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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엽편 소설] Run away

나나나나난알
댓글: 2 개
조회: 3118
추천: 1
2016-08-27 06:06:25


* 엽편 소설이란? 원고지 20내외 작품으로, 종이책 페이지로는 10페이지 이내의 극히 짧은 소설을 의미합니다.

--


발단은 반쯤 호기심으로 만남 어플을 깔면서부터였다.


나이나 혈액형 그리고 체형 정도만 간략하게 써놓은 다음에 기본 멘트 '좋은 인연 찾습니다.'로 게시글을 올렸던 게 화근이었다.


그 누가 예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미끼도 걸어놓지 않은 낚싯바늘에 알아서 와 걸려 주는 물고기가 있을 거라고.


하지만 우연은 어떠한 경우에도 일어나기에 우연이라 불리는 것이다. 사실 피해갈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악재가 악재라는 걸 알았다면 좀 더 현명하게 대처했을지도 모른다.


그치만 당시에는 그저 좋은 쪽으로만 생각했다. 메세지를 보내 온 상대는 프로필 사진만 보면 몸매도 꽤 괜찮았고 나이도 연하였다. 와 이 정도면 만나 보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기에 충분한 조건들이었다고 할까. 사진도 얼굴까지 나온 건 아니고 모두 다 적당히 지어낼 수 있는 신빙성 제로의 정보들이었지만 겨우 그걸로도 '곧 있음 마법사' 24년째 동정 김유성에겐 가슴 뛰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사실 환상은 환상으로 남겨둘 때가 가장 좋은 법이다.


미리 말해두는데 까보니 실물이 별로였다ㅡ이런 이유에서 하는 얘긴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실물이 좀 더 나았다. 몸매도 그럭저럭 훌륭하고. 다만 문제는 좀 더 현실적인 곳에 있었다.


"만나자고 했던 게... 너였어?"
"설마 아저씨가 내 만남 어플 상대?"


김지윤.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한 17살 여고생이다. 유성과는 몇 번 면식이 있는 사이기도 하다. 사적으로는 아니고, 자주 가는 고깃집 사장님의 딸이라 자연스레 알게 된 것 뿐이다. 사장님 말에 따르면 반에서 반장도 하고 있고 나름 성적도 괜찮은 게 매우 똘똘하다고 한다. 게다가 틈틈이 장사일도 도와준다고 하니 효녀가 따로 없다.


그런데... 어째서...


"저...저기 지윤아? 21세 대학생이라는 말은...?"
"당근 구라죠. 아 왜 하필 아는 사람이람. 거 됐고요. 것보다 할 거에요?"
"하다니, 뭘?"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저 당당한 태도는 뭐란 말인가. 음식점에서 보여주던 그 수줍고 청순한 여고생의 모습은 어디 가고. 전부 거짓말이었니? 여자 성격은 유리 가면이라더니, 정말 무섭기 짝이없도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거에요? 아님 진짜로 모르는 거에요? 헐. 설마 아저씨 동정? 완전 깬다. 그 나이에... 그러니까 그거 말이에요 그거. 우리 조건 만남 한 거잖아요? 그럼 모텔 직빵말고 더 있어요?"


귀에 음란마귀가 들어갔나 보다.


막 뇌에 이상한 전파를 흘린다. 소리가 전부 이상하게 변이되고 있어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크레센도?"
"뭘 멍청한 소리 하고 있어요. 그래서 할 거에요 안 할 거에요?"
"저기...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조건 만남이라니 처음 듣는 얘기고. 아니 애초부터 난 그냥 친구 사이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연인 사이로 발전해 나가는 순정틱한 사랑이... 아니 것보다 애초에 상대가 여고생이면 시작부터 불가능하잖아!"
"그럼 안 하겠단 거에요?"
"하고 싶습니다!"


여차저차 둘은 모텔로 이동했다. 그후 자연스럽게 방을 잡고ㅡ아이러니하게도 유성이 '보호자'의 신분을 맡게 됐다. 아님 미성년자인 지윤 양은 들어갈 수가 없으니까.ㅡ'할' 준비를 했다.


"저기... 지윤아? 뭐하는 거니?"


