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소녀전선'이 국내 서비스를 시작했을 때 지금 같은 위상을 가지리라고 예상하긴 어려웠을 겁니다. 동인팀에서 시작한 소규모 게임회사에서 처음 본격적으로 만든 모바일 게임에 하는 사람이 한정되어있는 서브컬쳐 게임, 그 중에서도 마이너한 부류인 모에화 게임이었기 때문이죠.
서비스 시작하기 한 달 전이었나, 구글 광고에서 G36의 이미지를 보고 냅다 들어가서 UID 번호를 1616번을 배정받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사전예약 20만을 넘기는 했지만, 어지간한 모바일 게임이 그 정도 사전예약 인원은 모으고 있는 걸 생각해보면 그리 크게 눈에 들어올 수치는 아니었죠.
그렇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소녀전선'은 국내 서브컬쳐 유저의 갈증을 풀어주기엔 충분한 게임이었습니다. 사실 서브컬쳐 게임하면 세간에는 로맨스나 밝은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 범주는 굉장히 다양합니다. 서브컬쳐라는 말 자체가 하위 문화라는 뜻인데, 이 하위 문화라는 것이 단순히 어느 한 장르의 하위라는 의미는 아니거든요.
때로는 하드코어하거나 비장한 서사, 혹은 심각한 담론이 담긴 장르의 서브층에 자리잡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일부 이해가 안 가긴 하겠지만, 서브컬쳐 유저들은 밀리터리나 택티컬에 관한 관심도 지대합니다. 그 관심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소재, 그리고 테마들도 서브컬쳐에서 주로 다루는 관심 품목이기도 하죠.
실제로 플레이 해온 '소녀전선'은 그 테마를 여러 가지로 잘 녹여낸 작품이었습니다. 아포칼립스에 가까운 절망적인 세계관에, 압도적인 강적을 눈앞에 두고 처절하게 부딪혀가는 지휘관과 전술인형의 이야기는 이벤트를 거칠 때마다 "과연 다음엔 어떤 이야기가 이어지게 될까"라는 생각이 들게끔 했죠. 초반부터 주연급 캐릭터들이 퇴장하는 등, 다소 충격적인 전개가 있기도 했고요. 모에화 요소도 전술인형에 부여된 코드 네임이라는 식으로 어느 정도 납득이 가게 설정하면서 심리적인 장벽도 낮췄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소녀전선'의 그 분위기를 느꼈던 것은 아마 로비 화면에서부터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Day 1, 그 특유의 느릿하면서도 다소 엇박으로 이어지는 이펙트 음의 불협화음은 뭔가 좀 무거운 이야기가 전개되겠구나, 하는 전조처럼 느껴졌죠. 숙소의 배경음에선 다소 긴장이 풀어지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들었을 때 무겁거나 긴박한 느낌이 드는, 그런 부류의 사운드가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듣기 좋다, 게임에 어울린다 이런 정도의 음악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사운드의 퀄리티도 급상승했습니다. 특히나 1부 마지막인 '특이점' 이벤트에서는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죠. 작품 전체의 테마를 관통하는 비장미가 엿보이는 'What Am I Fighting For', 소린이인 탓에 그 크레딧까지 가는 데 꽤 고난을 겪은 터라 그 곡의 가사들이 가슴 구석구석까지 스며들더라고요.
그런 곡들이 오케스트라로 편곡됐다는 사실에 기대가 되면서도, 가슴 한 편으로는 조금 불안했습니다. 과연 이 음악들이 관현악과 어울릴까? 싶었거든요. 제 짧은 음악적 소견으로는 대체가 불가능한 이펙트 음도 여럿 섞여있는데, 그걸 어떤 식으로 살릴지 기대 반 불안 반으로 공연에 임했습니다.
공연 곡의 구성을 보면, 1부에서는 전장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곡들 위주로 편성이 되었습니다. 난류연속 이벤트의 OST인 New Dawn부터 시작해서 저체온증, 큐브 작전, 심층투영, 특이점의 전장 OST들이 공연되었죠. 낮게 깔린 저음과 긴박한 비트가 인상적인 곡들이 많았는데, 비트패드의 음은 다양한 타악기로 소화하면서 그 전자음의 저음을 첼로, 콘트라베이스로 완벽에 가깝게 대체하는 모습을 보면서 일견 감탄이 나왔습니다. 바이올린과 현악기로 자아낸 곡의 멜로디 라인을 들으면서도 "이렇게 해석할 수 있구나"라는 감탄이 절로 새어나왔죠.
흔히 말하는 소린이 입장에서 1부 공연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떠올리기 어려울 정도로 가쁘게 지나갔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BGM과 뒤에 비치는 스크린을 보고서 그간 힘겹게 이벤트들을 클리어했던 기억들이 다시금 떠올랐기 때문이죠.
