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벤] [뉴스] 역사관 업데이트-세 망치단 의회: 강철과 화염

홍준기 기자 | 댓글: 92개 |




브론즈비어드, 와일드해머, 검은무쇠 부족들이 내부적인 갈등에 휘말린 가운데, 이제 막 시작된 세망치단 의회는 아이언포지에 내전을 촉발 시킬 만한 거대한 시련에 맞닥 뜨리게 되었습니다.



'쿠르드란의 선조가 살던 도시는 낡은 편견이 뒤끓는 가마솥이었다. 끝없이 끓어오르며 뿜어져 나온 독과 같은 연기는 백 년이 넘는 세월 중 아이언포지에 처음 함께 살게 된 브론즈비어드, 와일드해머, 검은무쇠 드워프 사이에 남아 있던 논리와 이성마저 녹여버렸다. 이 모든 일의 끝자락에 선 쿠르드란은 혼란스러운 상태로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 가마솥의 타오르는 심장부를 지켜보고 있었다.


쿠르드란은 불안감에 사로잡혀 아웃랜드에 꼼짝없이 갇힌 채, 저주받은 피의 호드와 전쟁을 벌이던 때의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아이언포지에 적이라고 단정 지을 만한 존재는 없었다. 미치광이 악마도 없었고, 세상의 명을 끊어놓겠다며 덤벼드는 광포한 오크도 없었다. 단지 말만 오고 갈 뿐이었다.'


☞ 공식홈페이지 아제로스의 지도자들 : 강철과 화염 바로가기




맹금의 봉우리 위로 펼쳐진 하늘은 얼어붙은 한겨울 밤의 모닥불에서 퍼져 나오는 은은한 빛처럼 쿠르드란 와일드해머를 유혹했다. 아웃랜드라는 지옥 같은 땅에 붙들려 20년이란 세월을 보낸 뒤, 드디어 돌아온 고향이었다. 오크족 호드와 싸우기 위해 얼라이언스 원정대에 합류했던 건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었으나, 험난했던 세월 동안 이 하늘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가슴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지난 20년간 늘 활기 넘쳤던 그의 그리핀 스카이리가 제 동족 셋과 머리 위를 활공했다. 쿠르드란은 당장에라도 스카이리 위에 올라 온 얼굴로 산바람을 맞고 싶었다. 운명은 그를 두 다리로 걷게 했으나, 쿠르드란이 진정 자유를 느꼈던 곳은 땅이 아닌 하늘이었다. 스카이리가 그에게 준 최고의 선물은 전쟁 중의 용맹함이나 평화 속의 우정보다도 그의 날개가 되어주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스카이리 홀로 하늘로 솟구치게 놔둘 참이었다.






쿠르드란은 심호흡하고 그가 살던 집을 찾았다. 사방으로 뻗은 울창한 숲. 와일드해머 드워프들이 경사진 산길을 따라 들어선 상점과 집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었고, 맹금의 봉우리 꼭대기에 우뚝 솟은 귀한 그리핀 모양의 거대 그리핀 출격장이 보였다. 모든 것이 그가 떠나기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쿠르드란은 옆구리에서 여러 가닥의 풀로 싸여 있고 그리핀 깃털이 달린 작은 철제 홀을 집어 들었다. 그건 무기가 아니었다. 그의 무기,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폭풍망치는 그의 등에 매달려 있었다. 철제 홀은 뭔가를 떠올리기 위한 도구였다. 홀은 아웃랜드에 머무는 동안 자연스럽게 자신, 그리고 그가 지켜야 하는 고향을 상기시켜주는 신성한 물건이 되었다. 그 홀을 꼭 쥐었던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그는 희망으로 온몸이 충만해짐을 느꼈다. 고향으로 돌아온 지금에도 홀의 효능은 -



날카로운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쿠르드란은 위를 올려다보았고, 커다란 공포가 엄습하는 걸 느꼈다. 날개가 비정상적으로 뒤틀린 스카이리가 나선을 그리며 지상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스카이리!” 쿠르드란이 울부짖었다.



끔찍한 소리와 함께 그리핀이 땅바닥에 처박혔다. 다리가 부러진 부위에서 날카로운 뼈가 드러났고, 갈라진 두개골에서는 피가 솟구쳤다. 스카이리는 다시 날아오르려 했으나, 엄습하는 고통에 주저앉았다. 스카이리는 부리를 벌리고 구슬픈 비명을 내질렀다.







“움직이지 마!” 쿠르드란이 소리쳤다. 그리고 쿵쿵 뛰는 심장 소리를 느끼며 쓰러진 동료에게 뛰어들었지만, 순간 손이 뻣뻣해지는 걸 느꼈다.



그가 들고 있던 홀에 거품이 일더니 섬뜩할 정도로 친숙한 무언가로 변하고 있었다. 수정... 아니 다이아몬드였다. 다이아몬드에서 빛나는 덩굴손이 튀어나와 그의 손을 스르르 타고 오르더니 쿠르드란의 팔을 바위처럼 딱딱하게 얼려버렸다. 끈적거리는 물질은 가슴을 타고 하반신으로 내려가더니 이번엔 그의 다리를 지면에 고정시켰다.



쿠르드란은 등에 찬 폭풍망치를 잡으려고 팔을 뻗었으나. 무기를 채 꺼내기도 전에 다이아몬드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그 자리에 얼어붙은 쿠르드란이 유일하게 할 수 있던 건 수없이 여러 번 자신의 목숨을 구해줬던, 또 하나의 자신처럼 소중해진 그리핀이 천천히 피 흘리며 눈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뿐이었다.



차갑고 무거운 다이아몬드의 감옥은 쿠르드란의 목을 타고 목구멍을 지나 허파까지 퍼져나갔다. 결국 다이아몬드는 그의 눈과 귀를 덮었고, 스카이리와 그를 부르던 푸른 하늘도 사라져갔다.



하지만 쿠르드란은 죽음의 자유를 얻지 못했다. 두려움이 제련소의 쇳물처럼 그의 정신에 스며들어올 동안, 그는 아직 공허 속에 있었다. 이윽고 어디선가 희미한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오더니 점점 큰 소리로 울려 퍼졌다.


쿵. 쿵. 쿵.


한 번 울릴 때마다 그의 온 몸에 둔탁한 진동이 퍼졌다. 마치 누군가가 죽음의 장막을 걷어내고 그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둔탁한 물체로 내리치는 것 같았다.


쿵. 쿵. 쿵.


몸을 짓누르던 딱딱한 느낌이 약해지고, 다리에 감각이 돌아왔다. 그리고 음색이 바뀌었다.


땅. 땅. 땅.


쿠르드란은 이 익숙한 소리를 듣고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악몽에서 막 깨어나 또 다른 악몽에 발을 들여 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모루를 때리는 망치의 금속 마찰음이었으나, 그 울림은 그가 살던 도시의 것이 아니었다. 확 트인 하늘의 기쁨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산속 깊숙한 곳에 만들어진 바로 그 도시,



아이언포지의 소리였다.



* * * * *




쿠르드란의 선조가 살던 도시는 낡은 편견이 뒤끓는 가마솥이었다. 끝없이 끓어오르며 뿜어져 나온 독과 같은 연기는 백 년이 넘는 세월 중 아이언포지에 처음 함께 살게 된 브론즈비어드, 와일드해머, 검은무쇠 드워프 사이에 남아 있던 논리와 이성마저 녹여버렸다. 이 모든 일의 끝자락에 선 쿠르드란은 혼란스러운 상태로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 가마솥의 타오르는 심장부를 지켜보고 있었다.



쿠르드란은 불안감에 사로잡혀 아웃랜드에 꼼짝없이 갇힌 채, 저주받은 피의 호드와 전쟁을 벌이던 때의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아이언포지에 적이라고 단정 지을 만한 존재는 없었다. 미치광이 악마도 없었고, 세상의 명을 끊어놓겠다며 덤벼드는 광포한 오크도 없었다. 단지 말만 오고 갈 뿐이었다.



몇 주 전 쿠르드란이 아이언포지에 도착했을 때, 그는 아웃랜드에서의 희생으로 영웅에 가까운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와일드해머를 겨냥한 근거 없는 소문이 마치 수년 전 드워프의 단결을 갈라놓은 잔혹한 세 망치의 전쟁 때처럼 은밀하게 아이언포지의 어딘가에서 새어 나왔다. 소문의 종류는 꽤 다양해서, 맹금의 봉우리에서 희생 의식이 치러졌다는 것부터 쿠르드란이 후퇴하려고 아웃랜드에 있는 얼라이언스 투사 여남은 명을 처형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몇 주 전부터 드워프들의 관심은 새로운 주제에 쏠려있었다.


“의회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쿠르드란 영주님.”


쿠르드란은 아이언포지 경비병의 말을 무시하고 와일드해머 홀을 손에 꼭 쥐었다. 그는 아이언포지의 그리핀 횃대에서 동굴 같은 거대한 용광로를 보았다. 대용광로라는 딱 맞는 이름이 붙여진 아이언포지의 심장부였다. 녹은 금속의 물줄기가 폭포처럼 천장에서 쏟아져 노르스름하고 뜨거운 주황색 웅덩이로 빨려 들어갔다. 부글부글 끓는 액체 금속의 통 너머로는 드워프 대장장이들이 모루에 망치를 힘껏 휘두르고 있었다. 열기, 특히 제련소 근처의 열기는 비정상적으로 답답하고 숨 막혔다. 마치 이들을 질식시키려고 뜨거운 불볕 아래 투명한 유리병 속에 가둔 것처럼.



스카이리는 거대한 몸 안에 다리를 숨긴 채, 짚으로 만든 둥지 위에 앉아 있었다. 쿠르드란은 자신의 거친 손을 깃털이 수북한 스카이리의 갈기 속에 넣고 자신의 운명에 대해 생각했다.


“난 왜 여기 온 거지?” 쿠르드란이 한숨을 쉬며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피비린내나는 과거가 되풀이되지 않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어디선가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 썬더스트라이크가 쿠르드란 근처에 떨어진 짚 더미를 가지런히 쌓아 올리고 말했다. "또한 브론즈비어드 부족이었으나 훌륭한 드워프셨던 마그니 국왕님 때문이죠. 그리고 영주님이 직접 폴스타트 님께 이 일에 적합한 건 자신이라 주장하셨기 때문이기도하고요.” 스카이리의 관리인이 말을 이었다.



엘리의 말은 쿠르드란의 머릿속에 아픈 기억을 불러왔다. 아웃랜드에서 돌아오면서, 쿠르드란은 자신의 빈자리를 채우고 와일드해머 드워프를 통솔했고, 가까운 친구이기도 했던 폴스타트에게 무례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폴스타트를 생각할수록 그런 생각은 쿠르드란의 문제를 심화시킬 뿐이었기에 그는 억지로라도 자신의 친구에 대한 걱정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애썼다.



