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벡스코 강연장, 71세의 호리이 유지가 한국 팬들 앞에 섰다. 30년 넘게 간직해온 드래곤 퀘스트 1편을 들고 온 팬들을 보며 그는 말했다. "정말 많은 분들이 드래곤 퀘스트를 플레이하셨더라고요. 사인을 받기 위해 오래된 작품을 가져온 분들도 많아서 너무 기뻤습니다." 21년째를 맞이한 지스타, 그리고 아름다운 부산의 풍경에 감탄하며 시작된 이 만남은 특별했다.
올해 일본 게임 개발자 최초로 욱일소수장을 받은 그는, 이 영예를 혼자만의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예전에는 게임이 해로운 놀이라고 불리던 시대가 있었어요. 게임을 하면 머리가 나빠진다는 말도 들었죠"라고 회상한 그는, "그것이 문화로 인정받아 훈장까지 받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기회가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기쁩니다"라며 후배 개발자들을 향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는 농담처럼 덧붙였다. "언젠가는 유튜버나 코스플레이어도 훈장을 받지 않을까요?"

그의 게임 철학은 40년간 변하지 않았다. "그 사람의 반응, 이렇게 하면 이렇게 생각해주겠지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만들어요"라고 말한 그는, 기술 중심이 아닌 사용자 중심의 개발 철학을 강조했다. "컴퓨터로 이런 대단한 걸 할 수 있으니 해보자, 봐라 내가 대단하지 않냐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아요. 어디까지나 유저 시점에서, 모니터 너머의 사람을 상대로 만들고 있습니다."
비평가에서 창조자로, 그리고 '버리는 용기'
호리이 유지의 게임 개발 여정은 독특하게도 비평가로 시작됐다. 그는 소년 점프의 '패미콤 신권'이라는 코너에서 게임을 평가했는데, 당시 그의 철학은 명확했다. "게임은 사기 전까지 재미있는지 알 수 없잖아요. 아이들이 비싼 돈을 주고 샀는데 재미없으면 불쌍하다고 생각했어요"라고. 그는 정확하게 점수를 매기고 평가했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런 그가 직접 게임을 만들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부담감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호리이 유지는 자신 있게 답했다. "당시에는 완전히 플레이어 입장에서 게임을 즐기며 그 재미를 체험하고 있었어요. 그 감각으로 게임을 만들었기 때문에 드래곤 퀘스트는 절대 재미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라고. 롤플레잉 게임이라는 장르 자체가 당시 아이들에게 생소했기에, 소년 점프에서 게임 출시 전에 롤플레잉 게임이 무엇이고 어떻게 플레이하는지 미리 소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게임 디자인에 있어서의 통찰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는 과거 일본의 한 강연에서 게임 디자인에 필요한 세 가지 덕목을 이야기했다. 첫 번째는 풍부한 발상, 두 번째는 그 발상을 형태로 만드는 지속력과 끈기, 그리고 세 번째는 만든 것이 재미없으면 과감히 버리는 용기. "아이디어는 정말 많이 떠오르는데, 전부 넣으려고 하면 게임이 완성되지 않아요. 실제로 만들어봤는데 재미없으면 과감히 버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라는 그의 말에는 40년간 쌓아온 경험이 배어 있었다.
"플레이어를 깜짝 놀라게 하는 걸 좋아해요"라고 말한 그는, 구체적인 예시를 들었다. "드래곤 퀘스트 3에서 피라미드가 있는데, 지하에 보물상자가 있어요. 그 보물을 가져가면 미라들이 깨어나서 '나를 깨운 게 네놈이냐?'라고 물어요. 그런데 '아니요'라고 대답하면 '그랬구나, 미안하다'며 그냥 돌아가버려요"라며 웃었다. 이렇게 의표를 찌르는 재미를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플레이어가 놀라는 모습을 보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큰 보람이었다.
플레이어가 주인공인 세계, 그리고 이야기의 힘
드래곤 퀘스트가 30년 넘게 지켜온 원칙이 있다. 플레이어가 곧 주인공이라는 점. "주인공은 플레이어이기 때문에 플레이어 의지 없이 멋대로 움직이지 않도록 하고 있어요"라고 설명한 그는, "다만 그것을 너무 철저하게 하면 어떤 일에도 주인공이 움직이지 않아 멍청해 보일 수도 있어요. 그래서 공유 범위 안에서는 주인공이 사건에 반응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라며 미묘한 밸런스에 대해 이야기했다.