방에 들어오자 마자 옷장이고 서랍이고 전부 열어대면서 뭔가를 찾는 듯 꼼꼼이 뒤지는 지윤을 보면서 유성이 물은 말이었다.


"몰래카메라 찾는 거에요. 사전에 조사를 좀 했는데 일부 악질 모텔은 '그걸' 찍어서 동영상으로 만든 뒤에 팔아먹는다 하더라고요. 전 관계는 맺을 수 있지만 AV데뷔는 하고 싶지 않으니까 만에 하나의 경우라도 생각해야죠. 뭐... 일단 이 방엔 없는 것 같네요."


그러자 지윤은 곧바로 윗옷을 벗기 시작했다. 유성은 당황해서 손사레를 치며 소리쳤다.


"자자자잠깐! 그만 하자. 역시 안 되겠어. 아무리 여자가 고프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고생이랑 할 수는 없다고. 그것도 평소에 알고 지내던 사장님 딸이랑은."


그러자 지윤은 표정을 확 찌푸리더니 말했다.


"여기까지 와 놓고요?"


무... 무섭다.


"하지만 너도 나처럼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아저씨랑은 하고 싶지 않을 거 아냐. 난 벌써 군대 갔다 온지 2년이나 지난 노땅이고... 넌 아직 청춘이니까."
"...청춘 말인가요?"
"응. 뭔가 좀 더 이런 거 말고 다른 대단한 일들이 가능한 나이니까."
"그런 거 딱히 필요없는데요."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그러나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막무가내인 말은 아니다. 중얼거림처럼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것에선 진심이 느껴졌다.


"뭐, 됐어요. 싫다는데 억지로 할 수는 없죠. 내가 모텔비 낸 것도 아니고. 대실 시간 아까우니 티비나 좀 보다 가요."


그렇게 말하며 반쯤 벗은 옷을 다시 입으면서 침대에 다이빙하는 지윤이었다. 자연스럽게 리모컨을 쥐고 티비를 켜는 그 모습은 누가 어른이고 누가 아이인지 헷갈리게 할 정도였다.


여자들의 본모습이란... 대체...


탄식하듯 그렇게 중얼거린 유성이었다.

 

 

단순한 해프닝일 거라 여겼던 그날의 '조건 만남'은 유성의 예상보다 훨씬, 훠어어얼씬 더 오랫동안 둘 사이의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루는 유성이 단골 고깃집ㅡ늘 들리는 곳. 그가 단골인 가게는 그곳 하나밖에 없다.ㅡ에 친구들이랑 같이 들려 술을 마시던 중에 서빙 일을 돕던 지윤이 찾아와 부탁했다. 말이 부탁이지 사실상 명령조였다. 처음에는 귓가에 대고 속삭이길래 뭔가 했는데 내용을 들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저 술 한 잔만 줘요."


아무렇지 않게 달라고 하는 그 모습이 이게 정말 17살짜리 여고생이 맞나 의심을 들게 했다. 당연히 거절한 유성이었지만 다음 말은 더 가관이었다.


"안 주면 아빠한테 그날 일 꼰지를 거에요."
"그날 일이라니?"


모르는 척 물었지만 사실 뭘 얘기하는지는 뻔했다. 그래도 최소한의 발뺌은 해볼 생각이었다.


"어머 이제 와 모르는 척하는 거에요? 안타깝게도 그건 불가능해요. 제 휴대폰에 증거가 남아 있거든요."


자랑스럽다는 듯 휴대폰을 내밀면서 능글맞게 웃는 그 모습이 흡사 사람 간 빼먹는 사악한 구미호를 연상시켰다. 어찌나 섬뜩한지 술을 여섯 잔이나 마셨는데 그 말 듣고 취기가 단번에 싹 가셨다. 세상에 이런 훌륭한 해장'담'이 있다니. 놀랄 노 자이기도 하지.


"대체 나한테 왜 그러니..."


이 애에게 언제 나쁜 짓이라도 했던가? 만약 그랬다면 그건 김유성 인생 최악의 실수이리라.


"건 됐고, 술 달라니까요."


그쯤 되니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친구들 다 보는 앞에서 반쯤 마신 술병 집어들어 여고생이 든 잔에 따라주니 '저 놈 저거 취해서 돌아버렸나.' 따위의 시선이 돌아오는 건 당연한 처사였다.
지윤은 술이 든 잔에 혀만 낼름 빼서 살짝 핥더니, 오만상을 다 구기며 불평했다.


