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 이슈 갤러리

전체보기

모바일 상단 메뉴

본문 페이지

[게임] 스압)카제나)원스토리작가가 썼다는 썰이 있는 팬픽 레노아의 일기

아이콘 로프꾼오징어
댓글: 13 개
조회: 1515
2025-10-29 15:40:49

( 1 ) 


― 레노아 그레이스, 요원 양성 프로그램 최우등 졸업을 축하한다.


홀로그램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전깃불처럼 지직거렸습니다.


그 코발트빛 사각형에 적힌 ‘01’이라는 숫자에 고개를 숙이고, 저는 겸양의 말을 꺼냈습니다.


“전부 제국의 홍복입니다.”


― 이제 귀관은 정식 요원으로서, 엘리트 개체 ‘가축의 성모’ 토벌 임무에 파견될 것이다. 귀관의 의사를 우선해서 배정하긴 했다만… 첫 임무치고는 난이도가 있는데, 괜찮겠나?


“바라는 바입니다.”


― 이유는?


“…그 개체와는 악연이 있습니다.”


― 좋다. 그럼 귀관이 배속될 분대를 택하라.


그와 동시에, 홀로그램이 확장되며 두 개의 제안서를 영사했습니다.


제국의 유망한 엘리트이자 간부후보생, ‘퍼스트’ 두 명이 저를 영입하기 위해 제출한 제안서였습니다.


보통, 요원이란 소모품이었고 퍼스트는 주인이었습니다.


고로 요원인 제가 퍼스트를 직접 고르는 이 상황은, 꽤나 호사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제가 최우등 졸업자이기에 주어진 특혜겠죠.


― 첫 번째 제안자 A, 분대 생환율 100%… 두 번째 제안자 B, 분대 생환율 90%. 어느 쪽을 고르겠나?


“B를 고르겠습니다.”


저는 즉답했습니다.


어젯밤, 두 제안서를 글자 하나하나까지 검토한 결과였습니다.


자명하고 합리적인 결론이었습니다만, 놀랍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어젯밤, A의 제안서를 살펴봤습니다. 직접 손글씨로 자기 분대의 장점과, 바라는 점, 저를 원하는 이유 따위를 적어 제출했더군요. 그리고 이미 찾아올 것을 확신이라도 하는 지, 분대원들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지독한 악필이었습니다.


본인도 인지는 하고 있는지, 수정펜과 화이트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것이 더 악질이었습니다.


알고 있으면 타이핑을 하면 될 것을.


“반면 B의 제안서는 표준 양식이었습니다. 사무적인 수치와 지표들 외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더군요.”


이것이면 충분히 대답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목소리는 집요하게 추궁해왔습니다.


― 하지만 생환율은 A 쪽이 더 높지 않나.


제가 꼭 A 쪽으로 가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는 듯, 목소리는 말했습니다.


― 퍼스트 A는 제국에서도 눈여겨 보는 인재다. 그 임기응변 능력과 지휘력은 특급 평가를 주어도 모자라. 


― 봐라, 그의 분대에는 귀관 같은 ‘5성’ 평가를 받는 엘리트 하나 없었다. 간신히 4성에 턱걸이한 여자애, 어린애, 소년병뿐이었다. 그럼에도 모든 분대원을 생환시켜 왔는데.


“그랬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절로 한숨이 쏟아졌습니다.


저렇게 판단이 무른 자가 제국의 상층부라니, 머리가 아파왔습니다.


“그의 작전 로그는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그 분대원들은 모두가 세 번 이상 카오스에서 ‘트라우마’를 일으켜 전장에서 이탈한 경력이 있더군요. 그 정도로 정신력이 약한 요원이라면, 한 명은 죽는 게 정상입니다.”


아니, 셋 다 죽는 게 정상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명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저 퍼스트가, 비정상적으로 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뜻했습니다.


“트라우마를 일으켰다면 버리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인데도, 그는 버리지 않았습니다. 다른 분대원 모두의 목숨을 판돈으로 걸어 구출해왔죠. 그것은, 요행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하니까, 완벽이란 불가능합니다.


때로는 희생을 긍정하고, 무언가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완벽한 100%의 생환율이라는 것은, 저에게는 필연적인 파멸을 예고하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런 요행이 계속 이어질 리가 없습니다. 언젠가 그들은 지금까지 겪어온 행운의 대가를 치르겠죠. 100%의 사망과, 임무 실패로.”


― 그런 관점도 있었나. 하면, 90%는? 그는 지금까지 치러온 거의 모든 임무에서 한 명 이상의 요원을 손망실했는데.


“10명이나 있다면, 한 명 정도는 희생되는 것이 정상적인 비율입니다. 오히려 부절하게 90%를 유지했다면, 그것은 요행으로 만들어낸 100%보다 유능한 것이라고, 저는 판단했습니다.”


― 그 한명이 귀관이 될 수도 있는데?


“제국의 현판에 이름을 새길 수 있다면, 바라는 바입니다.”


― 귀관은 스스로를 부품으로 생각하나?


“예.”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요원 양성 프로그램에서 주기도문처럼 외웠던 것을 다시 읊었습니다.


“서기 2855년, 인류는 고향을 잃었다…”


지구는 형언할 수 없는 존재들에게 점령당했다.


인간의 나약한 정신을 터널삼아 강림하는 그 존재들을 피해서, 인류는 방주에 몸을 싣었다.


검푸른 우주를 떠도는 우리는 인공 아닌 하늘을 모른다.


그 푸른 빛은 이 방주에 데이터로 실려 있을 뿐이다.


“…우리의 사명은 이 방주에 실린 ‘빛’을 지키는 것.”


― 하면…


“제 목숨으로 말미암아, 그 빛이 한 순간이라도 더 타오를 수 있다면. 저는 웃으며 죽을 수 있습니다.”


― …과연, 10년에 한번 나오는 최우등 졸업자는 다르군. 좋다. 귀관의 의사를 존중하여, B에 귀관을 배속시키겠다.


