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믿음을 주는 말

칼럼 | 김병호 기자 | 댓글: 23개 |


▲ 사진제공: 담원 기아

며칠 전, 일흔을 앞둔 아버지와 음식점을 간 적이 있다. 주차를 하신다던 아버지는 한참을 차 앞에 서서 이상하다는 듯 뭔가를 찾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물어보자 아버지는 차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차 문을 잠그기 위해 리모컨을 여러 번 눌렀지만, 늘 들리던 ‘삐빅’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며 걱정 어린 혼잣말을 했다.

“이젠 나도 나이가 들어서, 귀가 잘 안 들리나 봐…”

우울한 표정의 아버지에게서 차 키를 받아 잠금 버튼을 눌러보니 정말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차 문은 분명히 잘 잠겼지만, 차에 달려 있는 음향 장치에 문제가 생긴 듯 보였다.

“아빠 귀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차가 고장 난 거예요. 고치면 되죠..”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말에 아버지는 웃으셨다. 차에는 문제가 생겼지만, 자신의 귀는 문제가 없다는 것에 안심해서 였을까? 차를 의심한 게 아니라 자신의 귀를 먼저 의심한 아버지를 보며 ‘나이를 먹는다는 건 이런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일이라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은퇴를 앞뒀던 한 선수의 인터뷰가 기억이 난다. 아마 ‘쿠로’ 이서행이었던 것 같다. 예전처럼 스킬을 잘 맞히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그리고 그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을 보면서 ‘내가 정말 나이를 먹어 피지컬이 떨어진 걸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는 이제 은퇴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사실일 수도 있다. 진짜 나이를 먹어서 맞힐수 있던 스킬을 맞히지 못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여러 통계를 통해서 나온 것처럼 프로게이머의 전성기와 은퇴 시기는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하다. 그리고 많은 선수들이 그 통계의 벽을 넘지 못하고 사라진다. 올해만 해도 우리가 잘 알고 친숙했던 많은 선수들이 ‘프로’의 삶을 마감했다.

담원 기아의 탑 라이너 ‘칸’ 김동하도 그 선수들과 함께 우리 곁을 떠날 수 있었다. ‘칸’이 지난해 펀플러스 피닉스에서 보여줬던 폼은 사실 그리 특별하지 않았고, ‘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담원 기아의 입단을 앞두고 진행한 인터뷰에서 ‘칸’은 처음으로 은퇴를 고민했었다고 말했다.



▲ 사진출처: LCK

인터뷰를 한 지 고작 한 시즌이 지난 지금, 화면 속의 ‘칸’은 결승전 MVP 상금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마치 은퇴를 고민했던 적이 없는 것처럼 이번에는 MSI 우승을 꼭 해보겠다고 승부욕을 보였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가렌도, 나미도, 잔나도, 사이온도 모두 하겠다는 ‘칸’ 특유의 유머 감각도 여전했다.

1995년생 한국 나이 스물일곱, 프로게이머 연령 통계를 뛰어넘은 ‘칸’의 지금 모습은 3년 전 킹존 드래곤X 시절과는 많이 다르다. 선수가 인정하는 최고의 무력으로 제이스를 떠올리게 했던 ‘칸’은 이제 사이온이라는 방패를 들고 팀의 최전선을 책임지고 있다.

문득, 3년 전의 ‘칸’과 지금의 ‘칸’ 중에 누가 더 뛰어날까?’라는 고민을 하다 참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년 전 여름 ‘칸’이 들어 올렸던 트로피와 이번 봄에 들어 올린 트로피는 같은 것이니 말이다. 아니 어쩌면, ‘칸’에게는 지금의 트로피가 더 값지게 느껴질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칸’이 은퇴를 하지 않았던 건 김정균 감독이 내민 손 때문이었다. 전년도 월드 챔피언십 우승팀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해낼 거라는 김정균 감독의 믿음은 ‘칸’을 다시 의자 위에 앉혔다. 그리고 ‘칸’은 주어진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면서 감독과 선수들이 보내준 믿음에 답하고 있다.

‘칸’을 보면 믿음을 준다는 건 사람 한 명의 운명을 바꿀만한 일인 것 같다. 자신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게 되는 순간은 ‘칸’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나이를 의심하고, 실력을 의심하는 많은 선수들이 있다. 물론, 그 의심이 진짜일 수도 있다. 정말 실력이 떨어졌거나 나이를 먹어서 예전 같은 기량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그게 꼭 선수의 삶을 끝내야 한다고 결론지을 일은 아닌 것 같다.

아버지의 귀가 문제가 아니었다는 말 한마디는 아버지를 웃게 했다. 다시 한 번만 해보자는 김정균 감독의 말은 ‘칸’을 은퇴의 기로에서 MSI로 이끌었다. 믿음을 주는 말에는 아마 그런 힘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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