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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유시민 작가에게

Jinun
댓글: 26 개
조회: 2785
추천: 11
2026-08-25 14:29:12





저는 유시민 작가를 존경합니다.
당신의 책을 모두 소장하고 있고 때때로 반복해 읽습니다.
당신이 완전하거나 완벽해서가 아니라 행간에 숨은 노무현이라는 거인의 인간적 면모와, 그 고뇌와 갈등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또 한 사람의 일관된 역사를 따라 걷는 길이 즐겁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씁니다.
존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반박할 이유도 없습니다.

투표는 탄환이라는 명제에 동의합니다.
수만 년 인류사에서 고작 몇십 년밖에 되지 않은, 피와 시체의 산으로 받아낸 평등의 증거라는 사실에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대의제입니다.
내 뜻을 대신 실현할 정당과 정치인을 내가 골라 표를 주는 것,
그것이 투표권의 핵심이고 개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실체입니다.

내가 던지는 한표는 백지수표가 아닙니다.
정치의 위임에는 조건이 있고, 조건이 무너지면 위임도 무너집니다.
"우리는 A를 하겠다"는 약속에 표를 주었는데 "생각해보니 B를 해야겠다"가 돌아옵니다.
한 번이면 사정이라 하겠습니다.
두 번이면 전략이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반복되고 지속될 때, 우리는 그 정당과 정치인을 무엇이라 불러야 합니까.

'언젠가는'이라는 미망을 품고 단돈 천원 만원이라도 보태며,
끝없는 희망고문의 굴레 속에서 기다리고 또 실망하기를 반복해야만
올바른 지지자가 되는 것인지 작가님께 되묻고 싶습니다.
지지의 철회와 탈당은 민주주의에 대한 포기가 아니고 정치에 대한 외면도 아닙니다.
더 이상 민주당이 내 뜻을 대의할 자격이 없음을 천명하는 일이며, 이제 민주당 역시 국민의힘과 다를 바 없이 반드시 패망시켜야 할 정당이 되었음을 결심하는, 또 하나의 정치적 결단입니다.

30년입니다.
30년을 지지했고 30년을 표로 갚았습니다.
실망한 적은 많았고 지지자들끼리 언사가 격해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 표를 받은 당사자들이 그 표를 준 사람들을 향해 '가짜'라고 부르는 것은 고추에 털 난 이래 처음 봅니다.

8월 17일 대전.
당대표 후보는 마지막 연설에서 이중당적과 유령당원과 비자발 입당이
차차 정리될 것이라 했습니다.
가짜 당원의 경선 농단을 뿌리 뽑겠다고 했습니다.
당이 순수한 민주적 정치결사로 정화될 것이라 했습니다.
가짜 당원에게는 조용히 퇴장할 기회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신동엽을 인용했습니다.
'껍데기는 가라.'

정화(淨化).
저는 이 단어를 압니다.
이 단어를 즐겨 쓰던 자들이 어느 편에 서 있었는지도 압니다.
그날 상대 후보는 되물었습니다.
여기 반명이 있느냐, 분열주의가 있느냐, 신천지가 있느냐.
답은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답 대신 54.08%가 왔습니다.

노무현은 이라크 파병으로 자기 지지자들에게 등을 돌려세웠습니다.
문재인은 촛불이 감옥에 보낸 암캐를 대선 70여 일 앞두고 풀어주면서,
5대 중대 부패범죄는 사면하지 않겠다던 자신의 공약을 스스로 부수었습니다.
민변은 국민을 배신했다고 했고 참여연대는 규탄 성명을 냈습니다.
두 사람 다 잘못했습니다.
크게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쏟아지는 비난 앞에 고개를 숙였을 뿐, 비난하는 사람들을 '가짜'라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지지자를 유권자에서 혐오자로 강등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차이는 정책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거기 그 지점에 있습니다.
이제 비판은 공격으로 간주되고, 다른 목소리는 가짜로 분류됩니다.
그리고 그 분류를 관철할 제도가 지금 정비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투표권은 탄환이 맞습니다.
그리고 그 총구는 이제 민주당을 향할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의 포기도 외면도 아닌 저라는 개인의 정치적 선택입니다.
민주당도 사라져야 합니다.
원칙이 언제나 현실에 앞설 수는 없겠지요.
다만 원칙 앞에서 부끄러워할 줄 아는 인간들이 모인 정당이 새로 선다면, 저는 기꺼이 그들의 탄환이 되겠습니다.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자들에게 내어줄 탄환은 없습니다.

유 작가께서 이 글을 보실 가능성은 없습니다만,
제가 이 글을 쓸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작가님이라면 반대 의견을 반기로 읽지 않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다른 생각을 품고도 그 생각을 털어놓으며 같은 길을 걸을 수 있고,
길이 갈라진 뒤에도 서로를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 믿음 하나로 여기까지 썼습니다.

같은 믿음을 지금 민주당에 걸 수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제 대답은 제가 쓴 모든 글 전부입니다.
신뢰는 신뢰를 받을 가치가 있는 대상에게 주는 것입니다.

Lv12 Jin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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