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칭 액션 게임에는 낭만이 있다.
모니터 바로 앞으로 떨어지는 서슬퍼런 칼 끝, 뒤에서 날아드는 모닝스타에 아무것도 모르고 뒤통수가 터져나갈 때의 좌절감. 적의 공격을 정확히 예측해 쳐내고 치명타를 가할 때의 희열. 그래. 낭만이 있다.
사촌 격인 FPS가 게임의 태동기부터 지금까지 인기 장르로 이어지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낭만'일 거다. 동등한 입장에서 온전히 실력으로 갈리는 승부. 이 피터지는 막고라, 홀름강, 생사결. 뭐가 됐든 결투에는 낭만이 있다. 다만, 화약의 추진력으로 너무 빠르게 갈리는 승부에 다소 부족함을 느끼는 이들은 나 처럼 1인칭 액션에 녹아든다. 불꽃보단 강철로, 폭발과 에임 실력보단 완력과 전투 센스로 갈리는 승부 말이다.
다크 메시아: 마이트 앤 매직, 디스아너드 시리즈. 버민타이드와 다크타이드, 그리고 쉬벌리 시리즈와 모르드하우까지. 1인칭 액션 게임을 제대로 즐긴 게이머들이라면 이 게임들이 주는 칼 끝의 짜릿함을 알고 있다. 문제는, 이 재미는 아는데, 충족해 줄 게임이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는 거다.
그러던 와중, '페이트키퍼'가 눈에 들어와버렸다. 뭔가 요상하면서도 독특한 게임들을 주로 유통하는 THQ 노르딕이 내세운 신작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던 작품. 보자마자 이건 해 봐야겠다 싶었던 그 녀석.
신체 나이는 곧 불혹, 직업은 게임 기자. 내게도 아직 불타오를 심지가 남아 있다. 이게 얼마만의 1인칭 액션 게임이야?

이게 언리얼 5 인가 뭔가 그거냐
국내 한정 빅맥 지수만큼 합리적인 국밥 지수에 따르면 딱 국밥 한 그릇 정도 가격에 구매한 게임. 근데 용량이 심상치 않다. 거진 40기가바이트에 육박하는 용량. 만 원도 안 하는 게임이 용량이 이렇다고?
게임을 켜 보니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이 게임. 그래픽이 심상치 않다. 언리얼 엔진5를 사용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걸 감안해도 대충 깎은 그래픽은 아니다. 보통, 이렇게 무슨무슨 엔진을 사용했다는 걸 내세우는 게임들은 엔진 그 자체에 함몰되어 오히려 자기만의 색을 잘 살리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데, 가격대비 합리적인 선을 유지하고 있다.

걱정했던 시인성 부분도 나쁘지 않다. 보통 그래픽 퀄리티에 매몰되는 게임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화려함을 따라가다 실속을 놓치는 거다. 너무 쨍한 화면에 적들이 안 보인다거나, UI 색상이 따로 놀아 직관적으로 정보가 들어오지 않는 등 말이다.

동시에, 게임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액션'도 훌륭하다. 피가 퍽퍽 터져나가고, 공격에 맞은 적이 비틀대거나 넘어지고, 결정타를 먹이면 팔 다리 머리가 쑹덩쑹덩 떨어지는 것이 진짜배기라 할 만 하다. 독일산 게임들은 높은 정부 지원금 대비 굉장히 컷 높은 검열 탓에 표현이 다소 절제된 면들이 없잖아 있는데, 파라글레이셜은 독일 스튜디오임에도 거침없는 액션을 보여준다.
일단 초반 인상은 합격이라는 뜻이다.