최근 게임들이 풀보이스를 채택하는 것에 대해서도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주요 부분에는 보이스가 들어가지만, 마을 사람들까지 모두 보이스를 넣으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요"라면서도, "보이스가 있으면 캐릭터의 성격을 더 잘더파악할 수 있어서 좋긴 합니다"라며 장단점을 인정했다.
최근 게임 업계의 트렌드인 오픈월드에 대한 그의 생각도 독특했다.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를 즐겨 플레이했다고 밝힌 호리이 유지는, 드래곤 퀘스트도 어떤 의미에서는 오픈월드라고 설명했다. "다만 제가 주의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점이 역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불안도 낳는다고 생각해요. 어느 정도 할 일을 좁혀서 알기 쉽게 하는 것이 오히려 친절하다고 생각합니다"라며, 자유도와 가이드 사이의 균형을 중시하는 철학을 드러냈다.
"드래곤 퀘스트는 오픈월드지만 어느 정도 레일을 깔아주는 형태로 만들고 있습니다."

완벽한 자유로움에 대한 추구와 반대로 시장에서는 짧은 호흡의 콘텐츠가 넘쳐난다. 이런 시대 속에서도 JRPG가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에 대해 묻자, 그는 이걸 요리에 비유했다. "역시 이야기의 매력이 아닐까요? 드라마도 그렇지만, 이야기를 체험하는 것은 다음이 어떻게 될까 하는 설렘이 있어요"라며, "요리로 치면 간단하게 먹고 싶을 때 패스트푸드를 먹을 때도 있지만, 풀코스를 먹고 싶을 때도 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JRPG는 풀코스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했다.
드래곤 퀘스트 3의 HD-2D 리메이크부터 7까지, 그가 체크하는 기준은 명확했다. "설렘과 알기 쉬움이에요.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게 가장 괴롭다고 생각해요. 이걸 하면 되겠구나 생각하면 계속 플레이하고, 다음이 어떻게 될까 생각하면 계속 해주거든요."
AI 시대, 과거의 유산, 그리고 약속
인터뷰 중 한국에 대한 애정도 숨기지 않았다. "한국 드라마를 많이 봐요. '펜트하우스', '오징어 게임', '내 남편과 결혼해줘', '눈물의 여왕', '미스터 선샤인'도 봤어요. 정말 재미있더라고요"라며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을 표현했고, "서울은 뭐든지 다 파는 곳이라 좋아요. 게장이 맛있더라고요"라며 웃음을 자아냈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한국 드라마만이 아니었다.

SF와 판타지 작품에 대한 애정도 깊었는데, '천국에서 온 챔피언', '백 투 더 퓨처' 같은 영화. 아톰이나 불새로 유명한 데즈카 오사무의 '이상한 소년' 등을 즐겨 본다고 언급한 바 있다. 여기에 SF 작가들의 작품에 관심이 많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즐거웠던 경험, 무엇이 재미있었는지에 대한 경험은 게임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됩니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이 작품들이 시간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 만큼, 시간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아닐까 웃으며 말하기도 했다.
다른 창작물이 아니라 건축물에서 영감을 받기도 한다. 호리이 유지는 스페인 게임 전문지와의 인터뷰에서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보며 큰 영감을 받았다고 밝힌 적이 있는 그는 여행과 경험이 창작에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최근 화두인 AI 기술에 대한 그의 견해도 명확했다. "AI가 정말 발전했어요. 세 가지 단어를 주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하죠.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인정하면서도, "하지만 AI는 지금까지 있던 것들을 학습한 것이기 때문에 기존에 있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어요. 돌발적인 발상은 역시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라며 창작자로서의 인간의 가치를 강조했다. "AI는 어디까지나 도구예요. 새로운 발상은 어렵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드래곤 퀘스트12가 이전 작품들과 달리 성인 대상으로 기획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드래곤 퀘스트는 지금까지 주로 일본만을 타겟으로 했는데, 세계를 상대로 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역시 세계적으로는 성인 유저도 많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다만 그는 이번 신작이 아직 개발 중이고, 공개하지 않은 부분이 있는 만큼 자세한 내용은 때가 되면 더 자세히 말할 것이라고 전했다.