스카이리가 엘리의 말을 끊으려는 듯, 목구멍에서 낮은 우는 소리를 내며 쿠르드란을 부리로 살짝 찍었다.


“자네에게 한 말은 아니었네.” 쿠르드란은 엘리에게 아니라는 듯한 몸짓으로 손을 흔들고 스카이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한테 한 말도 아니었어, 스카이리.”


스카이리가 짚으로 만든 둥지에서 다시 자리를 잡는 사이에, 아이언포지에 도착하자마자 낳은 푸른색 점이 찍힌 연푸른빛 알 세 개가 얼핏 드러났다. 쿠르드란은 스카이리를 도시에 남길 바에야 당장에라도 맹금의 봉우리로 보내고 싶었으나, 스카이리가 그의 곁을 떠나길 거부했다. 스카이리는 단순한 탈것이 아니었다. 스카이리는 자유로운 영혼이었으며, 쿠르드란처럼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권리가 있었다.



스카이리의 결정은 쿠르드란에게 기쁨과 동시에 분노를 가져왔다. 갓 알을 낳은 스카이리는 너무 약하고 무뎌져 더는 날 수 없었다. 수많은 사제, 그리핀 조련사와 연금술사들이 스카이리를 검진하곤 같은 결론을 내렸다. 스카이리의 증상은 아웃랜드나 아이언포지에서 옮은 희귀병이 아니었다. 질병이 아니었기에 시간만이 유일한 치료법이었다.


“쿠르드란 영주님.”


“곧 간다고 하지 않았나!” 쿠르드란이 버럭 화를 내곤, 아이언포지 경비병을 째려보았다.


“그렇게 자리에 앉아선 가실 수가 없죠. 안 그렇습니까?” 엘리가 책망하곤 일을 계속했다.


쿠르드란은 끙 앓는 소리를 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옷을 입은 브론즈비어드 경비병은 휙 돌아서더니 대용광로를 둘러싸고 있는 보도로 뻗은 그리핀 횃대를 비틀거리며 가로질러갔다. 이 그리핀의 보금자리는 와일드해머 부족이 각자의 그리핀을 이끌고 아이언포지에 온 이래로 두 배는 더 커져 있었다. 어떤 면에서 맹금의 봉우리를 연상시켰다. 또 다른 고향 같았다.



옆구리에 홀을 낀 채, 쿠르드란은 짚더미 사이사이에 앉은 와일드해머 그리핀 기수들의 인사를 받아주며 경비병을 따랐다. 침울했던 쿠르드란 만큼이나 다른 드워프의 얼굴도 그가 죽으러 가기라도 하는 듯, 침울한 표정이었다.


어떤 면에선, 틀린 것도 아니었다.







쿠르드란은 경비병을 따라 보도를 지나 왕좌를 향했다. 왕좌 밖에는 혈기 넘치는 드워프 군중이 서 있었다. 도시 곳곳에서 타오르는 강철 화로의 불빛이 이들의 얼굴에 아른거렸다. 각 부족의 의원들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번쩍거리는 은빛 갑옷의 브론즈비어드 부족, 그리핀 깃털로 치장하고 문신한 와일드해머 부족. 그리고 그을린 자국으로 가득한 작업용 앞치마를 입은 잿빛 피부의 검은무쇠 부족도 있었다. 이들은 아이언포지의 현 상황을 한눈에 보여주는 축소판이었다. 브론즈비어드 부족이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와일드해머와 검은무쇠 부족이 소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쿠르드란은 군중 사이를 뚫고 가며 드워프 사이에 가열된 언쟁을 부분부분 들을 수 있었다.


“우리 브론즈비어드 부족은 모디무스 망치 조각을 본래 모습 그대로 보관해왔다!”


“너흰 도서관에 처박아뒀을 뿐이잖아. 먼지 쌓이게 말이야. 와일드해머 부족은 조각을 새롭게 재창조했지.”


“이런, 친구. 브론즈비어드 놈들과 이런 걸로 다툴 필요 없어. 아이언포지에서 발견된 조각은 모두 놈들이 고대 석실에서 빼돌린 물건일 뿐이니까.” 근처의 그리핀 기수가 소리쳤다.


인파 속의 누군가가 고함쳤던 그리핀 기수를 쿠르드란 쪽으로 밀치자, 군중은 그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비켜!” 쿠르드란이 외쳤다.


그의 근처에 있던 몇몇 드워프들이 길을 비켰다. 다른 이들은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로 쿠르드란을 노려보았다.


“나비 부족을 대표하는 쿠르드란이 지나갈 수 있게 길을 만들어라!” 누군가 비아냥 섞인 목소리가 외쳤다. 쿠르드란의 와일드해머 부족을 경멸하는 표현이었다.


“쿠르드란이 모디무스 망치의 조각을 포기하는 데 동의하는 자들에겐 내가 맥주를 한 잔씩 사겠다!”



머리가 제대로 달린 드워프라면 포기하지 않는다는 데 걸어야지!”


쿠르드란은 드워프의 마지막 줄을 헤치고 왕좌에 올랐다. 아이언포지의 섭정의 근거지라 할 수 있는 천정에 매달린 조명의 불빛이 높은 금속제 벽을 비추는 이 방은 도사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어둑하고 그늘진 곳이었다. 방 안쪽에 솟아오른 단상의 정상에는 같은 모양의 세 망치단 의회 왕좌가 있었다.



쿠르드란의 눈이 중앙의 왕좌에 고정되었고, 오싹한 기운이 그를 엄습했다. 그 왕좌는 한때 마그니 국왕의 자리였다. 쿠르드란이 의회에 합류했을 때, 마그니 국왕의 동생인 무라딘은 고대 도시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쿠르드란을 데려간 적 있었다. 그곳에서 쿠르드란은 악몽에나 나올법한 모습을 보고 말았다. 바로 다이아몬드 상으로 변한 마그니 국왕이었다. 그는 전 세계를 덮친 지진, 태풍과 다른 재앙들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대지와 대화하는 마법 의식을 행하던 중 다이아몬드 상으로 변했다.



이제 중앙의 왕좌는 무라딘의 차지였다. 쿠르드란은 그 브론즈비어드 드워프를 바라보았고, 곧 악의적인 시선을 돌려받았다. 그건 쿠르드란이 아이언포지에 처음 입성했을 때 받았던 유쾌한 환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의회에서의 첫날, 쿠르드란은 무라딘과 많은 맥주를 나눠 마시며, 아웃랜드에서의 모험담을 털어놓았고, 브론즈비어드 역시 얼어붙은 땅, 노스렌드에서의 모험담을 나누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무라딘은 와일드해머 부족인 쿠르드란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점점 더 그를 차갑게 대했다.






무라딘의 오른편엔 마그니 국왕의 딸, 모이라 타우릿산이 앉아 있었다. 비록 브론즈비어드 부족의 옛 맞수였던 검은무쇠 부족과 결혼하여 아버지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겼으나, 그녀는 자신의 발 옆에 흔들거리는 아기 침대에서 평화로이 잠든 젖먹이 동생, 다그란과 함께 아이언포지의 법적인 왕위 계승자였다.


완벽한 쪽진머리 모양을 한 왕위 계승자 모이라가 쿠르드란을 향해 살짝 허리를 굽혔다. “어서 오십시오. 쿠르드란.”


“왔소.” 짧게 답한 쿠르드란이 왕좌 쪽으로 난 경사로 아래 있는 나무 탁자를 지나갔다. 탁자 위에는 지난 주에 폭발 직전의 가마솥이었던 아이언포지를 폭발시킨 문제의 두 유물이 놓여있었다. 짙은 보랏빛 보석이 박힌 울퉁불퉁한 나무 지팡이와 긁히고 휘어진 망치의 머리 부분이었다.



쿠르드란은 유물을 확인하고 얼굴을 찡그린 채 무라딘의 왼쪽에 있는 왕좌에 앉았다. 모이라와 무라딘 옆에서 아이언포지를 통치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으나, 그는 왠지 허전함을 느꼈다. 의회에는 브론즈비어드 부족으로 가득했고 다그란의 영향으로 검은무쇠 부족도 많았지만, 쿠르드란 측 왕좌에는 아무도 없었다.



왕좌로 가는 입구에서 들리던 잡담소리가 작아졌고, 주름투성이의 조언자 벨그룸이 단상 위에 올라 허리를 굽혔다. 근처의 두 젊은 역사가도 존중의 표시인 벨그룸의 행동을 따라 했다. 그중 한명은 밝은 붉은빛 튜닉을 입은 작은 와일드해머 드워프였는데 다른 이들의 말에 따르면 철저하게 진실을 확인하는 자라고 했다.


벨그룸은 허리를 일으키고 앞으로 이동했다. “어서 오십시오, 쿠르드란 영주님. 결정은 내리셨습니까?”


쿠르드란은 방에 들어갔다. 최근 똑같은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같은 질문을 받았고, 과격한 드워프 군중도 같았다. 걱정스러운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똑같았던 벨그룸의 물음에 쿠르드란은 항상 “아직”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어젯밤 와일드해머와 브론즈비어드 드워프가 쿠르드란이 손에 쥔 홀을 두고 하찮은 말다툼을 벌였고, 결국 죽음을 맞은 사건이 일어난 직후였다.


“다른 선택권이 없군.” 쿠르드란이 답했다.


“이런...” 무라딘이 한숨을 쉬었다. “얼마나 더 끌어야...”


“쿠르드란.” 모이라가 끼어들었다. “우리 셋 중에 가장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하는 자는 당신이오. 망치 조각을 유지하는 길을 택한다면, 우리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될 거요.”


쿠르드란은 부들부들 떨리는 벨그룸의 늙은 손아귀의 너덜너덜한 두루마리로 시선을 옮겼다. 지난주 아이언포지의 도서관에서 발견된 양피지는 몇 세기 전의 드워프 내전을 다루고 있었다. 아이언포지의 모디무스 앤빌마 대왕이 죽었을 때, 부족들은 도시의 패권을 두고 전투를 벌였다. 그 과정에서 모디무스의 무기인 “대왕의 망치”가 갑자기 사라졌다. 쿠르드란도 지난 몇 년간 망치의 행방에 대한 소문을 지겹도록 들어왔다. 하지만 이 양피지는 모든 논란의 종지부를 찍었다. 양피지에 따르면 모디무스 망치는 세 조각으로 나뉘었고, 전쟁의 혼란 속에서 세 부족이 각자 하나씩 조각을 손에 넣었다. 아이언포지의 불투명한 미래와 맞닥뜨린 지금, 어리석은 드워프들에게 망치의 수선은 평화로 가는 지름길이거나 오래된 대립 관계와 적대감을 발산하는 수단이었으리라. 쿠르드란은 추측했다.



쿠르드란은 고개를 저어 시선을 두루마리에서 떨쳐냈다.