"어우 써. 이런 걸 대체 왜 마셔요? 아저씨 혹시 밤중에 목마를 때마다 냉장고에 꽁쳐뒀던 양잿물 마시고 그래요?"
"것 봐. 못 마시겠으면 이리 줘. 그건 어른 돼서 마셔야 맛있는 거야."


그러자 지윤은 뾰루퉁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이내 잔에 든 술을 단번에 원샷해버렸다. 일반 소주잔도 아니고 무려 물컵인데. 아버지가 러시아인인 혼혈도 저렇게는 못 한다. 오기도 정도가 있지.


"와아..."
"저... 저거 미친 거 아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친구들도 새삼 감탄했을 정도였다. 나름 주량 꽤 되는 녀석들인데도 말이다.


"크아. 봐요. 나도 이럼 어른인... 우웩."


마신 만큼 곧바로 토해내는 게 이건 뭐 거의 착즙기인가 했다. 불판 위에 하얀 게 후두둑 떨어지는데 다행히 고기는 몇 점 안 남아 있어 아쉽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사장님이 곧바로 달려오더니 사태를 파악하곤 미쳤다고 애한테 술을 먹이냐고 큰소리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행히 지윤 쪽에서 '내가 달라고 했어요' 라고 말해서 어찌저찌 넘어갔지만, 아니라면 정말로 경찰서 구경 할 뻔한 유성이었다.

 

 

그후에도 이런 저런 일들이 꽤 많았다. 아니 많은 수준이 아니라 거의 매일같이 벌어졌다. 유성은 최근에는 지윤과 마주칠까 두려워 고깃집도 잘 안 가게 되었다. 다른 곳을 가면 되지 않느냐 할 텐데 그건 또 왜인지 내키지가 않았다.


그렇게 얄미운 미소를 곧잘 지을 줄 아는 여고생을 안 만나게 된지도 꽤 되었을 무렵, 으슥한 밤에 산책 겸 담배나 피려고 공원에 들린 유성은 모래사장에 쭈그려 앉아 불을 붙이다가 문뜩 이쪽으로 다가오는 그림자를 보고는 고개를 들었다.


익숙하고, 두려운 얼굴이다.


"우와. 여기서 또 만나네요."


컥. 얼마나 놀랐는지 뒤로 자빠진 것도 모자라 떨어트린 담배에 발까지 데였다. 아뜨뜨. 몸부림 치고 있으니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는지 풋하고 웃음을 터트리는 지윤이었다.


"아저씬 왤케 볼 때마다 애도 안 할 실수를 하세요?"
"애 만큼도 못 돼서 미안하구나..."


유성은 바지에 붙은 모래를 털면서 일어났다. 그 즈음에, 지윤의 시선이 어느 한쪽에 쏠려있단 걸 깨닫고 그곳으로 고개를 내린다. 그건 자신의 손. 손에 들린 담배갑. 담배갑 안에 들어있는!


"자자자자자자자잠깐. 이건 안 돼. 진짜로. 술은 괜찮아도 진짜 담배는 안 되거든? 게다가 나 돗대야. 돗대가 뭘 뜻하는지 모를까봐 말해 주자면 내가 보물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한 개비란 얘기거든? 그래서..."
"달라고 안 해요. 왜 혼자 호들갑을 떨고 그러세요?"
"그, 그럼 다행이구나."


뻘쭘해져 괜스레 헛기침을 하는 유성이었다.


"그보다 이런 시간에 공원엔 웬 일이니?"


벌써 12시다. 오후 12시가 아니라 오전 12시다. 그러니까 새벽 0시란 얘기다. 원래라면 착한 아이는 꿈나라에서 쎄쎄쎄 하고 있어야 할 시간이다. 저 애가 결코 착한 아이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악마든 천사든 자는 시간대는 비슷비슷 할 거 아냐?


게다가 옷차림을 보면 아무거나 막 집어들어 입고 나온 것 같다. 세상에 네파 점퍼에 미니스커트라니, 앙드레김조차 살아생전 저런 패션은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냥요."