드래곤 퀘스트 역사를 쌓아온 토리야마 아키라와 스기야마 코이치의 부재는 많은 팬에게 슬픈 일이었다. 하지만 호리이 유지는 따뜻한 시선으로 미래를 바라봤다. "두 분은 그림이나 화풍, 곡의 느낌 같은 것들을 정말 많이 만들어주셨어요. 곡은 여러 가지로 활용할 수 있고, 그림도 토리야마 선생님이 많은 것을 남겨주셨습니다"라며, "도라에몽이나 마루코는 아홉살도 원작자가 돌아가신 후에도 작품이 계속 이어지고 있잖아요. 그런 형태로 만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밝혔다.

71세의 나이에도 현역 개발자로 활동하는 원동력에 대한 질문에, 그는 솔직하게 답했다. "게임 자체가 즐겁고 좋아하는 것도 있고, 이번에 훈장을 받거나 플레이어 여러분이 재미있다고, 힘내라고 말해주시는 것이 정말 힘이 됩니다". 그리고 특별한 목표를 밝혔다. "함께 일해온 음악가 스기야마 코이치 선생님이 무려 90세까지 일하셨어요. 드래곤 퀘스트 50주년까지 힘내면 제가 81세인데, 아직 여유가 있네요"라며 웃었다.
과거와 현재, 게임을 만드는 즐거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옛날에는 정말로 게임 만드는 것에 푹 빠져서, 룰을 배우고 모니터 안에서 캐릭터가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기뻤어요. 프라모델을 만드는 것 같은 느낌으로 즐거웠죠"라며 과거를 회상한 그는, "그 만드는 즐거움이 더 나아가서, 완성된 것을 사람들이 플레이하고 그 반응이 돌아오는 것이 지금의 즐거움이에요. 그것이 또 압박감이 되기도 하지만요"라고 덧붙였다.
계속되는 드래곤 퀘스트의 이야기
JRPG 3.0이라는 개념에 대한 질문에 호리이 유지는 깊이 생각한 후 답했다. 앞선 GCON 강연에서 아틀러스의 하시노 카츠라 프로듀서가 언급한 이 개념은, 초창기 JRPG 스타일이 발전한 JRPG 2.0에서 그간의 경험을 한 단계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린 개념이다. 이에 대해 호리이 유지는 어렵다고 하면서도 다음에 대한 고민과 청사진을 함께 내놨다.
그는 "어려운 질문이네요. 더욱 게임 세계에 몰입할 수 있다는 것, 더욱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일까요"라며, "그리고 그 체험한 것이 현실 사회에도 활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 게임을 해서 좋았다, 몇 년이 지나도 아, 좋았다고 기억할 수 있는 것. 현실에서 산을 올랐던 것처럼, 그때 그 던전에서 고생했지 하고 나이 들어서도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 현실의 추억과 게임의 추억이 거의 동등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마지막, 개발자와 플레이어로서 살아온 그를 가볍게 돌아볼 수 있는 질문을 하나 던졌다. 평생 드래곤 퀘스트만 만들 것인가. 아니면 평생 드래곤 퀘스트를 즐기는 플레이어로 살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질문에,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유저로서 즐기는 것도 꽤 괜찮을 것 같아요. 50주년이 지나면 그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라며 웃으며 답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한국 팬들과 개발자들에게 전한 메시지는 간결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한국도 게임이 다양해지고, 좋은 게임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한국 게임들이 많이 나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재미있는 게임을 많이 만들어주세요"라고.
그리고 그는 "게임의 즐거움, 힘든 현실을 잊게 해주는 것, 그리고 게임을 통해 현실에 맞설 수 있는 힘을 얻는 일. 게임으로 가르칠 수 있는 것도 많다고 생각해요"라 말했다.
그런 그의 말처럼, 드래곤 퀘스트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삶의 일부가 되어왔다. 모니터 너머의 사람을 향한 그의 시선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