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DC26] "내가 좋아하는 글을 썼다", 프로젝트문 한은경 작가 인터뷰

인터뷰 | 이두현, 김규만 기자 | 댓글: 4개 |
프로젝트문 한은경 수석 시나리오 작가는 12일(현지 시각)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GDC(게임 개발자 콘퍼런스) 무대에 올라 '각자의 지옥으로: 림버스 컴퍼니의 입체적 캐릭터 작법 여정'을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2023년 PC와 모바일 플랫폼으로 출시된 '림버스 컴퍼니'는 최고 동시 접속자 수 25만 명을 기록하며 전 세계 유저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게임이다. 한 작가는 이번 강연에서 깊이 있는 개인사를 지닌 12명의 캐릭터가 어떻게 가상 세계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게임의 전체적인 서사를 지탱하는지 상세히 설명했다.

강연 직후 현장에서 한은경 작가를 만나 GDC 참가 소회부터 팀원들을 향한 감사, 그리고 커리어 비화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



▲ 프로젝트문 한은경 수석 시나리오 작가

우선 강연을 무사히 마치신 것을 축하드린다. GDC에 참가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직접 신청한 것인가, 아니면 초청을 받은 것인가?
사실 GDC 측에서 김지훈 대표님에게 먼저 발표를 요청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내가 GDC 무대에 서게 된 데에는 다소 충동적인 이유가 컸다. 최근 9장 업데이트를 준비하며 감정적으로 많이 고갈되었고, 구상을 잘 마무리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매우 컸다.

내 상태를 본 대표님이 "GDC 강연 요청이 왔는데 나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먼저 제안해 주셨다. GDC가 좋은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말씀에 나도 한번 해보겠다고 마음먹었다.


혹시 대표가 가기 귀찮아서 떠넘긴 것은 아닐까?
대표님이 워낙 관심받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셔서 떠넘겼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웃음) 좋은 기회임에도 내게 양보해 주셔서 무척 감사하다.


이력을 보니 넥슨에 있다가 다시 프로젝트문으로 돌아왔더라.
사실 프로젝트문을 처음 퇴사할 때도 연을 끊으려고 나간 것이 아니라, "조금 더 큰 우물에서 경험을 쌓고 다시 돌아오겠다"고 구두로 약속한 상태였다. 넥슨의 '메이플스토리' 팀에 합류해 정말 운 좋게도 짧은 시간 안에 메인 지역, 캐릭터, 신규 직업 등 굵직한 시나리오를 많이 맡았다. 그곳에서 참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마침 당시에 대표님이 그 약속을 잊지 않고 몇 번 찾아오셔서 "때가 되었다. 새로 준비 중인 게임이 있는데 네가 오면 잘할 것 같다"고 제안하셨다. 대표님은 세계관이나 핵심 메시지를 설정하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고, 나는 인물의 정체성이나 관계성, 내러티브, 대사를 쓰는 데 소질이 있어 서로 죽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대표님 역시 그 시너지를 기대하며 지금이 적기라고 말씀하셨고, 나 또한 "그럼 돌아가겠습니다"라고 화답하며 합류하게 되었다.


GDC 참가는 처음인데 소감이 어떤가.
GDC는 다른 게임 행사보다 개발자 간의 소통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행사인 것 같다. 예상치 못하게 정말 대단한 분들을 많이 뵙게 되었고, 그분들은 어떻게 영감을 얻고 힘든 점을 극복하는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또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강연자들의 발표를 들으며, 실시간으로 게임 산업의 최전선에 서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막상 강연을 해보니 어떤가.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지, 아니면 아쉬움이 남는지 궁금하다.
아쉬움은 전혀 없다. 영어를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무사히 마친 것만으로도 정말 후련하다. 내 강연이 대단한 정보나 큰 도움을 줄 거로 생각하며 준비한 것은 아니기에, 그저 와주신 분들께 감사할 따름이다.

강연을 준비하며 지난 글쓰기 시절을 돌이켜보니 '아, 내가 이런 마음으로 글을 썼구나, 힘들 때 이런 방식으로 극복했구나' 하고 깨닫게 되더라. 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발표 주제를 선정하고 완성해 나가는 과정은 어땠나.
처음에는 글을 쓰며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힘들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치열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다 담으려다 보니 내용이 너무 길어지고 두서가 없어지더라. 그래서 원고를 한 번 갈아엎고, 우리 게임의 핵심 키워드인 '지옥'으로 접근해 입체적인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여정에 초점을 맞췄다.

글을 쓰며 유난히 힘들었거나 애착이 가는 캐릭터에 관해 이야기하고, 이것이 내 직접적인 경험과 어떻게 맞닿아 있으며 그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들려주면 사람들이 좋아할 것이라 생각해 주제를 다듬었다.


강연이 끝나고 Q&A가 복도에서 30분 정도 진행됐다. 기억에 남는 질문이나 소감이 있다면.
질문을 받을 때 거의 머리가 하얘졌다.




