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릴 때부터 게임을 사랑해온 변호사입니다. 손은 굳고 눈도 흐려졌지만, 오늘도 normal 난이도로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입니다. 게임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E-mail : gerrardgogo@gmail.com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기업 자문 업무를 수행하다 보니, 다양한 종류의 계약서를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계약서를 검토하다 보면 소송 대리와는 업무의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는 걸 자주 느낍니다. 소송처럼 판결로 옳고 그름이 명확하게 가려지는 게 아니라 당사자의 협상에 따라 내용이 확정된다는 점도 그렇고, 판결은 기본적으로 공개를 원칙으로 하는 반면에 계약은 당사자들이 비밀로 하기를 원한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계약 조건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나중에 다른 계약을 체결할 때 협상력이 떨어질 테니까요.
계약의 이런 특성들 때문에 계약서를 작성하고 검토하는 방법에 대한 일반적인 원칙을 도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정답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책으로 공부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운전이나 자전거처럼 경험을 통해 깨우치는 영역이라고나 할까요.

계약서를 검토하기 위해 찾아오신 기업의 대표나 실무 담당자를 처음 뵈면, 분위기가 대개 비슷합니다. 갑작스럽게 계약을 체결하게 되어 일단 변호사를 찾아오긴 했는데, 과연 이 계약이 자문을 받을 만큼 중요한 사안인지, 또 자문료는 얼마나 나올지 감을 잡지 못해 얼굴에 긴장감이 역력합니다.
이런 경우 분위기도 전환할 겸 ‘어떤 경우에 변호사의 자문을 받는 것이 좋은지’, ‘변호사의 자문을 받는 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같은 이야기부터 꺼내곤 합니다. 당사자들이 궁금해하는 건, 계약서의 구체적인 내용보다 ‘계약서를 검토하는데 변호사의 도움이 왜 필요하고, 어떤 경우에 도움이 필요한지’일 수도 있으니까요.
회의 자리에서 이런 설명을 할 때마다, 어색했던 분위기도 편안해지고 상대방의 눈빛에서 걱정이나 두려움이 사라지는 걸 자주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 얘기를 많은 분들이 보실 수 있도록 글로 정리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번 시리즈는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계약서를 검토하고 싶어 하는 분들께 도움을 드리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하지만 꼭 변호사와 협업을 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계약서를 검토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고 싶은 분들께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계약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을 마친 다음에는 모든 계약서에 공통으로 삽입되는 계약의 주요 조항에 대해서 하나씩 살펴볼 예정이니까요.
일단 이번 시간에는 계약의 체결과 관련해서 어떤 경우에, 어느 시점에 변호사의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지 살펴볼까 합니다.
변호사에게는 어느 시점에 도움을 요청해야 할까?

계약서를 변호사에게 검토받기 위해서는 자문료를 지급해야 합니다. 따라서 자문료 이상의 이익이 기대되는 경우에만 변호사에게 계약서 검토를 맡기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일반적으로 아래와 같은 상황에서는 자문료가 들더라도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우선, 거래 금액이 큰 경우입니다. 기업 규모에 비해 거래 금액이 크다면, 계약에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 회사에 심각한 손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집을 사고 팔 때 수백만 원의 수수료를 주면서 공인중개사의 도움을 받습니다. 집에 특별한 하자가 있거나, 근저당권이 설정되어 있는 등 권리관계가 복잡한 경우가 아니라도 말이죠. 그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집을 사고 파는 건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재산을 거래하는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실무적인 도움은 차치하고, 전문가가 옆에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심리적 위안이 됩니다.
계약 당사자들의 의무가 복잡해서, 당사자가 직접 문서로 정리하기 어려운 경우에도 변호사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앱 개발을 외주로 맡기는 계약에서는 앱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기능이나 인터페이스 등이 미리 구체적으로 정해져야 하고, 동업 계약에서는 각자의 역할과 책임이 명확히 정해져야 하는데, 이런 종류의 계약은 사안마다 구체적인 내용이 너무 달라서 전문가의 도움 없이는 각 당사자의 의무를 정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계약서를 반복해서 읽어봐도 무슨 말인지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는 경우에도 변호사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상환전환우선주 인수처럼 복잡한 계약은 주식회사의 개념과 주식의 종류, 주주총회와 이사회 같은 주식회사의 기관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일반인이 기초적인 개념부터 공부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소요됩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종류의 계약이라도 변호사의 자문이 실질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계약서 검토 요청을 받으면 가장 먼저 두 가지 사항을 확인합니다. 하나는 고객이 지금 이 계약을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인지, 다른 하나는 고객이 계약 조건을 수정하자고 하면 상대방이 그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는지 여부입니다.

