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플스토리 인벤 자유 게시판

전체보기

모바일 상단 메뉴

본문 페이지

[수다] 빅뱅 전 팬소설) 메이플스토리: 황야의 메아리 4화

누가퍼갔냐
조회: 108
2026-10-10 22:57:29





메이플스토리: 황야의 메아리 4화
1장 귀환의 꿈 (4)



샤모스는 나뭇가지 위를 걸었다.

햇빛을 쬐던 나뭇잎들이 샤모스가 옆을 지날 때마다 살랑였다.

샤모스는 가지가 점점 가늘어져 발 디딜 곳이 없어질 즈음, 바로 옆에 있는 나뭇가지로 뛰어 건넜다.

요정 숲에는 길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발을 디딜 수 있는 모든 곳이 잠시나마 그 위를 걷는 자에게 길의 역할을 수행해 주고 있었다.

숲을 걷는 자 역시, 자신은 잠깐동안 지나가는 존재임을 자각하며 차분한 걸음으로 나아가야 했다.

왜냐하면 요정 숲은 세계가 처음 만들어진 순간을 여태껏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 함부로 숲의 형태나 질서를 바꾸는 일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요정 숲의 나무들은 웬만한 힘이나 의지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샤모스가 다시 다른 가지로 발을 옮겼다. 가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만큼 넓은 가지는 그보다 훨씬 두껍고 단단한 줄기로부터 뻗어 있었다.

나무 한 그루가 오르비스 탑에 맞먹는 높이와 굵기를 지녔다.

과거 인간은 자신들의 모든 힘을 동원해 단 하나의 거탑을 지을 수 있었지만, 요정 숲에는 그에 못지 않은 거목 수만 그루가 예로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샤모스는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요정 숲에서 보이는 풍경은 빼곡하게 들어선 거목들밖에 없었다.

거목의 초록빛 껍질, 덩굴처럼 구불구불하게 솟구친 줄기, 그러다 줄기가 뒤엉키고 갈라져 오목한 공간이 생기고 거목의 수액이 서서히 고여 생겨난 웅덩이, 웅덩이가 넘쳐 떨어지는 폭포수.

무엇보다 하늘도 땅도 보이지 않는, 무한한 숲의 차원에 빠져버린 것만 같은 아득함.

샤모스는 수천 미터 상공에 있었지만 정확히 얼마나 높은지는 알 수 없었다. 요정 숲의 나뭇가지로 된 길을 걷다 보면 땅과 하늘의 감각을 잊기 마련이었다.

그러다 감각이 돌아와 고개를 숙이면 땅이 보이지 않았다.

숲으로 들어온 햇빛이 곱게 바스라져 생긴 안개만이 까마득한 발 아래를 유영하고 있었다. 햇빛이 거목 사이로 떨어지는 각도를 보니 한낮이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샤모스와 엘미나, 그리고 로웬이 숲에 도착한 것이 한낮이었다.

한숨 잤다가 하인즈를 만나보라는 로웬의 말을 듣지 않고, 샤모스는 하인즈가 있는 곳을 향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숨이 차올랐다. 샤모스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숲의 허공을 관통하는 희뿌연 빛줄기를 한참 바라보았다.

돌아왔다. 일 년 만에.

땅이 아니라 가지와 잎을 밟으며 걷고, 태양이 아니라 나무 사이로 새어드는 빛에 눈부셔하며, 가장 짧은 생명인 이슬과 매일 아침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곳.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곳.

샤모스는 실프 요정들의 고향인 엘리니아 숲에 돌아왔다.

자신의 유일한 친구를 만나기 위해,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 있을 오늘의 만남을 위해,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은 서리 맞은 꽃봉오리처럼 움츠려 두어야 했다.





샤모스는 장로의 집 문 앞에 멈춰 섰다.

실프 요정들의 마을은 지상에서 보이지 않을 만큼 높이 있었고, 이들의 집은 거목 줄기에 매달려 있거나 가지 위에 떠받쳐 있었다.

새가 나뭇가지를 모아 엮어 튼튼한 둥지를 짓듯이, 벌이 일정한 육각 구멍이 뚫린 벌집을 만들듯이,

이러한 자연의 창조물들이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매 순간 반복되었듯이, 실프 요정들은 태초부터 시작된 숲과 조화를 이루는 삶의 양식을 지켜왔다.

