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컬쳐] '도타'하고 싶으니까 스토리 겜 만들어줘요

칼럼 | 강승진 기자 | 댓글: 28개 |



게임 원작 영상물이 '구리다'는 건 일종의 공식과도 같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대개 게임 팬들이 기대한 바를 마땅히 충족해주지 못했기도 했고 그중 일부는 그냥 원작을 모르는 이들이 보기에도 한없이 '구렸'으니까요. 그렇다고 모든 작품이 실망만 안겨준 건 아닙니다.

대만 공포 영화 '반교'는 게임 속에 드러난 역사적 고통을 3차원 화면으로 200% 살려냈고 넷플릭스의 TV 시리즈 '캐슬바니아'는 부실했던 '악마성 드라큘라' 스토리 위에 흡혈귀에 대항하는 인간의 고뇌와 성장을 녹여내며 한때 평점 사이트 꼭대기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게임 판매량까지 올린 '위쳐'에 '수퍼소닉'은 지난해 북미 박스오피스 전체 2위를 차지했고 '명탐정 피카츄' 역시 흥행만으로는 아쉬울 게 없었죠.

여기저기서 게임 원작 영상물이 실망스러운 이유를 그럴듯하게 분석했고 이를 한층 나아져야 할 영상 제작의 근거로 삼길 바랐지만, 사실은 그저 제작진의 의지나 역량 부족. 혹은 주제나 표현에 적합하지 않은 인선 발탁에 문제가 있던 것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이미 손가락 발가락 다 써도 꼽을 수 없을 수의 저급한 게임 원작 영화를 낸, 그 유명한 우베 볼 같은 감독도 있으니 더 그럴 것 같고요. 우베 볼 이야기는 이 기사(링크)로 대충 살펴볼 만할 겁니다.




게임 원작 작품을 여럿 선보인 넷플릭스와 밸브의 만남을 이야기하기 위해 조금 멀리까지 왔네요. '도타: 용의 피(용의 피)'는 하프라이프, 포탈, 팀 포트리스 등을 지나 오늘날 밸브의 작은아들 쯤 되는 '도타2'를 기반으로 합니다. 당연히 서비스가 계속되며 덧붙여진 이야기와 원작 속 캐릭터들의 모습이 어떻게 구현됐을지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데요.

일단, '도타2'를 생각했다면 그럭저럭 제대로 찾아왔고요. 예고편 속 화려한 액션에 킬링타임용 작품을 기대하셨다면 잘못 찾아왔으니 그대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기사 내에 영상 내용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도타2였습니까'

고대 시절부터 시작된 레디언트와 다이어의 대립을 소개하며 시작되는 이야기는 곧장 '도타2'의 영웅, 용기사 다비온 개인에게 집중됩니다. '용의 피'라는 제목답게 용기사 다비온이 장로고룡 슬라이락과 피를 나누어 때로는 인간으로, 때로는 고대의 힘을 불러내 용의 형상을 할 수 있게 된 이야기의 기원을 다루고 있죠.

각각의 매치 하나에 성장과 대규모 전투, 결말을 다루는 '도타2'는 그 특성상 스토리의 진행보다는 게임 플레이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데 다비온의 이런 설정은 게임의 기초 설정과 거의 유사합니다. TV 시리즈가 게임이 가진, 잘 알려지지 않은 설정을 주입하는 데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거죠.




이야기를 주도하는 또 하나의 인물인 미라나 역시 비슷한 역할을 부여받았습니다. 여신 셀레메네를 섬기며 은빛 밤의 숲에서 메네의 연꽃을 지킨다는 원래 설정을 기반으로 한 미라나의 이야기는 '용의 피'가 게임 스토리의 영상화에 집중하고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저 원작 설정을 찍어내기만 해서는 원작 팬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할 수 있을지언정 각각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내기는 어려웠겠죠. 그래서 제작진은 이들 캐릭터에 가해진 설정을 변화구로 던졌고 이 둘의 교점을 만들었습니다.

