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병찬 변호사 소개
어릴 때부터 게임을 사랑해온 변호사입니다. 손은 굳고 눈도 흐려졌지만, 오늘도 normal 난이도로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입니다. 게임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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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약의 이해와 실무, 종합 '이병찬 칼럼' 모아보기
지난 화에서는 계약의 자유와 이를 제한하는 강행규정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오늘은 계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또 하나의 개념인 보충규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계약의 사각지대를 메우는 '보충 규정'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대학생 A는 2024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고등학교 동창인 B에게서 현금으로 10만 원을 빌렸습니다. A가 손꼽아 기다리던 게임이 출시될 예정이었는데, 마침 용돈이 떨어졌거든요. A는 B에게 2025년 구정에 친척들로부터 세뱃돈을 받으면 빌린 돈을 꼭 갚겠다고 약속했습니다.
A는 돈을 빌리면서 B와 ‘금전소비대차 계약서’를 작성했습니다(돈을 빌려주는 계약을 전문용어로는 ‘금전소비대차 계약’이라고 합니다). 계약서는 단 한 줄, “A는 B에게 10만 원을 빌렸으며, A는 2025년 구정 다음날까지 만 원의 이자를 붙여 11만 원을 B에게 갚아야 한다.”라고 적었습니다.
돈을 갚기로 약속한 날이 다가왔습니다. 그날따라 아침부터 눈이 내리고 바람도 차가웠습니다. A는 B에게 전화를 걸어 돈을 갚을 테니 집 앞으로 받으러 오라고 얘기했습니다. B는 황당해하며 “돈을 빌린 사람이 갚으러 와야지, 내가 왜 이렇게 추운 날 빌려준 돈을 받으러 거기까지 가야 하냐!”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A도 지지 않고 “빌린 돈에 이자까지 더해서 갚을 건데, 네가 여기 오는 게 소리까지 지를 일이냐!”며 화를 냈습니다.
과연 A는 어디서 돈을 갚는 게 맞을까요? A의 집일까요, B의 집일까요? 아니면 두 집의 중간 지점에서 돈을 갚는 게 가장 합리적일까요?
민법에는 당사자가 계약에서 특정 사항을 정하지 않은 경우에 적용되는 조항들이 있는데, 이런 걸 “보충규정”이라고 부릅니다. 민법에서는 위 사안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변제의 장소에 대해서도 보충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민법 제467조 제1항에서는 “채무의 성질 또는 당사자의 의사표시로 변제 장소를 정하지 아니한 때에는 특정물의 인도는 채권 성립 당시에 그 물건이 있던 장소에서 하여야 한다.”고 정하고 있고, 같은 조 제2항 본문에서는 “전항의 경우에 특정물 인도 이외의 채무변제는 채권자의 현주소에서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특정물이라고 하는 건 쉽게 말해서 개성이 중요한 물건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예를 들면, 김연아 선수가 신던 스케이트라든지, 최형우 선수의 200호 홈런볼 같은 물건이지요. 하지만, 돈은 일반적으로 개성이 중요한 물건이 아니라 교환가치가 중요한 물건이니까 특정물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돈은 특정물이 아니고, 위 민법 규정에서는 특정물 인도 이외의 채무변제는 채권자의 현주소에서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니까, A는 채권자 B의 현주소인 B의 집에서 돈을 갚는 게 맞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계약서에 특정한 사항을 정하지 않았는데, 해당 사항 때문에 분쟁이 발생했다면 가장 먼저 뭘 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관련 법령의 보충규정에서 어떻게 정하고 있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위 사례에서 A가 당사자 사이에 합의가 없으면 보충규정이라는 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제일 먼저 변제의 장소에 대한 규정부터 살펴봤을 거고, 군소리 없이 B의 집 앞으로 돈을 갚으러 갔을 것입니다.
가끔 당사자가 계약에서 정하지 않은 사항은 모두 추가적인 합의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위 사례를 예로 들면, 어디서 돈을 갚아야 할지 미리 정하지 않았고, 이것 때문에 분쟁이 생길 줄도 몰랐으니, 지금이라도 양 당사자가 합의를 해서 정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거죠. 하지만 보충규정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이런 억지를 부릴 일은 없을 겁니다.
이처럼 보충규정은 계약서에서 당사자가 합의하지 않아 공백으로 남아있는 부분을 메우는 역할을 합니다. 더욱이, 법률로 정하고 있는 보충규정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계약의 한쪽 편에게만 유리하게 작성되어 있을 가능성도 없으니, 계약 당사자는 계약에서 빠트린 게 있다고 하더라도 공평하게 규정된 보충규정의 적용을 받을 것이라고 일응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보충규정만 믿지는 말자!
하지만, 보충규정만 믿고 계약서 곳곳에 공백을 남기는 건 무척 위험한 일입니다.