전투 자체로 즐겁지만, 때로는 진지한
다른 게임들은 주지 못하는, 1인칭 액션 게임의 또 다른 매력이 있다. 1인칭 액션 게임은 내 행동, 그리고 그 결과가 굉장히 몰입감 높으면서도 무척 빠르고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1인칭 슈터에서 적을 맞추면 풀썩 쓰러지는 적이 끝이다. 3인칭 액션은 호쾌하지만, 내가 싸우는게 아닌, 내 캐릭터가 싸우는 느낌이라는 점이 살짝 아쉽다. 하지만 1인칭 액션은 다르다. 내 행동에 의한 결과가 바로 나온다. 쥐어박으면 비틀거리고, 발로 차면 넘어지고, 후려치면 굴러다닌다. 이게 잘 되어야 1인칭 액션의 재미를 잘 담았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페이트키퍼'는 이 부분을 정말 잘 깎았다. 전체적인 게임의 완성도를 보면 아직 모든 면에서 부족하지만, 그래도 계속 기대할 만한 게임인 이유가 바로 이 '행동에 따른 즉각적 결과'가 보이기 때문일 거다. '다크 메시아: 마이트 앤 매직'을 인상깊게 한 게이머들이라면 아마 그 게임만의 매력이 뭔지 알 거다. 단순히 칼을 섞는 것 이상으로, '다크 메시아'는 내 행동에 대한 결과가 직관적으로 나타났다.
달려오는 적의 앞에 얼음을 깔면 미끄러져 허우적대다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절벽의 적을 발로 차 버리면 그대로 떨어지며, 천장에 매달린 나무통을 추락시켜 밑에 있는 적을 뭉갤 수도 있다. '스카이림'을 플레이 한 사람 치고 절벽에서 '푸스로다'로 적 날려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며, '오버워치'에서 넉백으로 적을 낙사시켜보지 않은 이가 어디 있을까? 이게 재미있는 부분이다. 1인칭에선 더 재밌는데, '페이트키퍼'는 이걸 기가 막히게 해 놨다. 20년 전 '다크 메시아'가 떠오를 정도로 말이다.


솔직히, 이것만으로도 게임은 충분히 재밌다. 국밥 한 그릇 가격은 충분히 한다. '페이트키퍼'의 적들은 묘하게 잘 안 죽는다. '버민타이드'와 '다크타이드'로 대변되는 팻샤크의 게임들과는 지향점이 다소 다르다. 그 쪽이 우르르 쏟아지는 적들을 와장창 박살 내며 나아가는 호쾌함을 무기로 삼았다면, '페이트 키퍼'는 묘하게 질긴 적들을 주변 환경과 잔머리로 하나씩 없애며 나아가는 재미다.

물론, 보스전에 이르면 다소 진지해진다. 현재 빌드에서는 총 2개체의 보스가 등장하는데, 소울라이크 못지 않은 긴장감 넘치는 전투가 진행된다. 얻어 맞으면 나자빠져 구르는 건 적이나 나나 똑같다. 제대로 맞으면 주인공도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다른 게임들처럼 주인공이 굴러다닐 동안 잡몹들이 구경을 하는 것도 아니다. 제대로 맞으면, 바닥을 쓸며 굴러다니다 집단 린치에 바로 체크포인트로 직행한다.

더 가져와! 더! 더!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자면, '페이트키퍼'는 미완성 게임이다. 현재 빌드의 분량은 3시간 남짓한 데모 수준이며, 세계관과 서사도 아직 뭐가 뭔지 잘 알 수가 없다. 보스는 말한 대로 두 종이 전부이며, 방대한 스킬 트리가 존재함에도 정작 찍을 수 있는 스킬은 10%가 채 안 된다. 게다가 한국어 지원도 아직 없다. 그 뿐이랴, FOV 조절 옵션이 없어 3D게임에 무척 강한 나조차 가벼운 멀미감까지 느꼈다.


하지만, 현재 빌드로도 개발사인 '파라글레이셜'은 '페이트키퍼'라는 게임이 무엇을 지향하고, 어떤 게임으로 만들어 나갈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디자인적으로, 그리고 컨셉적으로 '페이트키퍼'는 '투 톤'을 지향하는 게임이다. 게임의 코어가 되는 실력 본위의 '전투', 그리고 이 실력을 보충할 수 있는 '성장' 시스템의 투 톤. 온갖 지형 지물과 환경, 마법을 활용해 창의적으로 풀어내야 하는 잡몹들과의 전투, 그리고 퇴로 없는 진지한 싸움을 해야 하는 '보스전'의 투 톤.
여러모로, '전어회'같은 게임이다. 한 마리 잡아 봐야 양도 별로 안 나오고, 뼈까지 씹혀 좀 불편하긴 하지만 제철에 맛볼 수 있는 그 녹진한 맛은 비교할 데가 없다. 더 오래 즐기고 싶어도, 가을이 다 지나고 기름기가 빠지면 그냥 기다릴 수 밖에 없다. 빨리 개발 더 해서 가져오라는 뜻이다.
모든 이들의 취향에 맞는 게임은 아니겠지만, 1인칭 액션의 팬들에게는 분명히 어필할 만한 강점을 지녔다. 15시간 분량으로 구성된다는 정식 출시가 언제 이뤄질지는 모르지만, 게임의 정식 출시를 기다린다면 지금이 아마 저점일 거다. 13명의 개발자로 구성된 '파라글레이셜'이 정식 출시까지 열정을 이어갈 수 있을지는 살짝 도박이란 느낌이 들지만, 나는 일단 믿어 보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