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의 달을 맞이하여, 다시는 반복되서는 안될 역사를 매년 알리고 있습니다.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그나마 가끔 이름이라도 들려오지만
국민방위군은 낯설고 잔인하고 딥 다크한 주제입니다.
진보도 보수도 차마 부끄러워서 도저히 말 못하는
지금도 국부라며 빨아주는 이승만 정권의 야심찬 한국전쟁 대전략
하지만 이승만 지지자들마저 욕하는 그 '국민방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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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1950년 후반 중공군의 개입으로 남쪽으로 전선이 밀리기 시작하자,
이승만 정부는 중공군에 점령될 지역의 남성들이 강제징병되어 북괴군 병력이 되는걸 걱정하기 시작한다.
50년 12월 15일로 정부는 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17세이상 40세 미만 남성들을 징집해 '국민방위군'이라 칭하고 중공군의 남하가 시작되자 12월 21일 첫 부대 1만명이 서울에서 부산으로 행군을 시작한다.
그리고 지옥이 시작되었다.
부산까지 걸어가는 국민방위군 총 68만명 청년들의 도보 행군.
겨울 산악 행군에 옷이 지급되지 않았다.
식량도 지급되지 않았다.
주어진 월동장비는 2명당 1장씩 준 가마니가 전부였다.
기아로 인한 아사, 동사, 병에 걸려 행군중 죽어가는 장병들이 속출했다.
행군 100일간 27만여명의 젊은이들이 질병사, 동사, 아사, 낙오되었다.
추정 사망자만 5-12만여명에 달하는 지옥도가 부산까지 펼쳐진다.
(한국전 전체 기간중 국군 사망자가 14만여명이다.)
부산에 도착한 잔여병력 40만여명의 20%는 생명유지가 불가능한 건강 상태, 나머지 80%는 근로조차 불가능한 건강 상태였다.
병자와 불구자들로 가득한 국민방위군은 해산 절차에 들어가고, 이들은 전국에 걸인들이 되어 흩어진다.
당시 국회가 지급한 예산은 1951년 1-3월간만 209억여원, 감사원 1년 예산이 3천만원이던 시기였다.
국민방위군에 줄 식량과 피복비는 다 어디로 갔을까.
국회진상조사위의 조사 결과는 국민방위군 사령부에서만 72억원어치를 해먹고 나머지 130여억원은 예하 교육대에서 어떻게 횡령했는지 파악조차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1950년, 쌀 80kg가 24원이던 시대에 72억원이다.
방위군 인솔 담당자로 임명된 사람들은 군 경 관련 경험이 전무한 사람들이었고,
단지 서북청년단이나 대한청년단 출신의 이승만에 대한 광적인 신앙 숭배만 하는 자들이었다.
국민방위군 사령관의 가장 큰 경력은 국방부장관 신성모의 사위라는 직함이었다.
이렇게 많은 돈이 어떻게 유용되었는지를 조사했더니, 횡령액 중 1/3은 국회의 신정동지회에 정치자금으로, 1/3은 관계 요로에 무마비조로, 1/3은 국민방위군 간부들의 유흥비로 소비 되었다. 특히 이 사건은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국회 내에 자기를 지지하는 정치세력을 만들려고 70명의 신정동지회에 정치자금을 지원한 데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승만의 총애를 받던 신성모 국방장관과 김윤근 사령관이 자신들의 뒷배를 믿고 저지른 대 횡령 참사였다.
결국 이승만이 아무 말이나 하면 감격해 눈물을 흘려서 '낙루장관'이라 불리던 신성모 국방장관은 해임되고 신성모의 사위인 사령관 김윤근과 횡령한 돈의 최종 도착지를 아는 5명은 대구에서 총살당한다.
이례적으로 빠른 사형으로 인해, 횡령한 국가예산의 상당수가 최종적으로 누구에게 갔는지는 밝혀지지조차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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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애국보수들에게는 흑역사 취급받아 은폐되어 온 국민방위군은
'빨갱이'정부라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와서야 첫 진상 조사와 피해자 파악을 시작했다.
너무나 늦게 시작된 조사는 자료와 증거, 증인의 부족으로 정확한 피해자 파악과 보상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2002년, 이들을 위한 첫 추모비만이 겨우 세워졌다.
'국부'의 천문학적 부정부패 비자금을 만들기 위해
겨울 산길에서 굶어죽고, 얼어죽은 후에도 보수 정권들에게조차 외면당해온
12만 호국청년들의 원혼을 추모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