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CON] 네임드 개발자들이 말하는 '좋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게임뉴스 | 정재훈 기자 |



지스타 2025와 함께 진행된 컨퍼런스 GCON의 첫날 마지막 세션에서는 현대 게임 서사의 핵심으로 떠오른 ‘다층적 내러티브’를 주제로 한 패널토크가 진행됐다. 이 세션은 GCON 2025의 프로그램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서사·디자인 종사자들이 관심을 보인 자리로, AAA와 인디, 액션 어드벤처부터 CRPG까지 다양한 장르를 경험한 개발자들이 한 무대에 올랐다.

당초 발표 예정이던 코히런스의 대표 '디노 패티'가 개인 사정으로 불참하게 되면서, 그 자리는 옵시디언 엔터테인먼트의 조쉬 소여가 대신 채웠다. 조쉬 소여는 폴아웃 뉴 베가스, 펜티먼트 등에서 보여준 독자적 시스템 기반 내러티브로 위상을 쌓아온 디자이너로, 국내에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개발자 중 한 명이다.

조쉬 소여 외에도 세션에 참여한 '벤 맥카우', '케이트 돌러하이드', '리즈 모블리'는 모두 업계에서 오랜 기간 경력을 쌓아온 이들이며, 호라이즌, 어바우드, 호그와트 레거시, 하데스 등 최근 몇 년간 큰 영향을 남긴 게임들의 내러티브·레벨 디자인에 관여해왔다. 이들은 서로 다른 스튜디오와 장르에서 활동해왔지만, 공통적으로 “이야기는 더 이상 텍스트가 아니라, 공간·시스템·팀워크가 함께 만드는 구조물”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1. 세계와 환경이 먼저 말한다다층적 내러티브의 시작점


모더레이터 케이시 알 가이시는 “플레이어가 처음 게임에 들어섰을 때, 어떤 요소가 가장 먼저 서사를 전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대담을 시작했다. 패널들은 한 목소리로 스토리는 대사보다 환경이 먼저 말한다고 강조했다. 공간의 구조, 오브젝트의 배치, 빛과 소리, 이동 동선까지 모든 요소가 결합되며 플레이어의 첫인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벤 맥카우는 호라이즌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을 “모든 요소가 같은 감정의 방향을 향하도록 맞추는 것”이라 설명하며 이를 ‘코히어런트 게임’이라고 불렀다. 그는 호라이즌 제로 던의 확장팩 더 프로즌 와일즈를 예로 들며, 아트팀이 고대의 댐을 실제처럼 설계해 놓자 스토리팀도 그 역사에 새로운 레이어를 더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어떤 장면은 대사가 아니라 시각이 먼저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쉬 소여는 세계의 설득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생활의 흔적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농업 방식, 식수 체계, 거주 흔적 같은 요소가 공간 곳곳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플레이어는 설명 없이도 세계의 논리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는 펜티먼트(Pentiment)와 어바우드(Avowed)에서 작은 오브젝트나 풍경을 통해 서사적 단서를 흘려보내는 작업을 강조하며, “작은 조각들이 모여 큰 세계의 논리를 만든다”고 설명했다.

케이트 돌러하이드는 공간을 ‘역사적 구조물’처럼 다루는 방식을 소개했다. 어바우드의 돈 트레더 던전을 설계할 때도 “이 장소를 사용했던 사람들은 누구였고, 무엇을 남겼으며, 지금 점유한 이들은 어떤 흔적을 덧씌웠는가”를 레이어처럼 쌓아갔다고 설명했다. 그는 “플레이어가 모든 의미를 이해할 필요는 없다. 감정의 잔향만 남아도 세계는 작동한다”고 말했다.

리즈 모블리는 “말을 줄일수록 감정은 직접적으로 전달될 때가 많다”고 말했다. 자신의 공포 게임 위 웬트 백은 대사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플레이어가 공간에서 느끼는 감각이 더 강렬하게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디즈니의 헌티드 맨션에서 영감을 받은 ‘시선을 따라오는 우주복’ 연출은, 설명되지 않는 감각이 어떻게 서사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였다.



▲ 옵시디언의 걸작 중 하나인 '펜티먼트(2022년 작)'


2. 이야기는 팀이 함께 만든다시스템·레벨 디자인·내러티브의 협업 구조


케이시는 “이야기의 주도권은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내러티브 디자이너인가, 아트팀인가, 레벨 디자이너인가. 네 사람은 공통적으로 “AAA 개발에서는 어느 한 팀이 서사를 지배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오히려 그때그때 가장 강력하게 완성된 레이어가 다른 요소들을 끌어당기며 하나의 경험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벤 맥카우는 “큰 프로젝트에서는 아트가 먼저 나오는 경우가 흔하다”고 말했다. 어떤 지역의 구조나 분위기가 먼저 시각적으로 완성되면 스토리팀은 그 공간에 맞춰 서사를 다시 조립한다. 호라이즌 시리즈에서도 이런 방식이 반복되었다고 한다. 그는 “내부에서는 ‘우리가 아는 진실’과 ‘플레이어가 알게 될 진실’을 분리해 설계한다”며, 오해를 유도하는 것도 하나의 전략이라고 말했다.

