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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제주4.3사건에 대한 왜곡

이프리티스
댓글: 1 개
조회: 628
2018-04-06 14:47:42
4.3 사건에 대하여 공산주의 사상을 제주 주민이 편들어서 학살이 일어났다는 식으로 이야기 자체가 상당히 왜곡되어 퍼지는 것 같은데, 실제 4.3사건의 경위는 주민들이 공산주의 사상을 믿어서 생긴 일이 아니지.


47년 3.1절 단정 반대를 한 사회주의 시위는 충돌없이 무사히 마쳤음.
시위를 구경하던 아이가 기마경찰의 말에 밟혀 그것을 보고 구경하던 사람들이 돌을 던졌고, 경찰이 경찰서를 습격한다고 생각해서 발포를 했고 6명 사망

이걸로 제주도 내에 좌 우 관 민 할것없이 모두 과잉진압에 대하여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관민 총파업을 했고, 60여명의 경찰들도 동조파업을 했음.
결국 이 총파업을 진압하면서 제주도 경찰들을 내륙경찰과 서북청년단으로 교체.

총파업으로 검거된 사람들 고문당하고, 이승만과 미군정쪽에서 제주도 도민들을 공산당으로 몰아가기를 시작함.
특히 서북청년단은 재산 강탈, 강간 등의 범죄를 계속 저질렀고, 거기에 총파업으로 걸린 사람들이 고문으로 한두명씩 죽어나가자 폭발하기 직전의 상황이었음.

그 상황을 이용해 제주도 남로당에서 단독적으로 경찰 습격계획을 세움. 이게 48년 4월 3일.
300명의 무장대가 서북청년단 경찰등을 습격했고, 이후 군경과 대치를 함.

미군정 측의 요청으로 김익렬 연대장이 남로당과 협상을 해서 귀순자들의 신변보장과 점진적 무장해제를 합의함.
그런데 이 협상 시간이 끝나갈 무렵, 마을주민이 총으로 죽고 방화가 일어나는 사건이 터지고, 귀순자들 안에 경찰의 프락치가 군에 총격을 하는 등의 사건으로 합의가 깨져버려.
물론 마을주민이 죽고 방화가 일어난 사건도 경찰이 합의를 물건너가게 만들려고 일으킨 사건.

이후 협상은 물건너가고 내륙에서 온 조병옥 등의 군인도 강경한 진압을 원하고, 미 군정 역시 새로온 사령관으로 강경한 진압을 원했음. 항의한 김익렬 연대장은 직위 해제가 됨. 김익렬의 후임은 박진경.

5.10 총선거는 남로당의 투표소를 불태우거나 주민들을 산에 억류하는 등의 방해로 제주도에서는 3곳중 1곳 밖에 이루어지지 못했고, 이에 박진경은 일반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체포하여, 이에 반감을 가진 주민들이 무장단으로 합류하게 됨.

박진경은 6월에 부하들에게 피살당했는데, 제주도민 30만을 학살시키는게 옳다라는 의견을 피력하다 피살당했음.
후임은 송요찬. 

송요찬은 10월 17일 해안가 5km 내 거주를 하지 않으면 모조리 반군으로 지정하였고, 내륙 주민들이 빠져나오길 기다리지 않고 선포 하루만에 내륙주민을 반군화 시켰음.
11월 17일 이승만은 계엄령을 내려 초토화작전을 실행했고, 내륙에 사는 주민들을 학살 시작함. 

49년 2월까지 2만5000명으로 추산되는 주민이 학살당했음. 이 학살은 대부분 군경 서북청년단에 의해 일어났고, 무장대에 의한 학살도 있었음.
3월 유재흥이 부임하면서 초토화 작전을 중지하고, 회유를 시작하면서 학살이 일단락.

Lv79 이프리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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