“결정을 내렸다.” 쿠르드란이 손의 철제 홀을 높이 쳐들며 외쳤다. “이 계승품은 수 세기 동안 와일드해머 부족의 일부분이었다. 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의회에 합류했다. 낡은 망치의 재련 여부를 토론하기 위해 합류한 게 아니다!”


강경파 드워프 구경꾼 무리가 웅성거리며 분노에 차 고함질렀다.


“망치는 처음부터 모디무스의 것이었다! 망치는 아이언포지의 것이다!”


“만약 와일드해머 부족이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면, 의회에 있을 자격도 없다!”


쿠르드란은 불안감을 안고 군중을 둘러보았다. 군중이 소수의 와일드해머 드워프들에게 달려들자 무장한 경비병들이 몰려들어 폭동을 진압했다.


“하지만 우리 부족의 일원이 이 망치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쿠르드란은 불평을 부르짖는 자에게 고함쳤다. “같은 일이 일어나게 둘 순 없다.”


그는 마지막으로 와일드해머 홀을 손으로 쥐어보곤 나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속이 비어있던 홀은 공한 소리를 내며 나머지 유물 옆에 놓였다. 군중이 조용해졌다.


벨그룸은 고개를 끄덕이고 현장의 모든 이들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의회의 결정이다. 아이언포지 최후의 대왕, 모디무스 앤빌마 대왕의 위대한 망치를 재련할 것을 선포하노라!”


환호의 함성이 드워프 군중들로부터 터져 나왔고, 쿠르드란은 인상을 구겼다.


“이로써.” 벨그룸이 말을 이었다. “와일드해머 부족은 비록 재련되어 홀이 되었으나, 과거 카드로스 영주를 거쳐 지금의 쿠르드란 영주까지 전해진 모디무스 망치의 손잡이를 내놓았다.”


쿠르드란은 홀을 보았다. 홀의 크기와 형태는 양피지에 묘사된 망치의 손잡이와는 살짝 달랐다. 쿠르드란은 수년 전 카드로스에게 홀의 정체에 대해 물었을 때를 기억해냈다. 카드로스는 짧게 답했다. 계승품의 과거는 중요한 게 아니라고. 중요한 것은 현재의 모습이라고. 쿠르드란은 영주의 모호한 설명을 자신의 철학적 사색에 비춰 보았다. 어쩌면 와일드해머 부족 자체를 빗댄 것일지도 모르리라. 이제 쿠르드란은 본래 모습을 숨기기 위해 손잡이의 모양을 바꾼 게 카드로스였을지 궁금해졌다.


벨그룸은 나무 탁자 위에 있는 변형된 망치 머리를 가리켰다.


“브론즈비어드 부족은 내전 중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된 이후 내전을 기리는 다른 물건들과 함께 아이언포지 박물관에 보관되었던 모디무스 망치의 머리 부분을 내놓았다.”


그 후, 벨그룸은 손을 뻗어 망치 머리 옆에 놓인 울퉁불퉁한 지팡이를 가리켰다.


“마지막으로 검은무쇠 부족은 부족의 마법사 중 한 명이 발견했고, 그 정체를 숨기려는 시도에 색이 바뀌어버렸으나 본래 망치 머리에 박혀 황금빛으로 빛났던 수정을 내놓았다.”


크고 불규칙한 박수갈채가 검은무쇠 부족들로부터 터져 나왔다.


“재련은 지금부터 3일 뒤에 거행된다. 그동안 의회에서는 조각을 재련할 자를 선택할 테니, 당분간은 자기 할 일에 집중해주기 바란다.” 벨그룸이 말했다.



구경꾼들은 불같던 논쟁을 추스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흩어졌다. 쿠르드란은 나무 탁자 위에 놓인 와일드해머 홀을 바라보았다. 골치 아픈 문젯거리가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앞으로 몇 주 뒤, 몇 달 뒤, 아이언포지는 그와 그의 부족으로부터 무엇을 더 앗아갈 셈인가?


그는 말없이 돌로 된 단상에서 일어나 왕좌의 출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쿠르드란.” 모이라가 걱정 섞인 말투로 물었다. “이제 누가 망치를 제련할지 정해야 하오.”


“누구든 상관없소.” 쿠르드란은 으르렁거리고 방을 떠났다.




* * * * *





쿠르드란은 줄지어 선 주택과 상점들을 뒤로한 채, 스카이리와 함께 아이언포지의 교외를 산책하고 있었다. 대용광로에서 모루를 때리는 망치 소리가 희미한 메아리로만 들리는 곳이었다. 그리핀의 눈에는 짙은 세월의 구름이 드리워져 있었고, 걸음걸이도 확실히 고통스러워 보였다. 쿠르드란은 그 모습이 안쓰러웠다. 하지만 스카이리는 아이언포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게 즐거운 듯했다.



쿠르드란은 스카이리와 아이언포지를 탈출하고 함께 훨훨 날아가길 원했다. 하지만 스카이리에겐 단순히 걷는 일도 벅찼다. 산책은 잡념을 떨쳐내는 데는 괜찮았으나, 오늘 쿠르드란의 머릿속에는 모디무스 망치 생각뿐이었다. 쿠르드란이 의회에서 뛰쳐나간 다음 날, 모이라와 무라딘은 망치를 재련할 부족으로 검은무쇠 부족을 택했다. 따지고 보면 결정을 내리는 자리에 불참한 자신의 잘못도 있었지만, 그 결정이 쿠르드란의 피를 끓게 했다. 그의 가슴 깊숙한 곳에 검은무쇠 부족을 싫어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와일드해머에게 그리핀이 그렇듯, 검은무쇠 부족의 문화 깊숙한 곳엔 배신과 배반이 깃들어 있으리라.



안타깝게도 홀을 포기한 쿠르드란의 결정은 아이언포지의 긴장감을 완화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쿠르드란은 길을 거닐 때마다 자신의 그을린 황갈색 피부, 불처럼 빨간 말총머리, 문신을 향한 행인들의 경멸 어린 눈초리가 느꼈다. 쿠르드란은 그 시선이 단순히 자신의 외모를 향한 것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아이언포지는 문화의 충돌지였다. 모든 부족이 자신들을 우월하다 여겼다. 와일드해머 부족은 지상에 살았고, 총애하는 그리핀과 북쪽 땅의 하늘로 솟아오르는 걸 좋아했다. 브론즈비어드 부족은 늘 그래 왔듯이 산속에 사는 걸 좋아했고, 검은무쇠 부족은... 더욱 더 깊은 어둠 속에서 살고 싶어했다. 그들은 장막에 가려져 있었다.



강철 판금 갑옷으로 무장한 누군가가 쿠르드란을 옆으로 들이받았고 쿠르드란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쿠르드란이 고개를 돌리자 거대한 맥주통을 어깨에 인 두 명의 검은무쇠 드워프가 보였다. 쿠르드란에게 달려든 드워프는 검은무쇠 드워프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강렬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 눈은 쿠르드란이 아웃랜드에서 봤던 악마의 눈을 연상케 했다.



검은무쇠 드워프는 으르렁거리면서 동료와 함께 발걸음을 재촉했다. 둘씩 짝지은 부족원들이 각자의 맥주통을 들고 한 줄로 둘을 따랐다. 강한 악취가 맥주통 밖으로 새어 나왔다. 쿠르드란은 이 냄새가 검은무쇠 드워프가 양조한 독주라는 걸 깨달았다. 그 혼합물은 그가 즐겨 마시던 맥주와는 전혀 달랐다. 그 음료는 한 잔만 마셔도 감각이 무뎌지며 기억을 잃게 만들 정도로 독한 술이었다. 쿠르드란은 검은무쇠 드워프들이 그 음료를 옮기는 모습을 수없이 봐왔다. 아마 아이언포지에서 구할 수 있는 술보다 독한 술이 필요했을 터였다.



“쿠르드란.” 맥주통을 든 마지막 검은무쇠 드워프가 지나가자마자 누군가 말을 걸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미리 연습이라도 한 듯한 차분하고 근엄한 목소리였다.


쿠르드란은 고개를 돌려 모이라가 다가오는 걸 보았다. 그녀 옆에는 탄탄해 보이는 드루칸이란 검은무쇠 드워프가 있었다. 모이라와 자주 함께 있던 자였다.


“고결한 스카이리와 산책하는 거요? 그렇군.” 모이라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쿠르드란은 모이라에게서 일말의 진심이라도 읽을 수 있길 바라며 그녀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는 모이라와 검은무쇠 드워프를 의심했다. 어떤 식으로든 와일드해머 부족에 대해 돌고 있는 헛소문을 퍼뜨리는 건 이들이리라.



결국, 이 모든 것은 모이라의 강경한 태도 때문이었다. 마그니 국왕의 사고 이후, 그녀는 무장한 검은무쇠 드워프들과 아이언포지를 장악하고 왕좌를 탈환하려 했다. 그것이 처음 세 망치단 의회가 결성된 계기였다. 모디무스의 망치를 재련하자는 결정 또한 그녀의 제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금껏 모이라는 아이언포지에서 쿠르드란의 가장 믿음직한 아군처럼 행세했다. 다른 드워프들이 음식과 주거지 부족, 또 초만원의 그리핀 횃대를 걸고 넘어지며 와일드해머 드워프를 겨냥해 근거 없는 비난을 퍼부을 때마다 그녀는 와일드해머 부족을 변호해왔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선행도 쿠르드란에게 전혀 만족을 주진 못했다.


“과열된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었겠지...” 쿠르드란이 사자를 연상케 하는 스카이리의 하체를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모이라는 스카이리 곁으로 다가오더니 팔을 뻗어 그리핀의 부리 부분을 만졌다. “이 얼마나 고귀한 생명체인가. 상태는 어떻소?”


“호전되는 중이오.” 쿠르드란은 거짓말했다. 필요 이상의 문제를 모이라에게 털어놓고 싶진 않았다. 사실 스카이리가 둥지에서 일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금방 완쾌할 것 같은 예감이 드오.” 모이라가 말하며 스카이리의 머리털을 쓰다듬었고, 그리핀은 머리를 수그리며 나지막이 우는 소리를 냈다.


쿠르드란은 스카이리가 사람을 구분할 줄 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스카이리가 모이라에게 호의적으로 대한다는 사실은 이 검은무쇠 부족 지도자에 대한 의심을 조금이나마 풀어주었다.


모이라는 저만치 뒤에서 음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드루칸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리 오너라, 드루칸. 스카이리는 살아 있는 전설이야. 심지어 용과도 싸운 적 있다고. 몰랐지?”


“드워프의 피를 맛본 야수를 믿고 싶진 않습니다.” 드루칸이 비꼬는 투로 말했다.


모이라의 눈망울이 놀란 듯 커졌다. 하지만 곧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와일드해머 부족에 대해 들리는 말입니다.” 드루칸이 말했다. “그들은 죄수들을 그리핀의 먹이로 준답니다. 여기 스카이리도 배 터지게 먹었다고 하더군요.


