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교미, 번식 그리고 진화 '앤세스터: 인류의 여정'

리뷰 | 정필권 기자 | 댓글: 27개 |

※ 해당 영상은 프리뷰 빌드로 촬영되었습니다.

[진ː화] : 생물 집단에서 세대를 지나면서 유전되는 특성의 변화

스트릭버거(Strickberger)는 자신의 저서 '진화학'에서 진화를 위와 같은 문장으로 정의한다. 종의 형질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유전적인 특성이 세대를 거치며 이어지는 것이 곧 진화라는 의미다. 그리고 파나쉬 디지털 게임즈의 '앤세스터: 인류의 여정(Ancestors: The Humankind Odyssey 이하 앤세스터)'이 다루는 진화의 의미도 이와 같다. 셀 수 없는 시간의 누적이다.

어쌔신 크리드 그리고 어쌔신 크리드2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은 패트리스 데실레트 대표가 앤세스터를 처음 공개했을 때를 생각해보자. 인류의 진화라는 거대한 주제를 게임으로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 길고 긴 역사가 어떻게 게임이 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무모한 도전처럼 보였으니까.

설명을 들어도 무엇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게임. 너무도 드넓은 주제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표현되었을까. 그리고 개발진은 이 게임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을까. 부모에서 자식으로 그리고 또 자식으로. 앤세스터라는 게임은 우리를 천 만년 전 아프리카로 이끌기 시작했다.





'인류의 기원'을 다룬다는 것
몇백만 년을 게임으로 표현하기

이전에도 진화를 주제로 한 게임은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맥시스가 2008년 선보였던 스포어가 세포 수준에서 하나의 종으로. 문명으로의 진화를 다루었다면, 앤세스터는 인간. 호모 사피엔스의 진화과정을 게임으로 풀어내고자 했다. 쉽게 선택하기 어려운 소재를 주제로 잡고 생존 게임으로서 초기 인류의 발달 과정을 다룬다.

앤세스터는 이 과정에서 진화라는 것의 의미를 조심스럽게 그리고 학술적으로 풀어내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진화한다고 해서 갑자기 뇌 용량이 커진다거나, 팔다리 근력이 증가한다거나. 갑작스레 이족보행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선조가 그러했듯. 시간과 행위가 겹겹이 쌓이고 세대를 거쳐 이어지는 결과물을 '진화'라고 보는 것이다.



▲ 신경 세포 발달은 세대를 거쳐 이어가는 것 = 진화

따라서 이 게임이 보여주는 그림은 정말로 넓고 크다. 일단 천만 년 전이라는 시대적 배경도 그러하거니와, 언어가 없는 호모 사피엔스들을 조종한다는 점. 그리고 길고 긴 시간의 누적을 게임으로 구현하려 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처음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드넓은 모든 공간이 모험의 장이자 여행의 지표가 된다. 그리고 처음 약간의 설명이 출력되는 것을 제외하면 게임 내에서 알려주는 정보도 적다. 제공하는 정보를 최소화하면서 플레이어의 호기심이 궁극적 목표인 인류로의 도달로 이어지도록 유도하고자 한다.



▲ 모르면 먹어보고. 만져보고. 깨고 보는 유인원식 사고 구조가 필수다.

사전적 의미에서 진화를 다루면 종의 발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되겠으나, 진화생물학에서 이야기하는 진화는 조금 다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진화는 생물 집단이 '세대'를 지나면서 '유전되는 특성'을 뜻한다. 세대와 유전, 두 키워드는 앤세스터의 중심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자리한다.

게임 시작과 동시에서 주어지는 목표는 하나다. 최초의 인간이라 불리는 '루시(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에 도달하는 것이다. 하지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과정은 안내하지 않는다. 알 수 있는 단편적인 정보는 세대를 거듭해서 진화해야 한다는 것뿐. 즉, '어떻게'라는 과정은 플레이어의 선택과 행동으로 구성되는 셈이다.



▲ 행동은 세포 발달을 일으키고 발달은 진화로 이어진다.

개발진은 길고 긴 시간의 누적. 그리고 세대와 유전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우선시 되는 개념을 '호기심'으로 정의하고자 했다. 게임을 처음 시작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플레이어들은 게임에 존재하는 모든 요소를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다.

