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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중국 왕조사, 전국시대(戰國時代)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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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9 18:12:39

춘추시대 140여개에 달했던 국가들은 치열한 전쟁으로 하나 둘 멸망해 사라졌고

이제 몇개 국가들이 남아 끝장을 보는 전쟁을 지속했으니 전국시대라고 합니다  

 

우리가 중국사, 동양사를 행여 접하면 역사용어로 듣게 되는 모든 개념들이 전국시대 즈음 탄생했습니다.

중화사상, 오랑케 구분, 삼황오제 전설, 요순 전설 하왕조 건국 전설에서 부터  

예법, 효, 충.  유가, 도가, 법가 등등 사상 철학까지 

우리가 동아시아에 살며 겪는 개념이나 관습의 유래가 90% 전국시대입니다.

 

그리스 문명에서 유럽이 태어났듯

바야흐로 동아시아 문명의 원류인 중국 문명이 피어나던 시기죠

또한 전국시대는 역사의 기록과 흥망이 비교적 신빙성 있게 전해집니다.

 

아니 이전 시대의 역사가 사실상 후대에 만들어진 전설과 창작에 가까웠던 거죠 

그 내용의 신뢰성이 떨어져 주로 고고학을 중심으로 역사를 봤습니다 

하지만 전국시대 기록은 비교적 자세하고 또 나름의 신뢰성을 가지죠 

 

이 시기의 역사는 후대에 등장 한 걸출한 역사가가 

이때의 내용을 전하고자 일평생을 바쳤고 위대한 역사책을 남겼기 때문이죠

 

그가 사마천이고 그 역사 책이 바로 "사기"입니다

 

사마천에게 있어 춘추 이후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은 부친의 유언이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사형 보다 치욕적인 궁형을 당하면서 까지 살아남아 과업을 완성했죠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한 목적은 공자가 춘추를 정리한 이래 난잡해진 

전국시대에서 한나라까지의 역사를 정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마천이 쓴 사기는 그 내용 뿐만이 아니라 그 형식도 매우 탁월하여 

이때 사마천이 정립한 '기전체' 라는 역사 서술형식은 동양에서 2천년간 역사 저술의 표준이 됩니다.  

그 덕분에 매우 자세한 역사가 오늘 날 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전국시대는 우리가 말하는 역사와 동아시아 중국문명 역사의  시발점이 되는 시대입니다.  




춘추시대에 가장 중요한 국가는 진(晉)나라 였습니다.

주나라와 같은 성씨인 희(姬)성 제후였으며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에 자리잡은 국가입니다. 

또한 남방의 신흥 강대국 초(楚)나라의 북진을 막아낸 강력한 중심 국가였죠

특별히 '방백'이라 불리워졌습니다

 

바로 그 진(晉)나라가 세월이 지나 몇몇 공신들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들이 진나라를 쪼개어 나눠먹고 스스로 제후를 칭하게 되었으니

이를 삼가분진(三家分晋) 또는 삼진(三晉)분열이라 합니다

흔히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나누는 기준으로 삼습니다.

 

위(魏)씨가 세운나라가 위(魏)나라

조(趙)씨가 세운 나라가 조(趙)나라

한(韓)씨가 세운 나라가 한(韓)나라 

 

춘추시대 그토록 간지쩔던 진(晉)공작도

결국에는 담배 심부름 하던 자기 꼬붕들에게 쥐어터지다

자기 나와바리를 전부 털려 버린 것이죠

 

일단 위씨, 조씨, 한씨는 주나라 왕이 제후로 임명한 것이 아닙니다.

진(晉)나라의 대부 가문으로 여러 공을 세웠던 신하들인 대부가문이죠 

진나라 공작에게 땅을 받아 차츰 세력을 키운 케이스입니다.

 

춘추시대 초기만 해도 국가와 국가 간에 전쟁은 있었지만

상대방을 완전 멸망 시키진 않았습니다 정복해 봐야 통치가 안되기 때문이죠 

도시와 도시를 복합적으로 동시에 통치하는 행정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나라에 봉건제도가 등장한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니들 지역은 알아서 통치해라' '살려는 드릴테니 빵셔틀 노릇잘 하자'

이런 형태의 봉건제는 중국문명에만 있던게 아니죠

인류사에 가장 오랫동안 존속한 원초적인 형태의 지배 방식입니다

 

반면 이런 지배의 목적이 아니라면 고대 국가에서 전쟁은 심플 합니다  

물자는 약탈하고 사람은 모두 죽여버린다

그리스 아테네가 멜로스에서 학살 했듯 고대 전쟁이 보통 그러했습니다 

 

이런 춘추시대의 통치 시스템은 전국시대 영역국가로 변모하자 큰 딜레마가 됩니다 

초기 일회성 전투로 삥을 뜯던 방식이 더욱 발전하여 국가를 병합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근데 이런 대규모 영역 국가라고 주나라와 다르게 별 다른 통치방법이 있는게 아닙니다  

 

결국 과거 주나라의 봉건제의 방식을 그대로 따를 수 밖에 없었죠

주나라가 제후를 봉하였듯 제후들은 밑의 대부에게 정복지를 봉해 주었습니다

또한 철기시대로 접어 들면 생산력이 크게 늘게되자 

발전된 도구를 바탕으로 개간사업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됩니다. 

기존에 존재한 봉건영지 이외에 새롭게 편입된 영토와 농지가 더욱 늘게 되죠 

 

이 시기 대부들이 가진 토지는 대부분이 새로 정복하거나 개간을 통해 스스로 넓힌 영지죠 

과거 춘추시대 처럼 제후에게 하사받은 토지가 아닙니다 

또한 해당 지역의 주민들도 자신들이 제후의 통치를 받는다는 개념이 약합니다 

과거 도시안에서 접촉하며 제후와 국인들이 서로를 알던 시대가 아니죠 

자신들 앞에 힘을 보여주고 세금을 받아가는 사람은 제후가 아닌 대부들입니다. 

 

그 결과 똑같은 패턴으로 과거 춘추의 제후들이 성장해 주나라 왕을 위협했듯

제후 밑의 대부들도 성장해 제후를 위협하게 됩니다

진(晉)나라의 6경 가문, 제(齊)나라의 전(田)씨 가문 등

제후를 우습게 보는 대부 가문들이 판을 쳤고 대부분의 국가들이 이 지경이었습니다

전국시대의 기점을 삼진분열로 삼는 이유가 바로 이런 상징성 때문이죠

과거 보다 커진 영역에서 대부가 제후를 몰아내고 왕을 칭한 그런 시대이거든요

 

이런 전국시대를 하극상의 시대라고도 부릅니다

신하가 힘을 키워 기존의 군주를 밀어 내는 일이 일상 다반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고로 어떤 사상이나 발명은 필요성과 문제의식이 있어야 나옵니다

하극상의 연속이라는 불안정한 국가통치는 이를 개선할 다양한 해결책을 요구하였죠 

전국시대를 거치며 국가통치 방법, 행정 시스템 구축, 지방 통제 방법 등은 

제자백가 학파들의 중요한 논쟁로 정치 주제가 되었습니다 

궁극적으로 군현제라는 제도가 중국문명에서 탄생하게 되는 이유가 됩니다.

