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이 게임도 '보드'로 있다고?

기획기사 | 정재훈 기자 | 댓글: 19개 |
한 번쯤 제대로 파 보고는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같이 할 사람을 구해야 하고, 같이 할 장소가 필요하고, 넉넉히 서너 시간 정도는 투자해야 하며, 제대로 즐기려면 어느정도 공부도 해야 한다. '보드 게임'이 그렇다. 재미있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고, 슥 훑어 봐도 재미있다는 건 알겠는데 할 만한 상황이 안 나온다.

그래도 나름 시도는 해 봤다. 이전에야 보드게임을 제대로 하는 이들이 워낙 적으니 사람 수배부터가 문제였는데, 게임밖에 모르는 사람들과 수 년을 함께하다 보니 같이 보드 게임 할 사람 정도 찾는것 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장소도 별 문제 없겠다. 중요한 건, '어떤 게임을 하느냐?'다.



▲ 무려 8년 전 취재에서 처음 느낀 보드 게임의 세계

문제는, 우리 모두 비디오 게임에는 도가 텄지만 보드 게임에는 문외한이라는 것이다. 부루마블 이후로 주사위는 만져본 적도 없는 사람들인데, 의기투합 해봐야 무슨 답이 나오겠나? 워해머 같은 테이블탑 게임을 진득하게 플레이하는 망상은 해 봤지만 룰북도 제대로 못 읽는 네 명이 모여봐야 즐기긴 커녕 장님 코끼리 만지기나 다를 바 없을 터였다.

그래서, 아예 선정 방식을 바꿔 버렸다. 예로부터 잘 모르는 분야에 도전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최대한 쉬운 방법으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든 흥미를 지닐 요소를 찾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뭐가 쉽고 어려운지조차 모르는 상초보들. 결국 '흥미'에 기대야 하는데, 우리의 공통점은 비디오 게임 아니겠나? 그렇게 어떻게든 비디오 게임들과 엮인 보드 게임을 찾기 시작했는데, 어라? 생각보다 익숙한 IP가 굉장히 많다.

그렇게 찾아 놓고 보니, 이렇게 좋은 기사 소재가 없다. 비디오 게이머라면 이름만 들어도 아는 게임들이 이미 '보드 게임'으로 출시되었을 줄이야. 게임 정하는 건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몰래 리스트를 정리했다. 우리처럼 보드 게임 한 번 해 보고는 싶은데, 뭘 해야 할지 모를 비디오 게이머들에게 최대한 익숙할 만한 게임들이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 말이다.


스타크래프트 - 국내 정식 발매




어린 시절 그 시대 유행 따라 부모님의 권유를 못 이겨 2주 간 지리산 청학동에 간 적이 있었다. 당시 청학동에 모인 100여명의 꼬맹이들은 대부분 나와 비슷한 또래였고, 막 스타크래프트를 시작했던 아이들이다 보니 컴퓨터가 없는 청학동은 창살없는 감옥이나 마찬가지. 그런 꼬맹이들에게 기댈 거라곤 종이와 연필 뿐이었다.

군시절 군납 속옷의 속 포장지로 화투패를 만든 건 아마 이 때의 기억 때문일 거다. 칸으로 나눠진 연습장에 그린 건물과 유닛들. 처음엔 조잡하기 이를데 없었지만, 일주일이 지나자 나름 룰이 잡히면서 할 만한 게임이 되었다. 그 시절 이 게임이 있었다면 아마 지우개 똥으로 산을 쌓을 일은 없었을 텐데.

국내에 정식 수입된 스타크래프트는 딱 컴퓨터 없이 즐기는 스타크래프트다. 무려 50페이지에 달하는 룰북을 숙지해야 하고, 한 판이 서너시간 가까이 이어진다는 건 단점이지만, 수백 APM은 꿈도 못 꾸는 로지컬 플레이어들에게 어쩌면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다.

PC판과는 달리 전장의 구성이 행성 하나가 아닌 행성계라는 것도 재미있는 포인트. 결국 뜯어보면 본진과 멀티가 각 행성으로 표현된 수준이지만,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이라는 장르에 가려진 스타크래프트의 매력 포인트인 스페이스 오페라를 즐길 수 있다.






갓 오브 워 - 국내 정식 발매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두 눈을 꿈뻑이며 '실환가?'했던 타이틀. 카드고 나발이고 도끼로 죄다 찍어버리며 가는 게임 시스템 상 이게 보드 게임으로 가당키나 한가 싶지만, 의외로 짜임새 있게 잘 만들어졌다. 원작 주인공인 크레토스와 아트레우스 외에도 미미르, 프레이야, 그리고 브록과 신드리까지 총 여섯 명의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등장하며, 동시 플레이 인원은 네 명.