“감사합니다.”


저는 비로소 고개를 숙였습니다.


‘01’과의 통신은 이미 끊어져 있었습니다.


홀로그램은 지직거리며 두 개의 제안서를 비췄습니다.


일어서 방을 나가려던 제 눈에, 문득 A의 제안서에서 실수로 놓친 부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겉장에 자그맣게 적어놓은 추신이었습니다.


‘추신. 저는 커피에 각설탕을 세 개 넣는 것을 좋아합니다. 레노아 양은 커피를 좋아한다고 하던데, 설탕은 몇 개가 적정하다고 생각하나요?’


“…당뇨라도 걸리고 싶은 건가.”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웃고, 저는 뒤돌아서 방을 나섰습니다.



( 2 ) 



다음 주, 저는 곧바로 A와 B가 있는 함선으로 이동했습니다.


‘나이트메어 호’.


그것이 그 함선의 이름이었습니다.


악몽. 


함선에게 붙기에는 불길한 이름이라,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승무원에게 물으니, 그는 말없이 외벽 갑판을 가리켰습니다.


그 곳에는 반파되어 희미해진 ‘0’이라는 글자가 보였습니다.


원래는 ‘제로 나이트메어 호’, 악몽을 0으로 만들겠다는 이름이었는데, 전 함장이 카오스에게 정신을 파먹혀 광증에 시달린 끝에 함선을 소행성 지대에 쳐박았다는 모양입니다.


…그 여파로 ‘제로’ 글자가 지워져서, 나이트메어 호라고 불리게 됐다고.


별로 아름다운 작명 사유는 아니었습니다.


지금 그래서 이 ‘나이트메어 호’는 함장 자리가 공석이라는 말도 뒤따랐습니다.


이번 ‘가축의 성모’ 토벌을 두고 A와 B, 두 퍼스트가 파견된 것은, 그 공석인 함장 자리를 메꾸기 위해서라는 설명도 들었습니다.


경쟁에서 승리해서, ‘가축의 성모’ 토벌에 성공한 쪽이 나이트메어 호의 함장이 되는 것입니다.


A와 B는 모두 서른 남짓한 남성이었습니다.


퍼스트로서는 햇병아리나 다름없는데, 함장이라.


제국을 통틀어도 30대 함장은 세 명도 되지 않을 텐데.


성공한다면 굉장한 출세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즉, 이번 ‘가축의 성모’ 토벌전은 그만큼 큰 것이 달린 경쟁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퍼스트의 태도는 전혀 그런 경쟁 중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각기 전혀 다른 의미에서.




( 3 )




B에게서는 열의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정정하겠습니다.


열의라는 말로는 그 무기력의 깊음과 강도를 설명하기 부족합니다. 


그는 생의지가 결핍되어 있었습니다.


커리어로부터 추론한 그의 인상은 출세지향적이고 냉정한 엘리트였습니다만, 현실의 그는 달랐습니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 저는 그 외모로부터 풍겨오는 이질감에 흠칫 떨었습니다.


그는 지독하도록 깡마른 사람이었습니다.


볼살이 녹아 융기한 광대는 코와 어울려 눈구멍에 깊은 어둠을 드리웠고, 앙상한 손가락마다 뼈마디가 툭 불거졌습니다.


그는 거식증과 강박증, 불면증에 동시에 시달리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의 커리어라면 마땅히 품어야 할 사명감이나, 전투 의지는 추호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의욕을 드러낼 때는 오직 식사 때 뿐이었는데, 그는 곰팡이가 슨 블루 치즈나 익히지도 않은 레어 스테이크를 게걸스럽게 뜯어먹었습니다.


그리고는, 화장실로 달려가 식당 전체가 울리도록 토악질을 해대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카오스에서의 연이은 경험이, 저 자를 저토록 변모시킨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제부터 함께해야 할 분대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평소에 넋이 나간 듯 무기력했고, 먹을 것에 극도로 집착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같이 깡말랐다는 것이 괴이쩍은 점이었습니다.


그들을 괴롭히는 허기는 생물적인 허기가 아니라, 보다 본질적이고 충족될 수 없는 어떤 갈망인 듯싶었습니다.


…안 좋은 시기에 온 걸까요.


그들은 새 동료를 받아들이기엔 충분히 치유되지 못한 상태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저를 신경쓰지도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딱 한 번, B가 회합에서 저를 소개할 때를 제외하면.


그 날, B는 저를 ‘특별 부함장’이라는 직함으로 소개했습니다.


멍하니 회의석에 앉아 공중에 떠다니는 셀룰로스 입자를 바라보던 분대원들은, ‘특별 부함장’이라는 말을 듣자 눈빛이 달라져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산책’ 이라는 단어를 들은 강아지와 같은, 척수반사적 반응이었습니다.


신입이 부함장이라는 높은 직위에 오르게 되어, 경계나 질투를 한 것인가.


저는 잠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눈빛은 좀 더 끈적하고, 생물적 본망과 연결되어 있는 듯했습니다.


그들의 시선에서는, 그래요. 


탐욕이 느껴졌습니다.



( 4 )



A 또한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스무 살에, 퍼스트 후보생으로 임관하자마자, 무려 31번이나 카오스를 답파했습니다.


31번.


전대 나이트메어 호의 함장과 B의 참상이 증명하듯이,


그 정도면, 인간의 정신 하나쯤 부수기엔 충분하고도 남는 경험입니다.


적어도 세상에서 가장 낙관적인 낙천주의자를 염세주의자로 만들 정도는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모든 경험에도 불구하고, 


그는 낙천주의자였습니다.


그와 처음 만난 것은 오르트 구름이 내려다보이는 함교에서였습니다.


그 날, 분대원들의 기묘한 상태에 마음이 복잡했던 저는 잠에 들지 못하고 선내를 산책했습니다.


크리스탈 유리창 너머로 비쳐보이는 별구름은 플레이아데스 성운을 머금고 크게 부풀어올라서, 창마다 별빛이 푸르게 타올랐습니다.