쿠르드란은 몸에서 열이 확하고 오르는 것을 느끼며 드루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입 조심하지, 친구.”


“요즘 터무니없는 헛소문이 도는 거 알지 않소?” 모이라가 갑옷을 걸친 쿠르드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드루칸은... 음 뭐랄까? 아직 예절을 배우는 중이오.”


그녀는 드루칸을 돌아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사과 드려.”


“하, 하지만 폐하.”


“당장.” 모이라는 차가운 눈빛으로 드루칸을 째려보았다. 더 말이 필요 없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드루칸이 이를 질끈 깨물며 말했다.


“당신과 스카이리를 불편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소.” 모이라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진심에서 우러나온 듯했다. “난 그저 어제 당신이 내린 결정이 큰 희생이 필요했던 행위라 전하고 싶었소... 아웃랜드에서의 영웅담을 듣고 기대했던 게 바로 그런 부분이었다오. 망치의 재련은 화합을 불러올 것이며, 이 모든 것은 당신의 결정 덕분이오.”


“난 자기 주관도 없는 다른 드워프들과는 다르오.” 쿠르드란이 차갑게 답했다. “하지만 지난 일은 돌이킬 수 없지.”


아이언포지의 계승자는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아, 그렇지. 당신과 무적의 스카이리의 산책을 더 방해하지 않겠소.”



그는 모이라와 드루칸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스카이리와의 평화로운 시간은 이들과의 만남으로 무산됐다. 쿠르드란은 내심 모이라가 적이길 바랐다. 그 방법이, 그 방법만이 아이언포지의 혼란을 수긍하게 해줄 것이었다. 하지만 쿠르드란은 겉모습 속에 진실을 숨긴 이 도시 속에서 이유를 수소문할 수록 점점 커지는 불안감을 막을 수 없었다.
“횃대로 돌아가자꾸나.” 쿠르드란이 말하곤 스카이리의 날개를 잡아당겼다.




* * * * *





쿠르드란은 마음을 진정시키려 왕좌에서 일어섰다. 왕좌 앞에 서 있는 벨그룸에게 당장이라도 뛰어내려가고 싶은 욕구를 가까스로 참아내는 중이었다.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조언자 벨그룸이 쿠르드란과 다른 의원들에게 존중의 표시로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왕좌에는 벨그룸과 세 부족의 대표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이든 드워프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 사이사이 긴장 어린 침묵이 방을 메웠다. 그의 긴장한 손에는 모디무스 망치의 이야기가 기록된 양피지가 들려 있었다.


“이건 잘 짜인 소설에 불가합니다.” 벨그룸이 찌푸린 얼굴로 두루마리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철저한 조사로 이 오래된 양피지가 마법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양피지는 역사책에 끼여 있었는데, 겉으로 봐선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쿠르드란이 말했다. “우리 부족 중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자네가 잊었을까 하는 말이지만, 우리 부족 사람도 목숨을 잃은 건 마찬가지야.” 무라딘이 반박했다. “애초에 자네가 망치의 조각을 양보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고.”


“자네 귀머거리인가? 이게 아무 일도 아니라니!”


“그걸 핑계로 삼지 말게! 애초에 그 문제 때문에 모인 것도 아니잖은가!”


“무라딘, 쿠르드란, 고정하시오.” 모이라가 시선을 벨그룸에게 돌리며 말했다. “재련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소.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소?”


“네, 폐하. 하지만 양피지는 가짜입니다. 제 목숨을 걸고 확신합니다. 누군가 진짜처럼 보이게 하려 많은 노력을 들였으나, 저 양피지의 글은 동시대의 두루마리들과는 엄연히 다릅니다.”


“그렇다면 어디서 온 거란 말이냐?” 모이라가 물었다.


“저희가 아는 바로는, 와일드해머 홀과 검은무쇠 보석은 내전이 끝난 이후 생겼습니다. 양피지에는 브론즈비어드 망치 머리가 입은 손상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죠. 그 기록을 추적해 망치 머리를 찾을 수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아는 바에 따르면, 망치가 언제 손상되었고, 또 언제 도서관에 보관되었는지 알 방법이 없습니다.”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지?” 쿠르드란이 으르렁거리며 다 벗겨진 두피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아직 정정한 그였으나, 숨이 탁 막힐 듯한 도시의 열기가 직접 피부로 와 닿고 있었다.


“아... 모릅니다. 매일 수많은 드워프들이 도서관을 드나들기 때문이죠.” 벨그룸이 답했다.


“상관없소. 이 문제는 반드시 안고 가야하오. “ 모이라가 말했다. “우리 드워프 동지들은 하나로 단결되길 기대 하고 있소. 만약 이 사실이 밖으로 나가 재련이 취소된다면 누군가는 의심받겠지. 이 사실은 방 밖으로 나가지 않는 걸로 하겠소.” 그녀가 덧붙였다.


모이라는 벨그룸의 눈을 바라보았다. 늙은 드워프 벨그룸이 고개를 끄덕였다.


쿠르드란은 왕좌에 주먹을 꽂았다. “거짓말을 숨기기 위해 내 부족의 정당한 소유물을 포기할 순 없소!”


“이미 아이언포지에는 거짓말이 아닐세.” 무라딘이 말했다. “며칠이나 지난 지금은 사실이나 다름없지."


속으론 동요했지만, 쿠르드란은 무라딘의 말에 숨겨진 지혜를 깨달았다. 모디무스 망치에 대한 논쟁은 아이언포지에 더는 이도 저도 못할 엄청난 긴장감을 형성하고 있었다. 마치 의회가 무슨 말을 하던, 재련 전까지는 계속해서 커질 거대한 눈사태처럼.





* * * * *





쿠르드란은 그리핀 횃대에 앉아 현 사태의 해답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모디무스 망치의 진실에 대한 의문이 그의 머릿속을 무겁게 압박했다. 그는 스카이리와 산책하며 머리를 맑게 하고 싶었으나, 스카이리는 둥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아무 움직임 없이 바닥에 누워 있었고, 숨소리조차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와일드해머 그리핀 기수들은 각자 자신의 그리핀 옆에 앉아 아이언포지의 긴장된 분위기만큼 스카이리의 상태를 걱정했다. 심지어 늘 활발했던 엘리조차 쾌활한 행동을 삼갔다. 그리핀 관리인들도 침묵을 지킨 채 갈퀴로 짚단을 긁어모았다. 엘리를 포함한 수많은 그리핀 기수들은 아웃랜드의 참전 용사였다. 그들은 오크의 고향 행성 아웃랜드까지 쿠르드란을 따라갔고, 또 쿠르드란을 따라 아이언포지까지 왔다. 그리고 결코 그 결정을 의심하지 않았다. 쿠르드란은 생전 처음으로 그들을 승산 없고 의미 없는 전투로 내몬 듯한 기분을 느꼈다.



열 명의 검은무쇠 드워프가 보도 쪽으로 이어진 둥지를 가로질러 나무 맥주통을 운반하는 모습을 발견하자, 쿠르드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횃대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검은무쇠 드워프는 앉아 있는 와일드해머 드워프를 지나칠 때마다 불편한 눈빛으로 흘겨보았다. 그때, 검은무쇠 드워프 중 한 명이 마른 지푸라기에 걸려 넘어지면서 그가 운반하던 맥주통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나무 용기가 부서지며 희끄무레한 액체가 온 횃대에 쏟아졌다.



쓰러진 검은무쇠 드워프는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치곤 일어서기 위해 발버둥쳤다.


“와일드해머 놈들. 왜 우리가 가는 길에 잡새들을 흩뜨려 놓은 거야?” 검은무쇠 드워프가 말하며 근처의 그리핀에 침을 뱉었다. 그리핀은 꽥하고 울더니 둥지의 가장자리를 갈퀴발톱으로 박차고 올라 분노한 드워프의 얼굴에 지푸라기를 한 움큼 뿌려놓았다.


엘리는 일을 멈추고 검은무쇠 드워프에게 침착한 모습으로 다가갔다.


“그건 이들 잘못이 아니야, 친구.” 그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너희 야수는 여기 온 이후로 골칫거리밖에 안 돼. 놈들이 더러운 둥지에서 활개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짜증 나. 도시 입구에서부터 악취가 난다고.” 검은무쇠 드워프가 펄쩍펄쩍 뛰어올랐다. 그는 손가락을 꺾어 우두둑 소리를 내곤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근처의 그리핀에게 다가갔다.



엘리는 본능적으로 쇠스랑을 검은무쇠 드워프에게 들이댔다. “그리핀에 손끝 하나라도 대 봐.”


쇠스랑이 자신을 향해 있다는 걸 확인한 검은무쇠 드워프의 눈이 커졌다. “이봐 친구들, 이거 보여?”. 그가 다른 검은무쇠 드워프들에게 말했다. “와일드해머 드워프가 우리에게 무기를 들이대고 있어.”


엘리는 급하게 쇠스랑을 낮췄다. “괜히 일을 크게 만들 생각 마.”


근처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다섯 명의 그리핀 기수들이 일어났다. 그중 한 명은 앞으로 나서서 검은무쇠 드워프의 가슴보호구를 손가락으로 밀기도 했다.


“너희 똥물이나 챙겨서 갈 길 가시지?” 와일드해머 드워프가 말했다.


쿠르드란은 올 것이 왔다고 느꼈다. 부글부글 끓는 용광로 속의 불타는 쇳물이 점점 더 넘쳐오고 있었다. 모디무스 망치의 진실이 폭로된 이후, 쿠르드란은 이런 주먹다짐 정도에 신경을 쓸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검은무쇠 드워프에게 다가갔다.



“너희 와일드해머 놈들... 우리가 그리핀을 건드리기도 전에 이 도시가 불타는 모습부터 보게 될 거다!” 검은무쇠 드워프가 내지르고는 동료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놈들에게 진정시켜 줄 만한 걸 주자, 친구들.”


망설임도 없이, 검은무쇠 드워프 중 두 명이 맥주통을 횃대로 던져버렸다. 맥주통은 쿠르드란의 머리 위를 넘어 스카이리 옆에서 터졌다. 스카이리와 근처의 그리핀들이 검은무쇠 드워프의 독주로 범벅이 되었다.



순간적으로 쿠르드란 속의 분노가 치밀었다. 그는 평정을 찾기 위해 심호흡하면서, 검은무쇠 드워프의 우두머리와 부족원들을 향해 다가갔다. 쿠르드란을 본 검은무쇠 드워프는 흠칫 놀라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쳤고, 지푸라기를 밟고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리핀 조련사들에게서 커다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쿠르드란 님이 코흘리개 애송이에게 겁을 준 것 같군!” 그 중 한 명이 외쳤다.
검은무쇠 드워프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은 굴욕감으로 가득했다. 결국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쿠르드란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나비 영주... 이제 그만 돌아가서 다른 짐승들과 짚더미 위에서 좀 쉬시죠?” 검은무쇠 드워프가 으르렁댔다. 그리곤 쿠르드란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작은 모욕이 쿠르드란 속에 묶여 있던 무언가의 고삐를 풀었다. 그가 아이언포지에 온 이후로 줄곧 마음속 깊은 곳에 담아뒀던 그것이었다. 맹금의 봉우리 위의 하늘을 보는 꿈... 왕위 계승을 포기하겠다는 결정... 스카이리의 상태. 모든 게 한 번에 폭발해, 쿠르드란을 분노로 눈멀게 했다.