장로의 집은 마을에서 얼마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장로의 집이라 해봤자 특별할 것 없는, 거목 줄기에 딱 붙어 자그마한 혹처럼 보이는 살구색 나무집이었다.

문은 아래쪽이 네모낳게 각지고 위쪽이 둥글게 굽어 있었다. 벽에 난 창문에는 유리나 창살이 없어 햇빛이 그대로 창틀을 넘었다.

장로의 집으로 연결되는 가지는 건물보다 조금 아래 있어서, 문까지 이어지는 짧은 계단을 샤모스는 올라야 했다. 계단 양옆으로 흰색 열매가 맺히는 작은 나무들이 서 있었다.

샤모스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손으로 잡아 멈췄다.

긴장이 풀린 탓이었다. 오르비스 탑을 내려오자마자 일주일 넘게 말을 달렸고, 하루 빨리 하인즈를 만나야 한다는 집념 때문에 별로 쉬지도 못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발이 땀에 젖어 얼굴에 들러붙었다.

샤모스가 손으로 목과 얼굴의 땀을 닦아내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빨리 왔구나.”
휴노가 선선한 미소를 짓고 말했다. 넓은 이마 뒤로 젖힌 머리카락이 그의 가슴까지 내려와 있었다.

“장로님.”
샤모스가 목례했다.

휴노가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샤모스가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요정의 집은 밖에서 볼 땐 좁고 답답해 보이지만, 안에 들어오면 인간이 지은 집에서는 느낄 수 없는 뭉클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거목 껍질에 대들보를 박은 집은 그래서 한쪽 벽이 우둘투둘한 나무껍질의 질감 그대로였다.

나머지 벽은 둥글게 안으로 굽어 있어서 마치 큰 공 속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창문은 바깥쪽보다 안쪽이 더 크게 뚫려 있어서 집안에 들어온 햇빛이 바닥과 천장까지 골고루 퍼졌다.

현관 주변을 제외하면, 장로의 집 1층은 책장으로 꽉 차 있었다. 거실로 쓸 공간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이곳에는 마법 도서관의 절반 가까운 수의 책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공간이 마법 도서관보다 한참 작기 때문에, 요정들은 장로의 집을 책장의 미로라고 부르곤 했다.

샤모스는 미로보단 숲에 비유하는 걸 좋아했다.

책장의 숲, 그것도 오랫동안 탐구자의 눈길이 닿지 않아 시간이 곰팡이처럼 눌어붙은 태곳적 지식의 숲이었다.

책들은 대부분 장로가 취미 삼아 필사한 것들이었다. 원본은 마법 도서관에 있었고, 장로는 샤모스나 하인즈가 허락을 받지 않고도 읽을 수 있는 책만을 필사해 1층에 꽂아 두었다.

덕분에 샤모스와 하인즈는 가끔 마법 도서관에 가기 꺼려질 때, 휴노의 집에 가 원하는 만큼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책장 사이를 미끄러지듯 지나가며 장로 휴노는 2층 계단으로 향했다. 샤모스는 책장의 숲을 통과하는 길이 살짝 가물가물했다.

“배고프지 않니?”
휴노가 뒤따라오는 샤모스에게 물었다.

“괜찮습니다.”
샤모스가 말했다. “하인즈를 볼 수 있을까요?”

“왜 괜찮다는 거니. 여기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을 텐데.”

샤모스가 대답이 없자 휴노가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이었다.

“하인즈도 배가 고플 거란다. 오랜만에 친구와 식사도 하고 싶을 테고.”

2층 계단이 나타났다. 한 사람이 오르내릴 수 있을 만큼 좁은 계단이었다. 휴노가 앞장서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휴노의 날개가 아래로 처져 있었다. 샤모스가 알던 날개가 아니었다. 길고 가느다란 모습일지언정 장로의 날개는 항상 양옆으로 힘 있게 뻗어 있었다.

장로의 뒷모습은 숲 요정 특유의 큰 키, 군살이 붙지 않아 조금 말라 보이는 체형을 넉넉한 모직 옷으로 가리고 있었다.

특히 그는 다른 요정들보다 굵고 강직한 뼈대를 가졌지만, 지금은 꼭 장로가 벌을 받아 감옥으로 가는 계단을 밟고 있는 것 같았다.