무엇보다, 보충규정이라는 안전장치가 모든 분쟁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게임 회사의 CEO인데, 신작 게임의 출시를 앞두고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당신은 디테일이 살아있기로 유명한 액세서리 제조회사의 대표를 만나 고객들에게 사은품으로 제공할 열쇠고리 제작을 위탁했습니다. 계약이 이행되는 과정에서 게임의 출시일과 열쇠고리에 각인할 게임 주인공의 얼굴이 상대방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열쇠고리는 정상적으로 납품되었지만, 액세서리 회사를 통해 게임 출시일이 알려지는 바람에 경쟁사가 경쟁게임을 먼저 출시하는 결과가 초래되었습니다.
당신은 신규 게임의 출시일이 보안이 유지되어야 할 중요한 정보이고, 상대방은 이를 비밀로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지만, (영업비밀에 해당하지 않는 한) 상대방의 사업에 대한 정보를 비밀로 유지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보충규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게임사에서 신규 게임의 출시일을 비밀로 유지하고 싶다면 보안 유지 의무를 부과하는 내용을 계약서에 직접 채워 넣어야 합니다.
또한, 계약 당사자가 정하지 않은 사항에 보충규정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변제의 장소에 대한 조항처럼 항상 결론이 명쾌한 것은 아닙니다. 법이라는 건 여러 사례를 포섭하기 위하여 추상적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고, 그 추상성으로 인해 항상 해석의 여지를 남기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보충규정에 대한 해석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판례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코로나-19의 감염이 확산되자 국토교통부는 국제선을 인천국제공항으로 일원화하는 조치를 발표하였고, 이에 따라 김포국제공항 및 김해국제공항의 국제선 청사가 폐쇄되어 면세점 운영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에 김포국제공항 및 김해국제공항에 입점해 있던 면세점들은 한국공항공사를 상대로 면세점 운영이 중단되었던 기간 동안 지급한 임대료를 돌려달라는 소를 제기했습니다.
면세점들은 임대료 반환의 법적 근거로 “당사자 쌍방의 채무가 동시에 이행되어야 할 경우에, 당사자 일방의 채무가 채무자의 책임 없는 사유로 이행할 수 없게 된 때에는 그 채무자는 상대방의 이행을 청구하지 못한다.”고 규정한 민법 제537조를 들었는데, 이는 민법의 대표적인 보충규정 중 하나입니다.
양 당사자의 책임 없는 사유인 코로나와 정부의 지방 국제선 폐쇄 조치로 임대인인 한국공항공사가 면세점을 ‘사용·수익 가능한 상태로 제공할 의무’를 이행할 수 없게 되었으니, 임차인 역시 ‘임대료를 지급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 면세점들의 주장이었습니다.
하지만, 1심과 2심 법원은 임대료 전액을 면제해달라는 면세점들의 주장을 기각했습니다. 청사 폐쇄가 ‘일시적’인 조치일 뿐, 임대차 계약 자체가 완전히 불가능해진 ‘종국적 이행불능’은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임대차 계약은 여전히 유효하게 존속하고 있고, 임차인들이 면세점 공간을 계속 점유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습니다.
반면 대법원은 청사 폐쇄 기간 동안의 임대료는 전액 면제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임대차 계약에서 임대인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을 제공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약에서 정한 ‘목적’에 맞게 임차인이 사용·수익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해 줄 의무를 부담하는데, 이 사건의 계약 목적은 명백히 ‘면세점 영업’이었는데도 정부 조치로 국제선 청사가 폐쇄되면서 면세점 영업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졌으니, 임대인인 공항공사가 계약의 핵심 목적인 ‘면세점 영업이 가능한 공간’을 제공할 의무를 이행할 수 없게 된 이행불능 상태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대법원의 최종적인 결론보다도 “당사자 일방의 채무가 채무자의 책임 없는 사유로 이행할 수 없게 된 때”에 대한 판단이 심급마다 달랐다는 사실입니다. 법원끼리도 판단이 갈라지니, 일반인 입장에서는 법률조항을 해석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위 규정은 보충규정에 해당하므로, 만약 당사자가 “전염병이나 화재 등 천재지변으로 인해 임차인이 면세점 영업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는 경우 임차인은 해당 기간 동안 임대료를 지급할 의무가 없다.”라고 계약서에 규정했다면 민법 제537조는 처음부터 적용될 여지가 없었을 것이고, 면세점들은 청사가 폐쇄된 기간 동안 임대료를 지급할 의무를 부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코로나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례적인 사건이므로, 면세점들이 임대차 계약 당시 이런 조항을 삽입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앞으로 면세점들이 공항공사와 임대차 계약을 다시 체결하게 된다면, 코로나 같은 비상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 임대료 지급 의무가 없다는 사실을 계약서에 명기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관련 분야에서 종래에는 예측할 수 없었던 사고가 터졌거나, 다툼이 발생하였다면, 해당 사항에 대하여 동일한 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반드시 계약서에서 명확히 규정하시기 바랍니다. 보충규정만 믿지 마시고요.
핵심 내용 간단 정리
- 당사자가 계약에서 명확히 정하지 않은 사항에 대해서는 보충규정이 적용된다.
- 다만, 보충규정이 모든 공백을 메울 수 있는 건 아닐뿐더러, 보충규정의 해석과 관련해서 다툼이 생길 수도 있다.
- 그러니 보충규정만 믿지 말고 중요한 사항은 되도록 계약서에 명기해서 다툼의 여지를 없애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