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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윤동주 시인은 무슨죄로 체포되었을까?

아이콘 밥디디
댓글: 8 개
조회: 1448
추천: 1
2024-09-28 19:00:58


밑에 요약 있음
(윤동주 시인의 육필원고 복각본)

윤동주 시인을 세간에선 "소극적 저항시인"이라 지칭하고, 그의 시 세계를 "지식인의 부끄러움"이라 표현함. 실제로 이 설들이 틀린 건 아님

근데 윤동주가 체포되었을 때 판결문을 보면, 그가 '소극적' 저항시인이었는지는 의문이 생김.

윤동주 육필 원고 복각본에 실린 판결문을 실어봄

판결

본적-조선 함경북도 청진 부포항정 76번지
주거-교토시 사쿄구 다나카 다카하라쵸 27번지 다케다 아파트 내
사립 도시샤 대학 문학부 선과 학생
히라누마 도주(윤동주)
다이쇼 7년(1917) 12월 30일생

상기 자에 대한 치안유지법 위반 피고 사건에 대하여 당 재판소는 검사 에지마 다카시 관여의 심리를 마쳐 판결함에 아래와 같다.

<주문>

피고인을 징역 2년에 처한다.
미결 구류일수 중 120일을 위 본 형에 산입한다.

<이유>

피고인은 만주국 간도성의 반도 출신 중농의 가정에서 태어나...(중략)...유년시절부터 민족적 학교 교육을 받아 사상적 문학서 등을 탐독하고 교우의 감화 등에 의해 치열한 민족 의식을 품고 있던 바...(중략)...

이에 조선민족을 해방하고 그 번영을 초래하기 위해서는 조선이 제국 통치권의 지배로부터 이탈하여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방법말고는 없으며, 이를 위해 조선 민족이 현재 가진 실력 또는 과거에 있었던 독립운동 실패의 자취를 반성하고, 당면한 조선인의 실력, 민족성을 향상시켜 독립운동의 소지를 배양할 수 있도록 일반 대중의 문화 앙양 및 민족의식 유발에 힘써야 한다고 결의하기에 이르렀으며,

특히 대동아 전쟁의 발발에 직면하자 과학력으로 열세인 일본의 패전을 몽상하고 그 기회를 틈타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할 수 있다고 망신하여 더욱 그 결의를 굳히고 그 목적달성을 위해 도시샤 대학으로 전교 후, 이미 같은 의도를 품고있던 교토 제국대학 문학부 학생 소무라 무게이(송몽규) 등과 빈번히 회합하여 상호 독립의식 앙양을 꾀한 외에 조선인 학생 마쓰바라 데루타다, 시라노 기요히코(장성언) 등에 대하여 그 민족의식 유발에 전념해왔는데 그 중,

제일, 소무라 무게이에 대해서는

(가) 쇼와 18년(1943) 중순 경 하숙처인 교토시 사쿄구 기타시라카와 히가시히라이쵸 60번지 시미즈사카 쪽에서 회합하여 조선, 만주 등의 조선 민족에 대한 차별 압박의 근황을 청취한 뒤 서로 이를 논란 공격함과 동시에 조선의 징병 제도에 대하여 민족적 입장에서 상호 비판을 가하고 조선 독립 실현을 위한 입장에서 상호 비판, 그 제도는 오히려 조선 독립 실현을 위해 일대 위력을 더할 것이라 논단,

(나) 동년 4월 하순경 시외 야세 유원지에서 같은 민족의식을 갖고 있던 릿쿄 대학 학생 시로야마(백인준)와 회합, 상호 조선의 징병제도를 비판하고, 조선인은 종래의 무기를 알지 못하나 징병제도의 실시에 의해 새로이 무기를 갖고 군사지식을 체득함에 이르러 장래 대동아 전쟁에서 일본이 패전에 봉착할 시, 반드시 우수한 지도자를 얻어 민족적 무력 봉기를 결행하여 독립 실현이 가능하도록 민족적 입장에서 그 제도를 구가하고, 또는 조선 독립 후 통치 방식에 대하여...(중략*)... 논정한 끝에 독립 실현에 공헌하도록 각자 실력의 양성에 전념할 필요가 있음을 서로 강조,

(다) 동년 6월 하순경 피고인의 거주지인 교토시 사쿄구 다나카다카하라쵸 27번지 다케다 아파트에서 찬드라 보스를 지도자로 하는 인도 독립운동의 대두에 대해 논의하고, 조선은 일본에 정복되어 일천하고 또한 일본은 세력이 강대하므로 현재 곧바로 찬드라 보스와 같은 위대한 독립운동 지도자를 얻으려 해도 용의치 아니한 상태이나, 한편 민족 의식은 오히려 왕성하므로 다른 날 일본의 전력이 피폐해져 호기 도래의 날에는 찬드라와 같은 위대한 인물이 반드시 출현하므로 각자 그 호기를 잡아 독립 달성을 위하여 궐기해야 한다고 서로 격려하는 등, 상호 독립의식 격발에 노력,

제이, 마쓰바라 데루타다에 대해서는,

(가) 동년 2월 초순경, 상기 다케다 아파트에서 조선 내 학교의 조선어 과목의 폐지됨을 논란하고 조선어의 연구를 권장한 뒤, 소위 내선일체 정책을 비방하고 조선문화의 유지, 조선민족의 발전을 위해서는 독립달성이 필수인 까닭을 강조,


.(중략)...

(라) 동년 7월 중순 경, 같은 장소에서 문학은 어디까지나 민족의 행복 추구의 견지에 입각해야 한다는 뜻으로 민족적 문학관을 강조하는 등 민족의식의 유발에 부심,

(중략)

제삼, 시라노 기요히코에 대해서는,

...(나) 동년 12월 초순 경 교토시 사쿄구 긴카쿠지 부근 길거리에서 개인주의 사상을 배격지탄한 뒤, 조선민족인 자는 어디까지나 개인적 이해를 떠나 민족 전체의 번영을 초래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중략)... 증거를 보건대 판시 사실은 피고인의 당 공판의 판시와 같은 취지의 공술에 의하여 이를 인정한다.

쇼와 19년 3월 31일,
교토 지방재판소 제2형사부
재판장 판사 이시이 히라오
판사 와타나베 스네조
판사 기와라타니 스에오

요약>

윤동주 시인은 교토에 있는 조선인 유학생들과 자주 회합해 조선 독립의 필요성을 강력히 역설하였다.

또한 조선인들에 대한 강제 징병 정책에 대하여, 오히려 이것은 일본의 힘이 약해질 때 군사 지도자를 얻어 무력봉기를 일으켜 조선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기회라 주장하며, 인도 독립운동 지도자 찬드라 보스의 사례를 자세히 연구하였다.

윤동주는 "소극적" 저항시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굉장히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이런점 때문에 일본이 생체실험 한듯 합니다
(대체역사 갤러리펌)

Lv74 밥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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