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개발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롭 팔도 CEO는 블리자드에서 약 17년간 근무하며 스타크래프트2,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디아블로3 등 글로벌 히트작 개발에 핵심적으로 참여했다. 2006년에는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블리자드 퇴사 후 2016년에는 본파이어 스튜디오를 공동 창업해 창의적 독립성과 열정을 기반으로 한 개발 문화를 이어오고 있다.
본파이어 스튜디오의 첫 작품 ‘알케론’은 45명의 플레이어가 3인 1팀으로 나뉘어 15개 팀이 경쟁하는 배틀로얄 PvP 게임이다. 다양한 아이템을 조합해 자신만의 전략과 빌드를 구성할 수 있으며, 선택에 따라 전투 양상이 달라지는 전략적 깊이가 특징이다.
아래는 기조강연 특성에 따라 롭 팔도 CEO 시점에서 재구성한 내용이다.

올해는 본파이어 스튜디오가 설립된 지 10주년이 되는 해다. 나의 게임 개발 여정은 1994년 인터플레이 프로덕션에서 게임 테스터로 시작됐다.
하지만 진정한 개발자로서의 여정은 1997년 블리자드에 입사해 '스타크래프트' 원작을 작업하면서부터라고 생각한다.
이후 2014년 블리자드를 떠날 때까지 실시간 전략 게임, MMORPG, 카드 게임 등 다양한 프로젝트에서 크리에이티브 리더 역할을 맡을 기회를 얻었다. 특히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이후에는 게임 디자인의 기틀을 세우고 경영진의 관점에서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출시된 지 22년이 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발매 당시만 해도 기껏해야 4~5년 정도 서비스될 것으로 예상했다. 영원히 지속되는 게임을 의도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는 요즘의 개념과는 달랐다.
나의 모든 프로젝트가 성공한 것은 아니며, 성공보다 취소된 프로젝트에서의 경험이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대표적인 예로 '워크래프트3'는 1999년 ECTS에서 처음 발표되었을 때 지금과 매우 다른 게임이었다. 자원 채집을 축소하고 영웅 중심의 롤플레잉 전략(RPS)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려 했으나, 결국 원하는 대로 작동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전통적인 형태로 선회해야 했다.
하지만 영웅, 레벨링, 아이템 등 효과적인 아이디어는 유지했다. 보통 실패 후 다음 프로젝트를 위해 사후 분석을 진행해 같은 재앙을 피하려 하지만, 다음 프로젝트에서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문제가 나타나곤 했다.
실패와 잦은 방향 전환은 창의적 발견 과정의 일부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원하는 모든 자원과 재능 있는 인력을 모은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대체할 원대한 목표로 시작된 프로젝트 타이탄이 그랬다.
나는 거대한 게임 프로젝트를 운영하며 할 수 있는 모든 실수를 저질렀다. 게임의 실체가 명확해지기도 전에 기술 구축을 시작했고, 새로운 IP, 새로운 게임 플레이, 새로운 세계관을 동시에 디자인하려 했다. 내 역할이 커졌음에도 파트타임 게임 디렉터 자리를 고집했다.
결국 비현실적이고 과도한 야심 때문에 프로젝트 취소라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는 내 블리자드 경력에서 가장 큰 실패였다.

하지만 그 팀의 일부가 남은 코드 베이스를 바탕으로 전투에 집중한 프로토타입을 만들었고, 그것이 결국 '오버워치'로 탄생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게임을 만드는 과정에서 성공을 예감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개발팀이 게임을 만드는 것보다 플레이하는 것을 더 즐기며 미완성 빌드에 빠져들 때다.
이때 개발팀은 단순히 게임을 즐기는 것을 넘어 매일 게임을 개선하는 데 집착하게 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험하는 등 선순환이 일어난다. 팀이 유저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좇는 대신 스스로 진정으로 믿는 게임을 만들 때 플레이어들도 호응한다.

초기 '스타크래프트' 시절, 나는 사내 커뮤니티 토너먼트를 만들고 최고 플레이어들과 경쟁하며 밸런스를 맞추는 데 집착했다.
훌륭한 밸런스를 맞추는 것은 기획서의 핵심 목표가 아니라 게임을 개선하려는 순수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이것이 예상치 못하게 e스포츠라는 훌륭한 결과물로 이어졌다.

본파이어 스튜디오를 설립하고 투자를 유치할 때, 우리는 의도적으로 게임 기획안이 아닌 회사의 비전과 팀을 내세웠다. 큰 아이디어를 먼저 내고 사람을 고용하는 대신, 팀에 가장 잘 맞는 게임을 찾는 것이 합당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직군에 상관없이 팀원들로부터 '씨앗'이라고 부르는 35개의 초기 아이디어를 모았다. 뱀파이어 서바이벌, 은퇴한 검투사의 농장 지키기 게임, 심지어 댄스 배틀 게임까지 다양했다.
포스트잇 투표를 거쳐 7개의 묘목으로 추렸고, 2~3주간의 스프린트를 통해 심층 기획서를 작성했다. 치열한 논의와 스택 랭킹을 거쳐 구성원들의 열정과 기술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던전 로얄' 콘셉트를 최종 선택했다.
우리는 게임을 내부에서 밖으로 확장한다는 '인사이드-아웃' 철학으로 모든 것의 토대가 되는 핵심 경험을 우선 다듬었다.

