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벤게임컨퍼런스(IGC) 발표자 소개] 창세기전, 서풍의 광시곡, 바람의 나라, 아스가르드, 라테일의 음악을 만들었다. 엔씨소프트에서 아이온을 맡은 후 미발표 신작을 개발 중이다.
6일에 진행된 IGC 첫째 날 행사에서 마지막 강연을 맡게 된 황주은 사운드 디렉터는 창세기전, 서풍의 광시곡, EZ2DJ, 바람의 나라, 어둠의 전설, 아스가르드, 라테일 등 게임을 직접 해 본 적은 없어도 최소한 이름은 알 법한 게임들의 음악을 작곡한 베테랑 사운드 디렉터다.
그런 인물의 강연이라고 한다면 사운드 디렉터가 하는 일이라든지 사운드 디렉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의 이야기를 기대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황주은 사운드 디렉터의 이번 강연 주제는 '지극히 개인적인 게임 음악 이야기'이다.
약 20년을 게임 음악을 작곡한 사운드 디렉터가 이야기하는 개인적인 게임 음악 이야기. 기존 예상과는 다르지만,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다. 그리고 작년부터 엔씨소프트 공식 블로그에서 게임 음악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는 말을 시작으로 그의 강연이 진행됐다.
■ 강연주제: 지극히 개인적인 게임 음악 이야기
⊙ 게임 음악 같지 않은 게임 음악
작년부터 엔씨소프트 공식 블로그에 게임 음악에 대해서 글을 쓰고 있다. 블로그 연재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블로그에 게임 음악에 대해 글을 써달라는 포괄적인 요청이 왔기 때문인데 이제 와서 게임 음악에 관해 무슨 글을 써야 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원래 듣는 것을 좋아하는 게이머였고, 게임 음악 동호회를 만들기도 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게임을 하면서 듣기 좋았던 게임 음악을 시대순으로 적다 보니까 원점부터 다시 돌아볼 수 있었다.
게임 음악에 대해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게임 음악이란 무엇인가?' 아니면 '게임 음악이 뭐가 좋아서?'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됐다. 이에 대해서 정답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부분, '나는 왜 게임 음악을 좋아할까?'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정말 좋은 게임 음악을 들을 때 유저들이 흔히들 하는 말이 있다. 게임 음악 같지 않다거나 게임에 쓰기 아깝다. 사실 이 말이 어찌 보면 칭찬으로 볼 수 있다. 정말 좋은 게임 음악을 들었을 때 쓰는 표현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게임 음악 같지 않다고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게임 음악이란 무엇이고 그에 대한 고정관념은 무엇인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 패미컴 스타일
'슈퍼마리오'의 경우 시리즈를 낼 때마다 스타일을 그 시대에 걸맞은 느낌으로 재해석해서 좋아하는 타이틀이다. 1편을 보면 캐릭터 자체도 게임 그래픽을 대표할 수 있는 도트 디자인인데 음악도 가장 게임 음악같은 음색과 느낌이 나는데 이를 '패미컴 스타일'이라고 부른다.
물론 패미컴 이전에도 인베이더, 퐁, 팩맨과 같이 단색 단음으로 이루어진 게임들도 존재한다. 지금 보면 디자인이 너무 단순한 것 아니냐 싶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처음부터 고퀄리티로 만들면 되는데 왜 못하느냐고 말할 수 있다. 매우 당연한 이야기 같은데 그 시절에는 그에 맞는 제약이 있는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패미컴의 스펙에 맞춰 음악을 만들게 되는데 패미컴의 스펙을 보면 CPU는 8bit에 1.79MHz, RAM은 2KB이니 이걸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은 스펙이다. 사운드 스펙의 경우 SQUAREWAVE 2개와 TRIANGLEWAVE, NOISE, DPCM 등 5가지 채널이 존재한다.
