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자로 이어진 '사일런트 힐'의 공포와 경험

게임뉴스 | 강승진 기자 | 댓글: 1개 |



  • 주제: 토야마 케이이치로의 게임 개발 이야기
  • 강연자: 토야마 케이이치로 / 보케 게임 스튜디오 대표
  • 발표분야: 커리어
  • 강연시간: 2022.11.17(목) 15:00 ~ 15:50
  • 강연요약: 이번 세션에서는 토야마 케이이치로가 감독했던 게임의 개발 사례들을 소개하고, 개발 과정에서 배울 수 있었던 자신의 경험을 신작 '슬리터헤드' 개발에 어떻게 반영시킬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 ■ 격동의 시기, 거기서 출발한 사일런트 힐




    코나미에 게임 경력을 시작한 케이이치로 대표는 여러 회사를 옮겨가며 사일런트 힐, 사이렌, 그라비티 러시 등을 개발했으며 2020년 독립, 보케 스튜디오를 설립해 업계 경력을 이어가고 있다.

    케이이치로 대표는 중요한 순간마다 시대의 변화를 겪었고 이에 따라 경력도 달라졌다. 그가 배우던 디자인 작업은 디지털로 변화하던 시기였지만, 아직은 이르다는 시각이 지배적일 때였다. 하지만 게임 업계는 이를 적용해 굉장한 성공기에 접어들었고 그가 다니던 대학을 포함, 많은 대학에서 취업 설명회를 진행했다. 그게 그가 코나미에 입사하며 업계 경력을 시작한 계기가 됐다.

    코나미는 창업지인 고베, 오사카 등 간사이 지역을 중심으로 운영됐다. 이곳에서는 아케이드, 당대 인기 콘솔인 닌텐도 플랫폼 게임 등에 집중했고 도쿄 쪽은 비교적 마이너한 콘솔에 집중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그가 입사한 시기는 이른바 32비트 시대가 열린 때였다. 1994년 말 출시된 플레이스테이션과 세턴이 출시됐다. 특히 게임 하드웨어 산업에 새롭게 진출한 소니는 의심의 시선이 많았지만, 대담한 가격 전략, 유통 혁신 등의 전략이 먹혀들어 효과를 봤다.

    이에 코나미 도쿄 스튜디오는 전직원이 모여 개발 중이던 16비트 게임 프로젝트의 중단을 결정하고 32비트 재편을 결정했다. 게임 업계에 큰 영향을 준 타이틀도 출시됐는데 그게 캡콤의 바이오 하자드였다. 바이오 하자드의 성공은 여러 회사가 호러 어드벤처 도전을 시도하는 계기가 됐고 코나미 역시 다르지 않았다.

    선배 디렉터와 호출된 그는 당시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낸 하이퍼 올림픽 in 애틀랜타와 신작 호러 게임 중 무엇의 디렉터를 맡을지 물었다. 선배는 스포츠 게임을 맡았고 그렇게 자신은 호러 게임의 디렉터로 새 팀을 이끌었다. 그 호러 프로젝트가 바로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사일런트 힐'이다.






    ■ 차별화, 그리고 어둠의 공포

    팀은 사일런트 힐의 원안이 되는 작품을 구상했다.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부분은 차별화였다.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끈 바이오 하자드의 영향을 받은 게임들이 비슷하게 여럿 출시되리라는 건 굳이 시장 분석 없이도 뻔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케이이치로 디렉터가 고안한 공포는 자신의 경험에서 나왔다. 작은 상점을 운영했던 그의 어릴 적 집은 화장실이 별채에 있었고 2층에 있던 그의 방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야 갈 수 있었다. 그때 느꼈던 공포는 견딜 수 없는 수준이라고 각인되어 있다.




    개발팀은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첫 콘셉트를 어둠의 공포로 잡았다. 이러한 공포는 인간의 본능에 뿌리를 둔 공포다. 즉, 국적, 문화 등과 관계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테마다.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 역시 있는 셈이다. 아울러 어둠의 공포를 실현하기 위한 동적 카메라, 라이팅 요소는 바이오 하자드에는 없는 요소이기에 차별화에도 좋으리라는 판단도 섰다.

    이러한 콘셉트에 맞게 플레이스테이션 기본 기능에는 없는 포인트 라이팅 시스템이 제작됐다. 차별화, 기능의 가능성 역시 보였지만, 당시 플레이스테이션 기기에 담아내기에는 지나치게 무거운 게임이었다.

    기술적인 부분의 개발과 함께 세계관 부분에서의 창작도 이루어졌다. 호러라는 장르 자체가 미국을 포함한 해외 시장에서도 충분히 가능성을 보이는 장르다. 즉, 콘셉트처럼 세계에서 통용되는 세계관 구축이 필요했다.