 

이런 개혁을 가장 잘 성공한 국가가

바로 훗날 천하통일을 하는 진(秦)나라 입니다.  

 

정세의 흐름을 살펴 보면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전국 7웅입니다.

 

물론 이 당시 송나라, 노나라 등등 소국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죠 

대충 중요 국가만을 기준으로 봅니다  

 

기존에 있던 진(秦), 초(楚), 제(齊), 연(燕)

+ 진(晉)나라가 분열되어 만들어진 조(趙), 위(魏), 한(韓) 을 말 하죠

 

춘추 5패의 경우 책 마다, 연구자 마다 5개 국가를 선정하는 기준이 각기 다르지만

여기서 말하는 전국칠웅은 그 7개 국가가 정해져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시험에 낼수 있단 뜻이죠

그래서 이름을 암기해 알아야 합니다. 

 

진-초-제-연-조-위-한 이렇게 암기하죠

 

춘추시대의 주인공은 초(楚)나라 였습니다  

 

전기 = 초나라 VS 진(晉)나라

후기 = 초나라 VS 오(吳)나라

이런 구도 였다면

 

전국시대의 주인공은 원탑으로 진(秦)나라 입니다.







진(秦)나라 VS 전국 6웅 구도에서

 

어떤 국가가 주력이 되어 무섭게 성장하는 이 진나라를 막는가? 여부가 가장 중요하였죠 

그리고 이게 실패하자 최종적으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게 됩니다 

 

전국시대 초기 진(秦)나라 VS 위(魏)나라

 

전국시대 중기 진(秦)나라 VS 초(楚)나라. 조(趙)나라

 

전국시대 말기 진(秦)나라 VS 초(楚)나라

 

전국시대 역사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위와 같습니다. 

이런 순서로 주력 국가가 교체되며 진나라에 대항해 싸웠고

최종적으로 초나라가 멸망하자 사실상 천하통일이 확정된 것입니다. 

 

이와 함께 전국시대애는 3가지 중요한 분기점이 된 전쟁이 있습니다 

 

1. 진-위 하서쟁탈전

2. 진-초 한중전역

3. 진-조 장평대전

 

이들 전쟁을 기억 하며 위의 흐름을 보면 전국시대 변화를 이해하기 편합니다.


전국시대 초기 최강대국은 바로 위(魏)나라였습니다.

 

위 지도를 보면 알지만 가장 중앙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국가죠

황하 연안을 따라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한 나라입니다. 

고대 국가 시절에 인구가 많다는 것은 곧 국력이 크다는 뜻입니다. 

 

훗날 진나라에서 보게 되는 법가를 통한 개혁이 처음 시작된 곳도 원래는 위나라였습니다.

황하 연안을 통한 관개사업도 활발하였으며 생산력이 커서 인구부양력도 높았죠 

위혜왕과 맹자의 유명한 대화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기록에서

위나라 왕은 하내와 하동을 오가며 호구를 이주하고 곡식을 구휼했다라고 언급합니다 

즉 이 시기의 위나라는 영역국가로 발전해 국가 단위의 호구 관리 통제 이미 시행했단 뜻입니다.   

 

또한 춘추말기 오나라 월나라에서 시작된 보병 중심의 전투방식을 더 발전 시킨 것도 위나라입니다  

정예 중장보병 무졸(武卒)을 양성해 그 국력을 알렸던 국가죠

위나라의 명장 오기가 양성했다는 위무졸은 중장 보병인 동시에 전문 직업군인입니다

체계적인 운영와 보급 그리고 은퇴 후 연금까지 주었습니다

비교 하자면 훗날 등장한 로마제국의 로마군단과 그 운영방식이 좀 유사합니다




전국시대 위나라의 호구관리와 위무졸의 존재 의미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이 시기 전쟁은 국가단위 보병 중심의 전쟁으로 완전히 바꿔버린 것이죠

 

이렇게 초기 안읍에 도읍을 정하고 위세를 떨치던 때가 바로 위나라의 전성기였습니다.

사실 천하통일의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국가이기도 합니다

훗날 최강국이 되는 진나라가 개천에서 용이난 케이스라면

위나라는 금수저 물고 태어난 재벌 2세 회사라 보면 됩니다

 

때문에 위나라 수도인 안읍은 전국시대 문화, 경제 최대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맹자를 비롯한 전국의 모든 명사들이 출세 해 먹고살려고 위나라로 몰려 들었습니다.

진나라 법가 개혁을 한 상앙도 원래는 위나라 사람입니다

그 위나라가 대기업인지라 취업 경쟁도 워낙 빡쎄다 보니  

서류전형, 면접 죄다 떨어지고 대신 벤처기업인 진나라에 입사한 케이스죠   

 

한편 인터넷이나 역사책을 보다 역사지도를 보면

전국시대 위나라 지도가 좀 이상하다 한번쯤 느껴지실 것입니다.



이런식으로 말이죠

 

같은 위나라를 표현한 지도인데 지도 마다 그 영역과 모양이 전부 다릅니다?

또 그 모양도 기괴하기 짝이 없죠.

이유는 점과 선으로 연결 된 당시의 지리적 개념을

면으로 표현 하려고 하니까 저 지경이 되는 것입니다.

 

근대 이전 국가들은 점과 점을 연결한 영역통치의 개념이지

지금 같이 국경을 통해 면과 면으로 나뉘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중요 도시만을 통치하고 그 주변을 간접 통제하는 개념이죠 

도시와 도시는 황하와 도로 등으로 연결이 되고 교통로는 모두가 공유합니다. 

 

교통 요지로 인구밀도가 높다는 말은 즉 뚜까맞기 좋단 뜻이기도 합니다.

위나라는 제나라 조나라 진나라 등등 말 그대로 사방 전방위로 전쟁을 하였습니다 

양면전쟁도 아닌 사면전쟁을 하다 보니 망조가 들었던 나라입니다

 

그 중에 특히 중요한 전역이 하서지역 쟁탈전입니다




빨간색 원이 위나라 수도이고 파랑색 원이 하서지역입니다.

하서(河西) 곧 황하 서쪽의 영토를 뜻 합니다. 

 

하서지역은 이전 진(晉)나라 시절 부터치열한 영토쟁탈 전을 벌였던 지역입니다. 