이 중에서 DPCM은 녹음한 것을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채널인데 용량을 많이 차지하므로 패미컴에서는 제대로 사용하기 어려웠다. 잘 활용하면 5화음이겠지만, 보통은 4화음 정도로 사용할 수 있는 스펙이다. 패미컴 같은 경우는 주어진 5가지 조건으로 어떻게 만들어 내야 할까가 음악을 만다는 사람들의 연구 과제이자 도전이었다.
그렇다면 역할을 나눠서 만들면 될 것 같지만, 효과음을 어떻게 할 것인가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효과음을 DPCM으로 만들자니 용량이 발목을 잡고, 노이즈 채널을 쓸까 아니면 서브 멜로디 대신에 그곳을 효과음으로 쓰기 위해 비워둘까 등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비워두면 음악에서 사용할 수 있는 두 채널 정도밖에 없어 제약이 굉장히 심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음악을 만들려고 하다 보니 노하우가 생기는 것이다. 채널을 어떻게든 활용하려 하고 더 풍성한 소리를 낼 방법들을 구상하게 된다.
효과음이 나와야 할 때 그 순간에만 멜로디가 안 나오게 하여 최대한 공간을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런데 멜로디가 효과음 때문에 안 나오면 어색할 수 있으니 이를 감안하고 편곡을 하는 것이다. 멜로디와 베이스를 딱딱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베이스인지 멜로디인지 구분하기 힘들게 만들고 리듬 같은 경우도 정박으로만 치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복잡하게 만드는 등 제약을 극복하려고 시도했다.
패미컴 스타일에서는 이런 제약이 있으니 뭘 하는 것이 제일 좋을까 하면 역시 기억에 남는 멜로디를 만드는 것이 음악을 만드는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파이널 판타지'는 멜로디로 유명한 타이틀인데 나의 경우에도 3편이 삶을 바꿔놓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타이틀이다.
파이널 판타지 1편과 3편은 같은 패미컴 게임인데 3편에서는 1편에 없었던 드럼 소리가 나온다. 음색이나 파워도 좀 더 꽉 찬 느낌이 든다. 게다가 3편에서는 메뉴가 움직일 때도 소리가 난다. 그 당시에는 잘 몰랐으나 같은 스펙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할 것은 패미컴으로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은 모두 조건이 같았다는 것이다. 조건이 같은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을 찾아야 했다. 패미컴의 경우 5개의 채널을 어떻게 활용하는 것이 좋을까부터 시작해서 멜로디를 왔다 갔다 하면서 단음이어도 화음이 들어간 것처럼 표현하는 등 조건이 같으니 이런저런 시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라그랑주 포인트'는 같은 패미컴을 사용하는데도 음색이 다른 느낌이 든다. 이 게임은 그냥 팩에 사운드 칩을 하나 더 넣었다. 치트키같은 느낌도 있지만, 나름대로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고민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 것 같다.
⊙ FM 사운드와 메가 드라이브
패미컴의 경쟁 무기라고 하면 세가가 대표적인데 세가의' 메가 드라이브'는 'FM 사운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컴퓨터 같은 경우는 '애드립(Adlib) 카드'를 사용하면 FM 사운드를 낼 수 있었는데 9화음이 가능하니 패미컴의 2배라고 볼 수 있다. 화음을 더 낼 수 있다는 것 외에 음색도 좀 더 다양해졌다.
FM 칩은 야마하에서 거의 주도하고 있어서 칩마다 약간씩 스펙 차이는 있어도 소리 자체는 비슷한 느낌이었다. 메가 드라이브 같은 경우는 64색에 사운드 채널도 많아져 색과 음악이 패미컴과 비교하면 2~3배 정도의 효과를 낼 수 있었다.
FM 사운드 시대에 가장 유명한 게임을 뽑아본다면 'Ys(이스) 2'가 있다. 이스 같은 경우는 게임 음악의 대중화가 시작된 타이틀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부터는 게임 음악가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정도.