이 게임이 특히 재미있는 건, 게임 속 주요 장면들이 각 퀘스트 장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퀘스트 종류에 따라 카드 배치 시 게임 속 주요 장면이 딱 만들어지는데, 알프하임부터 흐레즐리어 전투, 그리고 발두르와의 싸움까지 총 10개의 장면들이 준비되어 있다. 비디오 게임 IP를 활용한 보드게임 중 대부분은 원작을 몰라도 상관 없지만, 이 게임의 경우 원작을 플레이해봤다면 훨씬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는 것이 포인트.

무엇보다, 모든 기물들과 비품이 카드로 구성되어 있고 미니어쳐가 따로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볼품은 없지만 그만큼 가격이 싸다. 비싸게는 10만 원을 넘어서는 보드 게임들 사이에서 정가로 5만 원 선을 유지하고 있는 꽤 착한 가격대의 작품. 볼품 없다는 것도 대단한 미니어쳐 기반 게임들 대비 그럴 뿐, 카드 게임 치고는 부피감이 꽤 있는 편이라 게이머 그룹 모임이라면 접대용으로 손색이 없다. 물론 손님이 없어도 괜찮다. 1인 플레이가 되는 게임이니까...










역시나 '이왜진?'이란 문구가 떠오르는 보드 게임. 보드게임에도 여러 장르가 있지만, 둠 보드 게임은 그 중에서도 '디센트'와 '스타워즈: 임페리얼 어썰트'를 잇는 전선 돌파형 보드 게임이다. 총 플레이 인원은 5명. 마치 '데바데'나 '이볼브'처럼 네 명이 둠가이를 맡고, 다른 한 명이 악마 진영을 맡아 플레이한다.(둠가이가 한명이어야 하는거 아닌가?)

여튼, 게임의 목적은 간단하다. 몬스터들이 지닌 목표 아이템을 전부 탈취하면 둠가이의 승리요, 반대로 둠가이를 일정 횟수 이상 처치하면 몬스터의 승리. 임프부터 사이버데몬까지 원작에 등장하는 여러 몬스터들은 물론이고 글로리킬까지 넣어 둔 세심함에 친절한 커뮤니케이션 도우미인 전기톱까지 모두 등장한다.

보드 게임 치곤 진행 속도가 빠르기에 나름 원작의 속도감이 난다. 그럼에도 2016년판 리메이크 둠의 컨셉을 이어가긴 하지만, 해당 게임이 보드 게임과는 추구하는 재미에서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게임이다 보니, 원작의 심장떨림과 몰입을 느끼긴 힘들다는 게 조금은 아쉬운 부분. 게다가 한국어 정식 발매가 이뤄지지 않아 직접 한글화를 해야 한다.






디스 워 오브 마인 - 국내 정식 발매




보드 게임으로 만들만 한 비디오 게임이 뭐가 있을까? 했을 때 첫 번째로 생각나던 게임. 컴퓨터로 플레이할 때도 내내 생각을 거듭하게 만든 게임이다 보니 보드 게임으로 만들어져도 좋을 거라 생각했는데, 마침 있었다. 최대 여섯 명까지 플레이 가능한 이 게임의 특징은 컴퓨터 버전보다 더 암울한 생존 게임이라는 것.

원작의 매력 포인트인 '매 판이 다른 이야기가 된다'라는 점은 보드 게임에도 충분할 정도로 녹아 있다. 게임에 첨부된 스크립트북에는 1,900가지 이상의 이벤트가 기록되어 있으며, 게임은 의도적으로 이 사건들이 중복되어 일어나지 않게끔 설계되었기 때문에 보드 게임임에도 매 판 다른 이야기를 경험하게 된다. 서사 위주의 게임을 원하는 이들에겐 흡족할 만한 부분.

게다가,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 생존 시뮬레이터라는 원작의 요소가 보드 게임에서는 더 극적으로 살아난다. 게임 진행에서 발생하는 여러 상황에 대해 플레이어들은 토론을 하게 되지만, 결정권을 지닌 플레이어는 별도로 존재한다. 독단을 내릴 수도, 협의의 중재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 원작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인지 '세이브&로드' 시스템이 있다는 것도 흥미로운 점. 정식 발매가 되지 않았다면 언어의 압박 때문에 추천할 수 없었겠지만, 다행히 번역이 이뤄졌다.






레지던트 이블2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좀비 아포칼립스 IP중 하나인 레지던트 이블(바이오 하자드)를 기반으로 하는 게임. 그 중에서도 가장 명작으로 꼽히는 2편을 보드게임으로 각색한 것이 본 작품이다. 최대 4인이 참여해 준비된 시나리오 중 하나를 선택해 엄브렐라 사의 비밀을 파헤쳐 가는게 게임의 주된 스토리이다.