다비온은 늙고 힘없는 용 슬라이락이 아니라 영혼을 빼앗긴 또 다른 고룡 울도락과의 싸움으로 지친 강력한 슬라이락의 몸과 섞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를 마음대로 컨트롤하지 못하고 증오의 목표인 용이 된다는 갈등에 쌓인 인물로 그려집니다. 미라나 역시 메네의 연꽃을 도둑맞은 실패자로 이를 찾아 나선 과정에서 갈등하는 다비온과 만나게 되죠.

이처럼 추가적인 설정은 스토리 중심선에 두 캐릭터를 함께 올려놓는데 성공합니다.



▲ 강력한 모습과 함께 나름의 의지로 다비온과 함께 움직이는 고룡 슬라이락

그런데 이야기의 중심 선상에 있는 인물은 다비온 하나가 아닙니다. 잔혹한 성품을 거두고 셀레메네의 믿음에 따르기로 한 루나, 셀레메네와 복잡한 관계에 있는 원소술사(인보커), 혼돈에서 진리를 깨닫고 음험한 계획을 그리는 악마 테러블레이드, 여기에 고대의 용들까지 각각의 이야기 안에서 서로 교차하며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들 각각의 이야기를 어떻게 TV 시리즈 한 편에 담아낼지 고민할 필요가 있었는데요. 의외로 제작진의 답은 명쾌했습니다. 굳이 해결하려 하지 않은 거죠. 그 역할은 일단 시청자의 이해력에 맡겼습니다.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하기는 하지만 접점을 만드는 수준에 그칠 뿐 인물들은 서로 저마다의 목적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회차가 진행되며 늘어나는 캐릭터의 수만큼 이야기 갈래가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져 나가고 시청자가 이를 따라가는 데 애를 먹게 하죠.

메네의 연꽃을 찾아 돌아가는 미라나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시작부터 끝 비스름한 결말을 맺었지만, 다비온의 이야기는 찜찜한 여운을 남기며 그 결말이 다음 시즌으로 미뤄지죠. 원작보다 훨씬 강력한 신적인 수준의 마법 능력을 뽐내는 원소술사는 극 중반에서야 셀레메네와의 관계가 밝혀지고 다비온 등장 전 영상 시작과 함께 나왔던 테러블레이드는 시즌 마지막 화가 되어서야 그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냅니다.

여기에 원작에 없던 여러 신 캐릭터와의 해결되지 않은 갈등까지 생각하면 대충 '다음 시즌을 기대해주세요!' 쯤의 결말을 낸 셈입니다. '발단과 해결, 그리고 새롭게 일어나는 갈등'까지를 다뤘다기보다는 '발단과 발단, 그리고 전개 비슷한 발단'까지 보여주고 나머지 이야기를 뒤로 미뤘습니다.



▲ 주역 인물마다 서로 건너건너 엮여서 이야기가 더 복합해집니다

물론 기본적으로 다뤄야 하는 내용은 전부 담아내고 있어 한 번 정도 다시 본다면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눈에 들어오긴 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깊이만큼은 확실하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사실 20분 남짓한 영상 8편으로 기본 설정에 이런저런 스토리가 붙고 더해진 '도타2'의 이야기를. 그것도 나름의 추가 내용이 붙은 내용까지 전부 다루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넷플릭스는 빨리 시즌2를 내야 한다 이겁니다. 기다림은 언제나 지치니까요.


'빛나는 연출, 게임 느낌은 조금 부족한데'

여러 이야기가 이리저리 더해지며 복잡해지긴 했지만, 메인 스토리를 진행하는 다비온과 미라나의 조합은 적당한 서사와 유머로 깔끔하게 보는 맛을 살렸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 속에서 오는 이성 막지 않고 적당히 인생을 즐기며 살자는 주의. 그러면서도 정의감이 살아있는 다비온이 나름의 신념을 지키고자 하는 미라나와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 애정을 느끼는 빌드업이 시리즈 중 착실하게 이루어집니다.