아까 메가 드라이브의 경우 이스로 유명한 '코시로 유조'가 음악을 만든 건데 나는 메가 드라이브 게임 중에서는 '베어 너클' 음악을 좋아한다. 여기서 코시로 유조의 위상을 알 수 있는 것이 타이틀에도 작곡가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게임 음악으로 하우스 스타일의 음악을 선보인 것으로도 유명하며, 저 시대에 저 장르를 저 스펙으로 게임 음악을 만들었다. 다시 보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 슈퍼 패미컴
메가 드라이브가 패미컴의 2배 정도 스펙이었다면 닌텐도는 그보다 더 높은 스펙의 슈퍼 패미컴을 선보였다. 메가 드라이브가 사운드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FM사운드를 내세웠다면 슈퍼 패미컴에서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PCM 사운드를 내세웠다.
PCM은 음악을 파일로 만드는 기술인데 이것이 가능하다면 그냥 음악 전체를 녹음해서 바로 사용하면 되겠다 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스펙이 발목을 잡는다. 당시 슈퍼 패미컴 게임들의 용량이 대략 1MB인데 MP3로 음악을 넣는다고 해도 1분을 넘기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음악 전체를 녹음하는 방식으로는 게임에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샘플링을 통해 음악 전체를 녹음하는 것이 아니라 음색 하나를 짧게 녹음하고 이를 8채널로 쪼개서 사용했다. 슈퍼 패미컴의 스펙에서 같은 용량이면 좀 더 그럴싸한 음색을 만드는 것이 능력이다. 그런데 음색을 만들어내는 것은 상당히 예산을 먹는 작업이었다. 아무래도 음질이 좋아지려면 용량이 커야 하니 좀 더 큰 메모리를 사용할 필요가 있고 이게 다 비용인 것이다. 슈퍼 패미컴 시대에는 큰 회사가 사운드 면에서 더 좋았던 것 같은 기억이 있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코시로 유조가 참여했던 게임, '액트레이저'를 보자.
슈퍼 패미컴은 예산을 들이면 들일수록 음질의 퀄리티가 좋아진다는 느낌이 든다. 같은 바이올린 소리라도 예산을 좀 더 들인 소리와 들이지 않은 소리의 차이랄까? 94년에 '파이널 판타지 6'의 음악을 들으면 멜로디가 좋다는 것보다는 다른 관점에서 음악에 공을 들였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더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테일즈 오브 판타지아'는 오프닝에서 보컬곡을 시도했다. 슈퍼 패미컴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어간 노래가 나온다는 것을 상상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물론 목소리를 넣기 위해 매우 낮은 음질의 목소리를 사용했다.
테일즈 오브 판타지아는 나중에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리메이크됐고 음악도 개선됐지만, 그래도 나는 슈퍼 패미컴 시절의 음악이 마음에 든다.
슈퍼 패미컴에서의 제약이라고 하면 대체로 용량 제약이 큰데 이런 제약들을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어떻게든 돌파했다. 슈퍼 패미컴과 메가 드라이브가 경쟁하던 시대에 'PC 엔진'이라는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했다. PC 엔진은 CD-ROM을 내세운 것이 특징이다. 음악을 CD 트랙에 바로 담을 수 있으니 다른 기종과는 스펙에 관해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였다. 예를 들면 '히사이시 조'가 음악 감독을 맡은 천외마경 2의 음악은 CD 플레이어로 바로 들을 수 있었다.
메가 드라이브도 '메가 CD'라는 CD 확장 기기를 낸다. 메가 CD로 낸 '다크 위저드'는 오케스트라 녹음으로 전곡을 채운 거의 최초의 게임이다. 오케스트라를 녹음해서 게임에 넣는 것도 CD에 음악에 담으면 되니 음악을 만드는 것에 제약은 없다는 것 같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슈퍼 패미컴으로 나온 파이널 판타지 6는 게임 용량이 3MB 정도인데 그 게임에 들어가는 음악을 CD에 담았더니 3장이었다.
