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릴 때부터 게임을 사랑해온 변호사입니다. 손은 굳고 눈도 흐려졌지만, 오늘도 normal 난이도로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입니다. 게임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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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 [이병찬 칼럼 #1] 계약서 검토, 변호사에게 맡겨야 하는 시점은?
지난화에서는 계약서 검토, 변호사에게 맡겨야 하는 시점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번 화에서는 계약서를 검토하면서 자주 받는 질문들을 하나씩 짚어보며, 실무에서 도움이 될만한 팁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1. 계약서 초안은 어느 쪽에서 작성하는 것이 좋을까?

계약서 검토와 관련해서 제가 자주 받는 질문 중 하나는 이런 겁니다. “상대방과 계약을 체결하기로 했는데, 어느 쪽에서 계약서 초안을 작성할지는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쪽에서 초안을 작성하는 게 나을까요?”
계약서를 어느 쪽에서 작성할지 결정되지 않은 경우, 많은 사람들이 상대방에게 계약서 초안의 작성을 맡기고 싶어 합니다. 계약서 작성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정작 시간과 노력을 들여도 자기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 판단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답부터 말씀드리자면, 계약서 초안은 상대방이 아니라 우리 쪽에서 쓰는 게 좋습니다. 바로 “앵커링 효과(anchor effect)” 때문인데요, 앵커링 효과란 처음 입력된 정보가 이후의 의사결정과 판단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앵커링 효과에 대한 흥미로운 실험이 있는데, 부동산 중개인들에게 특정 주택의 가치를 평가하도록 하면서 한 그룹에는 낮은 호가를, 다른 그룹에는 높은 호가를 제시한 사례입니다. 부동산 중개인들은 호가 때문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높은 호가를 제시받은 중개인 그룹의 가치 평가액이 더 높게 나왔습니다.
독일의 15년 이상 경력을 가진 판사들을 상대로 주사위를 던진 다음 절도를 저지른 어느 여성의 양형을 선택하도록 한 실험도 있었습니다. 판사들은 주사위 숫자가 낮게 나온 경우에 더 가벼운 형벌을 선택했습니다. 주사위 숫자는 절도죄를 저지른 여성의 죄질과 아무런 관계도 없고, 15년 이상의 판사는 그 분야의 전문가라고 볼 수 있는데도 말이죠.
우리는 상대방의 터무니 없는 제안을 쉽게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앵커링 효과는 생각보다 강력합니다.
계약서의 경우에도 내가 먼저 초안을 작성하면 내 기준이 ‘기본값’이 됩니다. 상대방은 거기서 고칠 걸 찾겠지만, 우리가 일단 만들어 놓은 구조 자체를 뒤엎기는 어렵습니다. 앵커링 효과가 이렇게 강력하다면 이걸 이용하는 게 당연히 유리할 테니, 계약서 초안은 되도록 우리 쪽에서 작성하는 것이 좋습니다.
2. 직접 계약서 초안을 작성하면 자문료가 줄어들까?

가끔 계약서 검토를 의뢰하면서 “변호사님, 제가 일단 계약서 초안을 작성해 봤습니다. 검토만 하시면 되니까 좀 싸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말씀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계약서를 처음부터 작성하는 것보다 수정만 하는 편이 시간이 적게 들 테니, 이게 상당히 합리적인 제안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이건 비유하자면 이런 상황이랑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화가님, 제가 거실에 걸어둘 그림을 하나 의뢰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림을 그리시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수고비도 많이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일단 제가 그림을 그려왔습니다. 잘못 그려진 부분만 고치시면 되니까 싸게 해주세요.”
만약, 여러분이 화가라면 이런 제안을 받을 때 무슨 생각을 하실 것 같으세요? 일반인이 그린 그림을 고치느니 내가 처음부터 그리는 게 빠르겠다, 라고 생각하지 않으실까요. 변호사가 계약서를 검토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처음부터 계약서를 작성하는 게 의뢰인이 가져온 계약서 초안을 고치는 것보다 시간이 훨씬 더 적게 걸립니다.
그러니 어차피 변호사의 도움을 받으실 거라면, 쓸데없이 계약서 초안 만드느라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처음부터 변호사에게 맡기시기 바랍니다.
3. 계약서가 간단하면 검토도 간단할까?

