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릴 때부터 게임을 사랑해온 변호사입니다. 손은 굳고 눈도 흐려졌지만, 오늘도 normal 난이도로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입니다. 게임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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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화에서는 계약서를 검토하면서 자주 받는 질문들을 하나씩 짚었는데, 이번화에서도 지난화에 이어 계약서 검토에 도움이 되는 팁들을 전달드리고자 합니다.
1. 허접한 계약서에 쫄지 말자!

처음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고, 계약서를 검토하면서 당황스러운 경험을 여러 번 했습니다. 누구나 알만한 대기업에서 보낸 계약서 초안을 받았는데, 생각보다 너무나 허술한 겁니다. 내용은 둘째 치고 주술 관계조차 맞지 않는 비문들이 계약서 곳곳에 있었습니다. 이 회사는 이런 계약서를 사용할 정도로 작은 회사가 아닌데, 도대체 왜 이런 계약서를 사용하는 거지, 라는 의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여러 회사의 법무팀과 일하며 경험이 조금씩 쌓이다 보니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대기업 법무팀은 소송 사건을 처리하고, 현업 부서의 수많은 질문에 답변하는 와중에 계약서까지 검토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기업에서 체결하는 계약이 어디 한두 개인가요? 도급 계약, 근로 계약, 구매 계약, 납품 계약, 대리점 계약 등 매일 수많은 계약이 체결됩니다.
여러분이 대기업의 법무팀 직원이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협력사랑 계약을 체결해야 하는데 예전부터 사용해 온 계약서 양식이 있습니다. 내용도 어설프고 문장도 엉망이라 맘에 안 듭니다.
하지만 이 계약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뜯어 고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그렇게 바뀐 계약서로 계약을 체결하려면 팀장님, 상무님께 차례로 결재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 힘든 절차를 거치느니 차라리 맘에 안 들어도 그냥 예전에 쓰던 계약서를 사용하는 편이 훨씬 수월하죠.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법무팀에서는 하루에도 수많은 계약서를 검토해야 하는데, 사업팀에서 이런 내용의 계약을 체결해야 하니 계약서를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법무팀에서는 우리가 이 사업에 대해서 뭘 안다고 계약서를 만들겠냐며, 사업을 아는 건 당신들이니 초안을 만들어오면 우리가 검토만 해주겠다고 합니다.
사업팀에서 만들어 온 계약서는 허점투성이지만, 법무팀에서 전부 고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니, 가장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몇 가지 조항만 적당히 손질된 상태로 상대방에게 계약서가 날아가게 됩니다.

제가 왜 대기업 법무팀 사정을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제가 이런 배경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대기업과 계약을 체결하면서 특별한 이유 없이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사례를 많이 봐왔기 때문입니다. 대기업에서 보낸 계약서를 처음 받아보면, 비문도 많고 뭔가 명확히 규정되어 있어야 할 부분이 비어있다거나 필요도 없는 조항이 들어가 있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럼 당연히 보충할 건 보충하고 바꿀 건 바꿔야 하는데, ‘이렇게 큰 회사에서 이런 계약서를 사용하는 데에는 무슨 이유가 있겠지.’라든지, ‘이런 양식의 계약서를 쓰는 게 업계의 관행인가 보네. 그러니까 경험 없는 거 티 내지 말고 그냥 잠자코 있자.’라고 생각해서 별다른 이의제기 없이 계약서에 날인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허접한 계약서에 특별한 의도나 배경 같은 건 없습니다. 대기업에서 보낸 계약서가 허접하다면 그건 그냥 법무 담당자의 역량 부족이나 시간 부족, 아니면 두 가지 모두가 중복된 결과일 뿐입니다. 그러니 모르면 묻고, 이상하면 고치고, 맘에 안 들면 바꿔 달라고 하시기 바랍니다. 쓸데없이 쫄지 마세요!
2. 애매한 조항이 불리한 조항보다 더 나쁘다
“시장은 악재보다 불확실성을 더 싫어한다”는 주식시장의 유명한 격언이 있습니다. 악재는 시장이 그 파급효과를 판단해서 가격에 바로 반영할 수 있지만, 불확실성의 경우에는 방향과 규모를 예측하기 어려워 투자자가 위축되고, 이 때문에 시장에 오히려 더 큰 악영향을 준다는 의미입니다.
주식시장의 이런 격언은 계약의 체결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위 격언을 적절하게 변형해 보면, “애매한 조항이 불리한 조항보다 더 나쁘다”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두 친구가 식당을 함께 운영해서 수익을 나눠 갖기로 하는 “동업 계약”을 체결하려고 합니다. 이 계약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1) 각 동업자가 어떤 역할을 담당할지, (2) 발생한 수익을 어떤 비율로 분배할지일 겁니다.