멍하니 그 성광을 지켜보던 제 눈에 이상한 것이 비쳤습니다.


좀도둑처럼 살금살금 움직이는 그림자였습니다.


침입자인가?


뼈에 새겨진 교육 프로그램은 그 판단을 마칠 새도 없이, 제가 권총을 빼들게 만들었습니다.


잠시 후, 저는 그를 짓밟고 관자놀이에 총을 들이대고 있었습니다.


“항복! 항복!”


그는 한심하게 소리쳤습니다.


키는, 170 후반쯤 될까요.


저보다 머리 하나 정도 큰 성인 남성이었습니다.


어딘가 카피바라 같은 분위기를 풍겼는데, 저 지저분한 수염만 밀어주면 인물이 괜찮다는 평을 받을 수 있을 법한 인상이었습니다.


그는 두 손을 높이 들고 있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놈을 추궁했습니다.


“무슨 목적으로 함교에 침입했지?”


“야근을 하고 있었는데, 커피에 넣을 설탕이 모자라서! 함교에는 설탕이 남아 있나 하고 왔어!”


“…뭐? 설탕 때문에 함교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아.”


무언가 생각이 번뜩였습니다.


“…당신, 커피에 설탕은 몇 개 넣지?”


그는 눈을 껌뻑이다 답했습니다.


“세 개 넣는데.”


그가 바로, A였습니다.


잠시 후, 저는 그와 함께 함교 구석에 앉아 함께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습니다.


저에게 커피를 건네준 그의 얼굴은 기대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커피 맛에 자부심이라도 있는 걸까요, 칭찬을 듣고 싶은 모양이었습니다.


과연, 그 정도 맛은 있었습니다만, 저는 일부러 매몰차게 잔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래서, 함교에 침입한 진짜 목적은 언제 알려줄 건가요?”


“말했잖아. 이거라고.”


“헛소리하지 마시죠.”


“납득해줄 수 있는 맛이라고 생각했는데. 모자랐나.”


정진해야겠다!


사람 좋게 외친 그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웃었습니다.


“가축의 성모 토벌전에 앞서서, B 분대의 작전을 빼내려고 온 게 아닌가요?”


“…작전? 왜?”


그는 왜 빼돌릴 필요가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투로 말했습니다.


“작전이 궁금하다면. 물어보면 되잖아.”


“…왜 알려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모두를 위한 일이니까. 함께 힘을 합쳐주지 않을까? 우리 모두는 카오스와 싸우는 동료잖아. 레노아 양도, 나도.”


“…동료?”


저는 말문이 턱 막혔습니다.


이 사람은 가축의 성모 토벌이라는 성과를 두고, B 분대와 경쟁한다는 의식이 아예 없는 듯했습니다.


그런 사람이니까, 자신의 영입 제안을 거절한 저에게도 이렇게 뒤끝 없게 구는 것이겠죠.


“그렇구나. 레노아 양은 커피에 설탕을 넣지 않는 쪽이구나. 그래서 감점을 받았군.”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거렸습니다.


“다음에 또 커피를 탈 일이 있으면, 참고할게.”


“다음 같은 건 없습니다. 우리는 경쟁 중이에요. 명심하시죠.”


하지만, 저는 뒤끝이 없지 못했습니다.


일부러 매몰차게 말하고, 저는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다음은 있었습니다.



( 4 )



‘가축의 성모.’


그 토벌 작전의 결행일은 다가왔습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우리 분대는 강하 캡슐을 투하하는 사출실에 도착했습니다.


사출실의 유리바닥 아래로 목적지인 행성이 내려다보였습니다.


원래는 푸른빛이었을 이 행성은 카오스에 잠식되어 검게 우식되어 있었습니다.


행성의 사분면을 파먹은 어둠은 쉴새없이 융해되고 또 응고를 거듭하는 듯 보였는데, 그 모습은 암이나 종양의 기전을 연상시켰습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15G의 중력을 견디며 강하 캡슐을 타고 추락해서, 저 혼돈의 내부에서 암흑의 근원을 절제해야 했습니다.


저는 심호흡을 하고 캡슐에 발을 들이밀었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도착 좌표가 작전서와 다르게 설정되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오늘 우리는 카오스의 외곽 쪽에서부터 보급 부대의 지원을 받으며 작전을 개시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좌표는, 아무리 계산해도, 우리를 단숨에 혼돈의 중심에 내리꽂을 것으로 보였습니다.


“분대장, 뭔가 착오가…!”


바이저를 열고 항의를 하려는 찰나, 사출이 시작되었습니다.


―구우우우우웅


강렬한 폭음과 온 몸을 뒤흔드는 충격이 이어지고, 저는 잠시 정신을 잃었습니다.


―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작전을 개시하십시오.


저를 깨운 것은, 강하 포드에서 울려퍼지는 여성형의 기계음이었습니다.


저는 혼란스러운 채로 문을 열고 나섰습니다.


문을 열자마자, 농밀한 어둠과 탁기가 제 몸의 모든 구멍을 타고 흘러들어왔습니다.


카오스의 장독.


심우주의 존재들이 내뿜는 기운이 저를 침식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정신적 외상을 할퀴어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물건이었습니다.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붕괴된 정신은 심우주와 현세를 잇는 통로가 되어 괴물을 강림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고로, 당장이라도 체내 카오스 농도를 낮추어야 했습니다.


저는 바로 바이저의 강도를 최대로 높였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니, 강하 포드 여럿이 보였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아무래도 저 혼자 잘못된 좌표에 강하된 것은 아닌 모양이었습니다.


저는 엉거주춤 포드에서 걸어나오고 있는 B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분대장! 왜 갑자기 이런 위치에서 작전을 개시한 거죠?”


“진정하게. 진정.”


바이저 너머로, 그는 소름끼치는 웃음을 짓고 있었습니다.


“A 분대보다 빨리 도착하기 위해서야.”


