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그래서 누가 만든 게임인데?

칼럼 | 강승진 기자 | 댓글: 6개 |
오랜 배트맨 팬에게 '더 배트맨'은 단 1회 감상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아예 일도 하루 쉬고 3시간짜리 영화를 두 번 연속으로 본 날도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영화는 보면 볼수록 더 많은 게 눈에 잡히기 시작합니다. 흘러가듯 지나갔던 대사의 뜻이 새로 보이기도 하고, 연출을 위해 의도적으로 배치된 사물과 인물들의 구도 같은 미장센. 다크나이트와는 다른 방식으로 롱 할로윈 등 원작 코믹스를 각색한 시나리오와 연출. 그리고 이제 막 배트맨으로서 발을 디딘 브루스 웨인을 상징하는 듯한 투박한 배트수트까지. 3시간이라는 시간 동안 그려지는 가상의 세계는 수없이 뻗어 나가고, 생각할 거리를 만드는 완성된 미디어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완성해낸 건 유통사인 WB 픽처스도, 제작을 이끈 DC 코믹스 기반 스튜디오인 DC 필름스가 전부는 아닙니다. 촬영 후 매일 편집실에 살다시피 했다는 맷 리브스와 그 의도를 카메라에 담아내 끌어올린 촬영 감독 크레이그 프레이저. 그리고 시나리오와 그걸 화면 안에서 수행한 배우들, 코스튬 디자이너, 특수 효과와 아트 디렉터, 눈이 아니라 귀로 들리는 것까지 맡은 사운드 관련 스태프들까지 수많은 사람의 노고가 녹아있죠.




영화보다 훨씬 큰 게임 산업시장 규모만큼 게임에 따라서는 제작에도 영화만큼 많은 사람이 참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유통사나 스튜디오가 아니라 개발자 자체에 주목하는 경우도 많고요. 실제로 개발자를 들여다보면 게임의 역사, 혹은 작품의 분위기를 따라가고 이해하는 데 꽤 도움이 됩니다.

게임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프랜차이즈인 젤다의 전설 시리즈는 닌텐도의 대표적 인물인 미야모토 시게루가 그 창시자로 꼽힙니다. 하지만 미야모토의 분신으로 불리는 테즈카 타카시가 첫 작품과 전 세계적 인기를 끈 신들의 트라이포스를 디렉터로서 연출했죠. 2000년대 들어 테즈카가 게임 전체를 총괄하는 프로듀서로 닌텐도의 다른 여러 게임을 맡으며 3D 젤다는 아오누마 에이지의 시대로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아오누마가 제작으로 올라서며 젤다의 전설 스카이워드 소드부터는 일찌감치 두각을 드러낸 후지바야시 히데마로가 게임 디자인과 디렉터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야숨으로 불리는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및 그 속편도 그가 이끌고 있죠.

바이오하자드로 유명한 미카미 신지와 그 밑에서 바이오하자드2를 연출한 카미야 히데키 모두 현재는 탱고 스튜디오와 플래티넘 게임즈에서 새로운 게임 인생을 열고 있죠. 그리고 게임디자인으로 주목받던 나카니시 코시나 모리시마 사토는 바이오하자드 신작들의 디렉터로 올라섰고요. 코리 발록은 X-Men 개발 시절부터 20년 이상 손발을 맞춘 디자이너 에릭 윌리엄스에게 갓 오브 워의 후속작, 라그나로크 디렉터를 맡기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알 수 있는 건 어디에 그들의 뒷조사를 맡길 필요도 없고 미칠듯한 팬심이 없어도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개발자의 관계나 이력, 역사를 알 수 있는 건 이 모든 게 플레이어들이 확인할 수 있는 스태프롤로 기록에 남으니까요.




영화가 끝나고 수많은 사람의 이름이 올라가는 크레디트처럼 게임도 엔딩 장면에 크레디트를 남깁니다. 플레이어들에게는 게임의 마지막을 긴 여운과 함께 매조짓는 단계기도 하지만, 그 게임 개발에 참여한 수많은 이가 자신의 이름을 대중에게 남기는 시간이기도 하죠.