얼굴에 살짝이지만 그늘이 진다. 지윤은 근처 그네로 가 앉더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한참을 발을 동동거리며 가만히 있다가, 문뜩 유성을 향해 돌아 보더니 물었다.


"아저씨 있잖아요, 전에 그거 그냥 한 번 해볼래요?"


정말로 뜬금없는 말이었다.


"그거라니?"
"모텔서 그만뒀던 그거요. 저희 솔직히 최근에 좀 친해졌잖아요. 이젠 할 맘 생겼지 않나 해서요."
"무, 무슨 소리를 하는거람. 너 정말 정숙하지 못하구나?"


모르는 사람이 지문으로 대사를 읽으면 어느 쪽이 여자고 어느 쪽이 남자인지 헷갈려 할 만한 대화 흐름이었다.


"...정말로 안 해줄 거에요?"


평소라면 시무룩해 하거나, 토라지는 정도로 끝났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의 지윤은 어째선지 좀 더 무거워 보였다.


"뭐 걱정거리라도 있니?"


그걸 알아차리고 묻자 지윤은 살짝 어깨를 떨더니, 이내 차분함을 되찾고 말했다.


"저번에 저한테 말했었잖아요. 청춘이니 뭐니 하면서... 전 잘 모르겠어요. 그 청춘이라는 걸. 아저씬 혹시 알아요? 청춘이란 게 대체 뭔지."
"추상적 의미까진 잘 모르겠지만... 한 마디로 젊음이 아닐까?"
"젊음... 겨우 그뿐이라면 대체 왜 사람들은 청춘을 만끽해야 된다느니 청춘은 핑크빛이라느니 그런 소릴 하는 거죠? 아저씨, 전 있죠. 청춘은 결코 화려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즐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제게 있어서 그건 고통이에요."


청춘. 고통. 이 둘 만큼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합도 없을 것이다. 누구나 청춘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런 단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풋풋한 시절의 그 내음을 떠올린다. 때론 꿈과 같은 환상이기도 하고, 때론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불타오르는 열정이 살아 숨쉬는 그런 모습으로... 언제나 청춘은 그런 형태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녀는 아니다.


"있잖아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제가 어리다는 게 싫었어요. 다른 애들도 물론 그랬겠지만요. 저희 부모님은 사이가 좋지 않거든요."
"가게에선 엄청 화목해 보이던데?"
"남들 앞이니까요. 제 부모님은 남들 눈치 엄청 살피거든요. 그리고 또... 제 교육에 대해서도 무척이나 신경써요. 그래서 제 앞에서도 잘 안 싸우죠. 그런데 제가 없으면ㅡ없는 것 같으면ㅡ엄청 싸워요. 때론 바깥까지 들릴 때도 있고, 그것 때문에 한 번은 티비가 망가져서 새로 사야 됐던 적도 있어요. 정말 심해요. 근데 왜 싸우는지 아세요? 거의 다 저 때문이에요. 제 학원비도 그렇고, 가게 운영비도 그렇고. 돈이 꽤 많이 나가거든요. 어느 땐 적자가 나기도 하니까 무척 힘든가봐요. 그러다 보니 골이 깊어져서 서로 말다툼하다가 그게 싸움으로까지 번지는 거죠. 제가 돈을 벌 수만 있었다면, 뭔가 공부 말고 다른 일을 할 수 있었다면 부모님도 싸우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전 아직 어려요. 흔히 말하는 '청춘'이죠. 그래서 아무도 제게 일을 시키려고 하지 않아요. 부모님도, 다른 어른들도. 가서 공부나 하라고 하죠. 공부 다 하면 쉬엄쉬엄 놀고 그러라고 하죠. 하지만 그럼 돈이 나오나요? 가계가 나아지나요?"


지윤은 탄식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청춘은... 무책임해요. 축제 땐 열심히 놀았으면서 뒷처리는 나몰라라 하는 거잖아요. 전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되도록이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나랑 하고 싶다고 한 거였구나. 어른끼리의 그걸... 어흠... '관계'를 맺으면 분명 남들도 너를 어른으로 봐줄 거라 생각하고."