서쪽에 위치한 진(秦)나라의 경우 이 지역을 확보해야 동쪽으로 나아갈 수 있죠

반면 위나라의 경우 황하 서쪽 지역 영토를 잃으면

바로 강 건너에 위치한 수도 안읍이 직접적인 공격에 노출됩니다. 

국가 존립을 위해 결코 양보 할 수 없는 지역이죠

 

전국시대 초기 강력한 위나라가 정예 중장 보병인 무졸(武卒)을 통해

이 지역에서 수차례 진나라를 격파했으나

 

훗날 상앙이란 인물이 등장하며 진나라가 초사이어인으로 각성하게 되고

결국 위나라를 격파한 진나라 차지가 됩니다

이 하서지역 땅에 진나라가 세운게 바로 그 유명한 함곡관입니다.

이후 동쪽의 국가는 함곡관 넘어 더이상 진나라를 공격할 수 없게 되죠 

 

진나라는 하서 땅을 얻자 곧 이어 황하를 건너 위협을 하였고 

옛 수도인 안읍을 포함 한 하동 지방을 뺏았게 됩니다. 

또한 한나라의 의양을 비롯해 한나라 영토까지 차근 차근 뺏으니






진나라가 조금씩 점진적으로 진행한 이러한 영토 확장의 형세가  

마치 누에 벌레가 뽕잎을 갉아 먹는 것과 같다 하여 이를 잠식(蠶食)이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지금도 쓰는 '잠식 당하다' 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합니다.

 

하서 지역을 상실한 위나라는 국력이 쇠퇴하였고 위험한 안읍을 버리고

동쪽 양(梁)나라를 정복하고 얻은 땅인 대량(大梁)으로 천도를 하게 됩니다.

(대량이 훗날 송나라 수도가 되는 오늘날의 개봉 지역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정타는 진나라의 명장 백기에게

위나라, 한나라 연합군 24만명이 전부 몰살 당해 증발해 버린 사건입니다.

중요 영토와 인구를 모두 잃은 위나라는 다신 회복할 수 없게 되죠  

이후 전국시대 내내 쩌리가 되어 진나라와 싸울 여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1. 하서쟁탈전의 결과

 

초강대국 위나라의 완전 몰락과 진나라의 동쪽 진출 교두보 확보





초나라는 춘추시대 시절 부터 중원을 위협한 전통의 강대국입니다.

춘추 말기 장강 하류에서 발흥 한 신흥 강국 오나라에 수도가 함락되며

한 때는 멸망의 위기도 겪었으나 다시 부흥해 그 국력의 건재함을 알렸고

거꾸로 오나라를 이긴 월나라까지 멸망 시켜 장강 하류까지 모두 흡수했죠

양자강 중류, 하류를 모두 석권한 초강대국이었습니다. 




한편 전국시대 대표적인 외교전략을 합종연횡(合從連橫)이라 합니다

장의와 소진의 활약으로 유명한 전국시대 합종연횡 계책이란 것은

 

합종(合從) : 세로로 합친다 즉 6개국이 힘을 합쳐서 진나라와 싸운다

연횡(聯橫) : 가로로 연한다 각 나라가 진나라와 교섭해 평화를 얻는다

라는 표면상 나타난 명분이 있지만

 

이 계책의 본질은 실질적으로 진나라의 대 초나라 외교전략입니다

즉 장의가 주장한 연횡계책이란 최종적으로 초나라를 고립 시키기 위함을 목표로 합니다. 

초나라가 다른 5국과 연합해 싸우지 못하게 하고 초나라를 고립시킨다죠

 

이 당시 진나라 외교전략의 기본을 원교근공 (遠交近攻)이라 합니다  

요약하면 "가까운 위,조,한 과 초나라는 공격하고 먼 제나라와는 동맹 한다" 죠

 

진나라가 위나라, 한나라를 잠식하며 압살하자

이를 막기 위해 소진이 활약하여 6국이 연합하는 합종계책을 탄생 시켰다면 

진나라는 이를 분쇄하기 위해 6국을 각각 분리하는 연횔계책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연횡책을 진나라가 성공시킴으로써

최종적으로 진나라는 초나라와 유리하게 1:1 맞짱뜨는 구도를 만들었습니다 

결국 초나라를 작살낸 계책이죠  

 

이런 진나라를 상대하며 삽질만 하는 초나라 왕의 멍청한 행동과

진짜 무서운 진나라를 못 알아보고 엉뚱하게 제나라와 싸우는 미쳐버린 초나라 조정을 보면서

장차 다가 올 망국을 예견하고 한탄한 초나라 충신이 있습니다

초사라는 작품을 남겼고 멱라강에 몸을 던져 자결한 고사로 유명한 초나라 굴원입니다.

5월 5일에 몸을 던졌기에 이 날이 오늘 날 단오절의 기원이라고 하죠

 

잠시 삼천포로 빠지면 과거 농경시대에는 달력이 귀했죠 

또 설령 달력이 있다고 한들 그것을 해석할 사람도 적었습니다

때문에 중요한 농사일, 절기는 모두가 기억하기 쉽게

전설, 이야기, 미신에 엮어서 공동체가 함께 기억하고 날짜를 지켰습니다

서양의 축제 문화 동양의 명절 문화가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죠

한반도는 중국산 달력을 받아서 썼음으로

단오절과 연관된 초나라 굴원의 전설도 함께 전파되었고

한학에 대한 공부가 늘어나며 단오절과 굴원을 엮는 설이 퍼졌습니다

때문에 당연히 한국의 단오절은 그냥 한국의 농사관련 절기일 뿐

엉뚱한 초나라 굴원 이야기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다시 돌아와 진-초 전쟁을 보면

 

진나라 장의는 결국 연횡 계책을 성공시켜 초나라-제나라 동맹을 무너뜨리고

거꾸로 진나라-제나라 동맹을 맺는 연횡책의 최종 마무리를 달성합니다

이때 초나라 왕이 진나라에 납치되는 기상천외한 사건까지 겹치며

결국 초나라는 한중 주변 지역을 영원히 상실하게 됩니다.

 

초나라의 국력이 쇠퇴한 것이 한중지역을 잃으면서 부터 입니다.

어째 위나라가 하서지역을 상실하고 망조가 들었던 것과 비슷한 테크죠


삼국지에서 유비가 차지하고 한중왕을 칭한 이야기로 유명하죠 

 

서주시대 주나라의 최측근 제후국인 정나라가 주나라를 따라 동쪽으로 이주하자

일부가 남하해 정착하며 이 지역을 개척한 것에서 시작합니다

남쪽의 정나라라는 뜻에서 다른 말로 남정(南鄭)이라 부르죠

이 지역을 따라 한수(漢水)가 흐르는데 상용을 지나 양자강 중류 지역까지 이어집니다

그 한수에서 유래해 한중(漢中)이라고도 합니다  

또는 촉땅을 서천(西川) 한중을 동천(東川)이라 하여 다른 말로 동천(東川)이라고도 부르죠

지금의 사천지역으로 들어 가는 길목이자 장안이 위치한 관중 지역으로 나아가는 길목입니다 

또한 동쪽으로 강을 따라 양자강 중류로 나아갈 수 있는 교통 최요충지 중에 하나입니다.