    다만, 케이이치로 디렉터는 미국에서 더 잘 나가는 스플래터 무비는 그다지 선호하지도 않고, 지식도 없었다. 그때 떠오는 게 학창 시절 비디오 대여점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많은 사람이 대여한 스티븐 킹 원작 코너다. 당시를 기억한 그는 스티븐 킹을 비롯해 딘 쿤츠, 로버트 맥커먼 등의 조사하기 시작했고, 모던 호러 장르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리얼한 세계관 속에서 비현실적이고 황당한 사건 및 괴물들이 만드는 드라마를 선사한다. 케이이치로는 이렇게 유니크한 세계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으며 특히 스티븐 킹의 미스트를 보고 상상력에 큰 자극을 받았다.




    특히 미스트는 앞서 플레이스테이션의 기술적 한계로 구현하기 어려웠던 포인트 라이팅 시스템의 변형 도입을 가능케 했다. 안개가 가득한 거리, 짙은 어둠이라는 설정은 시야를 극단적으로 제한했고 멀리 떨어진 풍경을 구현하지 않아도 됐다. 가까운 풍경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 성능 한계 안에서 세심한 거리 구현이 가능했다.



    ■ 불안감과 불온함이 주는 공포, 사일런트 힐의 핵심으로

    다양한 호러 스타일 안에서 흥행을 위해 액션 요소는 무조건 필요하다고 판단, 액션에 어울리면서도 스플래터, SF 등 전형적인 요소는 배제했다. 결국 스스로 잘 아는 것, 자연스럽게 축적된 것에서 게임의 방향을 찾았고 UFO,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심령사진 등 자신을 매료시켰던 요소들을 되짚었다.




    세기말이 주는 불안감과 불온함. 미심쩍고 수상한 느낌. 봐서는 안 될 것이라는 게 분명하지만, 그 정체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무언가. 그게 게임의 핵심 공포로 결정됐다.

    그리고 이런 요소는 당대 전 세계적으로 J-호러 붐을 불러온 링 등의 성공이 확신을 줬다. 당대 영향력을 뽐낸 얼터너티브 컬처 영화 역시 게임의 바탕을 잡는 데 도움이 됐다. 특히 TV 시리즈인 트윈 픽스로 전성기를 맞이한 데이비드 린치의 영향을 받은 게임 크리에이터가 많이 나오기도 했다.

    일부에서 유행한 음악 장르인 노이즈 인더스트리 장르 역시 게임 제작에 영향을 준 요소다. 미니멀한 루프를 여럿 겹쳐 그린 해당 장르는 제약이 많아 메모리가 적고 음질이 좋지 못했던 당대 플레이스테이션의 한계를 도리어 거친 효과와 함께 불안한 공포로 연결시키는 힘이 됐다.

    노이즈는 음악을 넘어 그래픽 연출에도 사용됐다. 옛 게임들은 텍스처의 16색 제한으로 타일 패턴을 여럿 깔거나 이를 교차시켜 그라데이션으로 다른 색을 구현하곤 했다. 하지만 케이이치로 디렉터는 텍스처를 거칠게 남겨두는 형태로 투박하고, 불안한 심리를 강조했다.






    ■ 모두가 공감하는 보편적 공포

    케이이치로 디렉터는 이러한 도전과 성공이 젊은 팀과 새로운 인재들의 시너지라고 봤다. 케이이치로 자신도 겨우 입사 3년차가 됐을 때 한 프로젝트를 이끄는 디렉터가 됐다. 그에 맞춰 입사 3년차, 혹은 젊은 멤버들이 팀원이 됐다. 극단적으로 젊은 팀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오늘날까지 업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당대 '영 탤런트'들이 두각을 드러냈다.




    타카요시 사토는 아날로그 게임이 주류를 이루던 당시 3D CG 아트를 하고 싶어 업계에 들어왔다. 전에 없던 타입의 개발자인 셈이다. 사일런트 힐 시리즈를 대표하는 게임 음악 작곡가이자 리메이크 '사일런트 힐 2' 개발에도 참여하는 야마오카 아키라 역시 이때 팀에 합류했다.