조쉬 소여는 오픈월드 RPG에서는 작가가 큰 줄기만 잡고, 나머지는 디자이너들이 채워 넣는 방식이 자연스럽다고 설명했다. 모든 것을 미리 완벽하게 설계하면 팀 전체의 창의성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는 이 구조 위에 반응형 시스템을 얹어 플레이어의 선택과 행동이 쌓여 후반부의 결과에 자연스럽게 반영되도록 만드는 방식이 자신의 철학이라고 말했다.

케이트 돌러하이드는 협업 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플레이어가 어떤 감정을 느끼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공유라고 말한다. 플레이어가 레이어의 의미를 모두 이해할 필요는 없지만, 감정의 방향을 공유하지 않으면 공간은 혼란스러워진다는 것이다. 아웃사이더, 환경 아티스트, 퀘스트 디자이너가 하나의 작은 팀으로 묶여 움직이는 이유도 동일한 목표를 향하기 위해서다.

리즈 모블리는 여러 분야를 동시에 경험한 팀원들이 모이면 더 강력한 내러티브가 나온다고 말했다. 내러티브, 오디오, 퀘스트 제작을 모두 경험한 이들이 한 팀에 모이면, 레벨 디자인과 스토리가 서로를 보완하며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는 “고정된 역할보다 중요한 것은 ‘서사의 목적을 공유하는가’”라고 말했다.



▲ 조쉬 소여가 이름을 떨친 계기가 된 '폴아웃 뉴 베가스'


3. 컷신과 플레이어의 자유통제와 해방 사이의 균형


케이시는 다음으로 “컷신은 언제 필요하고, 언제 불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컷신은 감정과 타이밍을 정교하게 전달할 수 있는 강력한 장치지만, 동시에 플레이어의 자유를 빼앗는 다소 일방적인 도구이기도 하다.

벤 맥카우는 컷신은 반드시 필요한 순간에만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작 비용이 크고 수정이 어렵기 때문에 호라이즌 시리즈에서도 컷신은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호라이즌 제로 던 초반의 포커스 획득 장면처럼 감정과 시간의 흐름을 정확히 조율해야 하는 경우에는 컷신만이 가능한 방식이었다고 설명했다. VR 타이틀 콜 오브 더 마운틴에서는 카메라를 강제로 움직일 수 없어서 오히려 “플레이어가 엿보는 시점” 같은 새로운 연출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조쉬 소여는 컷신이 강력하지만 양날의 검이라고 말했다. 플레이어 통제를 유지하면서도 컷신 같은 순간을 만드는 방식은 하프라이프나 바이오쇼크 같은 게임이 보여줬던 ‘제한된 공간 연출’에서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컷신의 목적은 감정보다도 “정확한 전달”이며, 필요할 때만 잠깐 통제를 가져가는 것이 이상적인 방식이라고 말했다.

케이트 돌러하이드는 컷신의 사용 여부는 게임의 테마와 반드시 맞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펜티먼트는 “역사는 개인을 압도한다”는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무력감을 드러내는 컷신을 사용했고, 어바우드는 “운명을 쟁취하는 강력한 주체”라는 테마 때문에 컷신이 최소화되었다. 컷신은 단순한 연출이 아니라 “테마의 체현”이라고 설명했다.

리즈 모블리는 호그와트 레거시의 세바스찬 스토리를 예로 들어, 훌륭한 컷신은 “놀라움과 필연성”이 동시에 담겨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게임플레이와 컷신의 경계가 점점 사라지고 있으며, 앞으로는 더 세밀한 감정 조율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 컷신을 최소화해 게이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방향으로 기획된 '호라이즌: 제로 던'


4.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창작 철학과 새로운 실험


케이시는 마지막 질문으로 “각자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를 물었다. 패널들은 방식은 달랐지만 공통적인 철학을 공유하고 있었다. 좋은 이야기는 커다란 문장이 아니라 작은 선택, 작은 감정, 작은 경험의 누적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조쉬 소여는 폴아웃 뉴 베가스의 평판·파벌 시스템을 예로 들며, 작은 선택의 누적이 거대한 서사적 변화를 만드는 구조를 설명했다. 플레이어가 “내가 만든 이야기”라고 느끼는 순간에 집중한 설계 방식이다.

리즈 모블리는 인디와 AAA의 차이를 “가능한 실험의 폭”으로 설명했다. 인디는 빠르고 과감한 실험을 가능하게 하고, AAA는 견고한 이야기를 구축할 수 있는 인력을 제공한다. 최근 그가 가장 주목하는 영역은 “협동 플레이에서의 분기 대사”다. 플레이어 둘이 서로 다른 선택을 할 때 이야기가 어떻게 균형을 유지하는가는 아직 충분히 연구되지 않은 영역이라고 말했다.

벤 맥카우는 AAA 개발자들 사이에서도 언젠가 작은 팀을 꾸려 자신만의 인디 게임을 만들고 싶어 하는 욕망이 많다고 말했다. 실험적이고 과감한 아이디어 대부분은 인디에서 시작되고, AAA는 그것을 흡수하며 발전한다는 것이다. 그는 가장 큰 영감을 준 게임은 하데스를 꼽으며, 새로운 도전에 대한 갈망을 드러냈다.

케이트 돌러하이드는 언젠가 “대사 없는 게임”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환경, 음악, 텍스트의 레이어만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이며, 위 웬트 백이 그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고 했다. 그는 “말하지 않고도 말하는 법”이 내러티브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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