'서풍의 광시곡'같은 경우도 CD에 담는데 3장이 필요했다. 이 게임은 그때 당시의 기술로 그래픽도 뛰어나 CD가 3장이 필요했고 음악에 제약도 있는 편이었다. 게다가 이 게임이 CD를 교체하면서 즐기는 게임인데 공통으로 들어가는 음악을 모든 CD에 담아야 한다는 문제도 있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CD 트랙에 음악을 담는다는 것도 게임에서 사용하기엔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것이다.
⊙ 플레이스테이션과 그 이후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들어와서는 CD를 사용하고 있는데 더 뛰어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슈퍼 패미컴에서는 목소리를 넣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파격적이었는데 플레이스테이션에서는 높은 스펙을 바탕으로 테일즈 오브 판타지아의 후속작인 '테일즈 오브 데스티니'의 영상을 그대로 넣을 수 있고 음악도 영상에 바로 붙일 수 있었다.
이전에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유명 가수가 게임 음악에 참여한 예가 늘어났다. 소니가 게임기를 냈다는 것도 절반 정도는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
소니뮤직에서 활약하던 T-스퀘어의 '안도 마사히로'가 '아크 더 래드'에 참여했다. 안도 마사히로는 게임 음악가라기보다는 퓨전 재즈 음악가였는데 그가 게임 음악에 참여하다 보니 게임 전체가 퓨전 재즈 같은 느낌을 풍겼다.
그리고 플레이스테이션 정도로 스펙이 높아지면서 리듬 게임의 시초 격인 '파라퍼 더 래퍼'라는 게임도 등장했다. 지나가는 타이밍에 맞춰 버튼을 누르는 방식의 게임인데 이제 이런 게임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스펙이 높아진 것이다.
게임 음악을 만드는 것에 있어서 이제는 정말 제약이 사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특정한 음색이 아니면 안 되는 것도 아니고 동시 발음을 못 하는 그런 상황도 아니니까. 그에 따라 게임 음악도 여러 가지 시도를 하게 된다. 게임 음악에서도 3D를 시도하거나 플레이어의 상황에 맞춰 실시간으로 음악에 변화를 주는 '인터랙티브 뮤직' 혹은 '어댑티브 뮤직'이라고 부르는 방식도 나타났다.
예를 들어 '크라이시스'에서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면 초록색 영역의 조용한 음악이, 적이 나타나면 빨간색 영역의 빠른 음악이 나오는 방식이다. 슈퍼마리오에서 별을 먹으면 무적이 되면서 음악이 변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요즘 시대에 어댑티브 뮤직을 하려면 모든 상황에 맞춰 음악을 가득 만들어야 하는데 '아이온'의 경우도 몇 년 전만 해도 그런 음악 파일이 수 백 개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절차적 생성을 사운드에서도 적용하려는 시도도 하고 있고, 아이온에서 아주 약간 제한적이나마 사용해봤다. 최근에는 AI를 이용해 음악을 실시간으로 만드는 시도도 하고 있다. 알파고를 만든 '딥마인드'에서는 인공 신경망을 통해 사람의 음성을 생성하는 '웨이브넷'을 개발했는데 이를 활용하면 임의로 음악도 자연스럽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소니에서도 최근에 AI가 작곡한 곡이라면서 공개한 바가 있다. 이런 기술들이 계속 개발되고 있고 음악에 대한 스펙이 한없이 상승하는 그런 시대가 된 것이다.