지윤은 말없이 입술만 삐쭉 세웠다. 귀여운 부정이었다. 다만 동시에 긍정이기도 했다. 그녀 나름대로 최선의 시위를 한 것이다. 자존심을 살리면서 동시에 오기도 부리고 동시에 살짝이지만 인정까지 하는. 정말 어쩔 도리가 없는 성격이다. 그래서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하지만... 서두르는 건 좋지 않아. 지윤이 넌 청춘이 아프다고 했는데 사실 다 그래. 아프지 않은 청춘은 없어. 언제나 새 살이 돋을 땐 그 만큼의 고통이 따르니까."


어렸을 때 자주 담임 선생님이 자주 하던 말이다. 솔개는 새 삶을 얻기 위해서 바위를 쪼아 부리를 깨고, 그 뒤 발톱과 깃털까지 모두 뽑아버린 뒤 새 것을 얻는다고. 그런 고통을 견뎌내고 나서야 비로소 새 것이 찾아온다고.


"나는 청춘이 그런 거라고 생각해... 청춘은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이 아닐까 하고. 누군가는 만끽하고 누군가는 조용히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힘들어 하면서. 이건 어디까지나 방법의 차이가 아닐까? 모두 같은 청춘을 누리고 있지만 그 과정이 다른 이유는, 거기에 각자만의 방법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


그러자 지윤은 피식 웃음을 터트린다.


"아저씨다운 발상이네요."
"으응?"
"하지만 그건 좀 부조리한걸요. 그래서야, 즐기는 사람이 최고니까요.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 그런가..."


지윤은 그네에서 튀어오르듯 내려 일어서더니 유성을 향해 돌아봤다.


"하지만 아예 일리가 없진 않네요. 사실 알고는 있었어요. 서둘러 봤자 아직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쯤은요. 단지 조바심이 들어서... 사실 지금 공원에 온 것도 부모님이 밤새 말다툼을 해서였거든요. 그럴 때마다 제가 너무 약하게 느껴지는 거 있죠. 그런데 때마침 아저씨를 만나서 무심코 푸념을 하게 됐네요."
"난 괜찮아. 말상대가 되어주는 것 정도야 뭐 얼마든지 해줄 수 있는걸."
"그럴 줄 알았어요."


그녀의 표정은 한결 개운해진 느낌이었다. 그늘은 싹 가셨고, 대신에 가벼운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 미소를 보자 안심이 되었다.
그게 가장 지윤이 답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응."

 

 

그날 밤 공원에서의 일 이후, 사흘 정도가 더 지나고서 유성은 이른 아침 커피나 마실겸 번화가 근처 카페로 향하다가 우연히 지윤과 마주쳤다.


교복을 입은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청춘'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녀 답다고 할까, 겨우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다. 아니 원래부터 제자리였겠지만.


"머리스타일 바꿨네?"


유성이 알아보자 지윤은 뭐가 그리 기쁜지 생글생글 웃더니 말했다.


"변화 좀 줘보고 싶었거든요. 원랜 생머리로 다녔는데, 그래서 이번엔 양갈래로 묶어 봤어요. 어때요? 당연 어울리죠?"
"언제나 그랬지만, 대답을 강제시하는구나..."
"어차피 할 말은 뻔한데요 뭐. 아 참, 그리고 저 저만의 청춘을 극복하는 방법 찾았어요. "
"음 그래? 뭔데?"
"로맨스요. 누구 하나 마음에 드는 사람 붙잡아서 사귈까 하고요. 그럼 시간도 금방 지나갈 테니까요."
"...너 정말 거침없구나. 진짜로."
"그게 또 제 장점이죠! 그래서 말인데요..."


뜬금없이 손을 내미는 지윤.
유성은 떨떠름해 하며 그것을 붙잡는다.


"악수하자고?"
"아뇨."
"그럼?"
"두서 없지만 이제부터 잘 부탁해요."
"어엉..?"


지윤은 상황파악이 안 돼 벙쪄있는 유성의 어깨를 툭 건드리면서 지나치더니 이내 몇 걸음 거리를 사이에 두고 돌아서서 그를 향해 말했다.


"참, 폰번 저장해 뒀어요! 있다 봐요."


손가락을 총 모양으로 만들어, 탕 하고 그를 향해 쏜다.




Lv0 나나나나난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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