방의 마법을 도입해 사제들의 권력을 빼앗으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아카이럼은 신전 깊은 곳 대사제 집무실을 은밀히 찾아갔다. 대사제 자카리아를 비롯한 고위 사제들은 외방 마법사의 등장으로 권력이 흔들릴까 봐 심각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네놈이 감히 신전의 성역에 발을 들이다니! 무슨 수작이냐!"
"사제님들. 그리 경계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오히려 여러분을 도우려 온 것입니다."
아카이럼은 은밀하고 우려 섞인 목소리로 사제들의 귀에 거짓을 흘렸다.
"국왕 전하의 오만이 극에 달했습니다. 전하께서는 이제 신성력 대신 마법의 힘으로 신전을 완벽히 대체하고, 왕권을 공고히 하겠다고 제게 말씀하십니다. 제가 적극적으로 말리고는 있으나, 전하의 뜻이 너무나 확고하여 설득하기가 어렵습니다."
"뭐라?! 감히 신전을 폐지하고 마법 따위로 신성을 대체하려 한단 말이냐!"
자카리아와 사제들은 분노로 하얗게 질려 부르르 떨었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저는 신께 선택받지 못하여 마법을 수련하는 사람이지만, 늘 신성력이 마법보다 더 우월한 힘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신전이 아스완을 위해 얼마나 큰 공헌을 해 왔는데, 이제와서 헌신짝처럼 버리려고 하다니.. 조심스럽지만 왕께서 노망이라도 나신게 아닌가 싶을때가 있습니다."
"크흠.. 그래도 자네는 말이 좀 통하는구만."
"자카리아님. 나름 긴 기간 학문에 힘써온 제가 그동안 역사서에서 왕이 통치하는 국가를 몇이나 봤을 것 같습니까? 왕이 저렇게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하는 국가의 끝은 매번 파멸이었습니다. 아스완의 끝이 다가올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나도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그렇지만 방법이 없지 않은가?"
"제가 본 국가중 가장 이상적인 국가는 신전에서 통치하는 국가였습니다. 대사제님과 그 아래 여러 사제님들의 현명한 판단 하에 그 나라는 매우 번성하였고 모두가 행복했었지요."
사제들 내면에 '신전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불안감과 분노의 씨앗을 심어놓은 아카이럼은 곧바로 왕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국왕의 귓가에 뱀처럼 달콤한 속삭임을 내뱉을 차례였다.
"전하, 궁정의 마법사들이 세지니 사제들이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 은밀히 반란을 모의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두면 전하의 생명까지도 위태롭습니다."
"뭐라? 그 오만한 사제 놈들이 반역을 꾀해?!"
국왕이 격분하자 아카이럼은 미소를 지으며 해결책인 척 덫을 놓았다.
"사제들의 세력을 분산시켜야 합니다. 전하께서 직접 보관하고 계신 국보 '무녀의 구슬'을 대무녀에게 하사하십시오. 대무녀의 권위를 세워 사제들을 견제하게 만들면, 신전은 사제와 무녀로 분열되고 왕권은 더욱 단단해질 것입니다. 공공연한 소문입니다만 대무녀 또한 사제들을 싫어한다하니... 감히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전하께 감사하며 마음을 열 수도 있습니다."
힐라를 은밀하게 마음에 품고 있었으며, 왕권 강화에 눈이 어두워진 국왕은 결국 아카이럼의 계략에 완벽히 넘어갔다. 국왕은 즉시 힐라를 불러, 대무녀의 권위를 명목으로 국왕의 보물인 '무녀의 구슬'을 힐라의 손에 건네주었다.
대무녀의 구슬이 손에 들어가고, 아카이럼은 이를 빌미로 대사제 자카리아와 사제들, 그리고 민중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보라! 왕이 대무녀에게 사랑에 빠져 대무녀의 구슬을 넘기고 아스완마저 위태롭게 한다!"
아카이럼의 공작에 놀아난 사제들은 "노망난 왕을 끌어내리고 타인의 간교한 꾐에 넘어가기 쉬운 대무녀를 온전히 사제들이 보호하여 아스완을 지켜야한다"며 무력을 일으켰고, 이에 맞서 대무녀의 보호를 외치며 국왕의 군대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아아앙-!
신전 광장과 아스완의 거리마다 횃불과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어제의 동료가 서로의 목에 칼을 꽂아 넣고, 광기에 사로잡힌 민중들은 각자의 신념에 따라 신전과 왕궁으로 돌진했다. 내전이 터진 것이었다.
내전의 혼란과 화염이 신전 침소까지 들어찬 그 순간, 아카이럼이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힐라의 앞에 나타났다.
"크크크… 참으로 어리석은 여자로구나. 그분께서는 너를 데려오라 하셨다만…… 너 같은 애송이가 그분 곁에 설 자리는 없다."
"아카이럼…! 네놈이 이 내전을 일으킨 것이냐! 그분이라는 놈은 도대체 누구냐!"
아카이럼의 눈동자에 힐라의 강대한 신성력을 향한 검은 질투와 열등감이 차갑게 스쳐 지나갔다.
"이 내전의 혼란 속에서 대무녀가 원인 모를 저주로 허망하게 죽었다고 보고하면 그분께서도 어쩌지 못하시겠지."
힐라가 분노하여 신성력을 일으키려 했으나, 아카이럼은 미리 설치해 둔 어둠의 주술 진으로 그녀의 신성력 흐름을 순간적으로 봉인해 버린 뒤였다. 아카이럼의 손끝에서 칠흑 같은 어둠의 주술이 피어올랐다.
사람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육체를 순식간에 부식시켜 늙어 죽게 만드는 '흑사(黑死)의 저주'였다.
"죽어라, 대무녀! 그 분을 섬길 수 있는 진정한 수하는 나 뿐이다!"
아카이럼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벼락이 힐라의 가슴을 향해 내질러졌다. 신성력이 막힌 힐라는 그저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콰아아아앙-!
그러나 힐라의 몸에는 아무런 통증도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고막을 찢는 듯한 충격음과 함께 익숙한 남자의 향기가 충격파를 타고 흘러왔다.
"크아아악-!"
대무녀 전속 수호기사, 엘란이었다.
그는 아카이럼이 저주를 쏘아 올린 그 짧은 찰나, 망설임 없이 자신의 전신을 내던져 힐라의 앞을 막아서서 그 끔찍한 저주를 온몸으로 받아냈다.
"에, 엘란…?! 엘란-!!"
강철 같던 엘란의 갑옷이 검게 부식되며 흘러내렸다. 저주가 전신에 퍼져나가며, 훈련장을 호령하던 강인했던 그의 피부는 순간적으로 탄력을 잃고 쭈글쭈글하게 비틀렸다. 윤기 나던 검은 머리카락은 실시간으로 하얗게 탈색되어 갔고, 뼈 마디가 기괴하게 꺾이며 강건했던 체구가 시들어갔다.
"크아악… 힐… 라… 도망쳐라…!"
피를 토하며 바닥으로 추락하는 엘란. 힐라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한 채 바닥을 구르는 엘란을 품에 안았다. 오직 손목에 묶인 피바랜 붉은 머리카락 팔찌만이, 늙고 시들어가는 이 노인이 자신이 사랑했던 기사 엘란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기껏 오랜 기간 준비한 저주였거늘... 어쩔 수 없지."
아카이럼은 쯧쯧 혀를 차며 내전의 화염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불타오르는 신전 한복판, 죽어가는 엘란을 안고 오열하는 힐라의 부르짖음이 아스완의 밤하늘에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