샤모스가 휴노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장로의 집 2층은 생활 공간이었다. 거목 껍질로 된 벽면 구석에 화덕과 조리대가 보였다. 벽에 박은 못에는 줄에 묶어 매달아 둔 여러 식재료들이 보였다.

갓의 크기와 색깔이 제각각인 말린 버섯들, 열매처럼 둥글게 생긴 뿌리에 잔뿌리가 달린 약초들, 야생에서 자란 것을 수확한 견과류와 곡물.

찬장에 놓인 유리병에는 곱게 빻은 가루 향신료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금색 유리병도 보였다. 요정들은 금을 얇게 입힌 병에 꿀을 담는 전통이 있었다.

휴노가 몸을 숙여 화로에 오른손을 뻗었다. 장작이 쌓여 있는 검은 화로 안으로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불이 피어올랐다.

화로 위에 쇠로 만든 불판을 놓은 휴노는 화덕 옆 포대에서 곡물 한 바가지를 펐다. 곡물을 불판에 넣고 거기에 물을 부었다.

물이 끓으며 안에 든 곡물이 익어갔다. 고소한 냄새가 날 즈음에 휴노는 향신료와 약초 몇 가지를 불판에 넣고 볶기 시작했다.

불판 옆에 주전자를 올려놓았다. 꿀을 타넣은 물이 주전자에서 끓었다. 양털처럼 부푼 연기가 주전자 주둥이에서 피어 올랐다.

식탁 의자에 앉아 장로의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샤모스는 꿀물의 달큰한 냄새에 배가 주렸다. 꼬르륵 소리가 나는 배를 움켜 잡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휴노가 쟁반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두 접시, 꿀물 두 잔, 나무순 절임 한 접시, 그리고 두 벌의 수저를 옮겨 담았다.

자기가 들고 가겠다고 샤모스가 말했지만, 휴노는 대꾸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1층에 내려온 휴노는 쿰쿰한 책 냄새를 풍기는 책장 사이를 지났다.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벽에 이르렀을 때 휴노는 샤모스에게 쟁반을 들고 있어 달라 부탁했다.

쟁반을 샤모스가 받아 들자, 휴노는 오른손가락을 몇 번 움직여 보였다.

벽에 반듯한 금이 생겼다.

안으로 움푹 파인 벽이 뒤로 밀리더니 왼쪽으로 이동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혼자 내려갈 수 있겠지?”
휴노가 물었다.

샤모스는 장로의 집에 이런 공간이 있는 것을 처음 알았다.
“여기에 있나요?”

“올라올 땐 그냥 걸어 올라오면 된단다. 알아서 문이 열릴 거야.”

샤모스는 쟁반을 쏟지 않도록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찬 기운이 올라왔다. 계단의 끝이 어두컴컴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여긴 대체 뭘까? 죄인에게는 조금의 빛과 열기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걸까? 하인즈는 얼마나 오래 여기에 갇혀 있었을까?

샤모스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휴노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샤모스를 향한 것인지, 저 아래 하인즈를 향한 것인지는 몰라도, 사랑이 묻어 나오는 미소였다.

벽이 움직였다.

곧 닫혔다.

샤모스는 그제야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어둡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두려움인지 서러움인지 모를 감정이 저 아래를 거뭇하게 칠하고 있을 뿐이었다.

샤모스는 쟁반을 잡은 두 손에 힘을 주고 한 발씩 내려갔다.

계단을 다 내려왔다고 생각했을 때 반대편으로 꺾인 계단이 나타났다.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전부 내려갔을 때 지하의 넓은 방이 보였다.

지하는 춥지 않았다.

지하라는 말도 잘못됐다. 땅에서 한참 떨어진 요정의 집에 지하가 어디 있단 말인가. 단지 출입문보다 조금 낮은 공간이었고, 위층보다 더 춥거나 쓸쓸할 까닭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하인즈가 머무는 넓은 ‘지하’는 창문이 적어 햇빛이 덜 들어오지만 곳곳에 켜 놓은 초마다 뽀얗게 불빛이 번지는, 평소라면 장로가 혼자만의 시간을 누릴 만한 생활감 있는 실내였다.

하인즈는 탁자 옆 의자에 앉아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샤모스가 온 줄 모르고 다음 장을 손으로 넘겼다.

걸음을 죽이고 다가간 샤모스는 하인즈가 앉은 곳 옆에 있는 탁자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그제야 하인즈가 고개를 들었다.

“샤모스!”