쿠르드란의 주먹이 검은무쇠 드워프의 머리로 날아갔다. 주먹에 맞은 드워프가 나가떨어졌다.



명령이고 자시고 할 틈도 없이, 쿠르드란 쪽에 있던 와일드해머 드워프들이 달려들었다. 검은무쇠 드워프는 맥주통을 와일드해머 드워프들에게 던졌으나 그들은 능숙한 솜씨로 몸을 굴려 위기에서 벗어났다. 던져진 맥주통이 지푸라기로 덮인 횃대 곳곳에 뿌려지자, 횃대에서 그리핀들이 우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뒤이어 손에 잡히는 건 뭐든 잡아당기며 와일드해머와 검은무쇠 드워프가 격돌했다.



두 무리는 엎치락뒤치락했으나 먼저 중심을 잃고 근처의 화로에 처박힌 건 검은무쇠 드워프였다. 그 때문에 화로 속에 불타던 잿불이 튀어 인근 짚더미에 불을 붙였고, 불은 검은무쇠 독주로 젖어 있던 둥지에 순식간에 옮겨 붙었다.



몇 초 뒤, 온 횃대가 불바다가 되었다. 연기가 대용광로의 천장 위로 피어올랐다. 수많은 그리핀의 날카로운 비명이 허공을 뒤덮었고, 깃털과 먼지, 그리고 잿불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물 가져와!” 쿠르드란이 바닥에 쓰러진 드워프들을 밟고 올라서선 외쳤다.


대용광로의 다른 곳에 있던 드워프들이 횃대로 몰려들었다. 이제 그리핀들은 횃대의 그늘진 구석을 뱅뱅 날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네 마리는 아직 바닥에 남아있었고, 그 중 세 마리는 스카이리와 스카이리의 둥지 근처에 모여 있었다.


“스카이리!” 쿠르드란이 외쳤다. “거기서 나와!”


스카이리가 있는 곳에서 터져 나온 울음을 들은 쿠르드란은 고통에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그건 아웃랜드를 떠난 이후로 들어본 적 없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수많은 상황에서 스카이리의 적들을 공포에 젖어 도망치게 만들었던 전투 함성에 가까웠다.



스카이리 주위로 불길이 치솟았다. 쿠르드란은 횃대를 뒤덮은 짙은 연기 때문에 스카이리를 거의 볼 수 없었다. 스카이리 근처의 그리핀 무리 중 한 마리가 뿌연 덩어리가 되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을린 깃털에서 나온 연기가 긴 꼬리처럼 그리핀을 따라다녔다. 다른 두 그리핀 역시 날아올랐으나 도망치진 않았다. 이들은 스카이리의 날개를 갈퀴로 움켜쥐고 깍깍 소리 내며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두 그리핀은 동시에 맹렬히 날갯짓하며 스카이리를 바닥에서 들어 올리려 했으나 스카이리는 몸을 움직여 자신에게서 동족들을 떨쳐냈다.



드워프들이 물통으로 불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길고 매끄러운 로브를 입은 노움들도 합류해 주문을 외우며 횃대를 향해 얼음 수정을 발사했다. 하지만 불은 계속해서 타올랐다. 쿠르드란은 갑옷을 벗기 위해 움직이고 싶었으나, 심하게 충격받은 지금 상태에선 풀어 헤칠 끈조차 잘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갑옷을 벗는 것을 포기하고 불길 속으로 질주했다.


“쿠르드란 님!” 엘리가 외쳤다.


그리핀 관리인과 다른 와일드해머 드워프 두 명이 쿠르드란의 몸에 팔을 둘렀다. 세 명의 강한 드워프들이 매달려 있었음에도 쿠르드란은 점점 더 불 쪽으로 이동했고, 두 명의 와일드해머 드워프가 더 붙어서야 마침내 바닥으로 쓰러졌다.



바닥에 냅다 꽂힌 쿠르드란은 스카이리 근처에 있던 두 그리핀마저 횃대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다. 이들이 버티기엔 열기와 연기가 너무 강했다. 고통스러운 몇 초가 흐른 뒤, 스카이리는 바닥에 고꾸라졌다.



엘리와 다른 와일드해머 드워프는 마지막 잿불의 불이 진압돼서야 쿠르드란을 일으켜 세웠다. 쿠르드란은 일어서자마자 그을린 횃대로 달려갔다. 그곳엔 까맣게 불타 연기를 내뿜는 스카이리가 있었다.


누군가의 손이 쿠르드란의 어깨에 닿았다.


“죄... 죄송합니다.” 엘리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어째서 저항한 거지? 다른 그리핀들은 자신을 구하려 했던 건데...” 쿠르드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 스카이리는 알을 지키고 있던 겁니다!” 순간 생각났다는 듯 엘리가 말했다.


두 드워프는 조심스레 스카이리의 시체로 다가갔다. 스카이리 밑에는 한때 깨끗했지만 지금은 새까맣게 탄 세 알의 껍질과 설익은 스카이리 새끼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쿠르드란은 말없이 그 참혹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스카이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엘리가 까맣게 타버린 둥지 앞에 무릎 꿇으며 말했다.


무너진 그리핀 횃대를 보는 군중은 말을 잃었다. 심지어 화재에 부분적인 책임을 진 검은무쇠 드워프들조차 당황하여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모든 눈은 쿠르드란에게 쏠렸다. 그를 감싼 연기는 불에 탄 살과 지푸라기 냄새로 가득했고, 쿠르드란은 현기증을 느꼈다.




* * * * *





쿠르드란은 아직 공중에서 맴을 돌고 있는 그리핀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기 위해 모여든 아이언포지의 거주민들을 뒤로 하고 대용광로 밖으로 나왔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던 유일한 일이었다. 불은 그에게 큰 상처를 안겼고, 그의 핏줄 속에 흐르던 희망과 야망과 기쁨의 마지막 한 조각마저 앗아갔다.



그는 몇 시간 동안 사람들이 듬성듬성 찬 선술집에 앉아 맥주엔 손도 대지 않고 스카이리의 모습을 생각했다. 모든 추억이 불타버린 시체의 모습에 가려졌다. 스카이리는 전사했어야 했다. 아니면 고향 근처 맹금의 봉우리에서 최소한의 평안함이라도 누렸어야 했다. 산의 한가운데서 죽어선 안 됐다.



“여기 오는 게 아니었어.” 쿠르드란이 생각했다. 그의 후회는 지난 몇 주간 까맣게 잊고 있던 누군가의 기억을 들춰냈다. 폴스타트였다.


폴스타트는 몇 년간 쿠르드란이 아웃랜드로 나가 있는 사이 와일드해머 드워프의 고위 영주의 자리를 차지했다. 마침내 맹금의 봉우리로 돌아온 쿠르드란은 그의 고향에 없던 수십 년간 못했던 일들을 처리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시달렸고, 이를 바쁘게 속행했다. 비록 그의 옛 직위로 돌아간 상태가 아니었지만 쿠르드란은 폴스타트와의 상의 없이 그의 부족원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이는 고위 영주의 직위를 약화시켰다.



아이언포지로 향한 쿠르드란의 여정은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지도자라는 걸 보여주려는 쿠르드란의 무리한 시도 중 하나였다. 따지고 보면 현 고위 영주의 자격으로 세 망치단 의회에 가입하는 사람은 폴스타트가 되어야 하나, 쿠르드란은 그의 친구가 경험이 없기에 감당하지 못할 거라는 정교하지 못한 주장으로 그 기회를 갈취했다. 모든 결정이 난 이후에도 쿠르드란은 고위 영주의 눈에서 분노와 상처를 엿볼 수 있었다. 폴스타트의 눈은 마치 20년간 부족을 이끌어왔던 자신의 노력이 물거품이나 다름없었다고 말하는 듯했다.



쿠르드란은 자신이 저지른 일이 어리석었다는 걸 깨달았다. 또한 처음으로 폴스타트가 그의 자리를 대신하는 게 좋으리라 생각했다. 아이언포지에 만연한 긴장감을 폴스타트가 느껴보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단지 폴스타트가 그 일에 더 적합하다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니야. 쿠르드란이 말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상황에서 폴스타트를 끌어들이는 건 나약함의 표출일 뿐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쿠르드란은 그의 소중한 모든 걸 아이언포지가 앗아가지 못하게 막을 단 한 가지 방법이 남았음을 깨달았다.


아직 아이언포지가 앗아가지 못한 게 남아 있었다.




* * * * *





쿠르드란은 아무도 없는 왕좌를 지나 무라딘의 자리까지 다가갔다. 돌로 만들어진 왕좌 옆에는 모디무스 망치의 세 조각이 담긴 커다란 철제 공물함이 있었다. 각 의원에겐 공물함을 열 수 있는 크고 무거운 열쇠가 주어졌다. 쿠르드란은 자신의 열쇠를 열쇠 홈에 꽂았다.



쿠르드란은 천천히 공물함을 열고 와일드해머 부족의 홀을 집었다. 재련을 위해 그리핀 깃털과 여러가닥의 풀을 제거한 지금 모습은 볼품없고 더러웠다.



“다시 가져갈 줄 알고 있었지.” 목소리에는 만족감이 깃들어 있었다.


쿠르드란은 고개를 돌렸다. 다그란을 팔에 안은 모이라가 예복 차림으로 왕좌로 오르는 길 아래에 서 있었다. 한 줄기 서광이 왕좌의 뒤쪽에 있는 그녀의 열린 방문에서 퍼져 나왔다.



“난 이 거짓놀음에서 빠지겠소.”


모이라는 우아하게 왕좌로 걸음을 옮겼다. “당신을 보고 있으면... 꼭 목숨 걸고 장난감을 지키려 드는 다그란을 보는 것 같군. 내가 장난감을 뺏으려 하면 징징대는 꼴도 그렇고.”


“이게 내게 무슨 의미인지 당신은 절대 모를 거요... 절대로.”


아이언포지의 계승자가 쿠르드란의 왕좌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그 주위를 거닐었다.


“난 아직도 당신이 왜 여기 왔는지 모르겠소.” 모이라가 말했다. “당신과 당신 부족은 아이언포지에 어울리지 않소. 오고 싶어했던 것 같지도 않고.”


“난 부탁 받아서 온 거요.”


“내 부탁은 아니었지.”