 

후대에 농민봉기를 일으킨 유방이 이 지역에 왕으로 봉해져 한왕(漢)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를 기반으로 관중을 평정하였고 천하를 통일하여 한(漢)제국을 세우죠

삼국지에서 유비가 한중 공방전에서 여기를 얻자 기뻐하며 한중왕을 칭한 건

바로 유방의 전례를 모방하였던 것입니다

 

초나라는 이 지역을 통제하며 사천지역의 촉나라 파나라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진나라가 성장하며 압박을 가하였고 초회왕의 삽질과 같은 각종 실책 끝에 결국 상실하게 된거죠

그 결과로 사천지역의 막대한 배후지역을 얻어 초강대국이 되었고

한수를 따라 남하하여 상용을 거쳐 초나라 수도 영성을 곧 바로 공격 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려한 바 대로 진의 명장 '백기'가  한수를 따라 남하하여

수도 영성을 함락해 불태워 버리니 초나라가 쇠퇴하게 되죠

 

2. 한중전역의 결과

 

초강대국 진나라-초나라의 양강구도 붕괴

초나라는 독자적으로 진나라와 경쟁할 수 없는 중소국의 처지로 떨어짐.  



전국시대 후기에 이르게 되면 본격적인 진나라의 전성기가 도래합니다. 

진나라는 상앙의 변법과 파촉 지방 정벌로 전국시대 최강대국이 되죠

 

반면 위나라와 한나라는 전쟁의 여력을 완전히 상실했으며

전통의 강대국 남방의 초나라는 한중지역을 상실한 것에 이어 수도인 영성(강릉)을 초토화 당해 잃었죠

초나라는 결국 동쪽으로 수춘으로 천도해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전국시대 열국 중에 진나라에 대항할 국가는 조나라가 유일하게 됩니다.




조나라는 호복기사 고사로 유명합니다.

호복(胡服) 오랑케 복장 기사(騎射) 말 타며 활쏘기를 말하죠 

교과서에 나오는 일단 암기사항입니다. 

 

북방 접경지역에 위치한 조나라는 유목민과 접촉하며 새로운 기마전술을 도입하였습니다.

 

이전에 언급 하였듯 중국의 전통적인 전투는 전차전이였습니다

말의 용도는 수레를 끄는 것이고 전쟁은 수레에 올라 활과 극으로 상대하는 것입니다. 

이런 전차 중심의 전투의 양상이 보병 중심으로 변화가 되면서 전투의 방식도 바뀌게 됩니다.

이 시기 주력이 된 보병을 지원하는 용도로 기병이 도입되었습니다  

 

춘추전국 시대 최초의 기병은 아마도 서융과 교류가 잦았던 진(秦)나라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초창기에는 그 용도가 보병과 전차병에 예속된 정찰 등의 보조 수단이었기에 본격적인 도입이라 보기 힘들죠

 

조나라의 호복기사 이야기는 그런 기병이 독자적인 병과로 본격적으로 활용되었음을 말 합니다. 

말을 타기 편하도록 기존의 소매가 길고 치마와 같은 옷을 바지로 변형한 것에 대한 기록이죠.   

이는 전국시대 각국에 영향을 주어 기병은 이제 중요한 병과로 본격 활용되게 됩니다

진나라 병마용에서도 기병 군진이 발굴 되었죠 

하지만 당시 중국이 북방 유목민에게 도입한 기병전술은 여전히 초보적인 단계였습니다.




등자가 없었거든요

등자가 없으면 말을 탄 병사는 한 손으로 반드시 말을 잡아야 합니다. 

때문에 기마 운용이 한정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기병은 등자를 사용해야 비로소 병사의 양손이 자유로워지고

활을 쏘고, 기병 돌격을 하는 등의 다양한 기병전술이 가능하게 됩니다.   

 

중국에서 등자의 도입은 훨씬 나중에 서진(西晉)시대 쯤에 이뤄집니다

본격적인 정착은 오호16국 시대 유목민이 북중국을 정복하며 정착되죠

즉 삼국지에서 관우 장비 같은 장수들은 등자가 없던 말을 탔단 이야깁니다

삼국지 토탈워 게임에서 장수들이 일기토를 할 때 말에서 내려서 서도 맞다이를 뜨죠

그게 사실은 고증에 충실한 것입니다.

 

이런 호복기사를 도입한 조나라의 명군 조 무령왕은 조나라를 강군으로 만드는데 큰 공헌을 했지만 

자식 농사를 잘 못 지어 비참하게 같혀서 굶어 죽었습니다

 

그런 조나라와 진나라가 서로 맞붙게 되니 그게 장평대전입니다.




진나라는 꾸준히 잠식을 하여 위나라의 하서, 하동을 차지하고

한나라의 의양 주변을 점령하여 황하 이북과 이남의 길을 차단하기에 이릅니다. 

위 그림처럼 한나라 영토였던 붉은 원의 상당군 지역과 한나라 수도 신정의 교통이 끊어지게 되죠 

이에 한나라는 진나라에 상당군을 넘기느니 신흥 강국 조나라에 넘기기로 하였고

또 어리버리한 조나라는 이를 넙죽 수락하죠.

이에 빡친 진나라가 대군을 파견하여 전쟁을 시작했으니 장평 땅에서 양국이 운명을 건 결전을 하게됩니다

 

그 결과는 너무 유명하죠

 

만화 킹덤에도 자세히 묘사가 되어 있고

흔히 중국사에서 잔인한 전쟁을 언급할 때 종종 언급되는 사건입니다.




조나라 군대는 진나라에 패전했습니다 

그리고 포로가 된 병사 40만명은 그대로 생매장 되었습니다.

진나라 명장 백기는 이 전투로 인간 백정이란 타이틀을 얻게 되었죠.

 

춘추시대 전차 중심 전투를 하며 제후와 대부들이 예를 갖춰 싸우고

포로를 살려주던 다소 낭만적인 전투는 춘추시대 후기에 이르러 사라졌습니다   

전국시대 전투는 적의 전멸을 목표로 한 섬멸 전 양상을 띄게 됩니다

 

오나라가 제나라와의 전투에서 처음 선 보인 섬멸 전은 다른 모든 국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죠 

진나라의 천하통일 과정에서 적국의 기세를 꺾는 수단으로 일상화 됩니다

특히 이 분야 전문가로 유명한게 진나라 백기 장군입니다 

 

물론 정말로 40만명이 죽은게 맞냐? 다양한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그와 별개로 장평대전 유적은 실제로 발견되어 발굴이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조나라 인구는 200만명이 안 되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기록이 모두 맞다면 이 전투 한번으로 조나라의 젊은 남자는 전부 죽임을 당했단 뜻이 됩니다.