지켜보니 세계적인 석학들이 논의하는 것 같더라.
맞다. 질문자분들이 마치 석·박사 같아서 '내가 여기서 감히 말을 얹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부분까지 깊게 파고들며 "이거 맞죠?"라고 물어보시는데, 맞다고 대답하면서도 묘한 죄책감이 들었다.(웃음)

이렇게까지 깊이 분석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지만, 내가 엄청난 재능이 있어 처음부터 모든 것을 완벽히 설계한 것은 아니기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칭찬을 과분하게 해주셨는데, 그 밑바탕에는 모두 대표님의 아이디어와 콘셉트가 깔려 있다 보니 '내가 이 칭찬을 다 받아도 되나' 싶기도 했다.


한국 게임 개발자가 만든 시나리오가 영어권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줬다. 시나리오의 힘일까, 아니면 번역의 힘일까.
둘 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문장을 쓸 때 의미를 깊게 담고, 몰입감과 여운을 남기려다 보니 글쓰기 속도가 조금 느린 편이다. 대표님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세계관이 유저들에게 잘 와닿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습관이다.

사실 우리는 2017년 '로보토미 코퍼레이션' 때부터 대중적인 사랑을 노리기보다는, 우리가 좋아하는 내러티브 방식을 추구하며 글을 썼다. 스토리가 난해하고 비유가 많아 이해하기 힘들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어쨌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스토리를 써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묵묵히 쓰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결국 나와 같은 지향점을 추구하고 비슷한 취향을 공유하는 분들이 많았기에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한다.

물론 번역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내 자리 바로 옆에 번역가분들이 계시는데, 현지화 작업을 하며 정말 많은 고민을 하고 내게 질문도 자주 하신다. 이 텍스트를 어떻게 하면 영어권이나 일본어권 유저들에게 자연스럽게 전달할 수 있을지 활발하게 소통하고 있다. 이런 모든 과정이 융합되어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번역가들이 작가의 의도대로 잘 번역하고 있는지, 검수나 확인은 어떻게 진행하는가.
내가 영어 텍스트를 직접 검수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번역가분들의 포트폴리오를 보니 문학을 무척 사랑하고 나와 비슷한 문학적 스타일을 추구하는 분들이었다. 비록 텍스트 자체를 직접 확인하지는 못하더라도, 내게 질문하시는 내용이나 업무 방식을 보면 원문의 맥락과 표현을 온전히 살리려 노력하시는 것이 보여 자연스럽게 신뢰가 생겼다.




'림버스 컴퍼니'에 차용된 12개의 고전 문학 모티브가 시나리오를 집필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스토리를 구상하며 모티브가 된 문학 작품들을 읽는 동시에, 당시의 시대 상황이나 원작자에 대해서도 깊이 공부했다. 시대상이 혼란스러웠던 만큼, 작품 속에도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자아들이 짙게 배어 있더라. 원작자가 어떤 마음으로 작품을 썼을지 헤아려보고, 그 시대였기에 등장할 수 있었던 주제 의식과 사상을 탐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 게임의 시나리오에도 그 깊이가 녹아들었다.


팀 동료들에게 전하고 싶은 감사 인사가 있다면.
강연에서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는데, 주제와 벗어나는 바람에 덜어낼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를 빌려 마음을 전할 수 있어 다행이다.

'림버스 컴퍼니'는 정말 많은 사람의 노력이 모여 만들어진 작품이다. 대표님의 독창적이고 기발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수많은 팀원이 고생하며 살을 붙여 나간다. 우리 회사는 스토리가 중심이다 보니, 스토리에 따라 개발 방향이나 전투 메커니즘, 연출이 뒤바뀌는 일이 잦다. 의사 결정에 시간도 꽤 걸리는데, "왜 이제야 정했냐", "왜 또 바꾸냐"고 불평하기보다 "이렇게 바꾸면 확실히 더 재밌겠네요"라고 응원해 주시는 분들이 많다.

예전에 프로그램 팀장이셨던 PM님도 급하게 개발 방향이 수정되었을 때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이렇게 가면 스토리가 더 흥미로워질 것 같다"고 말씀해 주셨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다들 멋진 게임을 완성하기 위해 한마음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서 무척 감사하다.

성우분들의 노고도 대단하다. 워낙 대사량이 방대한 데다 인물의 입체적인 면모가 잘 드러나야 해서 내가 디렉팅을 꽤 까다롭게 하는 편이다. 어떤 챕터는 10시간 넘게 녹음한 적도 있는데, 피곤하고 예민해질 법한 상황에서도 기색 전혀 없이 스토리를 깊이 이해하려 질문도 하시고 계속 연구하신다.

한국어를 모르는 해외 팬들조차 "더빙만 들어도 인물의 감정이 전해진다", "한국 성우들 정말 대단하다"고 극찬할 정도로 열정적이시다. 그 밖에도 녹음 일정을 조율해 주시는 분들과 모든 스태프분들께 항상 감사한 마음뿐이다.



▲ "'림버스 컴퍼니'는 많은 사람의 노력이 모여 만들어진 작품, 모든 스태프분께 항상 감사하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펼쳐질 게임 시나리오를 기대하고 있을 유저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린다.
이야기를 창작하는 과정은 늘 고통스럽고, 재미있게 써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대표님과 나, 그리고 모든 팀원이 항상 치열하게 고민하는 부분이다. 다음번에도 무조건 멋지고 완벽한 스토리를 보여드리겠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언제나 최선을 다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만큼은 꼭 말씀드리고 싶다.

댓글

새로고침
새로고침

기사 목록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