상대방이 건네준 계약서 초안을 들고 와서 검토를 맡기는 분들이 간혹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변호사님 상대방이 계약서 초안을 보내왔는데, 몇 페이지 안 되네요. 이건 간단한 계약서니까 금방 검토하실 수 있죠?”
짧은 계약서를 검토하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검토의 범위를 그 계약서에 이미 기재되는 내용으로 한정하는 경우에만 그렇습니다. 변호사 입장에서는 계약서가 긴지, 짧은지가 아니라 계약서에 필요한 사항이 빠짐없이 들어가 있는지 여부에 따라 검토에 필요한 시간이 달라집니다.
계약서에 꼭 기재되어 있어야 할 사항들이 빠져서 계약서가 짧은 거라면, 그걸 일일이 채워 넣어야 하니 변호사 입장에서는 오히려 할 일이 많아지는 겁니다. 만약 검토의 범위를 상대방이 보내준 초안으로 한정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렇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앵커링 효과에 말려들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시면 됩니다.
4. AI는 과연 믿을만한가?

바야흐로, AI의 시대입니다. 코딩, PPT, 보고서, 이메일 등 업무의 모든 영역에서 AI에 의한 혁신이 일어나고 있고, 법률 분야도 예외는 아닙니다. 저도 민감하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는, AI에 사실관계와 쟁점을 입력하고, 계약서의 작성이나 검토를 요청해 봅니다.
AI의 답변을 기다릴 때는 매번 기대와 긴장이 교차합니다. 만약 AI가 계약서를 잘 작성하고 검토한다면, 일을 아주 빠르고 편하게 끝낼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AI가 일을 너무 잘해도 큰일입니다. AI가 저만큼 일을 잘하게 되는 순간 아무도 저한테 자문료를 지급하며 일을 맡기지 않을 테니까요.
아무튼 제가 생각하는 현재 ChatGPT나 클로드의 수준은 딱 80점 정도입니다. 정의, 계약기간, 각 당사자의 의무, 대금 지급 방법, 계약의 해제와 해지, 손해배상, 관할 등 제법 구색을 갖춘 계약서를 내놓을 수는 있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정확한 쟁점을 짚거나, 계약 유형에 따라 가장 집중적으로 기술해야 할 부분을 판단하는 능력은 아직도 아쉬운 수준입니다. 그러니, 참고는 하시되, 계약서 작성이나 검토에서 AI의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5. 믿을만한 계약서 양식은 어디서 구할까?

전문가에게 부탁하는 게 정확하고 빠르다고 해도, 중요하지 않거나 규모가 크지 않은 계약까지 변호사한테 검토를 맡기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인터넷에서 계약서 양식을 하나 구해서 상황에 맞게 고쳐 쓰는 게 가장 현실적인 대안입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 사실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우선 인터넷에서 구한 계약서 양식이 믿을만한 것이어야 하고, 이렇게 구한 계약서를 구체적인 상황에 맞게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변호사라면 대충만 훑어봐도 잘 만들어진 계약서인지 바로 알 수 있고, 구체적인 상황에 맞게 계약서 내용을 수정할 수도 있지만, 일반인에게는 두 가지 모두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다만, 계약서를 구체적인 상황에 맞게 고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이 부분을 도와드리는 건 어렵다고 하더라도, 믿을만한 계약서 양식을 찾는 유용한 팁은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하단에 열거된 계약서를 포함하여 법원이나 중앙부처, 공공기관에서 제공하는 표준계약서가 있다면 전문가들이 정성을 들여 만든 것이니, 믿고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핵심 내용 간단 정리
- 계약서는 내가 먼저 쓰는 게 유리하다(앵커링 효과).
- 계약서 초안을 직접 쓰고 검토만 맡기는 건 실익이 없다.
- 짧은 계약서라고 검토에 시간이 적게 드는 건 아니다.
- AI는 아직 80점 수준이니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자.
-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 최소한 검증된 기관에서 제공하는 믿을만한 계약서 양식을 사용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