 

실제로 이후 조나라는 전쟁를 지속 할 여력을 모두 잃게 됩니다.

전선에 내보 낼 장정이 더이상 없는 것이죠   

진나라가 공격하면 그저 수세적으로 막고 수도인 한단이 포위 되길 반복하다

 

결국 망하게 됩니다.

 

3. 장평대전의 결과

진나라를 저지할 최후의 보루 소멸 위,한,조 중심 지역의 진나라 편입 기정사실화

 

한편 수도가 함락되어 초토화 되었지만 초나라는 그럼에도 건재하였죠




춘추시대 이미 40여개국을 병탄하며 거대한 국력을 자랑한 초나라입니다 

진나라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끝판왕인 존재입니다. 

수도 영이 함락 된 이후에도 회수 연안의 도시 수춘으로 천도하여 초나라의 명맥을 이었고

진나라의 천하통일 과정에서도 가장 마지막까지 저항하였습니다

 

진나라는 조,위,한을 멸하고도 국가 전체의 모든 국력을 다 집결해

무려 60만 대군을 동원하여 초나라와 결전을 치룬 후에 천하통일 완수 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유명한 말을 남기게 됩니다.

 

"지금 초나라는 망하지만 초나라 가문이 1개라도 남아 있는 한

훗날 진나라를 망하게 만들 사람은 반드시 초나라 사람일 것이다! "

 

이 최후의 초나라 멸망전쟁에서 최후까지 저항한 초나라 장수가 항연이고

그 손자가 훗날 진나라를 멸하는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입니다.

 

나머지 쩌리국가 한,연,제 뭐 하고 살았나 살펴 보면




전국칠웅 한(韓)나라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그 한(韓)과 같습니다

다만 대한민국의 한(韓)은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우리도 삼한을 통합했으니 제국이다 하며 사용한 그 삼한에서 유래한 것이죠

우리가 쓰는 국명 한은 크다의 음차로 보통 보지만 정확한 기원는 모릅니다.

다만 전국시대 한이랑 우리나라 한이란 글자가 어라? 단어가 같네? 하악하악~라는 이유로

일부 환빠들이 저거도 우리민족! 이딴 미친소리 할 때 종종 써먹죠

 

한편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중국의 중심지에 위치한 국가입니다.

위나라와 함께 인구밀도가 높은 교통 요충지 중에 하나죠

국가의 위치는 지정학적으로 중국에서 가장 핫플레이스 였습니다 

주나라 동도인 낙양이 위치해 있고 정나라가 위치한 지역입니다.

 

잠깐 정(鄭)나라에 대해 언급하면 정나라는 춘추시대 5패에 잠깐 거론 된 나라입니다  

주나라를 따라 동쪽으로 이사 온 제후국으로 주나라의 가장 최측근 국가입니다.   

'예기'에 따르면 그 물산풍이 풍부하며 음악이 음탕하다 합니다. 

즉 최신 유행에 가장 민감한 국가라는 뜻입니다. 

이후에도 장장 2천년 간 중국 문명의 중심지가 된 땅이죠

 

한나라는 황하 이북의 평양에서 이남의 의양으로 다시 동쪽의 양책으로 수도를 옮기다

정나라를 멸망 시킨 후에 정나라 수도에 자리를 깔았으니 그 수도가 신정(新鄭)입니다.

오늘 날의 교통중심 도시 정저우입니다  

 

지정학적 핵심이란 건 즉 쳐맞기도 쉽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초나라가 북상 하려면 한나라 성을 먼저 쳐야 했고

제나라가 서진 하려해도 한나라 성을 먼저 쳐야 했고

진나라 동진 하려해도 한나라 성을 먼저 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방에서 뚜까맞다 보니 한(韓)나라가 성장을 못했습니다.

 

대신 여러 정보와 기술이 모이는 지역의 장점인 축적 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수비에 용이한 각종 기술과 쇠뇌 무기가 발달했습니다

전국시대 우수한 병장기는 한(韓)나라에서 나온다 할 정도로 나름의 명성을 얻었습니다




전국칠웅 연(燕)나라

 

전국칠웅 중에 유일하게 남은 주나라 왕성과 같은 희(姬)성 제후입니다

주(周)나라 무왕의 동생이 봉해진 국가로 변방 지역 확장 과정에 등장 한 나라죠

중원 중심부의 국가들과 다르게 기록이 그다지 많지가 않습니다

즉 그만큼 보잘것 없는 쩌리였단 뜻입니다.

 

150년간 왕이 즉위하고 죽는 기록만 다른 역사에 편린으로 나오고 

연나라 소왕 시기 일화와 악의가 제나라 정벌한 일 형가의 암살계획 등 유명한 사건 정도만 전해집니다. 

때문에 연나라 역사는 기록 보다는 유물을 중심으로 연구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제대로 된 기록이 없으니 유물이라도 찾는 상황이죠 

 

북경 부근에서 시작해 성장한 국가국입니다. 

이 지역에는 북방 유목계통, 고조선 계통의 유적과 함께 발굴되죠

이런 유물들이 점진적으로 중국계 유물로 교체되어 가는 과정이 고고학적으로 나타납니다.  

연나라의 성장과 동호, 고조선의 후퇴가 기록 뿐만 아니라 유물로도 이미 나타납니다. 




그리고 연나라를 논할 때 꼭 명도전을 언급해야 하죠

교과서 기본 암기사항입니다.

명도전(明刀錢)은 그 모양이 칼과 같이 생기고

옆에 명(明)자 문양이 새겨져 있어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선 말씀드리면 명도전은 연나라 화폐입니다.

 

동북에 위치하여 주변국과 교역을 할때

이 화폐가 활발히 사용되었기에 고조선을 비롯한 북방 유목지역과

조나라, 위나라 등지에서 함께 발견되죠

도전(刀錢)은 중국에서 통용되는 화폐의 형태로

연나라에서 만든 것을 명도(明刀)

제나라에서 만든 것을 제도(齊刀) 라합니다

 

인터넷이나 역사관련 자료를 찾을 때 명도전늠 '고조선의 화폐다'

뭐 이딴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전부 환빠들의 헛소리입니다.

 

심지어 "명도전은 고조선 영토인 한반도에서 가장 많이 출토된다" 라고 말도 안되는 거짓말도 합니다.