    사일런트 힐의 상징적인 크리처를 만든 재능 이토 마사히로도 케이이치로가 코나미 입사 4년 차에 신입으로 팀에 합류했다. 지금도 놀라운 수준의 크리처 디자인을 그려낸 그의 포트폴리오는 당대 충격을 주기 충분했고 누구도 접하지 못한 작풍을 가진 그의 팀 합류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만, 다른 사람의 작품과 그의 작품을 한 게임 안에 담아내면 그 형태가 굉장히 이질적이었기에 이를 융합하고, 작품을 더 잘 살리는 케이이치로 디렉터의 노력이 필요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인물들이 똑같이 젊은 디렉터와 함께했고 케이이치로 디렉터는 그게 팀이 잘 돌아갈 수 있는 힘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다만, 불안함이 없던 건 아니었는데 같은 코나미에서 나온 메탈 기어 솔리드의 공개가 대표적인 예다. 1997년 E3에서 공개된 메탈 기어 솔리드는 같은 코나미 내에서도 비밀리에 진행된 프로젝트여서 사일런트 힐의 개발팀도 그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E3에서 선보인 메탈 기어 솔리드의 프로모션 비디오 안에는 다채로운 게임 플레이가 담겼고 이는 일명 '메탈 기어 솔리드 쇼크'로 불리며 여러 개발자에게 문화 충격을 선사했다. 사일런트 힐 개발 팀 역시 자신들은 쇠파이프로 적을 때려죽이는 정도가 고작인데 메탈 기어 솔리드가 선보인 플레이는 그들 내부에 불안감을 싹 띄우기 충분했다.




    특히 팀을 이끄는 케이이이치로 디렉터의 불안과 초조함은 곧 팀 운영과 연결됐기에 그 스스로도 많이 고민했다. 다만, 단순히 불안에 떨고 게임 개발을 멈추기보다는 불을 끄면 어둠에 빠지는 요소를 제안하는 등 새로운 무언가를 더하는 데 집중했다.

    고민과 불안이 가득했던 1년이 지난 1998년. 해가 바뀐 E3에서 사일런트 힐이 발표됐다. 게임은 팀 내부의 불안과는 반대로 좋은 반응을 이끌어 냈다. 신규 IP, 독창성 있는 분위기에 관한 호평이 컸다. 같은 해 출시된 게임 역시 특유의 공포가 인정을 받았다.

    악전고투 속에서 사일런트 힐을 만들었고 이후 그는 SIE로 이적, 사이렌이나 그라비티 러시 등의 신규 IP를 제작했다. 스스로 돌아볼 때 화려한 성적을 남긴 IP는 아니지만, 영상화나 속편이 다시금 기획되는 등 플레이어의 기억에 남는 작품을 남길 수 있어 자부심을 느낀다고 케이이치로 디렉터는 자평했다.

    여기서 떠올린 게 가비지(Garbage)와 빈티지(Vintage)의 차이다.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남과 함게 낡기 마련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이를 되돌아봤을 때 진부한 것으로, 가치를 잃은 것으로 평가되는 건 가비지다. 반면, 새로운 쪽으로 더 나아가고 시간이 경과하며 부가가치를 느끼게 해주는 게 빈티지다.

    결국, 시대를 뛰어넘어 모두가 공감하는 보편적 가치를 만드는 게 둘의 차이를 만든다.



    ■ 20년이 지나, 야구자: 슬리터헤드로

    사일런트 힐이 출시된 지 20년이 지났고 직접 설립한 보케 스튜디오는 야구자: 슬리터헤드라는 새로운 타이틀을 준비하고 있다. 시간은 흘렀지만 창작 동기는 지금까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케이이치로 디렉터 내면에 자연스럽게 쌓이고 내포된 주제에 관해 자연스럽게 대화하면서 그 틀을 갖추는 것이다.




    중국 구룡성채에서 그 아이디어를 얻은 야구자는 90년대 홍콩의 이미지를 게임으로 살린 작품이다. 거리에는 네온 간판이 줄지어있고 비행가는 건물을 스치듯 겨우 하늘을 난다. 하지만 거리가 노후화되고 결국은 철거되어 사라진다.

    야구자는 점점 모습을 잃어버리는 거리에 관한 공감이자, 플레이어가 이방인으로서 거리를 헤매는 불안 섞인 모습에서 플레이어가 빠져들도록 한다. 전 세계 사람들이 함께 느낄 수 있는, '공감'이 다시금 게임의 핵심 근간이 되는 셈이다.

    젊음을 대표하던 케이이치로 디렉터도 어느덧 나이 50을 넘겼다. 그는 자신의 개발 경력을 돌아보며 작품이 캐릭터성보다는 무대가 되는 거리의 이미지부터 조금씩 게임을 구축해나갔다고 기억했다. 그리고 젊었을 때 느꼈던 창작의 열정을 떠올리며 새로운 창작 열의를 불태운다고 전했다.

    아울러 선배 개발자의 역할도 제시했다. 그는 많은 인재가 활약할 수 있는 힘을 지원하는 게 과거에 누린 개발에서의 자유를 보답하는 길이라고 전했다.

    한편, 팀원을 규합하고 좋은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노하우를 묻는 질문에 이는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면서도 상대방을 의심하지 않는 분위기를 강조했다. 불만이든 평가든 모든 내용을 팀원과 공유하고, 서로 대화해 발전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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