알 수 없는 미지의 무언가를 만지고 이용하고 먹는 모든 과정은 호기심이 먼저 작동하기 때문이다. 호기심이 빚어내는 플레이어의 행동은 세포와 지능의 발달을 낳으며, 모인 경험들은 다음 세대로 이어져 느리지만 조금씩 발전해나간다는 개념이다.



▲ 기한은 천만 년. 목표는 실제 진화의 과정을 따라가 보는 것.


인지의 한계 그리고 도전
판단하기에 너무도 커다란 게임.

모순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꽤 오랜 시간 '앤세스터: 인류의 여정'을 플레이하면서 개인적으로 느낀 바는 한가지다. '이 게임은 내 인지의 한계를 벗어난 듯한 느낌'에 가깝다. 단순하게 재미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해당 게임이 보여주려는 무언가가 터무니없이 크고 거대하다는 평가를 하고 싶다.

일단 게임이 불편하고 어렵다.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진화를 호기심에 출발하는 개념으로 그리고 있어서다. 즉, 플레이어인 내가 게임에 마련된 오브젝트들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면, 오브젝트들은 그저 자연환경의 일부로만 남는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고 관찰해야만 궁극의 목적인 진화를 거듭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 가끔 뭘 하는지 모르겠다는 단점도 있기는 하지만.

게다가 인류가 만물의 영장이 되기 이전. 유인원에 가까운 상태에라는 점도 게임을 한층 어렵게 만든다. 천만년 전 자연환경은 이들에게 있어 가혹함 그 자체다. 사실상 정착지를 제외하면 나무 위가 가장 안전한 장소다. 땅 밑에는 악어, 호랑이, 뱀과 같은 포식자들이 그득하다.

진화가 덜 되어 도구도 없는 상태에서 이들을 만났다면?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먹잇감이 되기 일쑤다. 개발진의 의도 또한 인류의 조상이 어떤 경험을 했는지를 게임으로 구현하는 데 있었으니, 이런 요소들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 제발 좀 가라...

재미있는 점은 경험할 수 없는 것을 경험하게 해준다는 측면에도, '시뮬레이션 장르가 아님'을 계속해서 강조한다는 사실이다. 게임 시작부터 언급하는 사항이기도 한데, 얼핏 봐서는 이해가 안 되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게임 구조적인 측면에서 판단하자면, 분명히 이 게임은 시뮬레이션이 아닌 서바이벌이 맞다고 하겠다.

서바이벌이기에 곳곳에 산재한 위협도. 정신 착란을 일으키는 도파민 수치도 시스템상으로는 설득력이 있다. 식사와 수면, 수분으로 구분되는 세세한 파라미터, 과장된 자연환경도 서바이벌 장르로써 판단하면 용납되는 수준이다. 어디까지나 사실에 근거한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생존 게임이므로 나올 수 있는 요소들인 셈이다.



▲ 시뮬레이션이 아니니까. 수치 관리를 하라고 만든 느낌.

체험보다는 생존. 그리고 생존 과정에서 플레이어가 한 행동이 진화의 과정으로 이어지는 것이 앤세스터의 순환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플레이어가 얼마나 관심을 두고 행동을 했는지. 주변 환경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보였는지가 진화에 도달할 수 있는 단서들이 된다.

실제로 경험하며 체득한 정보들은 무리의 다음 세대로 이어져 긍정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수많은 실패와 소소한 성공들이 게임을 채운다. 실제로 그러했듯이 죽음과 생의 반복. 실패에서 진화라는 목표를 향해 매우 느리게 다가간다.



▲ 첫 3시간 플레이 결과창. 뭔가 파악할 새도 없이 멸종당했다.


서바이벌이라는 장르에 메시지를 녹이기
인류의 생존은 어떻게 게임이 되었나

서바이벌. 생존 장르이긴 하지만, 게임 내에서 극도로 설명을 제한해둔 만큼 게임은 전반적으로 불친절하다. 게임 시스템을 오롯이 파악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일반적인 게임의 문법과도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게임 대부분이 플레이어가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여기서 기자 개인의 경험을 예로 들겠다. 플레이하면서 자식을 만들고 세대를 거듭해야 한다는 것까지는 이해했으나, 출산을 위한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교미를 위한 잠자리를 만드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대략 하루 정도가 지나서야 이파리들을 몇 개 모아 밟아야만 잠자리를 건설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쓸모없는 재료를 서식지 구석에 모아두던 도중 우연히 찾게 된 것이다.