만약, 당신이 게임 회사를 차렸는데, 계획보다 개발기간이 길어져서 직원들 월급을 주기도 빠듯한 상황이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때마침 대형 게임사에서 개발 중인 게임에 관심을 보이면서 투자 의사를 밝혔습니다. 지금 투자를 받지 않으면 게임을 완성할 수가 없고 당분간은 다른 투자자를 찾기도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까요? 이런 경우에는 고민하지 말고 하루라도 빨리 계약 체결하고 게임을 완성하는 게 정답입니다. 설사 상대방이 너무 많은 수익을 가져간다거나 개발 중인 게임에 과도하게 개입할 수 있는 조건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지라도요.
마찬가지로 아무리 계약서 내용을 수정하고 싶어도 상대방이 이를 받아줄 가능성이 없다면 굳이 비용을 써가며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상대방이 수정 의견을 받아주지 않는 게 무척 부당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면 납득이 가는 측면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투자 회사의 직원인데, 혼자서 약 10개의 피투자회사를 관리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투자를 할 때마다 각기 다른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한다면 매번 문제가 생길 때마다 계약서를 꺼내서 계약 내용을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회사와 동일한 내용으로 계약을 체결한다면 관리의 효율성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겠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상대방이 제안한 그대로 계약을 체결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해도 변호사의 자문이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런 경우 의뢰인에게 이렇게 설명합니다.
“조건이 내키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이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것도, 수정을 요구한다고 해도 상대방이 받아줄 가능성이 없다는 것도 잘 알겠습니다. 그래도 저에게 도움을 요청하신다면 이 계약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이 계약에 따르면 최악의 상황에서 어떤 일까지 벌어질 수 있는지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쉽게 설명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최악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 계약을 정말 체결할 건지 다시 한번 고려해 보실 수도 있고요.”
이런 경우 꽤 많은 분들이 도움을 요청하는데, 그 이유는 최악의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는 편이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2016년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연구에 따르면, 컴퓨터 게임에서 돌무더기를 클릭할 때 매번 뱀이 튀어나오는 경우보다, 50%의 확률로 뱀이 튀어나오는 상황에서 참가자들이 더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개입이 늦을수록, 변호사가 도와줄 수 있는게 줄어든다

고민 끝에 계약서의 검토를 변호사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다면, 어느 시점에 변호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좋을까요?
요즘에는 일단 비밀유지계약(NDA)을 체결하고, 텀 시트(Term Sheet)를 주고 받은 뒤, 본 계약을 체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밀유지계약은 통상 NDA(Non-Disclosure Agreement)라고 불리는데, 계약을 체결하기 전에 앞으로 서로 주고받을 정보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겠다는 합의입니다.
당신이 게임 회사를 창업했는데, 투자를 받기 위해 게임 기획안과 개발자 정보를 공유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때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자료를 건네면, 투자자가 유사한 기획안을 기반으로 독자적인 게임을 만들거나, 제3자에게 정보를 넘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전에 NDA를 체결한다면 이런 위험을 어느 정도는 방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런 조언은 변호사가 개입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NDA도 체결하기 전부터 변호사의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계약이 체결될지 여부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자문료를 지급하는 것이 매우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변호사의 개입이 늦어질수록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여지도 줄어든다는 점은 꼭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간혹 계약서 날인을 코앞에 두고 자문을 요청하는 분들도 계신데, 만약 여러분이 상대방이라면 날인에 임박해서 계약 조건을 바꾸려고 하는 파트너가 곱게 보일지 한 번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배운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거래 금액이 크거나, 계약 당사자의 의무를 문서로 정리하기 어렵거나, 계약서를 읽어도 무슨 말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면 변호사의 도움을 받으시는 게 좋습니다.
만약, 계약 체결이 불가피하고, 상대방이 어떤 수정 요청도 받아들일 의사가 없다면 자문은 실익이 없을 수도 있지만, 변호사를 통해 계약서의 의미와 위험 요소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막연한 두려움을 줄이는데 도움이 됩니다. 변호사의 개입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요.
다음 화에서는 계약서를 검토하면서 변호사와 효율적으로 협업하는 방법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