보니까 심지어 이젠 나무위키에도 누가 이딴 헛소리를 설명이라고 써놨더군요

 

제가 학교 다닐 때 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못하던 미친소리인데

2000년대 한 학술 논문에서 주장 된 이후 무슨 돈오의 깨달음이라도 단체로 얻었는지

명도전에 관한 각종 뇌피셜이 유사역사학에서 유행하기 시작했죠  

거짓말에 거짓말을 더하여 서로 구라 자료를 정겹게 주고받아 자체 보강 자력갱생을 하더니 

각종 자료와 책으로까지 출판되는 괴상한 지경에 이른 상황입니다.

이젠 인터넷에 명도전을 치면 죄다 이딴류의 개소리 천지죠.

 

인터넷에 특히 고대사의 경우 사이비 자료가 넘치는데 구분이 어렵죠 

 

"명도전은 고조선 화폐다" 이딴 주장이 책이나 자료에 행여 있음

그 자료는 일단 둘중 하나라 보면 됩니다

 

1. 환빠들이 하는 미친소리를 내용으로 한다.

2. 환빠류 자료도 구분 못 할 정도로 수준이 낮다

 

역사관련 서적을 볼 때 신중히 골라 봐야 괜히 쓸데없는 시간낭비를 막고 건강에 좋습니다

 

실제로 명도전은 중국 화북지역에 가장 많이 발견되는 화폐이며

연나라 수도인 북경 주변에서만 40여개 지역에서 출토가 되었고

이 지역 출토량만 한반도 요동지역 전체 명도전 출토량 보다 많습니다.

당연히 연나라 화폐니까요

 

보다 자세히 말씀드리면

한반도의 명도전 유적은 가장 빠른게 기원전 5세기 경 즈음 

초기철기 시대 무덤에서 부장품으로 명도전이 무더기 형태로 발견되죠

중국 북경, 화북 지역에서 발견되는 명도전 유적은 그 종류 부터가 다릅니다. 

그냥 명도전을 만들 때 쓰는 거푸집과 도구 그리고 명도전 주조 공방 유적이 발견됩니다.

비슷한 형태로 제작 되어 제나라에서 발견되는 도전에는 아예 제지법화(齊之法貨)라고

제나라에서 만든 화폐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죠

 

우리가 역사를 가지고 정치, 이념을 투영해 망상을 하지 않는다면  

아니 역사에 대한 간단한 인과관계만이라도 구분 할 수 있다면 

한반도와 요동의 명도전은 중국과 교역하는 과정에서 넘어와 매장 되었음을 바로 알수 있죠.

 

기왕에 화폐로 삼천포 빠진김에 더 썰을 풀어 보면




위 사진은 포전(布錢)이라 합니다

칼모양의 도전(刀錢)이 연나라, 제나라 그리고 조나라에서 주로 유통이되었다면

포전은 위나라, 조나라, 한나라에서 활발히 유통된 화폐입니다. 

 

상인들이 지역마다 돌며 각각 주조하여 유통한 화폐입니다

위 사진의 경우 해당 청동이 제작 된 지역인 섬서성의 '평양'이란 명칭이 새겨져 있죠.

밭가는 농기구의 모양을 본떠 만든 것입니다.

모양을 통해 가치의 계산을 편하게 하기 위해 화폐라는게 도입 되었음을 알려주죠

 

화폐는 신용의 도구입니다.

그 자체의 실용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약속으로 만들어지는 개념입니다.

그 것이 의미하는 물건, 용역과 거래를 약속하는 계산의 용도죠

 

예를 들어 로마군이 로마의 은화나 금화를 다른 지역에 유통하고 싶으면

해당 지역에 군대가 주둔하는 보호비와 세금으로 금화와 은화를 요구하면 됩니다.

그럼 현지인들은 로마군에게 바칠 금화와 은화를 얻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식량과 옷감을 제공해 교환 하고자 할 것이고 그렇게 얻은 화폐는 세금으로 납부되죠

다시 그 화폐를 주둔한 군인들의 급여로 주면 이후 병사들의 보급물자는 국가가 보급할 필요가 없이

그냥 주둔한 현지에서 은화와 금화로 교환하며 자체적으로 화폐를 통한 교환 보급이 가능하게 됩니다.

상업과 화폐의 유통이 이런식으로 시작되는 것이죠.

 

중국에서도 화폐 유통도 같은 이치입니다.

중국 대륙이란 긴 거리를 오고가는 물자의 운반과 유통 과정에서

상인집단은 각자의 신용으로 현지 거래와 유통의 편의를 위해 요구하며 탄생한 것이죠 

초기에는 도구로 잘 안깨지고 구하기 어려운 개오지 조개와 같은 것을 사용하다

개오지를 흉내낸 청동제 동패로 다시 그 가치를 직관적으로 형상화 한 포전, 도전으로 바뀌었습니다.

  

초창기 계산의 도구이자 보조적 수단이던  조개, 청동조각들은

이런 약속 거래가 빈번해 질 수록 재화의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상인은 지역을 돌며 거래의 편의 차원에서 청동조각을 유통하고 싶으면

자신이 가져 온 물건의 교환 댓가로 청동조각을 요구하면 됩니다

이후 각 지역들은 청동조각을 얻고자 지역의 물건을 제공 할 것이고

그렇게 청동 화폐가 점차 유통됩니다

물건 자체가 아니라 그 도구인 조개, 청동이 가치를 지니게 된거죠 

화폐의 개념이 그렇게 탄생합니다. 

 

때문에 화폐는 어떤 쓸모가 아닌 위조가 힘들고 계산하는데 편리하면 될 뿐입니다

금화, 은화 ,명문 청동조각을 이용한 인류 초기 금속 화폐 유통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죠  

 

전국시대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이 오랜 기간 지속되자 

이 시기 국가간의 물자의 유통을 상인집단이 책임 졌었기에 나타난 현상이죠  

중국 대륙의 중심지역인 한,위,조 지역에서 화폐를 유통한 것은 상인들이었습니다

그게 포전(布錢)입니다

 

그와 반면 도전의 경우 상인이 아닌 국가에서 주조했습니다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에서 화폐를 국가단위로 만들었단 것은

지역 물자의 유통을 책임진게 상인집단이 아니라 국가라는 뜻이죠  

 

제나라 관중의 개혁에서 보인 소금, 철 전매에 대한 기록과 

연나라 왕의 천리마를 구하는 고사 등이 이런 사례를 단적으로 말해 줍니다.   

특히 변경 지역인 연,조,제의 상업활동은 대외 무역과 외교의 수단이었습니다.  

 

유목민, 고조선등은 자국의 위신제로 명도전과 중국 물품이 필요하였고

중국 국가들은 이를 제공하여 약탈과 전쟁을 예방했습니다.  