여기서 끝난 것도 아니다. 암컷과 짝이 되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아무리 교미를 해도 새끼를 낳는 출산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짝이 가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식이 없으니, 다음 세대로 진화했음에도 무리의 규모는 줄어들었다. 싱글로 고독사한 부족 구성원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 앗...아앗..?

대략 3~4회 정도의 멸종을 경험하고 나서야 제대로 깨달았다. 앤세스터에서의 생존은 개체 홀로의 생존이 아니라, 종 자체의 생존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이다. 오래 살아남아서 종을 보존하고, 조금씩 발전을 누적하는 것이 우리가 겪어온 진화의 과정일 테니까.

다른 의미에서 생존이라는 키워드를 다루고 게임을 설계한 앤세스터. 이를 통해서 인류가 경험했을 과정 전반이 곧 진화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생존 게임이라는 장르로서는 조금 이질적인 시선이다. 그러나 반대로 리스크를 관리, 제어하며 목표에 도달한다는 생존 게임으로는 충실한 구성이다.



▲ 세대의 누적, 진화 그리고 생존. 장르 면에서 충분한 재미는 있다.



▲ 특히, 살아남아 종의 진화를 이룩했을 때 더더욱.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
패트리스 데실레트의 생각들

정리하자면, 앤세스터는 순수 다큐멘터리와 극단적 생존 게임의 중간 즈음에 있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학적 측면에서 자료로 사용할 수 있을 것도 같고, 한편으로는 생존 게임으로서 갖춰야 하는 요소들도 충실하게 설계되어 있다. 영화로 따지자면 장 자크 아노 감독의 1981년 작 '불을 찾아서(원제 Quest for Fire)'와 유사하다고 하겠다.

이는 곧, 게임을 만든 데실레트의 관점과 연구가 깊이 녹아든 작품임을 의미한다. 게임을 만들기 시작한 계기는 어땠을지 몰라도, 개발 과정에서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많은 자료와 더불어 이를 게임으로 어떻게 자연스레 풀어낼 것인지 노력한 모습들이 눈에 띈다.



▲ 영화, '불을 찾아서'를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그러므로 패트리스 데실레트 대표, 파나쉬 디지털 게임즈가 빚어낸 '앤세스터'는 독특한 시리즈가 될 가능성이 넘친다. 게임 디자인 측면에서도. 의미에서도 허투루 만든 게임은 결코 아니다. 실제 인류가 겪은 진화를 게임으로 조금씩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신선한 재미가 있음은 분명하다.

패트리스 데실레트의 선택도 이를 보여준다. 개발 초기 과학적인 게임으로 구상했다가 재미를 위해서 방향을 변환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진화라는 의미를 살리면서도 게임으로서 재미있는 구조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그리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의미와 재미를 잡기 위한 시도는 성공적으로 달성한 것처럼 보인다. 자연스럽게 그리고 재미있게 진화의 과정을 아주 천천히 바라볼 수 있는 타이틀을 만들었다.



▲파나쉬 디지털 게임즈의 패트리스 데실레트(Patrice Désilets) 대표

출시 이전, 너무도 독특한 소재와 구성이 불안감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총 3부작으로 나뉘어 출시할 것이라는 언급까지 하며 너무도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우려가 앞섰다. 그러나 시리즈 첫 작품인 '앤세스터'는 우려를 한 번에 걷어낼 정도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하겠다.

그저 유인원만 등장해도. 설명을 극도로 제한해도. 게임으로서 기본기를 충실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분명, 소재가 소재이기에 호불호가 선명하게 갈리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시리즈의 첫 작품이 보여준 시도와 게임으로서의 재미는 이후 등장할 후속작을 기대하기 충분하다. 유인원에서 인류로. 파나쉬 디지털 게임즈가 그리는 길고 긴 진화의 역사는 8월 27일 이제 시작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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