“그 말은…”


“나는 가축의 성모께서 어디 거하시는지 알고 있거든.”


A 분대보다 빨리 가축의 성모를 토벌하기 위해서, 일부러 위험한 지름길을 택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일단 납득할 만한 설명이었기에, 저는 불만을 가라앉혔습니다.


그는 킬킬거리며 분대원들을 불러모았습니다.


분대원들은 B의 명령에 의욕적으로 따랐습니다.


평소의 무기력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습니다.


잠시 후, 우리는 B의 인도를 따라 카오스 속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부함장이었으므로, B의 바로 뒤를 따랐는데, 자연스럽게 저는 분대원들에게 둘러싸인 형태로 걷게 되었습니다.


B는 분대원을, 그리고 저를 핥는 듯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브리핑을 시작하겠네.”


가축의 성모.


그것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옛 신의 하수인 중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특이한 식사를 취한 자의 정신을 뚫고 강림합니다.


그 식사란 바로, 인육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식인은 제국 최고의 중범죄로 취급받았으며, 식인한 자는 재판조차 없이 즉결처형되었습니다.


“그리고… 불행한 사고가 있었지.”


B는 음미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 거주성 UB234가 카오스에게 파먹혔지. 제국은 급히 이민선을 파견했어. 무인 이민선이라서, 전투원까지 보낼 순 없었지.”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요.


“또, 무인 이민선이라서… 이민자를 가려 뽑을 수도 없었어. 그 이민선에 탄 자 중에는,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인육을 섭취한 자가 있었네.”


“…그 이야기는, 어째서.”


“끝까지 듣게!”


B는 버럭 소리질렀습니다.


단순히 브리핑을 방해당한 자의 분노라기엔, 광기에 찬 고함이었습니다.


“그 이민선이 우주를 반쯤 항해했을 때, 강림이 시작되었네. 그 자의 정신을 타고 가축의 성모께서 강림하셔서, 그 몸을 거대한 육괴로 변형했던 거지. 이민선에는 요원이 없었으므로… 그 괴물을 토벌할 수는 없었네.”


저는 불안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여전히, 분대원들은 어깨를 맞대고 빈틈없이 저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 든든해야 할 인의 장벽이, 어째서인지, 가축의 우리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가축의 성모께서는 자애로우셔서… 아니, 그냥 맛없는 고기를 먹기 싫은 것이었겠지… 어린아이의 고기 하나만을 요구했네. 그러면, 열흘 동안 잠을 자 주겠다고 했지. 그래서… 한 어머니가 자신의 딸을 바쳤어.”


그 끔찍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B의 목소리는 황홀경에 젖어 녹아내렸습니다.


“그 딸은 성모께 통째로 삼켜졌으나… 기적적으로, 그 직후, 토벌대가 도착했지. 그래서 그녀는 소화되지 않은 채 살아남을 수 있었네. 흔적 하나만을 남기고 말이야.”


뜸들이던 그는 말했습니다.


“성모의 위액에서 건져올린 그 아이는… 머리가 희게 탈색되어 있었다고 하더군.”


그 아이, 


저 레노아는 안색을 굳혔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임무에 자원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악몽을, 끝내고 싶어서.


“…제 소개를 이제야 분대원들께 하는 건가요?”


어째서 B가 이런 상황에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을 살려, 토벌에 관련된 지식을 공유해달라는…”


“아니. 아니야. 내가 궁금한건… 음, 그거야.”


B는 물었습니다.


“자네, 맛있었나?”


“예?”


“자네를 삼킨 성모께서는… 만복을 느끼셨나? 행복한 표정이었나? 이 끔찍한 허기와 갈증에서 잠시나마 해방되어 복락을 누리셨나? 얼마나 감미롭고 또 달콤하기에, 성모께서 금세 소화하지 않고 천천히 녹여 드셨던 겐가…”


“…농담이라면 그만두시죠. 징계위원회에 고발하겠습니다.”


“나도 그 이민선에 있었다네.”


그 말에, 저는 얼어붙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 이민선에 있었지. 그리고, 우리 모두가… 성모와 같은 것을 먹었다네.”


그 말에, 저는 반사적으로 총을 빼들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저보다 빨랐습니다.


분대원들은 순식간에 달려들어 우악스럽게 제 사지를 결박하고, B는 뒷짐을 진 채 이야기를 이어나갔습니다.


“그건 그저 사고였어. 우리 모두는 지하 벙커에 보름이나 갇혀 있었네.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미 굶어 죽은 자의 고기 뿐이었어.”


“…당신!”


“하지만 제국은 우리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겠지. 그래서 우리는 제국의 심장부에 투신하기로 했네. 권력을 움켜쥐어서, 처벌을 피할 생각이었던 거야. 그 비밀로 묶여 서로를 감시했기에, 우리의 유대와 결속은 강하고 효율적이었지…”


B의 목소리는 광기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카오스에 거듭해서 들어갈수록, 어떤 갈망이 선명해졌네. 바로… 그 날, 성모가 드셨던 고기에 대한 갈망 말일세. 마침 우리에게는… 고기를 공급할 수단이 있었지.”


그는 피식 웃었습니다.


“카오스에서, 열 명중 한 명이 임무 중 사망하는 것 정도는, 이상한 일도 아니지 않나?”


“당신! 설마, 지금까지!”


“그래. 특별 부함장을 주겠다는 말로 애송이를 꼬셔서, 연회를 즐겼다네.”


지속적인 생존률 90%.


그 비밀은 이것이었습니다.


“아아, 그런데 이 연회는 에리식톤의 식사와 같아서, 아무리 탐닉해도 갈증과 허기만이 가득해지더군. 결국 이 허기를 달래줄 수 있는 고기는 하나뿐이라는 공통된 결론을 내렸지.”


축축한 것이 제 사지를 적셨습니다.


그 정체를 알 수 있으면서도, 저는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분대원들의 입에서 흘러내린 타액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성모가 드시던… 아이 말이야.”