⊙ 당시에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들
당시에 게임을 할 때는 좀 더 좋은 성능의 기기를 사니까 더 좋은 그래픽과 사운드의 게임을 할 수 있겠다는 단순한 생각을 한 것 같다. 지금은 저 시대에 저 스펙으로 어떻게 저런 것을 만들어낼 수 있었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 음악의 역사는 스펙이라는 제약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와 도전의 연속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제약을 돌파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서 개성을 느끼고 그런 점들이 재미있었던 것 같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면 상관없지만, 오히려 뭔가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선택들에서 개성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3DS 게임에서 세계수의 미궁이라는 게임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데 그 게임의 특징 중 하나가 5인 파티다. 그런데 이상하게 6명이 모이면 완벽할 것 같은데 5명이 되니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사람마다 국민 파티와 같은 구성을 못 하는 게임인데 이런 제약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느냐는 부분에서 게임 음악의 매력을 찾은 것 같다.
추억의 그래픽과 음악이라고 하면서 도트 그래픽이나 패미컴 스타일의 음악들을 보여주는데 개인적으로는 내 취향은 아니다. 시도를 통해 제약을 극복하려는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여유를 부리는 느낌이랄까? 물론 정답은 아니고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다.
⊙ 제약 즐기기
콘솔 게임의 변화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나는 게임기를 새로 살 때마다 제약이 크게 바뀌는 것과 많은 타이틀을 한 것은 아니지만, 타이틀을 하나씩 맡을 때마다 개발환경이 많이 달라졌다. 아마 게임 음악이 아니라 보통의 음악을 했다면 이런 단계적인 작업을 안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이런 단계별로 다른 것을 해야 하는 것이 내 취향에도 맞고 재미도 있었다.
그런 취향이라 그런지 48시간 동안 게임을 만드는 행사인 게임잼에도 도전했는데 이게 정말 재미있었다. 이건 공간에도 제약이 있고 48시간이라는 것이 정말 큰 제약이다. 여기에 사용하는 하드웨어들을 하나씩 교체하거나 같은 세팅으로는 다시 하지 않는 등의 룰을 만들어 스스로 제약을 즐겼다. 그리고 이렇게 제약을 즐기는 것 자체가 게임 음악을 좋아하다 보니 생긴 것이 아닐까 한다.
⊙ 게임 음악이란 무엇인가?
게임 음악이란 무엇인가? 게임 음악의 특징은 무엇인가? 참 오래전부터 이어졌던 이야기다. 예전 같으면 게임 음악의 특징은 기억에 남는 멜로디가 있어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게임 음악이란 게임에서 나오는 음악, 그 외에 무언가를 붙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사실 게임 음악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음악을 만드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음악을 만드는 일이라기보다는 좋은 게임을 만드는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게임은 망했지만, 음악은 좋다는 말이 게임 음악가에게 좋은 말이냐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게임 음악 CD를 자주 사는 편인데 이 게임 음악이 좋다는 추천을 받아서 직접 들어보면 잘 만들었다는 느낌은 있지만, 뭔가 와 닿는 것은 없다.
좋은 게임이 나오기 위해서는 음악에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는 말도 오래전부터 나온 이야기다. 투자는 회사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좋은 게임 음악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결국 게임이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예전에 좋아했던 게임 음악들을 다시 돌아보니 더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다.
나는 게임 음악을 정말 좋아한다. 좋은 게임 음악이 나오는 게임을 만들고 싶다. 그리고 더 좋은 게임이 나올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것에도 관심이 있다. 음악에 더 투자할 수도 있고 좋은 게임을 만드는 것에 집중할 수도 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것과 우선순위는 다르니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만들어왔던 타이틀도 그 당시에는 그리 의식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취향이 다 들어가지 않았느냐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본다.
좋은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은 많다. 저 사람은 음악을 만드는 기술이 뛰어나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하기 어렵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음악을 잘 만드는 사람은 많으니까.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 자신만의 것을 하는 것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그런 것들은 어렸을 때부터 겪어왔던 경험과 취향들의 결합이라 생각한다.