두 사람은 포옹했다. 샤모스는 하인즈의 등을 아플 정도로 두드렸다.





“마법에 관한 책은 장로님께서 읽지 못하게 하셨어.”

하인즈가 밥 한 숟갈을 입에 넣고 말했다.

“읽을 만한 게 역사책밖에 없었어. 재밌더라고.”

샤모스는 하인즈가 읽고 있던 책 표지를 살폈다. ‘엘나스 암흑시대의 새벽’라는 제목이 쓰여 있었다.

“재미없어 보이는데.”
샤모스가 말했다.

“재밌진 않아.”
하인즈가 인정했다. “그래도 읽을 만해. 이 책의 접근 방식이 흥미롭거든. 엘나스 산맥의 역사는 밝혀진 게 별로 없잖아. 사료가 부족하니까. 이 책도 엘나스의 역사를 제대로 규명하려 한다기보단, 파편적인 정보들을 토대로 최대한 재구성을 해보는 식이야. 예를 들면 이런 거지. 왜 엘나스 산맥에는 악마 숭배의 흔적이 많이 발견될까? 대전쟁 때 마족들이 악마 신앙을 거기에 퍼뜨렸나? 그래서 대전쟁 당시, 엘나스 산맥이 최대 격전지였던 걸까?”

“그런 식으로 끼워맞추는 걸 누가 못하겠어.”
샤모스가 말했다. “하나의 진실에 도달 못하는 역사 해석은 의미가 없어. 이런저런 말을 갖다 붙이는 건 차라리 소설이잖아.”

“네 말도 맞지. 이야기 지어내려고 역사 연구하는 게 아니니까.”

하인즈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꿀물을 한 모금 마신 하인즈가 막 떠오른 듯이 말했다.

“오르비스에는 역사책 없었어?”

“엘나스 산맥에 관한 거?”

“오르비스가 제일 가까이 있잖아. 탑을 지은 인간들이 왕래한 시기도 있었고. 엘나스 산맥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님프 요정들은 조금이라도 알지 않았을까?”

샤모스가 고개를 저었다.
“오르비스는 지상에 관심 없어. 자기들 얘기만 기록하지. 심지어 대전쟁에 관한 기록도 없더라. 검은 마법사는 언급조차 안 하고.”

“그럼 뭐에 관심 있는데, 님프 요정들은?”
하인즈가 물었다.

“별.”
샤모스가 대답했다. “해와 달. 하늘에 떠 있는 건 새랑 구름 빼고 다.”

“새랑 구름은 왜 빼?”

“빛나지 않잖아.”

“요정들도 빛은 안 나는데.”

두 사람은 크게 웃으며 밥을 한 숟갈씩 먹었다. 마지막 숟갈이었다. 싹싹 비운 접시에 꿀물 담은 잔도 바닥이 보였다.

숟가락을 내려놓은 샤모스는 ‘엘나스 암흑시대의 새벽’을 아무 쪽이나 넘겨 읽었다.

이런 문장이 있었다.

‘암흑시대에도 사람은 살았다. 그들의 목소리가 전해지지 않았을 뿐이다. 망각된 시대에도 사람들은 치열하게, 목숨을 걸고, 그들의 지식과 지혜를 전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했다.’

샤모스는 몇 쪽 더 넘겼다. 또 이런 문장이 있었다.

‘통상적으로 암흑시대는 대전쟁 이후 백 년을 가리킨다. 이는 사료와 전승자가 대거 소멸한 상태에서 새로운 사료와 전승자가 등장하기까지 백 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음을 뜻한다. 엘나스 산맥의 암흑시대는 사백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다. 혹자들은 아직 산맥 기슭에 인간들이 살고 있으리라 말하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진정한 암흑시대란, 결국 그 땅의 선주민들이 전부 사라진 생명의 암흑을 가리킬 것이다. 아직 엘나스의 암흑은 확인되지 않았고, 혹자는 이에 대해 희망이라는 말을 붙일 수도 있을지 모른다.’

사백 년이라는 언급을 보니 이 책은 백 년 전에 쓰였다고 샤모스는 생각했다.

샤모스는 오르비스 탑이 떠올랐다. 인간 마법사들이 암흑시대에 지었다는 사실만이 전해지고, 그들이 정확히 누구였으며 끝내 지혜의 여신을 만난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설원의 거탑은 사백 년 세월 동안 침묵만을 고수했다.