이들은, 저를 잡아먹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웃음이 비명처럼 솟아올랐습니다.


그 웃음이 가라앉은 후에, B는 선고하듯 말했습니다.


“자네 혹시 ‘가축의 역설’이라고 아나?”


가축의 역설.


만약 종을 보존하는 것이 생물의 유일한 목적이라면, 가축이 되는 것이 최고의 길이라는 역설.


가축이 되었기에 닭은 태어난지 5분만에 거세당하고, 30분만에 육골분이 되고, 14일만에 알을 낳고, 28일만에 출하되지만, 그 종의 보존만은 누구보다도 성공적으로 유지하고 있다는, 그 역설.


그것을 B는 입에 담았습니다.


“정말로 빛을 보존하고 싶다면… 인간은… 가축이 되어야 하네. 그도 그럴것이, 인간이 가진 재능이라곤… 맛있다는 것 하나밖에 없잖나.”


“그런, 썩어빠진…!”


“퍼스트로서 명령하겠네. 요원 레노아 그레이스, 가축이 되어주게.”


그 순간, 변이가 시작되었습니다.


B의 살점은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더니, 악몽 속에서 수없이 보았던 그것의 형상으로 변이되기 시작했습니다.


구더기와 지렁이를 뭉쳐 인간 형상으로 콜라주한 듯한 고깃덩어리, 그럼에도 가슴에, 팔에, 머리에 거대한 입을 달고 있는 그것은,


가축의 성모였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입을 딱딱거리며, 곧바로 저를 덮쳐들었습니다.


사지를 구속당한 저는 꼼짝없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이자자자시시식!!!! 내내가가지지진짜이이입이이인데!!”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가축의 성모의 또 다른 입이, 별개의 생물처럼 움직여 방해를 한 것이었습니다.


저 자의 식욕은 같은 몸뚱이 안에서도 서로 경쟁을 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 찰나를 틈타, 저는 간신히 구속을 풀고 총을 꺼내들 수 있었습니다.


―드르르르르륵!


콩알 볶는 소리가 울려퍼지고, 분대원 둘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습니다.


그 틈을 틈타서, 저는 간신히 몸을 추스려 현장을 벗어났습니다.


B, 가축의 성모는 그제서야 제 도망을 알고 내분을 멈추어 소리질렀습니다.


“쪼쪼쪼쪼쫓아아아아!! 다다다닭이 다다달아나난난다!!”


추격전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 5 )



― 잔존 에테르, 17%.


― 경고. 당장 귀함해야 함. 트라우마 수치 상승중. 경고.


바이저는 붉게 점멸하며 경고음을 울렸습니다.


저는 카오스 내부를 정처없이 헤매고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남은 장비도 없었고, 연락 수단도 없었습니다.


그저 떨어질 때 보았던 좌표로부터 역산해서, 마지막 보급기가 있을 것이라 추정되는 곳을 향해 발을 옮기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시시시시시싯….”


그리고, 그들은 제 뒤에 있었습니다.


무너진 가로등 뒤에, 반파된 슬레이트 지붕 속에, 무너져내린 마천루의 잔해 밑에서, 그림자를 흉내내며 저를 뒤쫓고 있었습니다.


가끔씩 발작적으로 그들에게 총을 쏘아보았으나, 제 총탄은 그림자를 후려쳤을 뿐 아무것도 타격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 잔존 에테르, 13%.


이 에테르가 다 떨어졌을 때, 제가 어떻게 되는지를.


바이저가 기능을 정지하면, 카오스가 제 안에 파고들어서, 저를 붕괴시킬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저들은 무력화된 제 살점을 케이크처럼 쉽게 물어뜯을 작정인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헤매이고 헤매인 끝에 저들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사냥법을 다시 구사하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 잔존 에테르, 6%.


그러니, 그 이전에 중계기에 도착해야 했습니다.


제가 죽더라도, B의 정체가 가축의 성모라는 사실.


그것만큼은 함선에 전달해야 했습니다.


― 잔존 에테르, 0%. 요원께서는 옷을 벗고 꿀과 밀가루, 소금을 온 몸에 칠해주십시오. 인류를 위해 봉사해주십시오.


“닥쳐!”


정신을 차리고 에테르 잔존량을 다시 확인하니, 3%였습니다.


이제는 환청이 뇌를 침식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했습니다.


버려진 초원에 덩그러이 놓인 중계 보급기에,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정신없이 달려들어 그 수화기를 들고 연락했습니다.


“본부, 응답하세요. 비상 사태입니다. 구조를…”


― 잔존 에테르, 0%. 카오스 차단 바이저, 작동 중지. 


― 만약 요원이 임무 수행 중이라면, 자결하십시오. 당신의 인간적 존엄을 크렘린 궁의 현판은 기억할 것입니다.


그 때, 에테르의 농도가 다했습니다.


제 내부와 카오스를 차단하던 증기막이 스러지고, 물밀 듯 암흑이 밀려들었습니다.


그 암흑은 수화기 너머에서 오래된 말을 재생했습니다.


― 딸아,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이제는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의 목소리였습니다.


가축의 성모는 이민선의 식량고에서 쉴새없이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저희 모녀는 가난했고, 힘이 없었고, 밀항자였습니다.


함선 밖으로 던져질 것이냐, 딸을 바칠 것이냐, 누군가가 윽박질렀고, 어머니는 굴복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떨던 저를 식량고에 던져넣은 것이었습니다.


영문을 모르던 저는 식량고의 수화기를 들고 어머니에게 애타게 전화했습니다.


그 때, 어머니는 사과했습니다.


미안하다고…


“아…”


축, 수화기가 손에서 떨어져내렸습니다.


이것은 트라우마의 증상입니다.


제 정신적 외상 중 가장 고약한 부분을 영사해서, 제 정신을 붕괴시키려는 카오스의 수작입니다.


아는데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엄마아…”


그 암흑은 제가 외면하고 있던 진실을 비웃듯이 뒤흔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엄마니까요.


