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조선은 세계사적으로 독특한 노비제를 운용한 나라입니다. 동족을 19세기까지 노비로 세습시켰다는 점 때문입니다.
이것은 전쟁 포로나 다른 민족을 노예로 삼았던 사례와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또, 15세기 이전에 노비가 사라진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해도 유별난 사례입니다. 물론 다른 민족을 노비로 두면 이보다 낫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높은 문명 수준을 자랑]하던 조선이 현대를 목전에 둔 19세기까지 이런 제도를 유지했다는 점은 분명 의외의 대목입니다.
중국이나 일본 같은 경우도 노비가 있긴 했습니다만 중국의 경우엔 송나라 때 법으로 철폐됐고, 일본도 전국시대를 거치며 사실상 사라지게 됩니다. 물론 이후에도 노비가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채무 관계라든지 경제적 형편으로 인해 벌어지는 사적인 영역에 속했고, 국가 차원에서 노비제에 적극 개입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몽골 간섭기엔 고려 정계의 실력자였던 활리길사(闊里吉思, 고르기스)라는 몽골 관리가 노비제 철폐를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세계 제국을 다스리던 몽골의 입장에서 볼 때 고려의 노비제는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런데 이것을 막아선 것은 충렬왕입니다. 충렬왕은 “이것은 조상 대대로의 풍속입니다. 천한 무리가 양인이 되도록 허락한다면 나라를 어지럽게 하여 사직이 위태롭게 됩니다. 쿠빌라이칸은 고려의 풍속을 존중해주기로 했으니 이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호소해 결국 무산됐습니다.이후 순조 1년인 1801년엔 공노비가 해방됐고, 1886년엔 노비세습제(갑신정변의 산물로 일본의 개입)가, 1894년엔 갑오경장(일본의 개입)으로 노비제도가 폐지되면서 공식적으로 노비제가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후에도 노비제의 유산(조선인들답게 여전히 몰래몰래 노예제 유지함. 가장 유명한 것이 1930년대 김유정의 소설 '봄'에 나오는 점순이 감자 생각하면 됨)이 어느 정도는 남아있었습니다.
조선에서 유난히 노비 숫자가 증가하고, 또 양반 관료들이 이를 결사적으로 막았던 것은 고려말부터 증가했던 대규모 농장을 유지하는데 노비의 노동력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퇴계 이황의 경우만 해도 자녀들에게 약 36만평 가량의 농토를 남긴 지방 지주였습니다.
다른 민족인 일본인, 몽골인들이 조선의 신분제가 매우 잔인하다면서 폐지하자고 주장하지만 조선의 양반과 고려의 충렬왕의 거센 반발로 무산됨.
역사내내 조선인의 적은 조선인이었다.
조선은 망해야 하는 나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