한 시대의 제약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와 도전을 했다는 것, 그러한 시도와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개성, 그리고 그 안에 녹아든 일관적인 스타일을 좋아했다. 제목에서부터 개인적인 이야기라고 했는데 결국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자신이 좋아하는 방법으로 풀어나가면 좋을 것 같다. 제약 속에서도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풀어내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 질의응답
게임 음악을 제작할 때 게임과 어울려야하니까 게임이 어느 정도 만들어진 후에 음악이 만들어질 것 같다. 실제 음악이 제작될 때 어느 정도의 순서에 시작되는가?
= 설계부터 같이 하면 좋겠지만, 국내의 경우 사운드 팀이 회사 내에 없거나 외부에서 작업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상황에 따라 바뀌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바람의 나라는 음악없이 서비스를 하다가 음악이 추가됐다. 그래서 한 달 정도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여기에는 이런 음악이 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진행했다. 이미 제작된 게임에 음악을 추가한 것이다. 시간이 있으면 이 방법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드래곤 퀘스트는 게임을 엔딩까지 모두 플레이하고 음악을 만든다고 한다.
음악을 먼저 만들고 다른 쪽에서 그에 맞는 부분을 제작할 수도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서풍의 광시곡은 원래 피아노를 치는 부분이 없었는데 나중에 이벤트로 추가됐다. 방법은 다양하지만 너무 따로 놀지 않고 여러 개발자들과 같이 하면 자연스럽지 않을까 한다.
디렉터와 충돌하면서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 사실 바람의 나라에서 십이지신의 평원 음악을 너무 대충 만든 것이 아니냐며 성의가 없다는 식의 이야기가 있었는데 내가 그 곳에 음악을 넣을 때는 유저들이 편하게 쉴 수 있을 것 같다는 의견이 있었다. 뭐가 좋다고 하기에는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서풍의 광시곡 이야기에서 나온 곡 제목이 '윈드 오브 메모리'인데 음악이 먼저 나오는지? 아니면 장면이 먼저 나오는지?
= 피아노 곡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보고 게임에 그 장면을 넣어보자고 생각한 후에 작업했다.
'윈드 오브 메모리'가 시나리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엔딩에도 편곡되서 나온다. 그 곡이 국내에서도 최고의 곡 중 하나로 뽑고 있는데 이런 명곡을 만들었을 때 이것을 메인에 쓰자는 의견이 있으면 반영되는지?
= 이 장면은 2명이서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보고 만들었다. 여담이지만 최인규 디렉터가 시나리오를 쓸 때 장면을 먼저 쓰고 앞뒤를 붙여가는 스타일이다 보니 여기가 하이라이트라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편곡해서 엔딩에 쓰는 것은 주로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에서 자주 사용하는 방식이다. 파이널 판타지를 좋아하다 보니 알게 모르게 내 음악도 그런 식으로 사용했다.
자신만의 것을 전달하는 것과 별개로 게임 문화를 소비하는 유저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디렉터님은 유저들이 게임 음악에서 가장 기대하는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 듣는 사람이 여기를 좋아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만드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 정도면 좋아하겠지?', '이런 것을 더 좋아하겠지?'처럼 듣는 사람을 낮춰보는 느낌이다. 스스로 생각해서 가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결정하지만, 외주 입장에서는 그게 어렵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생각대로 하기보다는 스펙이나 요구에 맞추게 되서 더 그렇다.
다만, 그런 요구도 스펙이고 제약이라고 생각하는 관점에서 그 사람이 요구하는 것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자신만의 것을 담아 주장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유저의 관점보다는 자신의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인가?
= 나는 그게 맞다고 생각한다. 만리장성이 크니까 웅장해보이게 만들어달라고 해도 나는 만리장성이 쓸쓸해 보인다고 느끼니 그렇게 만들었다. 내가 쓸쓸하다는 생각으로 음악을 만들었을 때 유저들도 그렇게 느끼면 좋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두 경우가 다르게 느껴지면 안 좋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