오르비스의 님프 요정들도 샤모스에게 입을 열지 않았다. 탑을 지은 그들에 대해, 여신과 마주했던 그들의 감정에 대해.

탑을 걸어 내려오면 뿌듯함이 들 거라 기대했었다. 그래서 샤모스는 떠나기 전 엘미나와 님프 요정들에게 부탁했었다.

그가 탑의 1층에 도착했을 때 느낀 감정은 억울함이었다.

샤모스는 책을 탁자에 놓았다.

하인즈가 말없이 그를 보고 있었다.

“가져온 게 있어.”
샤모스가 겉옷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잠시 후 그의 손에 연초록 풀 몇 포기가 쥐여 있었다.

“이게 뭐야?”
하인즈가 샤모스에게 풀을 건네받았다.

“생명의 풀이라는 거야.”
샤모스가 말했다. “님프 요정들한테 중요한 물건이래.”

“어떻게 가져왔어?”

“훔쳤어.”

“뭐?”
하인즈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방 안의 촛불이 찰랑였다.

샤모스가 자리에 앉으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농담이야. 훔친 게 아니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길래 가져온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하인즈는 의자에 앉으면서도 의혹 섞인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샤모스가 말했다.
“말 그대로야. 이런 풀이 있는데, 아무도 이 풀을 신경 안 쓰길래 가져왔어.”

하인즈가 눈을 찡그렸다.
“그게 훔친 거야. 주인이 신경을 쓰는지 안 쓰는지 네가 어떻게 확신해.”

“네 말이 맞다. 근데 다시 오르비스에 갈 일이 없을 것 같고. 기념품은 챙기고 싶은데 님프 요정들은 날 하루빨리 내보내고 싶어서 안달이고. 그래서 요정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물건이 뭘지 찾아봤어.”

“그게 이 풀이라는 거야?”

“오르비스에도 도서관이 있어. 당연하지만.”
샤모스가 하인즈를 향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탁자 위 책에 두 팔을 얹고 거기에 턱을 얹었다.

“엘리니아의 마법 도서관과 오르비스의 도서관의 공통점이 뭐일 것 같아?”

하인즈가 손에 턱을 괸 자세로 고민하더니 말했다.
“책이 있겠지.”

“그건 모든 도서관의 공통점이잖아. 두 도서관만의 공통점.”

“······못 들어가는 방이 있구나.”

“오르비스에도 그런 방이 있어. 떠나기 직전에 한번 들어가 봤지. 그 방의 책들은 한 장 넘기는 것도 조심스러울 만큼 종이가 오래됐는데, 그중 한 책에서 오르비스가 처음 만들어진 역사를 설명하더라.”

하인즈가 눈빛을 밝히며 경청했다.

“오르비스를 하늘에 띄우기 전에, 님프 요정들은 지상의 모든 식물을 챙겨가려고 했었대. 그중에는 세계수도 있었어. 세계수의 묘목을 하나 받아서 오르비스에 또 다른 세계수를 키우려고 했는데, 세계수가 허락하지 않았대. 그래서 님프들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하인즈가 손바닥에 있는 생명의 풀을 한참 보더니 입을 열었다.

“훔쳤어?”

“곧바로 오르비스를 띄워서 도망쳤지. 그런데 님프들의 계획은 실패했어. 세계수의 땅을 떠난 곳에서는 세계수의 묘목을 키울 수가 없었던 거야. 그래도 오랫동안 세계수를 키우려는 시도를 했나봐. 그 무수한 시도의 결과가 이거래. 생명의 풀.”

“풀은 어디에 있었는데?”

“신전 제단. 지혜의 여신을 모시는 곳.”
샤모스는 여신의 부재를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다.
“지혜의 여신을 모시는 곳에 왜 생명의 여신의 물건을 두냐고. 어울리지 않아서 챙겨왔어.”

“너 설마.”

하인즈가 뻣뻣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이렇게 생각한 건 아니지? 님프 요정들이 세계수의 묘목을 훔쳐 갔으니까, 그걸 다시 세계수의 땅으로 가져온 거라고 합리화한 건 아니지?”

샤모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몸을 창문 쪽으로 돌려 앉았다.

“너 가져. 유리병에 담아두면 될 거야.”
샤모스가 말했다.

“넌 안 가질 거야?”

