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1940년대 총인구 2000여만명.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인도차이나 반도와 기후 특성상
사계절 내내 농작물의 2모작-3모작이 가능한 식량농업 중심 국가.
일제는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이름을 걸고
태평양 전쟁 초기에 프랑스로부터 이곳을 빼앗아 지배한다.
같은 동양인이 압제자 프랑스를 몰아냈다며 베트남인들이 환호하자
당시 베트남 독립운동가였던 호치민은
"일본의 지배를 받는 조선인들이 행복해 보이더냐?"는 말을 베트남인들에게 남겼다.
1944년, 일본은 전쟁에서 지고 있었다.
태평양 전선에서의 계속되는 전투 패배는
일본 점령지들의 유지가 불가능해졌다는걸 의미했다.
소위 '본토 절대 방위선'의 함락은 시간문제였고,
이제는 일본 본토에서 귀축영미를 맞아 싸워야 한다는 결전론이 대본영에서 나오던 시기.
고대부터 지금까지, 동서양 모두 전쟁에 져 땅을 잃을경우,
적이 빼앗은 내 땅으로 인해 강성해지는걸 막기 위해 초토화 전술이 시행되었다.
밭을 불태우고, 농수 시설을 파괴하며, 탄광은 무너뜨리며, 항구는 기뢰를 뿌려놨다.
하지만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적이 빼앗은 땅에 어떤 민간인도 살지않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었다.
아니면 아무도 살 수 없게 만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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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은 제1차 북벌(서기 228년) 당시 가정 전투의 패배로 철수하면서,
점령했던 농우 지역(천수·남안·안정 등)의 위나라 주민과 민간인 가구 수천 호를
촉한의 본거지인 한중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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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본영은 포기하고 떠나야 하는 점령지들에 대한
가장 효율적이면서 들어오는 연합군에게 치명적인 부담을 주는 방법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첫 '실험대상'은 베트남이었다.
1944년 초, 일제는 베트남 식민지령에서 이전의 양곡 수탈에 한가지 방식을 추가한다.
'다음 농사 파종을 위한 종자도 전부 징발할것.'
종자를 회수하기 위한 고문과 폭행 또한 용인되었다.
농업에만 의존하는 지역의 수확물과 종자를 다 빼앗고,
다음 농사를 짓지 못하면 무슨 일이 생길까?
42년부터 일본은 베트남에서 생산된 쌀 대부분을 일본 본토로 보내고 있었다.
44년부터는 파종할 종자와 베트남 농민들이 먹을 식량까지 징발되었는데
연합군의 공격으로 다리와 도로가 파괴되 식량물류가 곤란해진 상황에서
각종 재해와 흉년까지 발생한다.
44년 10월, 농촌에서 아사자가 발생한다.
전시에 그나마 가장 식량 사정이 좋다는 농촌에서
농부가 굶어죽었다.
지옥의 문이 열렸다.
산짐승, 곤충, 풀, 나무껍질, 이끼를 뜯어먹었고,
굶어죽은 가족은 집 마당 앞에 묻어야만 했다.
마을 이웃들이 내 가족 시체를 파내 먹는걸 막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몇달 후에는 이웃들이 가족의 시체를 파먹을 일조차 사라졌다.
내 형제, 부모와 자식을 끓여 먹던가, 아니면 죽던가 였으니까.
이 지옥도에서도 일본군의 양곡 수탈은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농촌과 도시 길가에서 굶어죽는 사람들과 상관없이
귀축영미들과 결전을 위해 본토에 보내질 양곡은 창고에 쌓여지고 있었다.
그 곡식 대부분이 연합군 잠수함에 의해 바다에 수장되는걸 알고 있었어도
일본은 베트남 아사자들을 구하는 대신
그 방법으로 쌀을 바다에 버리는걸 선택했다.
1945년 3월, 뼈와 가죽만 남은채 죽어가던 베트남인들은
베트남 독립 동맹회 주도로 베트남 전역의 일본군 미곡창들을 습격한다.
일본은 참수와 요참-허리를 베어 죽이는 사형-을 해대며 진압했다.
현재 일본 극우는 흉년으로 인한 우연이였다는 식으로 책임회피를 해대지만
같은 시기, 똑같은 일제의 '초토화 실험'이 점령지인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시행되고 있었다.
결과는 1945년에만 자바섬에서 인도네시아인 120만명이 죽어야 했다.
을유년 대기근으로 불리는 이 베트남 대기근은
우크라이나의 호로도르무, 아일랜드 대기근과 규모가 같으며
뱅골 대기근과 자바 대기근과 함께 2차대전중 유명한 고의적 기근 학살에 속한다.
일본 대본영의 초토화 전술 1년만에
베트남 총 인구의 10%인 200만명이 아사로 죽었다.
이 수탈방식이 3년만 더 유지되었다면
베트남인은 소수민족이 되었을거다.
그들이 구원받을 가능성은 없는
차례로 아사해 결국 말살되기까지의 몇 년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일제가 만든 기아의 지옥이었고,
작은 '희망의 빛'조차 보이지 않는 암흑의 시대였다.
1945년 8월 6일, 9일
아사자들이 그렇게 생전에 바라던
'희망의 빛'이 그 가공할 에너지로
일본 군사도시들을 태워버린다.
'한여름, 미국 정부는 일본의 비타협성에 참을성을 잃고는,
굉장하고 장엄하고 뭐라고 항의할 수 없을 만큼 결정적인 방식으로
전쟁을 끝내고 싶은 유혹에 굴복하기 시작했다.'
존 키건, 《2차 세계대전사》 p.856
본토 장기 결전을 준비하던 일본 군부는
8월 초순 두차례의 연합군 핵 폭격을 맞은 후 항복한다.
이 조기 종전으로 일본 대본영의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에
기아를 이용한 초토화 작전은 중지되며
만주와 중국, 한반도에서의 시행계획도 백지화된다.
전혀 다른 형태의 빛이였고, 베트남인들을 구하려는 목적도 아니었지만
베트남인들에게,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전쟁이 장기화되면 대본영의 다른 초토화 실험대상이 될
중국인에게,
만주인에게,
한반도인에게
당시 그들에게 그건 구원의 빛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
8월 9일, 나카사키 원폭 투하일.
현대 전쟁사중 가장 많은 아시아인의 예고된 아사-학살을 막은 폭격.
나카사키와 히로시마에서 조센징이라며 학대받다
핵 투하에 휩쓸려 죽어간 징용 조선인들과
조기 종전 직전까지 일제에게 굶어죽어야만 했던
아시아인 모두에게 조의를 표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