미안하다고, 사과했으니까요.


제가 희생하지 않았으면, 그 이민선의 모두는 죽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틀린 결정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100% 대신 90%를 골랐습니다.


위기에 몰린 인간은 누구나 인간을 희생합니다.


그렇게 믿고 싶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어머니한테 버림받은 아이가 되니까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두 제안서 중 90%를 골랐고, 그래서 이 자리에 선 것입니다.


하지만 내 안의 어둠은 비웃듯이 제게 계속해서 진실을 흔들어댔습니다.


“그렇구나, 나는…”


나는 버림받았습니다.


어머니는 날 버렸습니다.


제가 제국의 함선에서 눈을 떴을 때, 어머니는 더 이상 저를 찾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밀항자인 게 들키니까요.


저를 찾지 않으면, 제국의 시민으로 살 수 있으니까요.


“나는… 버림받았구나.”


이 드넓은 쓰레기의 우주에서, 나는 혼자였습니다.


털썩, 무릎에 힘이 풀렸던 모양입니다.


저는 어느새 쓰러져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비강과 고막과 점막을 파고드는 어둠은 이제 달콤하고 부드럽게 느껴졌습니다.


쉬고 싶다.


삶에 대한 의지가 스러져가고, 그 빈자리를 쉬고 싶다는 마음이 채워갔습니다.


저는 이제 조리가 완료된 것입니다.


그것을 확인한 괴물들이 어둠 속에서 킬킬거리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가축의 성모는 그 육중한 몸을 뒤뚱거리며 앞장섰습니다.


총을 들어 반격해야 할 텐데, 반격할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저는 그 날, 그대로 먹혀서 죽는 게 맞았을지도 몰라요.


저를 향해 엄습하는 이빨을 보며, 저는 눈을 감았습니다.


― 쾅!


하지만, 그 운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함장! 구시대 오토모빌 운전 면허 있다고 했잖아요! 운전 개판으로 해서 늦을 뻔했잖아!”


“자동 면허였어! 구닥다리에도 급이 있다고! 수동일줄은 몰랐지!”


“아 진짜, 아무튼 제대로 좀 해요!”


…갑자기 어디선가, 거대한 덤프트럭이 나타나서, 가축의 성모를 들이받은 것이었습니다.


그 운전대를 쥐고 있는 것은 분명히,


A였습니다.


“자, A반! 지금부터 가축의 성모 토벌과 우리의 동료 레노아 요원 구출을 시작한다!”


이 어둠과 혼란의 한 가운데서, 그는 우렁차게 소리쳤습니다.



( 6 )



그들은 용맹하게 싸웠습니다.


붉은 머리의 여자아이는, 곡예하듯 외벽을 타며 기다란 장검을 휘둘렀습니다.


검이 호를 그릴 때마다 에테르 불꽃이 튀고, 성모의 살점이 잘려나가 피를 흩뿌렸습니다.


멍하니 바라보면서, 저는 제안서에서 보았던 글을 떠올렸습니다.


― 우선, 레이라는 아이에 대해 알려드릴게요. 레이는 난치병을 앓고 치료를 거부당해서, 실험체로 군에 입대한 아이입니다.


― 하지만 지금은 그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소대에서 누구보다 검을 잘 쓰는 아이가 되었어요.


저 아이가, 아마도 제안서에서 설명하던 레이가 틀림없었습니다.


“제기랄, 아무리 베도 베도 끝이 없잖아! 미카, 보급을!”


“네? 네!”


그 말에, 하늘빛 머리칼의 아이가 허둥지둥하며 손을 쳐들었습니다.


그 손끝에서 에테르가 빛나며, 푸른 물이 쏟아져 레이를 휘감았습니다.


레이의 생채기와 피로가 사라져가는 것이, 이 멀리서도 느껴졌습니다.


― 미카는 사교집단에서 자라난 아이입니다. 지혜롭고 똑똑해서, 사교집단의 모순을 발견하는 바람에, 심한 집단 따돌림을 당했죠. 군이 구조하고 얼마 동안은 방에서 나오지도 못했어요.


― 하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 따뜻한 아이가 되었습니다.


“트리사, 결정타!”


그 말에, 붉은 옷을 입은 여자아이가 단검 수십발을 쏘아냈습니다.


그 몸짓은 곡예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절도가 있었습니다.


― 트리사는 불행한 아이에요. 그 불행이 자기 탓이 아닌데도, 다른 사람을 휘말리게 할까봐 다른 사람과 접촉하는 걸 차단한 아이였죠.


― 하지만 지금은 동료와 서로 등을 믿고 맡기는 우리 소대의 에이스랍니다.


“아…”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솟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들 모두가 겪은 공포, 고통은, 저에 모자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들은 당당하게, 저토록 당당하게, 괴물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화력이 모자라!”


“함장, 라이프코어 출력을 높여 주면 안돼?”


“이미 함장은 한계까지 높이고 있어!”


만약 이 장면을 직접 보지 않았다면, 저는 이들이 무모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3성, 4성 요원이었고, 가축의 성모는 엘리트.


체급의 차이는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저들의 싸움에는, 기적을 기대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


서서히, 다리에 힘이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쉬고 싶다는 마음이 몰려가고, 좀 더 밝은, 빛나는 것이 마음에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 그리고 이 아이들 모두는, 레노아 양과 함께 하고 싶어합니다. 물론, 저도 그렇구요.


― 함께 카오스와 맞서는 동료니까요.


그건 바로, 저들을 구하고 싶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저는 저들의 동료였습니다.


저는 이미,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다들 물러서!”


소리치고, 저는 가진 모든 힘을 총탄에 밀어넣었습니다.


5성의 요원만이 할 수 있는 것, ‘구현’.


카오스의 힘을 역이용해서, 세계의 섭리를 뒤바꾸는 절기.


그것을 시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트라우마를 이겨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교관은 말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그것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 텅!