“난 다른 거 많이 훔쳐 왔어.”
샤모스가 말했다. 입은 웃고 있지만 목소리에 웃음기는 없었다.

“오르비스가 이만 년 동안 쌓아 올린 천체 지식을 모두 훔쳤거든. 난 해와 달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 알아. 달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손으로 바닷물을 잡았다 놓는지, 별들이 우주의 광막한 공간에 어떻게 좌표라는 갈피를 꽂아두고 있는지 다 알아.”

말을 마친 샤모스는 하인즈의 대답을 기다렸다.

촛불 타는 소리가 자글자글했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가 둥글게 번진 촛불 빛에 발각되었다.

샤모스는 눈을 감았다.

또 괜한 말을 했나 싶었다. 이래서야 자랑밖에 되지 않았다. 샤모스가 말하려던 것은 방대한 지식의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막대한 공허함이었다.

샤모스는 하인즈를 데려가려고 했다. 엘미나가 반대했다. 장로도 반대했다. 모든 요정이 반대했고, 심지어 하인즈 자신도 반대했다.

그때 샤모스는 절감했다. 요정들의 허락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샤모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지식을 쌓는 것은 행동이 아니었다. 강물이 흘러 밑바닥에 모래알이 축적되는 자연적 운동에 불과했다. 쌓은 지식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이 행동이었다.

“좋았겠다.”
하인즈의 목소리였다.

샤모스가 고개를 돌렸다. 하인즈는 미소 짓고 있었다.

“재밌는 거 많이 배우고 왔네, 너.”

“재밌었어.” 
샤모스가 말했다. “다음에 같이 가자.”

“다시는 갈 일 없다며?”

“나 혼자 갈 일이 없다는 뜻이었어.”

창밖으로 들어오던 빛이 조금씩 붉어지고 있었다. 벌써 해가 지려고 했다.

하인즈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방에 있는 서랍과 장롱을 하나씩 열어보던 하인즈가 무언가를 집어들었다.

작고 기다란 유리병이었다.

하인즈가 뚜껑을 열고 생명의 풀을 조심스레 병 안에 넣었다.

나무로 된 뚜껑에는 구멍이 있어서, 하인즈는 또 다른 서랍에서 가느다란 끈을 찾아 구멍에 끼웠다. 끈의 양 끝을 묶자 목걸이처럼 되었다.

유리병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하인즈가 의자에 앉았다.

“고마워. 네 생각 날 때마다 볼게.”
하인즈가 말했다.

“내 생각이 나면 날 보러 오면 되잖아.”
샤모스가 하인즈를 마주 보지 않으며 말했다.

“아냐. 난 추방될 거야.”

“내가 설득할게.”

“누굴?”

“누구든. 엘미나든 장로님이든 아르웬이든. 로웬은 네 편이니 설득할 필요 없고. 로웬만 빼고 전부 설득하면 돼. 어려울 거 없어.”

“샤모스. 일은 그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아. 장로님이랑 엘미나 님이 결정하실 일이야. 그리고 엘미나 님이 무슨 결정을 하실지는 내가 잘 알아.”

“설득할 거야. 엘미나는 너 추방 못 시켜.”

“네가 억지 부려봤자 하나도 도움 안 돼. 너한테도 도움 안 되고.”

“숲에 도착하면 너부터 만나려고 했어.”

하인즈는 침묵했다.

샤모스가 말을 이었다.
“일 년 동안 너는 숲에만 있었겠지. 별일 없이 지냈겠지만 그래도 재밌는 일이 한두 개 쯤은 벌어졌겠지. 만나자마자 그것부터 물어보려 했어. 로웬이 잘 해줬나, 장로님이 특별히 알려주신 마법이 뭐가 있나, 아르웬은 또 얼마나 까칠하게 굴었나. 뻔한 안부 인사잖아? 앞으로는 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 일이잖아?”

하인즈는 침묵했다.

“뭐가 그렇게 궁금했던 거야. 왜 하지 말라는 짓을 해서 이런 상황을 만드는데? 누군 안 답답해? 날개 달린 요정들 틈에 끼어서, 천재 소리 들으면서 사는 게 행복한 줄 알아? 나도 잘한 짓만 한 건 아니지만, 네 말대로 도둑질도 했지만, 적어도 금기는 어기지 않았어.
왜 금기를 금기라고 부르는지 알아? 네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내가 물어볼 수 없으니까 금기인 거야! 물어보는 일조차 금기를 어기는 일이 되니까! 네가 한 모든 행동과 생각이 영영 암흑에 묻혀버리니까 금기라고 부르는 거라고!”

