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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17세기 영국 역사로 본 한국의 미래

Jesus찬양
댓글: 7 개
조회: 3791
2023-02-07 21:14:36
17세기 영국은 격랑의 시대를 보냈다. 1640~50년대에는 왕당파와 의회파 간 내전(보는 시각에 따라 ‘청교도혁명’이라고도 부른다)을 겪으며 국왕 찰스 1세를 처형했고, 영국 역사상 유일하게 공화국 시대(the Commonwealth)도 경험했다.

1660년 왕정 복고가 이루어져 찰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겉으로는 사회 전체가 뒤집어졌다가 원래 질서로 되돌아간 것처럼 보이지만, 온전히 과거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17세기 후반 영국인들은 지난날과는 달라져 있었다.

‘뉴스에 목말라하는 사람들(news-hungry people)’이라 할 정도로 정보에 민감하여, 신문, 잡지, 팸플릿을 읽고 비판적으로 토론하는 풍조가 자리 잡았다. 대륙에서 바다를 건너 영국에 도착한 사람들은 지붕을 이던 일꾼이 쉬는 시간에 지붕에 그대로 걸터앉아 신문을 읽는 모습을 보고 경탄했다. 대륙에서는 아직 귀족이나 부유한 집안 출신 아니면 글을 읽지 못하던 때다. 수도 없이 생겨나는 커피하우스에서는 정치 논쟁을 하거나 주식 투자 이야기를 했다. 이렇게 똑똑해진 시민들이 맹목적으로 국왕에게 복종할 리는 만무하다. 어차피 무능한 군주라면 찰스 2세처럼 우유부단한 가운데 개인적으로 방탕한 생활을 즐기며 지내는 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다.

1685년 찰스 2세가 사망하고 동생인 제임스 2세가 왕권을 이어받았다. 문제는 신왕이 절대왕권의 신봉자인 데다가 드러내놓은 가톨릭 신자였다는 점이다. 국왕이 조용히 자기 믿음을 지키는 정도라면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영국 국민들은 과거의 피비린내 나는 종교 갈등을 다시 겪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신왕은 자신의 신념과 종교, 이데올로기를 적극 관철하려는 스타일이었다. 정부 요직과 군 고위직에 가톨릭 인사를 임명하고, 심지어 비밀리에 가톨릭을 신봉하는 인사를 영국 국교회 주교로 중용했다. 옥스퍼드 대학 막들린 칼리지(Magdalene college)에 가톨릭 학장을 임명하려 했을 때 평의원들이 반대하자 그중 다수를 파면한 다음 학장 임명을 감행했다. 이쯤 되면 문제가 안 될 수 없다.

이런 사태가 국제 정치 동향과 맞물렸다. 무엇보다 프랑스의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루이 14세는 한 국가에는 한 국왕과 한 종교만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낭트칙령(일정 정도로 신교도의 존재를 용인한 앙리 4세의 1598년도 칙령)을 폐기하고 신교도(위그노)를 압박했다. 가톨릭으로 개종하든지 프랑스를 떠나라는 것이다. 실제로 수많은 위그노가 프랑스를 떠나 영국으로 와서 그들이 처했던 지옥 같은 상황을 전했다. 그러지 않아도 프랑스의 강력한 절대주의 정책이 영국과 충돌하고 있었다. 루이 14세는 네덜란드, 독일 등과 전쟁을 벌였고, 높은 관세 장벽으로 국내 산업을 보호하려는 콜베르(Colbert·루이 14세의 재상)의 무역 정책도 위협적이었다.

지금까지 영국은 정치·군사·경제 면에서 네덜란드와 충돌했다. 그렇지만 이제 유럽의 패권을 장악한 프랑스가 점점 더 명료하게 영국의 라이벌로 부상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 중 어느 나라를 우방으로 선택해야 하는가? 이는 단순히 정치적으로 유리한 파트너를 고르는 정도를 넘어 상이한 두 세계 중 하나를 고르는 문제처럼 비쳤다.