사실이었다. 모이라가 검은무쇠 드워프들과 아이언포지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사실상 아이언포지를 인질로 삼았다. 그때 인질로 붙들렸던 방문자 중에는 스톰윈드의 안두인 왕자도 있었다. 이에 안두인의 아버지인 국왕 바리안 린은 SI: 7 암살요원 무리와 함께 아이언포지에 침투하여 모이라를 처치하고 그녀의 악행에 종지부를 찍으려 했다. 결과적으로 바리안은 모이라를 살려두었으나, 평화 유지를 위해 세 망치단 의회의 창설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 과정에서, 바리안은 폴스타트를 와일드해머 부족의 대표로 임명했다.



잠시 두 드워프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만 보았다. 하지만 먼저 정적을 깬 건 모이라였다. “당신처럼 수많은 전투를 승리해온 드워프에게 패배는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군.”


“무슨 뜻이오?”


모이라는 다그란을 무라딘의 왕좌 근처에 앉혔다. 젖먹이 아이는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 알지 못한 채 돌로 만든 의자 위로 기어 올라가선 키득거리며 웃었다.


“분명 이상하고 끔찍한 기분이겠지.”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쿠르드란이 커져가는 불안감을 안고 물었다.


모이라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건 쿠르드란이 수없이 봐온 인위적인 미소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왠지 모를 사악함이 담겨 있었다. 차디찬 깨달음이 그를 엄습했다.


“당신이 의회에 합류했을 때 사실 좀 걱정했소. 당신은 강철 같은 의지와 힘과 결의를 가진 드워프였지. 이 세상을 지키기 위해선 모든 걸 희생할 것 같은... 하지만 마침내 당신이 도착했을 때, 난 그 낡아빠진 철 조각에 대한 당신의 집착을 알게 됐지. 참 기괴한 광경이었소... 그 작은 것 하나에 얼마나 많은 자부심을 쏟아 붓는지... 참 흥미롭더군.”


모이라의 말은 쿠르드란에게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와일드해머 드워프에 대한 기괴한 소문들, 도서관에서 발견된 조작된 양피지 때문에 생겨난 긴장감, 모이라의 와일드해머 부족 변호까지. 그 모든 게 와일드해머 드워프를 이방인으로 낙인 찍었으며, 그들의 평판을 질서정연하게 갉아먹었다. 그 결과로, 이제 아이언포지에서 가장 멸시받는 드워프들은 검은무쇠 부족이 아니었다.



이 단순한 정황은 쿠르드란에게 자신과는 급이 다른 적에게 당했다는 끔찍한 무력감을 안겨주었다. 모이라를 의심하긴 했었다. 하지만 쿠르드란은 자신의 직감을 거부했다.


“도서관에 양피지를 놓은 게 너였나? 아니면 그 쥐새끼 같은 드루칸?”


아이언포지의 계승자는 능글맞게 웃으며 질문을 무시했다. 그리곤 다그란의 등을 토닥였다. “도서관에 경비병을 배치했소.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 보장하지.”


“내 말에 답해!” 쿠르드란이 폭풍망치를 모이라에게 겨누며 외쳤다.


모이라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차분히 쿠르드란을 바라보았다. “그 망치로 용을 쓰러뜨린 적도 있지? 그렇지? 아마 오크도 엄청나게 쓰러뜨렸겠지... 그렇다면 나한테도 못할 짓은 아니겠군.”


“이거면 네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머리통을 박살 낼 수 있다.”


모이라는 피식하고 웃었다. “그럼 내 피가 이 바닥을 적실 것이고, 검은무쇠 드워프들이 들고 일어서서 도시를 불태울 거요. 물론 당신과 당신의 야수 같은 부족이 그 첫 번째 목표가 될 거고.”


“네놈에게 눈곱만큼의 명예라도 남아 있다면, 네가 한 짓을 인정해라.”


“다 끝났소, 쿠르드란. 당신은 말이 아닌 몸으로 싸우는 드워프요. 안타깝게도 아이언포지에선 말의 힘이 더 강하지. 아이언포지는 얼마나 많은 피를 쏟았는지가 중요했던 아웃랜드와는 다르오. 여기서 중요한 건 얼마나 많은 이의 마음을 샀느냐는 거야. 당신은 그 점에서 정말 완벽하게 실패했고. 결국 당신 부족을 대표할만한 드워프는 폴스타트였을지도 모르겠군.”


“넌 지금껏 우리가 단결해야 한다고 나불대왔다.” 쿠르드란이 말했다. 폭풍망치를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넌 네가 원하는 게 뭔지도 몰라.”


모이라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억지로 웃기 위해 애썼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는 정확히 알고 있소.” 모이라가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처음부터 검은무쇠 드워프에게 평화의 손길을 내밀 생각 따윈 없었소. 복수에 눈이 먼 당신은 여기 오기 전부터 결정을 내린 상태였지.”


“그래서 네놈은 더러운 검은무쇠 드워프가 쓰레기처럼 취급받지 않게 하려고 나와 내 부족을 팔아먹은 건가?” 쿠르드란이 물었다.


“미래를 위한 일이었소. 내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은 뒤에도 핏줄을 타고 흐르는 피 때문에 자신이 통치할 도시에게 버림받는 건 원치 않으니까.”


“마그니 국왕님이 네 모습을 봤더라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셨을지 상상이 되는군. 타락해버린 멍청한 딸이 자신이 일군 모든 걸 부숴버리는 모습을 본다면 말이야.”


“나와 아버지의 과거를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마.” 모이라의 분노가 폭발했다. “너와 네 부족은 이 도시의 방문객일 뿐이다. 빨리 사라지는 게 좋을 걸!” 흥분한 모이라가 무의식적으로 다그란의 팔을 꽉 쥐었고, 다그란은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건 늘 예상하고 있었...” 쿠르드란은 잠시 말을 멈췄다. 끔찍한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는 폭풍망치를 모이라의 코앞까지 드리웠다. “너... 네가 스카이리를 죽였지? 네가 그 더러운 드워프들을 보내 불을 붙인 거야.”


“아니.” 모이라가 분개하며 말했다. “내게 잘못의 책임을 돌릴 생각 마라. 싸움에 개입된 검은무쇠 드워프는 내 손수 처벌했지만, 사건은 너에게서 비롯됐다고 증언했어.”


죄책감이 쿠르드란을 옥죄었다. 그날 불이 난 이후로, 쿠르드란은 자신이 싸움을 피할 수 있었단 사실을 잊으려 노력했었다. 팔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그는 폭풍망치를 내렸다.


“가지고 가던지 말던지 마음대로 해." 모이라가 와일드해머 홀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녀는 쿠르드란은 돌아보지 않은 채 다그란을 팔에 안고 경사로를 내려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재련은 행할 것이다. 내일 드워프를 하나로 통일하는 부족은 검은무쇠 드워프가 될 거야.” 모이라가 그녀의 비밀 방에 들어가며 말했다. 등 뒤의 문이 쾅 하고 닫혔다.


모이라의 말에 담긴 진실, 그녀가 한 모든 말에는 큰 설득력이 있었다. 쿠르드란이 그렇게 찾아 헤맸던 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온 도시를 상대하지 않는 이상 모이라에 대항할 순 없을 것이다. 그는 수정상이 되어버린 마그니 국왕처럼 무력했다. 순식간에 낯선 패배의 기운이 그의 온몸에 감돌았다.


온몸에 구슬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숨을 쉴 때마다 공기가 아닌 탁한 열기를 뿜어내는 느낌이었다. 쿠르드란은 홀을 가슴보호구와 팔 사이에 생긴 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도시의 계승자는 사라졌지만, 쿠르드란은 아이언포지의 돌벽이 자신을 향해 무너지기라도 하는 듯 방을 뛰쳐나갔다.




* * * * *






쿠르드란은 아이언포지의 정문에서 차디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의 온몸을 감싸던 땀이 차가운 밤 공기에 얼어붙었고, 쿠르드란은 추위에 몸을 떨었다.


끝없이 펼쳐지는 눈의 향연 사이로, 수레에서 상자를 내려놓는 형체들이 열린 성문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에 비쳤다. 그 검은 형체 중 하나가 쿠르드란 쪽을 올려다보더니 눈발을 뚫고 터덜터덜 걸어왔다.


무라딘이었다.


“자넬 찾았네, 친구.” 브론즈비어드가 손으로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말했다. “스카이리의 일은 들었네. 얼마나 슬펐는지 몰라. 스카이리는 죽을 때도 한결같았네. 공포에 굴복하지 않고 가장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지... 동료, 그리고 미래를 위해서 말이야.”


“스카이리의 숨이 끊어졌을 때 녀석의 미래는 끝났네.” 쿠르드란이 말했다. 그는 긴 한숨을 쉬었다. 추위 속에서 그의 입김이 하얗게 뿜어져 나왔다.


무라딘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래... 하지만 나라면 싸우지도 못하고 죽을 바에야 싸우다 죽겠네. 내 말뜻을 자넨 이해할 수 없겠지, 안 그런가?”


쿠르드란은 모욕감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모이라를 상대한 뒤로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난 아이언포지에 발을 들인 이후로 지금껏 우리 부족을 위해 싸웠네.”


“완고함과 용맹함을 혼동하지 말게. 그 둘은 엄연히 달라.” 무라딘이 답했다.


“자넨 이해하지 못할 걸세. 자네도 결국 모이라와 똑같아.”


무라딘은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숙였다. “자네가 의회에 합류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지. ‘드디어 이 도시의 갈등을 잠재울 드워프가 왔구나.’ 하지만 자넨 갈등을 잠재우긴커녕 더 심각하게 만들었네.”


“그래, 인정하지. 하지만 그건 다 내가 혼자였기 때문일세. 처음엔 두 팔 벌려 환영하더니, 곧 내 주장을 펼치자마자 바로 등 돌리지 않았나?”


“망치를 두고 싸우는 게 얼마나 가치 없는 일인지, 몇 번 말했는지 기억하는가? 자네가 이성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때 더는 시간 낭비하지 말아야겠단 생각에 그랬네.” 무라딘이 반박했다.


쿠르드란을 신뢰했기에, 무라딘은 몇 번이나 쿠르드란을 사적으로 만나 와일드해머 홀을 포기하는 문제에 대해 의논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쿠르드란은 그 대화를 충고보단 자신을 향한 공격처럼 느꼈다.


“이제 알겠나, 친구?” 무라딘이 말했다. “저 낡은 쇳덩어리는 자넬 붙잡아두는 족쇄라네. 아니지, 온 아이언포지를 묶어두는 족쇄야. 자네가 집착하면 집착할 수록 더 꽉 조여오는 족쇄란 말일세.”


“만약 내일 재련을 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 것 같나?” 쿠르드란이 버럭 내뱉었다. 말이 입 밖을 떠나자마자, 그는 갑옷 속에 있는 숨겨둔 홀이 자신의 갈비뼈 쪽을 찌르는 걸 느꼈다.