요동과 한반도에 발견되는 명도전이 중국산 철제농기구, 중국산 붓 등과

함께 발견되는 이유는 그 물건을 얻기 위해 명도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위신제의 역할을 했단 뜻이죠

중국문명과 주변부 문명의 교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연나라는 전국시대 꾸준히 확장하여 북방 유목민을 요서지방에서 격파하고

이어 고조선 역시 요동에서 밀어냈으며

제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 넣는 엄청난  국력을 한 때 과시하였으나

 

쩌리는 결국 쩌리죠  

 

장평대전에서 발렸던 조나라에 조차 거꾸로 무참히 쳐발리더니

끝판 왕 진나라가 찾아 오자 최후엔 진시황의 암살까지 모의하다 실패하고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됩니다.




전국칠웅 제(齊)나라

 

제나라는 사실 쩌리 국가가 아니죠

춘추시대 오패의 반열에 든 나라였으며 태산을 중심으로 국토 전체가 물산이 풍부한 지역입니다

상공업이 발달한 국가였죠




좀 다른 관점에서 초,오,월을 포함하여 제나라의 그 문명적 성격을 논할 때

내륙의 위,조,한,진 과 다른 성격을 지닌 해양무역 중심 국가로 보기도 합니다

진나라, 위조한의 경우 내륙국가로 농업 중심의 국가이지만 

춘추 후기에 급성장한 해안 지역의 제나라 오나라 월나라는 해상무역 중심 국가입니다. 

 

진나라의 천하통일을 고대 해상무역 중심 국가와 내륙 농업 중심국가의 경쟁에서

농업 중심 국가가 승리한 거라 보는 관점인 것이죠 

마치 내륙에서 성장한 로마가 해양 무역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를 삼켜 버린 것 처럼 말입니다.

 

위 지도에서 보듯 바닷길의 중심에 있던 국가입니다.

저 붉은선이 고대 바닷길 입니다.

이후 천년 간 고려시대까지 이어지는 동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해상 교통로입니다

제환공 시절의 명재상 관중도 상인 출신으로 상공업 육성에 주력했죠

 

춘추시대 최초의 섬멸전 양상을 보여준 제나라와 오나라의 전쟁과

제나라를 거의 멸망의 위로 몰아 넣은 제나라와 연나라의 전쟁

양자강 중류의 초나라와 양자강 하류의 오나라의 전쟁 등 

모두 이런 해상 무역과 연계한 패권 쟁탈의 과정이라 보기도 합니다.

 

반대로 이런 투쟁을 제외하면 

제나라의 경우 전국시대 기간 나름 평화로운? 국가였죠 

내륙국가와의 관계에는 수세적인 입장에서 이익을 취하는 방어 외교만을 주로했습니다 

도중에 연나라의 침공을 제외하면 비교적 평화로운 번영을 구가했죠

 

제나라는 진나라의 외교 책략인 원교근공과 합종연횡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에 있던 국가죠 

진나라가 천하통일 과정에서 진행 한 위나라와의 전쟁, 초나라와의 전쟁 등

진나라 동방정책에서 와일드 카드는 언제나 제나라였습니다

 

제나라 역시 스스로 영리한 외교라 생각하는 이런 합리적인 외교를 하며   

전국시대 기간을 통털어 진나라와 불필요한 전쟁을 피했고 나름의 평화와 번영을 이뤘죠

그리고 이 영리한 외교의 결과로 진나라가 나머지 5개국을 모두 멸망시키자

제나라만 혼자 남겨졌고 당연한 순서로 멸망했습니다  

 

한편 제나라는 그 부유함과 더불어 학문으로 명성을 떨친 국가입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제자백가 사상의 요람이 바로 제나라입니다.

 

춘추전국시대를 통털어 모든 학문과 지식이 집결되던 곳은 제나라 수도 임치였고

그 중심은 직하학당이었습니다




제나라는 임치 궁성 남쪽(또는 서문) 직문에 옆에 직하학당을 만들었고

그 학당에서는 제자백가들이 다양하게 모여 토론을 하였다고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규모도 엄청나서 한번에 1천명 이상이 논쟁을 했다고 하니

그리스의 아고라는 귀여운 장난 수준이죠

 

이 직하의 대표적 저작물이 백과사전인 관자입니다.

일찍이 제나라 재상 관중이 저술 했다고 하는데

실제는 관중이 쓴 저작이 아니라 이런 학당의 토론이 활성화 된 전국시대

과거의 명성이 높은 관중의 이름을 빌어 편집 된 서적으로 봅니다




전국시대 이런 풍경이 가능했던 것은 철기와 함께 전통 질서가 해체되며

다양한 종류의 유랑민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특정 지역을 넘어 오갔고 

상업이란 행위를 통해 물자와 사람을 지역과 지역으로 교류하기 시작했죠

이 과정에 물자 뿐만 아니라 교육을 받은 인적자원 역시 거래가 되었죠

상공업의 중심지인 제나라 수도에 인재들이 집결한 것도 그런 연유입니다

순자는 직하의 총장이었고 맹자, 손자 등 은 직하에 살았거나 또는 제나라와 연관이 있습니다. 

 

춘추시대 도시국가 수준에 머물러 있던 국가라는 체제는

전국시대를 거치며 토지와 호구를 광역 단위로 관리하는 영역국가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이 시대 모든 국가의 당면 과제는 보다 규모가 커지고 갈등이 심화된 국가의 통치를 어찌해야 하는가? 였습니다

 

제자백가들을 두고 "자"가 붙은 특정 인물로 단순 이해하는 경향이 있죠

공자, 맹자, 묵자, 노자,장자,열자, 순자,한비자, 손자 등등

 

이런 가(家) 학파들의 정체는 집단화 된 지식인 유랑민을 말합니다

특정 스승을 중심으로 춘추시대 일반화 된 공동생활 공동 노동을 하며 집단 생활을 하는 무리들이죠

 

이들의 역할을 각 국가들에서 당시 필요로 하는 인력 수요.

"국가 통치" 솔루션을 제공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공자학파인 유가의 경우 각지를 다니며 자신들을 어필하고 취직시켜 달라 유랑했죠.

그 제자들은 그냥 학생이 아니라 전쟁, 회계, 사상. 행정, 상업 등등 각각 세분화된 준비된 인력입니다.