의자가 뒤로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샤모스가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 뒤였다.

오른손으로는 ‘엘나스 암흑시대의 역사’를 꽉 쥐고 있었다.

벌어진 책의 윗부분은 샤모스의 손가락에 구겨져 있고 아랫부분은 거미줄에 매달린 벌레 시체처럼 흔들거렸다.

펄럭이는 낱장들이 소리 없는 말을 방울처럼 떨구었다.

“미안해.”
하인즈가 겨우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샤모스는 책을 바닥에 던졌다. 곧장 계단으로 걸어갔다.

장로는 계단을 올라오면 알아서 문이 열린다고 했었다. 그러고 나면 끝이었다.

추방이 결정되는 순간, 추방자의 인도를 맡은 한 명의 요정을 제외하면 누구도 추방자를 마중할 수 없었다.

숲 바깥에서는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겠지만, 샤모스가 숲을 떠나 하인즈를 만날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샤모스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추방이라니. 요정들이나 할 법한 발상이었다.

필멸의 운명을 타고난 인간은 이미 추방자였다. 생명과 시간으로부터 추방을 선고받은 운명이었고, 요정들이 그걸 이해할 길은 없었다.

샤모스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하인즈는 탁자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시선은 바닥에 던진 책으로 가 있는 듯했다.

“하인즈.”

샤모스가 부르자 하인즈가 시선을 돌렸다.

“또 보자.”

샤모스는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정말로 벽이 알아서 열렸고, 1층에 올라오자 벽이 닫혔다.

샤모스는 그때 알았다. 쟁반을 놓고 왔다는 사실을.

장로는 밖에 나가고 없었다.





각주:

1) 휴노는 마법사 4차 스킬 퀘스트 〈샤모스의 과거〉의 퀘스트 아이템인 ‘마법사 이야기’에서 언급됩니다. 휴노는 “당시 엘리니아의 장로”였으며 샤모스를 어엿한 마법사로 가르치고 또한 인정했던 샤모스 서사의 중요한 인물입니다. 본작의 휴노는 이러한 원작의 내용을 바탕으로 창작, 재해석되었습니다.

2) 엘리니아 숲을 이루는 거대한 나무는 가이드북 『메이플스토리 퍼펙트 가이드 16』(시공사, 2003)에서 “마법나무”(43쪽)라고 설명됩니다. 또한 엘리니아 숲은 “엘리니아는 마법의 나무들이 끝없이 솟아 있는 숲”(44쪽)으로 설명됩니다. 이를 통해 엘리니아 숲의 나무들이 평범한 나무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밤마다 나무에서 빛이 나온다는 본편의 묘사는 원작 엘린숲의 더미데이터 중 하나인 ‘캠프 지하실’ 맵의 이미지를 참고했습니다. 해당 맵에서는 엘리니아(과거에는 엘린숲)의 나무 밑동으로 보이는 곳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모습이 확인됩니다.

3) 본편에 나오는 요정의 꿀은 원작의 소비 아이템인 ‘요정의 꿀’을 참고했습니다.

4) 원작에서 ‘마족’이라는 단어는 콜드아이 몬스터북 에피소드에서 “심연의 땅속에서 나오는 마족의 기운을 받아”에 한 번 언급되는 것이 전부입니다. 본작에서는 이를 확대, 재해석하여 인간, 요정에 맞먹는 하나의 종족으로 설정했습니다. 본작의 마족이 갖는 이미지는 원작의 데몬슬레이어로 대표되는 마족 이미지에서 일부분 참고했습니다.

5) 원작 파티 퀘스트 〈여신의 흔적〉에 등장하는 퀘스트 아이템 ‘여신의 풀’은 “생명의 풀만 있으면 미네르바 여신님을 부활시킬 수 있”다고 설명됩니다.



Lv1 누가퍼갔냐

모바일 게시판 하단버튼

댓글

새로고침
새로고침

모바일 게시판 하단버튼

지금 뜨는 인벤

더보기+

모바일 게시판 리스트

모바일 게시판 하단버튼

글쓰기

모바일 게시판 페이징

최근 HOT한 콘텐츠

  • 메이플
  • 게임
  • IT
  • 유머
  • 연예
▲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