그리고 이런 개발자들의 이름은 바꿀 수 없는 이력으로 남아 기록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누가, 어떤 게임을 만들고 새로운 개발자가 과거에는 무엇을 만들었는지 확인할 수 있죠. 분명 프로듀서급, 디렉터급으로 게임을 책임지고 팀을 이끄는 인물이 아니더라도 게임 개발자로서 자신의 노력을 인정받을 수 있기도 하고요.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해외 개발사들에나 해당하는 모양새입니다. 여러 차례 국내 개발자 크레디트에 대한 기록을 남기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정작 게임에 올라오는 스태프롤을 찾아보기 힘드니 이걸 정리하기는 쉽지 않았겠죠. 특히 온라인 게임, 나아가 모바일 게임으로 국내 게임 무게추가 옮겨가기 시작하면서 엔딩이 없는 게임에 크레디트를 넣기 어렵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온라인 게임에 스태프롤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마비노기가 시즌 엔딩마다 개발자들의 이름을 올렸었고 확장팩 단위로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가 끝나는 파이널판타지14 같은 경우에도 크레디트가 포함됐죠. 엔딩 없이 즐기는 모여봐요 동물의숲은 K.K.의 공연을 스태프롤이 올라가는 시기로 잡았고요. MMORPG인 로스트아크도 크레디트를 홈페이지에 올리는 방식으로 개발자들의 이름을 남겼습니다. 다만 국내가 아니라 아마존이 서비스한 버전에서 말이죠.

아마존 게임즈는 로스트아크 글로벌 버전의 공식 홈페이지에 크레디트를 만들고 서비스에 참여한 사람들을 기록했습니다. BGM이나 현지화, 퍼블리싱, 연기자 등 국내 개발자가 아니라 서비스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만 나열했을 뿐인데도 깨알 같은 글씨로 20페이지 가까운 이들이 여기에 이름을 올렸죠. 아마 국내에서 실제 게임 개발을 함께한 사람들까지 더한다면 훨씬 더 많았겠죠.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엔딩의 유무나 온라인, 혹은 모바일 같은 게임 특징에 따라 싣지 못하는 게 아니죠. 하지만 이러한 서비스 방식을 이유로 스태프롤은 점점 사라졌습니다. 메인 디렉터, 혹은 프로듀서 등 게임의 문제를 책임질 사람들만이 얼굴을 드러내는 정도에 그치고 있죠.



▲ 아마존 버전 로스트아크의 크레디트, 국내 개발자 없이 해외 서비스 인물들만으로도 이렇게 많은 인물이 참여

제작자가 아니라 회사, 유통사의 이름이 찍혀 나오는 건 작품이 아니라 마치 공산품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분명 개발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의 노력이 담겼지만, 제대로 된 기록이 남지 않으니 개발자 대부분에겐 이력서 한 줄로만 남을 뿐이죠. 그마저도 언제든 다시 즐길 수 있는 기존의 게임 형태와 달리 서비스 종료로 다시는 즐길 수 없는 방식의 게임은 완성된 결과물마저 언제든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새로운 게임이 나와도 디렉터, 혹은 함께 참여하는 개발자들의 이력이 아니라 회사와 IP 이름을 가리키고 줄 세우기가 이루어지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상황이고요. 지금 당장에야 이미 이름을 알린 스타 개발자, 사업가들을 내세울 수 있다지만, 그들이 일선에서 물러난 다음에는 누가 새로 게임을 맡든, 어떤 과거를 가졌든 그저 똑같은 개발자 한 명이 되어버릴 수도 있고요.

게임의 역사는 만들어진 작품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그걸 만든 개발자의 역사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족보가 남아있지 않는다면 그 역사를 제대로 세울 수 있을까요? 젤다의 전설은 최고 프로듀서인 미야모토 시게루의 이름을 팔아야 할 테고 바이오하자드의 신작은 회사 떠난 이들을 소개 문구에 넣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과거가 없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나이트, 맷리브스 더 배트맨은 그저 코믹스 속 배트맨이라는 캐릭터 하나에 기준을 뒀을 테고요.

이미 출시된 작품, 사라진 게임들까지 모두 정보를 채워넣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미래를 위해 기록을 남겨둘 게임을 얼마든지 있고 또 출시되겠죠. 여러 이유를 대가며 빠졌던 게임 크레디트를 지금이라도 넣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댓글

새로고침
새로고침

기사 목록

1 2 3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