 

마치 오늘날의 내각제 정당과 같이 각 학파의 공약과 정책에 맞게 국가 행정을 운영하는 역할을 하죠

스승이 채용되면 제자들은 바로 행정 요직에 들어가 그 즉시 국가를 운영하는 구조입니다

 

춘추시대 봉건제에서 신분제의 비효율적인 통치로 어지럽던 국가에

양성이 어려운 전문 관료집단을 용병처럼 고용하는 것이죠

어떤 용역이 보다 나은 통치를 하는가로 그 역할과 평가가 나오는 것입니다

춘추전국시대 모든 국가에서 발생한 개혁과 변법운동들의 정체가 바로 이런 활동을 말합니다

 

출세를 하고자 스승을 찾아 이런 유랑 학파에 뛰어들고

그 학파 소속으로 국가에 등용되어 전문 관료로 나아가는 것이 일상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 핵심은 당연히 유가(儒家)입니다

즉 공자가 이런 레시피를 쓰는 국밥집 원조죠 

법가도 유가에서 파생하여 나온 학파이고 도가도 유가에서 파생된 결과물입니다  

 

철기시대 인구와 통치의 반경이 커진 영역국가에서 국가의 통치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도시국가 단위에서는 실질적인 폭력으로 억누르며 복종 시키는게 가능한 것과 달리

제국과 같은 큰 규모의 영역 국가는 모든 피지배민을 통제하는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죠  

 

동아시아의 경우 이 문제 해결을 사람에 대한 탐구부터 시작했습니다.

현실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이들이 모여 정치와 국가를 만든다면

이 사람의 성질이란게 무엇이냐?

이것을 규명해서 안정적인 통치 질서구축하자

그게 춘추전국시대 역사에서 배우는 성선설, 성악설 논쟁입니다

 

유가에서 성선설을 주장한 일파가 오늘날의 유교로 발전하였고

유가에서 성악설을 주장한 일파가 법가 학파로 발전했으며

이런 유가 계열 집단이 주장하는 사람에 대한 통제에  반발해

그냥 자유롭게 살게 둬라 백성 좀 그만 쥐어짜라 주장한 것이 도가 학파이며

이 당시 등장한 영역국가 자체에 반발하며 과거 춘추시대 이전

집단 공동체 공동생활로 회귀하자고 주장한게 묵가입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게 있습니다

 

동양과 서양 모두 비슷한 시기 영역국가로 나아갔는데

왜 동양에서만 이런 논쟁이 발생했는가?

눈치 채셨는지 모르겠는데

춘추전국시대 역사를 볼 때 이 시대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한가지가 없습니다.

 

종교

 

유학이 조상숭배의 유교로 발전하는 것은 한나라 성립 이후이며

도가 학파가 도교로 발전하는 것은 후한 말에 이르러서 입니다

국가의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상호간 이어줄 매개체가 없죠

여기서 말하는 종교는 단순한 원시종교가 아닌 형이상학 체계를 가진 고등종교를 말합니다

인도 문명의 발명품이죠

 

제국이 가장 먼저 등장한 중동지역은 이 문제를 종교를 통해서 해결했습니다.

왕의 존재는 눈에 안보이지만 지금 통치자가 바로 신의 대리자라는 종교적 믿음을 교육하는 것이죠

이상향과 도덕률의 존재를 입증한 형이상학의 영역을 가미해

사회의 윤리적 안정을 교육하고 동시에 지배자에 대한 자발적인 통제를 이끌어 내게 됩니다

 

현대 종교에서는 윤리의식과 도덕률을 이야기하죠 

쉽게 말하면 천당과 지옥의 개념 말 합니다

종교는 이제 현실이 아닌 이상적인 가치를 설정해 그에 대한 믿음을 끌어내고

이를 현실의 복종과 연결하는게 가능합니다 

내세, 신, 구원 등의 가치로 현실의 안정을 추구하는 사상입니다  

중동을 시작으로 일신교로 발전해 나갔고

오직 하나의 신이라는 보다 직관적인 형이상학을 제시하며

로마제국 까지 이어진 종교의 영향은 이런 대체가 가능했습니다 

 

반면 불교가 아직 전래 안 된 동양 중국문명의 경우

이 문제를 사람탐구와 가족관계로 해결했습니다

가족인 아버지에게 효를 하듯 국가의 왕에게 충을 하라 유가가 말하는 충효사상이죠.

 

이에 반대한게 법가의 형벌입니다 사람을 뭘로 믿고 윤리를 드리미냐

봉건시대와 같은 직관적 폭력이 힘들다면

대신 폭력을 인간이 아닌 시스템화 시킴으로써 범위를 확장해서 적용하는게 가능하다

그게 법가가 말하는 형벌제도의 법치입니다

 

종교나 충효나 형벌이나

모두 사회를 안정시키고 복종하게 하는 효과는 동일합니다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의 논쟁을 두고 동서양 문명의 가치관이 달라지는 분기점이라 보기도 합니다

동양문명은 이 시기 사람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고 필연적으로 집단과 인문 중심의 문화를 키운 반면

서양문명은 이 시기 물질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고 필연적으로 개인과 경험 중심의 문화를 키웠다 보죠

 

물론 위의 내용들은 전부 하나의 참고 의견일 뿐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런 학파들의 논쟁의 결과 국가 통치에 대한 논의는 심화되었고 

이전에 없던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게 됩니다 

무엇이 국가와 사회를 안정시키는가? 에 대한 질문을 두고 특히 큰 효과를 보인 집단이 있죠 

법치의 통제를 주장한 법가는 전국시대 후기 단기간에 효율성을 증명하며 큰 활약을 합니다 

보다 큰 영역국가의 통제도 가능하단 자신감을 얻게 되면서 전국시대 후기 변법운동의 중심이 됩니다 

그리고 국가의 전쟁과 불안을 잠식 시키는 것은 효율적인 무력의 활용에 달렸다는 병가의 사상과 서로 결합하는 단계이 이릅니다

 

바로 법가이자 장군인 공손술의 영향을 받은 상앙이란 인물이죠

이런 개혁과 시스템을 전면 적용하자

이전에 없던 새로운 개념의 전쟁 국가를 탄생 시키게 됩니다.

전국시대 주인공 진나라입니다.




역사에서 중국이란 단어는 현대의 국가 명칭과 구분을 해야 합니다. 

천하(天下) 즉 중국(中國)이란 단어는 당시 존재한 중요 문명을 지칭하는 용어죠 

전국시대에 천하, 중국이란 의미는 이런 문명권의 국가들이 

정복을 통해 이익을 달성할 수 있는 팽창의 최대범위를 의미합니다  

 

전쟁 팽창 국가 진나라는 국가의 부국강병을 이루고

주변의 국가들을 하나 둘 정복, 잠식해 가면서 깨닫게 되죠

공자에서 시작해 한비자로 이어진 국가 안정 정책은 

궁극적인 하나의 사상으로 귀결되게 됩니다.

 

천하통일

 

이를 성공시켰으니

최초의 통일 제국 진나라입니다

 

 

끝.





참고문헌(출처)

우리역사넷, 스토리세계사, 춘추전국이야기, 십팔사략, 동주열국지, 춘추전국지, 춘추전국영웅들, 통째로세계사
세계사위키백과,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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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문가의 질문에 답변할 정도의 수준이 못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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