저체온증에서 흔히 말하는 '지옥런'을 뒤늦게 접해서 군수 돌리던 FNC를 부랴부랴 장비 다 챙겨주고 돌리다가 죄책감 들어서 '천국런' 도전했다가 실패했던 일, 심층투영에서 빨콩(골리앗 플러스)에 멋도 모르고 들이박았던 일들이 스쳐지나갔습니다. 큐브 작전에서는 그렇게나 우로보로스를 쥐어짜냈지만 결국 '파없찐'으로 남았던, 조금 가슴 아팠던 일도 떠올랐고요.
전자음 위주인 원곡을 오케스트라에 맞게 편곡한 만큼 다소 다르게 느껴지긴 했지만, 스크린에 비친 영상과 음을 듣다 보면 "아, 이게 그때 그 음악이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유저의 경험과 일체화되어서 기억에 남는다는 게임 음악의 또 다른 특징을 몸소 느낄 수 있었죠.
2부에서는 그와 달리 지휘관의 일상이 느껴지는 곡들 위주로 편성이 되었습니다. '소녀전선'은 어쨌든 서브컬쳐 게임인 만큼, 그런 게임들이 갖고 있는 콘텐츠(서약, 숙소 등)를 갖고 있긴 했으니까요. 그러면서 잠시 이완한 뒤, 마지막은 특이점의 긴박함이 느껴지는 OST, 'Suite for Singularity'와 우리말 테마곡 'Frontline'으로 장식했습니다.
1부 약 한 시간, 2부 약 45분 가량 이어진 이번 공연은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나 모를 정도로 훌륭한 구성이었습니다. 물론 아쉬운 점이 없던 건 아닙니다. 1부 공연 초반까지는 스크린과 음악이 매치가 되면서 유저의 추억이 새록새록 돋아났지만, 점차 비슷비슷한 영상이 나오면서 오히려 영상이 음악 감상을 저해한다는 느낌이 들었죠. Kar-98k은 아이콘에도 나올 정도로 마스코트 캐릭터이긴 하지만, 어쨌든 스토리에서 거의 모습을 드러내질 않다보니 그와 연관이 된 곡에서 나올 땐 "왜 자꾸 나오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특히 각 부 마지막을 장식한 보컬곡은 아쉬웠습니다. 단순히 보컬이 직접 부르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라, 그 곡 특성상 완벽히 오케스트라 100%로 소화할 수 없었기 때문에 MR을 썼는데 그 음이 다소 튀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특히나 'What Am I Fighting For' 공연 중에 유달리 베이스음이 퉁퉁 강하게 튀는 현상이 있었습니다. 'Frontline'에 들어서는 다소 나아지긴 했지만, 커튼콜인 만큼 보컬을 모셔오는 것은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고요.
물론 이 두 곡, 'What Am I Fighting For'과 'Frontline'은 공연에서 빠질 수 없는 곡입니다. '소녀전선'의 테마를 관통하는 곡이기도 하면서, 유저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곡이었으니까요. 심포니 오케스트라로 편곡하고, 이를 연주한 악단의 퍼포먼스는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부족했던 부분이 다소 아쉽게 느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렇듯 아쉬운 점이 없던 건 아니지만, 팬서비스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번 '인형과 피안화' 공연은 종합 선물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게임 오케스트라라는 영역을 한 층 더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간 국내에서 열린 게임 오케스트라를 살펴보면 다수가 판타지풍의 게임을 소재로 했습니다. 즉 관현악 연주와 크게 동떨어지지 않은 분위기의 게임 음악들이 다수였죠. 물론 녹음 당시에 직접 오케스트라로 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보니 편곡을 거쳐야 하지만, 악곡의 형식이나 음색 자체가 완전히 동떨어지지 않은 곡들도 많다보니 비교적 편곡이 쉬운 편입니다. 게임의 분위기 자체도 오케스트라와 어울리다보니, 유저들이 낯설게 느낄 가능성도 적고요.
'소녀전선'은 그와 달리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게임의 분위기 자체도 흔히 생각하는 오케스트라의 웅장함이나 화려함과는 다소 거리가 먼 게임입니다. 음악 자체도 '오케스트라로 이게 될까?' 싶은 곡들이 많았고요. 그 중 일부를 선정해서 편곡한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오케스트라로 훌륭하게 편곡하고 연주해낸 이번 공연을 보면서 또 다른 게임 오케스트라 공연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번 공연에서는 '이성질체' 부분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블레스4의 아키노가 부른 '자작나무의 빛'을 비롯해, 지휘관과 전술인형이 각종 고난을 겪으면서 뚫고 지나온 스테이지의 BGM들이 남아있다는 것이죠. 앞으로 '소녀전선'이 계속 서비스되면서 이러한 역경과, 그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OST들도 꾸준히 나올 것이고요. 이 다음 공연은 '소녀전선'이 여태 걸어온 행보처럼 이전의 다소 아쉬웠던 점을 개선해서, 더욱 더 완벽하게 다가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