무라딘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그는 경멸 섞인 표정으로 쿠르드란을 바라보았다. “마그니 국왕님은 자네와 스카이리가 아웃랜드에서 펼친 활약상을 들으며 기뻐하시곤 했지. 지금 자네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보지 못하셔서 천만다행이야.”


쿠르드란은 무라딘에게 모이라와 맞닥뜨렸던 이야기를 하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무라딘과 마그니의 딸이 공모자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중이었다. 하지만 무라딘에게는 쿠르드란의 의심을 줄여주는 솔직 담백한 느낌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 말이 더 고통스럽게 들렸다.


“그 홀 덕분에 아웃랜드에서 우리 부족의 정신이 무너지지 않았던 걸세!” 쿠르드란이 외쳤다.


“자네 부족의 정신은 자네 안에 있네!” 무라딘의 목소리가 쿠르드란만큼 커졌다. “그 정신은 스카이리에게도 있었네. 그리고 자네가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고통스러워하던 이 도시의 모든 와일드해머 드워프에게도 있네. 난 말도 안 되는 낡은 쇳덩어리에 휘둘리지 않고 어떻게든 이 도시를 이끌기 위해 노력 중이야.”


“이끈다고?” 쿠르드란이 비웃었다. “그 망치가 진짜였을 때도 우릴 앞으로 이끌 물건은 아니었네. 하지만 망치가 가짜라는 게 밝혀진 이상, 옳은 방법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해.”


무라딘은 깊은 한숨을 쉬고 쿠르드란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냥 포기하게, 친구. 그 무엇도 희생 없이 얻을 순 없어. 자네가 우리 누구보다도 잘 알지 않는가?”


쿠르드란은 브론즈비어드의 팔을 밀쳤다. “그게 날 찾아온 이유인가? 내 부족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 충고하려고?”


무라딘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는 밤중에 일하고 있는 검은 형체들을 돌아보았다. 다른 드워프들은 무라딘과 쿠르드란을 의식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상자를 내리고 있었다. 브론즈비어드는 고개를 돌리며 오른손으로 쿠르드란의 얼굴에 주먹을 날려 그를 쓰러뜨렸다.


“아닐세, 바보 같으니.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상인지 스스로 확인하고 싶었을 뿐일세.”


쿠르드란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무라딘은 수레로 돌아가고 있었다. 쿠르드란은 정문 앞에 서서 칠흑 같은 밤의 고요를 멍하니 지켜보았다.



품속의 와일드해머 홀의 무게가 이상할 정도로 무겁게 느껴졌다. 아웃랜드에서의 수많은 기억이 담긴 물건이었다. 하지만 전에는 이 계승품에 많은 애착을 가지진 않았다. 사실 오크의 고향인 아웃랜드를 향해 떠날 땐 거의 두고 갈 뻔했다는 사실도 기억해냈다. 홀은 먼지가 쌓인 채 벽에 걸려 있었고, 짐을 쌀 때 문득 생각나 챙겼을 정도의 물건이었다.



그는 순간 왕좌에서 홀을 가져온 일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내가 이걸로 뭘 하려고 했던 거지? 이건 의회의 일원으로서 도시를 저버리고, 자신의 명예뿐만 아니라, 폴스타트, 그리고 남은 부족원들의 명예도 송두리째 실추시키는 일이 아닌가?



아이언포지의 열기를 뚫고 정문 안으로 들어서는 쿠르드란의 머릿속에 그 질문이 맴돌았다. 그가 목적 없이 아이언포지의 외곽 지구를 돌고 있으려니 웬 목소리가 그를 찾았다. “쿠르드란 님!”


엘리가 멀리서 모피 한 다발을 들고 뛰어오고 있었다.


“엘리, 지금 난 대화할 기분이 아니야.” 쿠르드란이 불평했다.


“네, 네, 어떤 기분이실지 압니다. 하지만 이건 꼭 보셔야 합니다!” 엘리가 말하고 거의 바닥에 쓰러지듯 앉았다.


그리핀 관리인은 모피를 돌 바닥 한쪽에 펼쳤다. 쿠르드란도 무릎을 꿇고 엘리가 모피 무더기를 펼치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스카이리가 남긴 겁니다.” 엘리가 말했다. 두터운 수염으로 가려진 웃음이 귀에 걸리도록 길게 퍼졌다.


쿠르드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모피 가까이 다가갔다. 그을음이 뭍은 알이 포근한 모피 위에 놓여 있었다.


“어떻게...?” 쿠르드란은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그리핀 중 하나가 옮기는 모습을 봤습니다. 녀석이 대용광로의 횃대에 숨겨놓았지 뭡니까. 불난리가 났을 때 하나 집어온 거 같습니다. 아무도 알을 돌보고 있지 않더군요.” 엘리가 말했다. “그 이후로 줄곧 쿠르드란 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쿠르드란은 기억해 냈다. 불 속의 혼란, 재, 깃털, 끔찍한 비명, 그리고 스카이리 옆에서 흐릿한 연기 속에 솟구쳐 오르던 그리핀 한 마리, 앞다리를 가슴에 밀어 넣고 꼼짝 않던 스카이리의 모습... 쿠르드란은 머리를 곧추세우고 엘리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핀 관리인은 재빨리 눈물을 닦아냈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다른 친구들이 제가 엉엉 울었다는 걸 알게 되면 영영 놀려댈 테니까요.”


“그렇게 징징 짜는 모습은 처음 본 걸로 해두지.” 쿠르드란의 입에서 말이 떠나자마자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웃음이 밀려 나왔다. 하지만 즐거움은 그가 알을 내려다보자마자 곧 분노로 바뀌었다. 알을 지켜냈다는 건 극적인 반전이었으나, 당장에라도 고민 없이 알과 스카이리를 맞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이 녀석은 스카이리가 아니야....” 쿠르드란이 말했다.


“이런, 그런 사고방식은 머릿속에 해만 될 뿐입니다. 당장 그만두십시오. 안 그러면 남은 삶을 불가능한 상상에 빠져 허비하게 될 테니까요.” 엘리는 쿠르드란의 팔뚝을 잡았다. “이 녀석은 절대 스카이리가 아닙니다. 절대 그럴 리 없죠.” 엘리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의 얼굴은 쿠르드란이 지금껏 봐온 얼굴 중 가장 진지했다. “하지만 녀석은 스카이리의 새끼입니다. 당신을 위한 선물이죠. 제가 약속드리겠습니다. 언젠가 이 그리핀이 제 어미처럼 위대한 그리핀이 될 거라고.”


“그래...” 쿠르드란이 목 안으로 응어리를 삼키는 기분을 느끼며 답했다.


쿠르드란은 머뭇거리다 알에 손바닥을 댔다. 따뜻했다. 숨이 막힐 듯이 답답한 아이언포지의 열기와는 사뭇 달랐다. 온기가 쿠르드란의 핏줄을 타고 올라 동부내륙지의 파란 하늘 아래, 태양의 빛을 쬐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 순간, 어떤 결과가 닥치더라도 마그니 국왕님의 명예를 지키고, 세 망치 의회의 일원으로서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명확해졌다.




* * * * *





대용광로는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많은 드워프들이 모여 있었다. 거의 온 도시의 드워프들이 모디무스 망치의 재련을 지켜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심지어 몇 안 되는 노움, 드레나이, 그리고 드워프들과 멀리 떨어져있던 얼라이언스의 일원들까지 대용광로의 중심부에 있는 거대한 모루 근처로 모여들었다.



아이언포지 경비병이 모루 주위의 저지선을 통제하고 있었고, 모이라, 무라딘, 그리고 검은무쇠 드워프 대장장이만 모루 가까이 있었다. 수많은 드워프들이 무장한 상태였고, 분노를 억누른 상태였기에 긴장감이 고조되어 있었다. 와일드해머 드워프들은 그들이 평소 모이던 그리핀 횃대가 아닌 왕좌 근처의 입구에 모여있었다. 불이 난 후로, 와일드해머 드워프들은 이들의 날개 달린 동반자들을 도시 밖으로 내보낸 상태였다. 깔끔하게 청소하고 새 지푸라기를 깐 둥지에는 오직 아이언포지의 그리핀들만 있었다.



쿠르드란은 북적북적한 용광로를 뚫고 나아갔다. 주위 곳곳에서 군중의 커다란 함성이 튀어나왔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음 속에서 “도둑”이라는 말도 여러 번 들렸다. 쿠르드란이 방의 중심부에 가까워지자, 모이라가 경비병 뒤에 서서 군중에 연설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모디무스 망치를 훔쳤다고 의심되는 자가 있다.” 모이라가 말했다. “수사는 여기서 진행될 것이다. 이 도둑들이 우리의 거사를 막을 순 없게 하겠다. 이제 재련의 시작을...” 모이라는 대용광로를 둘러싸고 있는 경비병들 뒤에서 쿠르드란을 발견했다.


“쿠르드란.” 어젯밤의 일이 일어나긴 했었느냐는 듯, 모이라가 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중에 도둑이 있소.”


아이언포지의 계승자는 브론즈비어드 드워프의 망치 머리와 검은무쇠 드워프의 보석이 잘 보이도록 놓여진 대용광로를 가리켰다.


“이 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해줄 수 있겠소?” 정중함의 가면을 쓴 모이라가 수많은 구경꾼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쿠르드란은 모이라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와일드해머 드워프의 대표인 자신을 압도할 수 있을 거란 확신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물론이오.” 쿠르드란이 잠시 무라딘을 바라보곤 말했다. 무라딘은 쿠르드란을 역겨운 표정으로 보고 있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쿠르드란은 거대한 모루의 모퉁이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곤 와일드해머 드워프의 계승품인 홀을 갑옷 속에서 꺼내 하늘 높이 쳐들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드워프들 사이로 다가갔다.


“아이언포지여!” 쿠르드란이 울부짖었다. “망치의 조각을 가져간 건 바로 나다.”


군중이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고, 거대한 모루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경비병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몇몇 드워프들은 왕좌의 입구에 있는 와일드해머 드워프들에게 달려들었다.


무라딘이 모루 근처로 다가와 쿠르드란의 남은 팔을 붙잡았다. “쿠르드란!” 브론즈비어드는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폭동을 일으킬 작정인가!”


“자네가 말했지, 나만이 이 도시의 갈등을 잠재울 수 있다고. 그게 내가 지금 하려는 일이네.”


“어떻게?” 무라딘이 물었다.


“족쇄를 끊는 방법으로 말이야, 친구.”


혼란에 빠진 무라딘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그러나 쿠르드란이 보기에 결국 브론즈비어드도 앞으로 일어날 일을 어림짐작한 듯했다. 무라딘은 군중에게 다가서서 외쳤다. “그에게 항변할 기회를 주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작아지자, 쿠르드란은 말을 이어나갔다. “난 수년간 아웃랜드에 처박혀 살았다.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란 희망도 가지지 못했다. 그때, 이 철제 홀은 나와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 상기시켜 주었지!”