과거 '하스스톤'의 경우 비교적 간단하게 2D 플래시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카드 규칙과 게임의 핵심 재미를 찾아냈다.
반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처럼 거대한 게임의 경우, 전체 세계를 구축하기 전에 특정 지역에서 퀘스트 모험 루프가 완벽하게 작동하는지 먼저 확인했다.
신작 개발에서도 전투 감각을 핵심으로 삼고 톱다운 방식, 배틀라이트 스타일 조작감 등을 거쳐 카메라 축을 회전할 수 있는 시점을 도입하며 최적의 시스템을 찾았다. 이를 네트워크에서 완벽히 구현하기 위해 엔지니어링 팀은 9개월에 걸쳐 네트워크 레이어를 예측형 클라이언트-서버 아키텍처로 전면 재구축해야 했다.
우리는 훗날의 재앙을 막기 위해 타협하지 않고 가장 어려운 재작성 작업을 먼저 진행했다. 이후 매일 아침 일일 플레이테스트를 진행하며 게임 그 자체를 디자인 문서로 삼아 빠르게 피드백을 반영했다.

미래의 플레이어 및 커뮤니티와 반복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길 기대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출시 1년 전 알파 테스트 당시 극적인 에피소드가 있었다. 당대 최고 수준의 플레이어가 있었는데, 내가 너프 패치를 단행하자 그는 분노하여 16페이지 분량의 항의 블로그 포스트를 작성했다.
그는 블리자드 CEO와 모회사 임원에게까지 연락해 나를 해고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 과정을 통해 그를 직접 만나게 되었고, 결국 그를 디자이너로 채용했다. 그는 이후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다.
플레이어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게임에 대해 강한 의견을 내는 것을 존중해야 한다. 게임이 정말 성공하여 누군가의 삶의 일부가 되면, 플레이어는 그것을 회사의 제품이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경험한다.
이것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바다.

오랜 진화를 거친 우리 게임의 현재 이름은 '알케론'이다. 원래 정통 판타지 세계관이었으나, 한 아티스트의 "모두가 죽었다면 어떨까?"라는 질문을 계기로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플레이어는 이승에 미련(기억)이 남은 영혼이 되어, 그 닻(기억)의 영향으로 무한히 구조가 변하는 사후세계의 탑을 탐험하게 된다.
15개의 3인조 팀이 동시에 탑에 진입하며, 생존을 다투는 거대하고 치명적인 의자 앉기 게임처럼 전개된다. 탑을 올라가며 몬스터와 싸우고 퀘스트를 수행하지만, PVE는 궁극적으로 다른 플레이어 팀과의 치열한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해 존재한다.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플레이어가 처음부터 영웅으로 시작하는 대신, 영웅들을 '이터널스(Eternals)'라는 아이템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특히 같은 이터널스 세트에 속하는 아이템 4개를 모두 모으면, 플레이어가 직접 해당 영웅으로 잠시 동안 변신할 수 있는 독특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현재 개발 중인 '알케론'이 영원히 지속되는 게임이 될지 결정하는 것은 나의 권한도, 우리 팀의 몫도 아니다.
오늘날의 시장은 수백 개의 훌륭한 게임이 플레이어의 관심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으며, 플레이어의 시선은 파편화되어 있고 기준은 한층 높아졌다.
특히 새로운 PVP 라이브 서비스 게임을 만드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며, 결국 결정은 플레이어들의 몫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만들고 있는 게임을 굳게 믿으며, 올해 드디어 플레이어들에게 검증받을 최고의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오랜 경력을 통해 깨달은 것은 개발자로서 평생 만들 수 있는 게임의 수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
'알케론'과 함께한 여정은 매우 길었고, 그 과정에서 게임 개발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지만 무엇보다 리더로서 큰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GDC에 참석한 여러분 모두가 퇴근할 때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무언가, 현실에 내놓고 싶을 만큼 진심으로 사랑하는 무언가를 만나길 바란다.
또한 그것이 세상에 맞춰 진화하도록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겸손함을 갖추기를 희망한다.
게임 제작자로서 우리는 게임이 영원히 지속될지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기껏해야 그 결과를 확인할 자격을 얻을 뿐이다.
현재 게임 산업은 진입하기 어려워졌고 개발 비용은 상승하고 있으며, 수많은 해고 사태가 발생하는 등 많은 변화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렇기에 경영진이나 비즈니스 리더들에게 마지막으로 이 말을 전하고 싶다. 진정으로 오래 지속되는 게임을 만드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지만, 그런 게임을 선보이는 행운을 얻는다면 그 보상은 엄청날 것이다.
나의 경험상, 그런 위대한 게임을 만들었다는 것은 곧 '믿을 수 없을 만큼 훌륭한 개발팀'을 구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게임 자체보다 게임을 만드는 팀이 훨씬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그 팀을 소중히 여기고 육성하며, 그들이 계속해서 플레이어를 보살필 수 있도록 자율성을 부여해야 한다. 애초에 게임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