총탄은 굉음을 흩뿌리며 쏘아져나갔습니다.


그 궤적 뒤로 가시덩굴이 솟아올랐습니다.


검은 장미를 매달고 있는 가시덩굴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상창처럼 곧은 궤도로 날아가더니, 성모의 뱃가죽을 사정없이 꿰뚫었습니다.


“기기이이이이이이익!”


성모는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뒤틀었습니다.


그럴수록, 가시덩굴은 더욱 더 깊게 살에 파고들었습니다.


“아직 안 끝났어!”


이어, 두 번째, 세 번째 총탄이 성모를 꿰뚫었습니다.


그 상처마다 검은 장미가 피어오르며, 성모의 육괴를 무너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핵을 잃어버린 성모는 서서히 무너져내렸습니다.


그 괴물이 울부짖던 자리에는 한 줌의 핏물만이 남았습니다.


무찌른 것입니다.


그 기억속의 대적을.


더 이상 저는, 수화기를 붙잡은 채 떨던 무력한 어린아이가 아니었습니다.


“해냈,다…”


안도의 한숨.


그리고, 급격히 힘이 빠져나갔습니다.


무리한 탓에, 눌러두었던 피로가 쏟아져 잠을 재우려고 하는 듯했습니다.


털썩 쓰러져내릴 때, 따뜻한 것이 머리에 닿았습니다.


황급히 달려온 A가 저를 안아든 것이었습니다.


“레노아 양! 괜찮아?”


…그 품은 포근했습니다.


혹시 저한테도 오빠나, 아빠가 있었다면.


이런 기분이었을까요.


가물거리는 정신 속에서, 저는 간신히 한 마디를 남겼습니다.


“설탕…”


“뭐?”


“사실, 한 개 넣어.”


그리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 7 )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장담컨대, 제 인생에서 가장 소란스러운 일주일이었습니다.


A반의 아이들이 매일같이 제 방에 병문안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관심없는 척하고, 쌀쌀맞게 말하고, 자는 척을 해도,


그 아이들은 제게 달라붙어서 하루 세 시간은 수다를 떨어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다음에 또 트라우마에 걸린다면, ‘수다 공포증’ 같은 게 걸리지 않을까요.




A는 한 번도 모습을 비추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못했습니다.


B와 B의 분대가 식인 분대였다는 사실은 거대한 스캔들이 될 수 있었고, 제국은 이것의 철저한 은폐를 명했습니다.


A는 그 작업과, 함장 취임 준비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요.


그는 이 함선, ‘나이트메어 호’의 함장이 되었습니다.


31세에 함장이라니, 제국 역사에 남을 대출세입니다.


이제 요원 하나를 돌볼 시간 같은 건 없겠죠.


( 추신. 그가 31세에 독신이라는 것은 그냥 수다를 떨다가 우연히 알았습니다. 캐묻지 않았습니다. )


매일같이 찾아오는 A반 아이들에게 은근슬쩍, 넌지시 A에 대해 물어봐도, 함장은 너무 바쁘다는 말만이 돌아왔습니다.


…그러니 제가 수다에 흥미가 붙지 않을 수밖에요.


“커피, 또 타준다고 했으면서…”


이불을 끌어안고, 저는 중얼거렸습니다.


그 혼잣말을 듣기라도 한 걸까요.


양반은 못 되는 모양입니다.


그날 밤, A… 함장은 양 손에 과일을 들고 제 병실에 찾아왔습니다.


“레노아 양, 면회인데. 들어가도 될까?”


“…들어오세요.”


잠시 거울로 앞머리를 확인하고, 저는 일부러 쌀쌀맞게 말했습니다.


그 몸단장이 무색하게, 함장의 수염은 더욱 더 대단한 것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 마디 쏘아붙였습니다.


“그 수염, 안 불편해요?”


“어?”


머쓱하게 웃던 그는 열없이 거울을 보다 답했습니다.


“조금 예의가 아니었나? 밀까?”


가만히 수염을 들여다보던 저는 말했습니다.


“아니, 밀지 마세요.”


수염을 밀라고 했다가, 밀지 말라고 했다가, 말을 바꾸는 제가 혼란스러운 모양이었습니다.


함장은 제 곁에 앉았습니다.


“그 날, 레노아 양 덕분에 살았어.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어서, 찾아왔어.”


신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날, 제가 보급기에 남긴 한 줄의 구조 신호.


그것을 듣고 찾아온 사람은 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그건 당연하다는 듯이.


오히려 제가 함장을 도왔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그는 머쓱하게 답했습니다.


“왜냐니, 구조 신호를 들었으면 도와주러 가는 것이 퍼스트의 의무잖아.”


그러니까, 자신의 헌신은 당연하게 깔고 있는 주제에,


타인의 헌신에는 감사를 표해야만 하는 성격인 모양이었습니다.


저는 기가 찼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어리숙한 사람이 있을까요.


제 최초의 직감은 어느정도 맞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부에서도 지령이 왔어. 레노아 양도, 어쨌든 소속은 B 분대였으니까. 견책 처분을 내려야겠다고 하던데.”


“…그렇습니까.”


당연한 이야기였습니다.


B가 이상하다는 징후는, 작전을 결행하기도 전에 여럿 있었습니다.


그것을 왜 고발하지 않았는지, 제국으로서는 의심할 수밖에 없었겠죠.


“그래서, 좀 싸웠어.”


“…네?”


“나한테도 책임이 있으니, 레노아 양에게 견책을 내린다면 나도 견책해라. 그리고 함장직은 그만두겠다고 했지.”


“당신, 미쳤어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사람은, 만난 지 고작 며칠도 되지 않은 저를 위해서, 제국 역사에 남는 대출세를 걷어차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배의 함장을 구하는 것도 힘든 모양이라. 그냥 견책은 없던 걸로 해 준대. 다행이지?”


그가 바빴던 이유는 이것이었던 모양입니다.