쿠르드란은 홀을 들어 올렸다. 그는 어젯밤 스카이리의 알 옆에 무릎 꿇었던 그때, 마침내 홀의 정체를 깨달았다. 홀은... 그저 낡은 쇳덩어리일 뿐이었다. 드워프와 드워프 사이를 갈라놓고 쿠르드란의 마음속에 공포와 증오를 불어넣은 쇳덩어리... 그간 쿠르드란은 알지 못하는 걸 두려워하고, 익숙한 것을 포기하고 앞으로 나아가길 두려워하는 자신 앞의 과격한 군중과 별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쿠르드란은 아웃랜드에서 그 일을 이미 해낸 적 있었다. 바로 폴스타트에게 고위 영주 자리를 양보한 일이었다. 그는 부족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맹금의 봉우리에서 보낼 수 있던 세월을 포기했다. 그 희생에 비해 홀은 너무나도 하찮은 물건이었다.



“하지만 여긴 아웃랜드가 아니다.” 쿠르드란이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조상님들이 살던 아이언포지도 아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망치를 하나로 합쳐 과거로 돌아가려 하는가? 여긴 새로운 아이언포지다. 과거와는 전혀 다를 것이다. 모디무스 망치를 재련한다고 그 사실이 변하진 않아!” 쿠르드란이 모루 위에 와일드해머 드워프의 계승품을 힘껏 내던지며 말했다. “나와 우리 부족은 망치라는 족쇄에 묶인 채 새 시대를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군중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대용광로의 그림자 아래 있던 드워프들의 모습은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보였다. 확장과 수축을 반복하다 어느 틈에서 금방이라도 폭발해버릴 것 같았다.


“그가 망치의 조각을 가져가려고 한다!”


“와일드해머 드워프들이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쿠르드란은 말을 잇지 않고 등 뒤에서 폭풍망치를 뽑아냈다. 그리고 망치를 하늘 높이 들어 올리고는 단숨에 홀을 향해 내리꽂았다. 수십 년간 써온 그의 망치였음에도 천둥벼락을 쓴 쿠르드란의 귀가 윙윙 울렸다. 계승품은 작은 철 조각이 되어 산산이 부서졌다.


무리의 드워프들이 순간 당황하여 얼어붙었다. 긴장한 그들의 얼굴이 혼란으로 가득했다.


“새로운 아이언포지가 이곳에서 시작된다. 자신에게 물어라. 이 망치를 하나로 합쳐 언젠가 다시 쪼개질 수 있게 하는 길을 택하겠는가? 우리 와일드해머 드워프는 뒤로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택했다. 우리와 함께하겠는가?”


쿠르드란은 고개를 돌리고 폭풍망치를 의회의 다른 의원들에게 뻗었다. 그리고 이미 모루를 향해 다가오고 있던 무라딘을 보고 놀람을 금치 못했다.


“브론즈비어드 드워프는 함께하겠다!” 무라딘이 외치면서 폭풍망치를 움켜쥐었다.


무라딘과 쿠르드란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모이라를 보았다. 모두가 대용광로에 모였으나, 그녀 홀로 서 있었다.


아이언포지의 계승자는 도망칠 곳을 찾기라도 하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방의 정적이 계속 이어지자, 결국 불편해 보이는 발걸음으로 모루를 향해 걸어갔다. 마치 그녀의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듯했다. 그녀의 눈이 쿠르드란에서 멈췄을 때, 모이라는 폭풍망치 손잡이를 잡은 무라딘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쿠르드란은 남은 손으로 거대한 모루 중앙에 브론즈비어드 드워프의 망치 머리와 검은무쇠 드워프의 보석을 놓았고, 의회의 의원들은 함께 쿠르드란의 무기를 힘차게 내리찍었다. 또 다른 천둥벼락이 울려 퍼지며 남은 유물이 잘게 부서졌다. 유물과 함께 이들의 거짓도 부서졌다.



세 드워프는 한 손을 폭풍망치 위에 올리고 높이 쳐든 채, 모루 앞에 섰다. 그 모습에 갈채를 보내던 군중은 곧 환호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내내 모이라는 쿠르드란을 노려보았다. 자신을 향해 일침을 날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쿠르드란은 말이 없었다.




* * * * *






바로 다음 주, 부족 간의 긴장감은 연기만 피우고 사그라진 석탄 조각처럼 식었으나, 아주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폭력의 위협은 어느덧 사라지고 없었다. 쿠르드란은 부싯돌 선술집 구석에 홀로 앉아 맥주를 두 잔째 마시는 중이었다. 그의 고독은 분노나 죄책감의 부산물이 아니었다. 그는 긴장에 가득 차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쿠르드란은 생각했다. ‘만약 오지 않는다면... 책임을 그에게 물려도 될까?’


그 질문에 화답이라도 하듯, 폴스타트 와일드해머가 선술집에 들어왔다. 쿠르드란처럼 붉은 머리칼을 뒤로 묶은 그는 문 앞에 잠시 멈추곤 은은한 빛이 퍼지는 방안을 두리번거리다 쿠르드란을 발견했다. 웃음도, 끄덕임도 없이, 폴스타트는 쿠르드란의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반갑군, 친구.” 쿠르드란이 말했다.


“나도 만나서 반갑네.” 폴스타트가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잠시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쿠르드란은 와일드해머 홀을 파괴하자마자 폴스타트를 불렀다. 그의 친구가 자신의 부름에 어떻게 응할지 모르는 상태였다. 이제 도시에는 폴스타트가 있었음에 쿠르드란은 안도감과 의심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이럴 필요까진 없었네. 나보단 자네가 의회에 대한 권한을 더 갖고 있지 않나.” 폴스타트가 말했다.


“아닐세.” 쿠르드란이 답했다. “자넨 와일드해머 드워프의 고위 영주로서 20년을 보냈네. 최근 변한 건 한 멍청한 드워프가 자네보다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부분이겠지...”


“방금 엘리와 대화했네. 자네 벌써 아이언포지에서 유명인사가 된 것 같더군.”


“내가 어질러놓은 것들을 직접 정리했을 뿐이네. 자네가 있었으면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진 않았을 거야.”


폴스타트는 입술을 오므리고 쿠르드란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쿠르드란은 그의 친구가 자신의 오만을 질책할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면 자신이 아이언포지에서 일으킨 소동에 대해 속으로 고소하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날 위해서가 아니네...” 쿠르드란이 갑자기 절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부족을 위해 의회의 의원이 되어주게.”


폴스타트는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의 눈은 쿠르드란에 고정되어 있었다.


“내가 자네를 용서하고 의회에 합류하길 바라는 건가... 요 앞에 맥주 한 잔 대령해 놓지도 않았는데?” 폴스타트는 이를 다 드러내며 씩 하고 웃었다.


쿠르드란은 가슴에서 우러나온 웃음을 터뜨렸다. 거대한 짐을 어깨에서 덜어낸 기분이었다. 순간 폴스타트가 지닌 엄청난 지혜와 넓은 아량이 느껴졌다. 비록 의회가 구성된 후 아직도 많은 것들이 불확실한 상황이었지만, 바로 그런 점이 와일드해머 드워프를 바르게 이끄는 데 필요한 것들이리라.


쿠르드란은 폴스타트를 위해 맥주를 한 잔 주문했고, 두 드워프는 각자의 맥주잔을 들었다.


“의회를 위하여.” 폴스타트가 말했다.


“와일드해머 드워프의 고위 영주를 위하여.” 쿠르드란이 답했다.


“스카이리를 위하여.” 폴스타트는 쿠르드란이 건배를 청하기도 전에 맥주잔을 입에 갔다 댔다. 엘리가 폴스타트에게 스카이리의 죽음에 대해 미리 일러둔 상태였다. 쿠르드란은 굳이 스카이리를 추억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그의 사려 깊음에 감복했다. 그와 다른 그리핀 기수들은 스카이리처럼 좋은 친구를 잃은 자에게 긴 조의를 표하는 게 고통을 누그러뜨리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폴스타트는 빈 맥주잔을 쿵 하고 내려놓고 물었다. “그래, 이제 뭘 할 건가?”


“스톰윈드를 여행할 생각이네. 과거에 인간과 좋은 경험을 하기도 했고... 국왕 바리안 린도 만나보고 싶네. 도시의 입구에 아웃랜드에서 죽은 나를 추모하는 석상이 있다고도 들었고 말이야.” 쿠르드란이 활짝 웃었다.


“그래... 그 석상의 문구는 내가 썼지. 좋은 말을 찾기 힘들더군.” 폴스타트가 키득키득 웃으며 빈정거렸다.


밤이 깊자 다른 드워프들도 쿠르드란과 폴스타트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대격변으로 생긴 천재지변이 세상의 지형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그리고 아제로스의 왕국들에 어떤 정치적 변화가 생겼는지 이야기했다. 대화 내용 중, 쿠르드란의 흥미를 끈 것은 황혼의 고원에 흩어진 와일드해머 드워프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들은 맹금의 봉우리의 통치 없이 오랫동안 독립적으로 지내왔다. 하지만 최근 북쪽의 푸른 언덕에 뭔지 모를 어두운 세력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드워프들이 주제를 바꿨을 때, 쿠르드란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지난주만 해도 의회에서 그의 자리를 포기하는 게 와일드해머 부족 내에서 자신의 중요성을 깎아내리진 않을까 걱정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가 이끄는 자들을 위해 소중한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욕구를 희생할 의지가 쿠르드란 속에서 불타올랐다. 그를 아웃랜드로 이끌고, 와일드해머 홀을 부술 수 있게 이끌었던 바로 그 의지였다. 그의 운명은 아이언포지나 맹금의 봉우리에 눌러앉는 게 아니었다. 그의 운명은 여기에도, 저기에도 있었다. 바람처럼 가는 삶. 그런 불확실성이 어떤 도전에도 맞설 수 있는 힘, 이겨내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굳건히 버틸 수 있는 힘, 실낱 같은 희망이라도 그것을 위해 싸울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그것이 바로 와일드해머 드워프의 의지였다.



쿠르드란은 아이언포지에 온 이후 처음으로, 아니 아웃랜드에서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마치 스카이리와 함께 구름 사이를 날아드는 기분이었다. 쿠르드란은 상상 속에서 스카이리의 영혼과 함께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넓게 트인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노닐고 있었다. 그 위로는 알아보기 힘든, 어른거리는 신기루 같은 뭔가가 있었다. 쿠르드란은 마음속으로 그게 맹금의 봉우리와 모든 와일드해머 드워프의 평화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며칠, 몇 주, 아니 10년이 걸릴지 모를 일이었지만, 걱정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 쿠르드란은 결심과 결의를 다지며 스카이리의 목을 애정 어린 손길로 쓰다듬고, 바람이 이끄는 저 먼 지평선을 향해 날아갔다.

댓글

새로고침
새로고침

기사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