수익 분배와 관련해서, “식당을 운영하여 발생하는 수익은 7:3의 비율로 나누기로 한다.”라는 조항과 “식당을 운영하여 발생하는 수익은 각 당사자의 기여도에 따라 나누기로 한다.”는 조항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만약, 두 사람의 업무강도나 업무시간이 비슷한데, 한 동업자가 수익을 5:5가 아니라 7:3으로 분배하는 조항을 상대방에게 제안한다면, 해당 조항은 상대방 입장에서 매우 불리한 조항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명백히 불리한 조항은 오히려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너무 불리하다면 애초에 계약을 체결하지 않으면 되니까요. 설사 불리한 조건을 감수하고 계약을 체결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불이익을 감수하고 서명했기 때문에 계약기간 동안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은 낮습니다.
반면 “식당을 운영하여 발생하는 수익은 각 당사자의 기여도에 따라 나누기로 한다”는 조항은 어떨까요? 한 명은 자신이 음식을 만들었으니까 더 많은 이익을 가져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 명은 자신이 무례한 고객을 상대하고 식당이 열리지 않은 시간에도 SNS를 통해 홍보를 하고 있으니 더 많은 이익을 가져가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기여를 과대평가하고 상대방의 역할을 저평가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위 조항은 기여도와 관련하여 다툼이 생긴 경우 어떤 기준으로 기여도를 평가할 것인지 전혀 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내용이 애매한 조항이며, 그래서 나쁜 조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두 사람은 수익의 분배를 두고 자신의 기여도를 다투다가 사이가 틀어져 식당을 폐업하는 상황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계약서를 검토하다 보면, “합리적인 범위에서”,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상호 원만하게 합의하여 정한다.” 같은 표현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잖은 말들은 편하게 읽히고 뭔가 세련된 것 같지만, 내용이 명확하지 않아 분쟁의 씨앗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계약의 각 당사자가 ‘합리적인 범위’나 ‘필요’를 다르게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문장이 다소 투박하더라도 누가 봐도 동일한 내용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 명확한 내용으로 계약서 조항을 작성하시기 바랍니다.
3. 데블스 애드버킷이 되어 불리한 조항을 평가하라
'데블스 애드버킷(Devil’s Advocate)'은 가톨릭 교회의 성인(聖人) 추대 과정에서 유래된 용어인데, 성인 후보자에 대한 심사 과정에서 반대 의견을 제시하여 편견이나 오류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지칭했습니다. 요즘에는 어떤 문제에 대한 의사결정 과정에서 일부러 반대 의견을 제시하여 집단사고의 폐단을 막거나, 논쟁을 유발하여 더 나은 결론을 도출하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계약서의 특정 조항이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건 알겠는데, 그 불리함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기 어려울 때에는 스스로 데블스 애드버킷(Devil’s Advocate)이 되어 보시기 바랍니다. 즉 ‘상대방이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이 조항을 어디까지 악용할 수 있을까?’를 상상해 보는 겁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투자자가 유상증자 방식으로 주식회사의 신주를 인수하면서, 회사가 제3자로부터 돈을 빌린다든지, 임원의 연봉을 인상한다든지, 새로운 사업에 진출하는 경우 등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릴 때는 투자자의 동의를 받도록 하는 내용의 신주인수계약을 체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신주인수계약의 말미에는 “투자자가 회사의 주식을 모두 처분하는 경우 본 계약은 효력을 상실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투자자는 이익을 배당받거나 주식을 제3자에게 비싸게 팔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투자를 진행한 것이니, 주식회사가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기 전에 투자자의 동의를 받도록 한 것이 반드시 부당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투자자가 회사의 주식을 모두 처분하는 경우 본 계약은 효력을 상실한다”고 규정한 부분입니다.
여기서 데블스 애드버킷이 되어 보겠습니다. 제가 만약 악독한 투자자라면 유상증자로 취득한 회사의 주식을 모두 팔고 단 한 주만 남겨둘 겁니다. 그리고는 중요한 의사결정에 합리적인 이유도 없이 계속 반대를 하겠죠. 혹시 모르지 않나요? 주식회사의 대주주가 이런 상황을 피하려고 제게 남은 한 주를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사줄지도.
제가 계약서를 검토하면서 이렇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면, 이렇게 되묻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에이, 설마 상대방이 그렇게까지야 하겠어요?” 저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똑같이 대답합니다. 상대방이 그런 짓까지 할지, 하지 않을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건 상대방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핵심내용 간단 정리
- 허접한 계약서에 특별한 이유 같은 건 없다. 쫄지 말고 수정을 요구해라.
- 애매한 조항은 불리한 조항보다 더 나쁘다. 누가 봐도 다툼이 없도록 명확하게 써라.
- 불리한 조항을 정확히 평가하고 싶다면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