간단하게 말하고 있지만, 그 뒤에 얼마나 끈질긴 투쟁이 있었을 지, 저는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붙었어. 내가 레노아 양을 지속적으로 감찰할 것, 이라는 조건.”


“그런가요.”


“그래서, 나는 레노아 양이 내 곁에서 일해줬으면 좋겠는데.”


저는 고개를 홱 들었습니다.


이미 한 번 거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또 다시 저를 영입하기 위해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저를 당신의 소대에 영입하고 싶다고 한 건가요?”


“그렇게 되려나?”


그는 쑥스러운지, 볼을 살짝 붉히고 답했습니다.


저는 그 얼굴을 지켜보며 천천히 질문했습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대답해 줄 수 있는 거면, 대답할게. 질문해.”


“당신은, 지금까지 악착같이 생존률 100%를 지켜왔죠. 그 이유가 뭔가요?”


그 말에 함장은 놀랐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온 말은,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서기 2855년, 인류는 고향을 잃고 방랑자가 되었다…”


제가 제국 앞에서 외웠던, 기도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인공이 아닌 하늘을 모른다. 우리가 신이라 믿었던 것은 그저 힘. 이형의 힘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기도문은 중간부터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세상에서도, 인간은 기도를 올린다.”


두 손을 모아 소망을 전하고,


그 소망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나는, 신이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내가 들어주고 싶다고 생각했어.”


“…당신이요?”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사람 곁에 있고 싶어. 구원해달라는 사람을 전부 구원해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곁에라도 있고 싶어. 위기에 있을 때, 그 사람이 있으니까, 힘내자. 그렇게 생각되고 싶어. 그게 내 바람이야.”


그 말은 진심처럼 들렸습니다.


생존률 100%.


그 수치는 어쩌면, 그저 그 바람에서 파생된 결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내 바람을 함께 이루어주지 않을래?”


…하지만.


그것은, 무관계한 타인이 기도해도, 자신의 몸을 깎아 구하겠다는 선언에 다름없습니다.


기도를 들어주고 싶다니, 그것은 인간에게는 허락된 바람이 아니에요.


소모되고, 소모되다가, 언젠가 거짓말처럼 쉽게 부서지겠죠.


저 길 끝에는, 반드시 파멸이 있을 것입니다.


생존율 100%.


제가 처음 그 수치를 보았을 때와, 지금과.


그 결론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네.”


…그러니까.


그렇게 되지 않도록, 곁에서 내가 지켜줘야겠다.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가 내민 손을 붙잡자, 함장은 멍하니 제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뭐가 묻기라도 한 걸까요?


“…왜 그래요?”


“아니, 레노아 양.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하고 깨달아서.”


“…제가 웃었나요?”


“그리고 지금은 얼굴이 빨개졌어.”


잠시 후, 함장은 버선발로 병실에서 쫓겨났습니다.



( 8 )



얼마 후, 함장의 취임식이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저는 부함장으로 임명되어서, 함장의 곁에서 손을 흔드는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번엔 ‘특별 부함장’이 아니라, 진짜 부함장이라구요.


원래는 부인이 함께 취임식에 참석하는 게 관례인데, 이렇게까지 젊은 함장은 처음이라, 부함장이 대신하게 됐다나 어쩐다나.


제국의 높으신 분들과 함께하는 식사를 마친 함장은 녹초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업무는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니, 함장. 이제 함선의 새 이름을 정해야 하는데요.”


“새 이름? 그대로 나이트메어 호면 안 돼?”


“새 술은 새 부대에, 라는 말도 있으니까. 형식이라도 중요한 거지.”


…그리고 저는, 이렇게 슬쩍슬쩍, 반말을 섞으려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함장은 녹초가 되어서인지, 별 말 없이 넘어갔습니다.


“음… 이름이라…”


함장은 머리를 쥐어싸맸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묘안이라는 듯 말했습니다.


“그럼, ‘제로 나이트메어’는 어때? 나이트메어 호라는 명칭도 유지할 수 있고, 악몽을 0으로 만들겠다는 뜻도 되는데.”


…아무래도 그는, 이 함선이 왜 나이트메어 호로 불렸는지를 모르는 모양이었습니다.


저는 한숨을 내쉬며 이 함선에 엮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럼 안 되겠네. 이미 썼던 이름이니까…”


“안 될게 뭐 있어? 발상 자체는 좋은데.”


함장은 고개를 벌떡 들었습니다.


가끔, 사소한 칭찬에도 이렇게 크게 반응하는 그가, 조금 귀엽다고 느꼈습니다.


“기존에 쓰던 리소스를 재활용하게, 나이트메어 호라는 이름을 유지한다는 발상은 코스트 절감 측면에서 나쁘지 않아. 사연이 있어서 제로 나이트메어가 안 된다면, 하나 더 붙이면 되잖아.”


“…그렇네? 레노아, 생각해둔 게 있어?”


“음… 이건 어때.”


저는 종이에 유려한 글씨체로 글자를 새겼습니다.


함장은 멍하니 그 글자를 읽었습니다.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


“이 함선이 카오스들의 악몽이 되겠다는 뜻이야. 어때?”


우리의 배 이름은 그것이 되었습니다.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


만일 당신이 외롭다면,


혼자라서 트라우마에 패배할 것 같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면.


부디, 기도를 올리고 밤하늘을 바라봐주세요.


이 고래를 닮은 배가, 당신의 하늘 위에서 유영하고 있으니까요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chaoszero&no=13390




게임 오픈전인 9월에 올라온 내용....

디테일한 설정이나 떡밥 회수 그리고 캐릭터 성격같은거 보면 오픈전에 알수없는 내용들

개인적으론 메인 스토리 이렇게만 나왔으면 일러같은거 AI썼어도 물고 빨고했을텐데

모바일 게시판 하단버튼

댓글

새로고침
새로고침

모바일 게시판 하단버튼

모바일 게시판 리스트

모바일 게시판 하단버튼

글쓰기

모바일 게시판 페이징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