또 덩치는 작지만 의외의 괴력을 내보이는 미라나의 시종 마르시는 시즌 곳곳에서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며 이들의 조합에 빠져들게 하죠. 해외에서는 마르시가 진짜 주인공이라며 치켜세우기도 하는데 작품을 끝까지 시청했다면 반쯤은 고개를 끄덕일 만할 겁니다.

아마 이 이야기 줄기가 8편의 에피소드를 모두 채워 넣는 건 힘들었을지 모르지만, 확실히 계속 추가되는 내러티브에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은 제대로 하고 있습니다.



▲ 여기서는 강력한 모습이지만 평소에는 귀여운 소녀 느낌으로 여러 매력을 내는 마르시



▲ 함께 싸우고 의지하며 애틋한 감정을 키우는 둘

여기에 원작 일러스트보다 한껏 버프 받은 캐릭터들 디자인도 이야기에 집중하기 쉽도록 만들죠.

기본적인 이야기 위에 덧입혀진 시각적인 부분. 그러니까 선 굵은 캐릭터와 액션으로 눈에 담기는 부분에 꽤 많이 집중한 게 곳곳에서 느껴집니다. 또 1화 시작과 함께 떠오르는 오프닝 크레딧과 각 에피소드 마지막 스태프롤 곳곳에 올라오는 한국어 이름에서 왠지 모를 자부심이 끓는 점 위로 넘어 보글보글 거리는 게 느껴집니다.

한국에 본사를 둔 스튜디오 미르는 이번 작품에서 단순히 동화나 애니메이션만 손보지 않고 제작과 기획에도 참여했습니다. '토르: 천둥의 신',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의 각본을 맡았던 쇼 러너 애슐리 밀러가 총괄로 주목받았지만, 스튜디오 미르의 류기현 감독 역시 공동 총괄 제작으로 작품을 함께했죠.

아마 스튜디오 미르 하면 '코라의 전설'에서 멋진 작화를 보여줬던 게 기억나는데요. 이번에는 액션 자체도 더욱 강력하게 다듬어졌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TV 시리즈 전체에 스토리를 덧붙이는 대화와 묘사로 전투나 액션 장면이 생각만큼 많은 편은 아닌데요. 상황에 따라 액션 스타일은 다르지만, 몰입감을 높이는 연출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죠.

1화에서 다비온이 보여준 용 사냥은 두꺼운 용 비늘을 다양한 도구로 잡아내는 처절함이 담겼다면, 용 슬라이락과 용의 힘을 빌린 용기사 케이든(케든)이 정면 충돌하는 4화의 전투는 강력한 힘과 힘의 맞대결로 굵직한 액션을 그립니다. 원소술사와 용의 싸움에서는 다양한 마법으로 화려함을 더했죠.



▲ 인보커님 마법 쓰신다

원소술사는 강력한 공격 마법 외에도 손에 물을 담아 사람을 이동시키고 순간적으로 장소를 옮기는 등 다양한 실용 마법도 선보입니다. 마법에 별 내성이 없는 다비온이 원소술사와 만나 마법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모습은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에서 에이션트 원을 만난 닥터 느낌이 아주아주아주 살짝 나기도 합니다.

여기저기 피를 튀기는 액션도 게임의 분위기를 살려내는데요. 그저 '와! 피! 섬뜩!' 스타일의 잔혹함만을 위한 폭력이라기보다는 현실성을 더해주는 수준을 지키고 있습니다. 성인 등급을 받았지만, 지나치게 선정적인 요소나 다른 넷플릭스의 성인 애니메이션이 보여주는 장기 자랑은 거의 없습니다. 작품의 몰입도를 위해 필요한 부분에서 표현이 다뤄졌다는 게 맞겠네요.