게임은 원작의 많은 부분을 따라간다. 다잉 라이트나 레프트4데드같이 좀비를 갈아버리는 게임이 아닌, 한 걸음 한 걸음을 신중히 디디고 탄약을 아껴가며 플레이하는 게임성을 보여주는 원작처럼 보드게임 또한 좀비 학살이 아닌 생존과 탐험, 위기 상황 회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 바로 '문' 시스템.

문을 열면 새로운 통로를 개척할 수 있지만, 문 뒤에 어떤 적들이 얼마나 있을지는 알 수가 없다. 공격 시에도 캐릭터와 좀비 사이에 방해물 없이 시야가 확보되어야 하며, 충분한 탄약과 사거리를 고려해야만 공격을 시도할 수 있다. 협동의 경우, 모두가 한 자리에서 시작하지 않고 각자 맵의 다른 부분에서 시작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형태다.

원체 유명한 IP에다가 게임 구성도 짜임새있게 잘 되어 있어 평가는 좋은 편. 다만 아쉬운 건 한국 정식 발매가 이뤄지지 않아 언어 장벽 해소를 위해서는 자체 한글화를 해야 하며, 추가 시나리오는 결국 또 사야 하기 때문에 금액 부담이 만만찮을 수 있다는 것이다.






XCOM




지구상에서 가장 총 못 쏘는 친구들로 구성된 특수부대로 지구를 지켜야 하는 악독한 게임의 보드 게임 버전. 원래부터가 턴제 게임이었던 만큼 보드 게임의 완성도 또한 당연히 낮지 않다. 원작을 기준으로 설명하면, 게임의 핵심 시스템은 보드 게임에도 모두 녹아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리소스 관리, 요격기 개발 및 UFO 격추, 기술 연구와 병사 임무 할당에 이르기까지 원작에 있는 콘텐츠라면 어떻게든 넣어 두었다는 뜻이다.

무엇보다도 이 게임을 특별하게 만드는 건 '컴패니언 앱'의 존재다. 게임을 플레이할 때 게이머는 무료로 다운로드 가능한 컴패니언 앱을 실행할 수 있는데, 원작에서 등장하는 랜덤 인카운터나 침공 계획이 앱을 통해 정해진다. 웬만한 보드 게임의 모든 변수는 결국 주사위 선에서 결정된다는 걸 생각하면, 게임의 깊이를 끌어올리는 새로운 변수 창출의 매개체가 하나 더 있다는 뜻이다.

또한, 이 앱을 사용하며 플레이할 경우 난이도 조절이 가능하다는 이점도 있다. 원작의 경우도 고난이도에 철인을 켜야 상남자로 인정받긴 했지만, 상남자고 나발이고 스트레스 때문에 게임을 접는 이들이 적지 않았는데, 보드 게임 또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걸 걱정했는지 자체적으로 난이도 설정을 넣어둔 것.

아쉬운 부분이라면, 이 게임 또한 한국에 정식 발매가 이뤄지지 않아 기본 상태로는 영어와 싸워가며 플레이해야 한다. 유저 한국어화 자료는 인터넷 상에 존재하지만, 한국어화 과정은 고생을 좀 해야 한다.






다크 소울




순간의 반응 속도에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게임 주제에 뻔뻔하게 턴제로 만들어진 게임. 조심해야 할 건 턴제라 해도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보드 게임에서도 이름값 하듯, 결코 쉬운 게임이 아니다.

게임은 기본적으로 '다크소울3'를 기반으로 한다. 휴식 시 모든 몬스터가 다시 살아나고 다시 길을 열어야 하는 게임성을 충분히 반영해 게이머들은 모두 화톳불에서 게임을 시작해 진행에 따라 길이 개척되지만, 다시 화톳불로 돌아가면 개척한 길 타일을 모두 떼어내야 하는게 게임의 특징. 정해진 스토리 없이 게임 시작 시 정한 보스를 처치하면 게임을 클리어하게 되며, 보스는 '골짜기의 무희'부터 '용사냥꾼 온슈타인', '기사 아론' 등 다크 소울 시리즈 전반에서 골고루 뽑아 왔다.

게다가 전투 또한 평범하지 않다. 주사위 굴림을 기본으로 룰북에 따른 보정이 들어가는 일반적인 보드 게임과 달리 무작위로 뽑히는 보스의 행동 패턴이 적용되며 일정 수치 이상의 피해를 입히면 페이즈가 바뀌어 새로운 전투 양상이 펼쳐지는 등, 보드 게임이면서도 원작의 전투를 어떻게든 재현하려 한 노력이 보인다.

아쉬운 부분이라면 역시 언어의 장벽이 있다는 점과 다량의 미니어쳐가 포함되다 보니 가격대가 만만치 않고, 추가 에디션이 많아 DLC를 다 못 모으면 병에 걸리는 게이머들은 만만찮은 지출이 필요하다는 것. 지금 당장 온라인에서 판매 중인 기본판만 해도 30만 원에 호가할 정도로 고가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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