마치 냉전 시대에 미국과 소련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영국 국민은 대체로 프랑스를 더 위협적으로 간주하는데 국왕 제임스만 반대로 판단하고 있지 않는가. 국왕과 국민의 간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영국 국민은 성격이 정반대인 다음 국왕을 기다리며 위안을 삼았다. 제임스 2세는 왕위를 이어받을 왕자를 얻지 못한 상태였다. 첫 번째 왕비 앤 하이드는 4남 4녀를 낳았으나 두 딸 메리와 앤만 생존하고 나머지 아이들은 다 일찍 사망했다. 바로 이 장녀 메리가 네덜란드의 오렌지 공 윌리엄에게 시집가 있었다. 왕비가 37세에 사망한 후 재혼한 두 번째 왕비 모더나의 메리는 10번 이상 임신했는데 유산과 사산을 거듭하거나 태어나도 어린 나이에 죽었다. 이대로 가면 50대 중반에 이른 국왕이 왕자를 낳을 가능성이 희박해지고, 네덜란드에 시집가 있는 신교도 메리가 1순위의 왕위 계승자가 되어 모든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소되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1688년 6월, 국왕 부부가 뒤늦게 왕자를 출산했다. 왕실의 득남에 대해 온 국민이 이토록 슬픔과 분노에 휩싸인 사례가 또 있나 싶다. 곧 영국의 귀족들은 메리와 윌리엄 공에게 영국으로 침공해 오라는 ‘초청장’을 보냈다. 윌리엄의 병력이 무사히 도버해협을 건넜지만 국왕의 반격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렇지만 제임스는 이미 신망을 잃었다. 망하는 첫 징조는 주변 인물들이 떠나는 것이다. 국왕의 오랜 친구였던 최측근 인사 존 처칠(John Churchill·20세기 처칠 총리의 조상)을 비롯한 고위직 인사들이 국왕을 버렸다. 가장 큰 충격은 친딸 앤 공주가 이들을 따라간 일일 것이다.

궁지에 몰린 제임스는 국외 도주를 결정했다. 도망가는 길에 국새를 템스강에 던져버렸다. 국새도 새로 만들고 왕도 새로 정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어부들이 용케 왕을 알아보고 런던으로 잡아왔다. 윌리엄은 공연히 ‘순교자’를 만들어서 더 큰 분란을 일으키는 대신 조용히 프랑스로 떠나도록 도주 길을 열어주었다. 다음 해인 1689년, 의회는 새로운 통치자와 일종의 협약을 체결하는 방식으로 국정을 매듭지었다. 도주한 제임스는 스스로 왕위를 포기한 것으로 간주했고, 차제에 가톨릭 신자의 왕위 계승을 금지했다.

보수적 세력은 메리를 여왕으로, 남편 윌리엄은 단지 여왕의 조력자 정도로 만들고자 했으나 윌리엄은 왕권을 원했다. 결국 윌리엄과 메리 모두 ‘공동 왕’으로 모시는 방향으로 결정했다. 그렇다면 새 통치자는 혈통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회가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왕이 된 것이다.

대신 의회는 윌리엄에게 왕권을 제약하는 내용의 권리장전(Bill of Rights)을 들이밀며 서명할 것을 종용했다. 이후 국왕은 자의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의회와 타협하며 통치하게 되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루어낸 혁명이라고 해서 당시부터 이 사건을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이라고 칭했다. 이 혁명의 성격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권력자만 바뀐 일종의 쿠데타에 불과하다는 주장부터 국민을 억압하던 족쇄를 끊고 완전히 새로운 체제를 출범시킨 근본적 혁신이라는 주장, 혹은 정반대로 이전 국왕의 일탈을 바로잡고 과거 질서로 되돌아간 보수 회귀라는 주장까지 다양하다. 다만 파괴적 갈등을 피하면서도 국가의 도약을 위해 필요한 체질 개선을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영국은 유럽 변방의 양치기 섬나라에서 세계의 패권 국가로 도약하는 과정에 들어섰다.

1689년 12월 16일 ‘신민(臣民)의 권리와 자유를 선언하고 왕위 계승을 정하는 법률’이라는 이름의 의회제정법이 공포되었는데, 이것이 곧 권리장전이다. 그 내용과 형식은 실로 ‘영국적’이라 할 만하다. 그동안 제임스 2세가 저지른 행위를 12항으로 정리하여 불법행위라 선언한 다음, 새 국왕은 어떤 이유에서든 국가의 기본법을 침해할 수 없으며 그러기 위해 지켜야 하는 것들을 제시했다. 국가의 경비는 매년 의회 의결을 거칠 것, 평화 시기에 의회 동의 없이 군을 징집하지 말 것, 국민의 자유로운 청원권과 언론 자유를 보장할 것, 적어도 3년에 한 번은 반드시 의회를 소집할 것 등이 주요 내용이다. 이 이상 명료할 수 없다. 휘황찬란한 추상적 개념을 선포하기보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중요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못 박는 게 자유를 지키는 데 훨씬 효과적이다.

Lv45 Jesus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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