눈 돌아가는 액션에서 아쉬운 점이라면 원작의 모습을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인데요. 그나마 루나가 보여주는 월광선 정도를 제외하면 주역들은 거의 기본적인 활과 검 공격 정도로 액션을 채워 넣습니다. 이 부분은 다비온이 아직 슬라이락과의 몸을 공유하기 시작했을 뿐이고 미라나 역시 원작과 설정이 달라진 게 이유긴 합니다. 일단 시즌이 계속되며 바뀔 모습이 기대돼야 하는데, 그래서 다음 시즌은 대체 언제 내주나요?



▲ 원작 특성 자체는 거의 그대로인 루나는 원작 스킬을 기억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입니다


'이쯤 되면 제대로 스토리 그린 게임 하나 내줄 때가 됐는데'

용의 피를 통해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래서 쟤들은 누군데?' 혹은 '어떻게 되는데?'일 겁니다. 게임이 있다는 걸 안다면 게임을 플레이해보고 싶어질 거고요. 아쉬운 점은 '도타2'가 그 스토리에 대한 가려움을 쉽게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게임의 만듦새를 떠나 '도타2'는 용의 피처럼 레디언트와 다이어의 대립이라는 간단한 개념으로 시작했습니다. 이 위에 갖가지 스토리가 덧칠해졌죠. 그래서 코믹스나 개발진의 코멘트 등을 통해 풍부해진 이야기를 알 수는 있지만, 이걸 게임 하나로 쉽게 체감할 수 없었죠.

여기에 이미 '도타2'를 즐겼다면 모르겠지만, 비교적 진입 장벽이 높은 장르 특성도 걸림돌입니다. 넷플릭스에서 오리지널 시리즈로 메인 화면이고 광고고 용의 피를 꽤 밀어줬던 걸 생각하면, 평소 게임에 관심이 적어 '도타2'를 잘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 잠깐 발을 들였다가 손사래를 칠 지도 모를 일이고요.



▲ 오늘 딱 용기사 하는 각. 그렇다고 잘할 수 있다고는 안 했습니다.

지금은 꽤 다양한 스토리가 쌓인 만큼 이를 풀어낼 수 있는 게임 하나쯤은 생각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요. 오토 배틀러인 '언더로드'나 결국 개발 종료를 선언한 카드 게임인 '아티팩트'도 게임 자체에 집중한 편이지 스토리에 몰입하도록 구성된 편은 아니니까요.

여기에 물이 들어올 때 젓던 노에서 손을 뗄 필요는 없겠죠. 전문가들도 엄지를 세운 또 다른 게임 원작 애니메이션 '캐슬바니아'와 비교하면 전문가 평은 영 아쉽습니다만, 메타크리틱 유저 점수는 8.6점으로 준수하고 로튼토마토는 관객 점수 격인 팝콘 지수가 93%로 옥수수가 바삭바삭 튀겨졌죠. 평가가 많아지면 또 달라지겠지만, 지금까지는 좋은 평가라고 할 수 있죠.

기획 단계에서 어그러지긴 했지만, RPG 제작을 준비하기도 했고 밸브도 스토리를 풀어낼 게임에 대해 고민이 없는 편은 아니니 다비온은 어쨌고, 미라나가 누군지 더 쉽게 녹아들 수 있는 게임에 대한 기대를 품어봅니다. 굳이 도타3의 숫자 3이 싫다면 '하프라이프: 알릭스'처럼 새로운 부제를 붙여도 되고요.



▲ 게이브는요~ 3 그런 거 몰라요~

이 한 시즌으로 완결된 이야기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다음 시즌. 그리고 게임이라는 다른 매체로의 플레이 욕구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그 매력은 확실히 어필했습니다. 그만큼 용의 피는 '게임 원작'이라는 표현이 작품을 평가하는 데 아쉬운 요인이 아니라는 것을 또 한번 증명한 작품이 됐죠.

어찌 됐든 이리저리 벌여놓은 '떡밥'을 얼마나 잘 회수하느냐가 차기 시즌 평가의 주요 평가 요인이 될 텐데요. 밸브를 생각하면 무조건 시즌 3까지는 가지 않을 테니 곧 흩어진 이야기들을 짜 맞출 수 있다고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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