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GC2016] 게임이 세상을 읽는 또 하나의 방식이 될 때까지, 이경혁 칼럼리스트

게임뉴스 | 박순 기자 |


▲ 이경혁 게임칼럼니스트


[인벤게임컨퍼런스(IGC) 발표자 소개]이경혁 게임칼럼니스트는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현직 회사원 겸 게임 칼럼니스트. 성균관대학교 '게임과 인문학' 강좌 진행하고, 저서로 '게임, 세상을 보는 또하나의 창'을 2016년 출간했다.


사람들은 게임은 문화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최근 게임 광고도 나오면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해가고 있고, 컴퓨터나 다양한 디지털 기기의 보급을 통해 많은 사람이 즐긴다. 그러나 게임을 하는 사람에 대한 세상의 시선은 꽤 차갑다.

오늘 IGC 2016의 강연에 선 이경혁 게임칼럼니스트는, 게임이 진정한 대중매체가 되기 위해서는 게임의 매체성에 주목하고, 이를 이용한 보편문화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번 강연을 통해 풀어낸 그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자.


■ 강연주제: 대중매체로서의 게임: 세상과의 상호작용


⊙ 루톨로지와 내러톨로지, 두 요소로 바라본 게임

과거 매체는 실제 사회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을 표현한 루톨로지와,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서사적인 구조로 구전하는 내러톨로지 두 종류로 나뉜다. 활판 인쇄술이 등장하면서 이들은 트럼프 카드같은 형태 혹은 대중소설 같은 형태로 변했다. 그리고 이 두 요소가 결합된 서로의 룰에 따라 움직이는 TRPG가 등장하기 이르렀다. 그리고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복잡한 계산이 쉬워지며, 컴퓨터 게임이 등장한다.

루톨로지와 내러톨로지 이 두 형태 모두 세계에 존재하는 사건과 사물을 표현한다. 특정 제작자의 메시지를 수용자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전달자의 역할을 맡는다. 오래전 즐겼던 승경도놀이의 경우 당시 존재했던 계급을 게임으로 표현하면서, 조선 시대의 계급에 대해 자연스레 학습했다. 즉 대중매체의 기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물리량의 한계를 바꾸었다. 디지털 사회가 되면서 0과 1로 표현되는 가상의 공간에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큰 예로, 상거래의 경우 과거 직접 돈을 전달하거나, 물건을 확인하는 수단이 필요했으나 지금은 전자상거래로 바뀌어 가상의 세계에서 모든 거래가 가능하다.





게임은 이런 부분에서 선구자 같은 역할이 가능하다. 자각몽에서는 자신이 꿈을 직접 콘트롤해 현실에선 즐길 수 없는 경험을 꿈에서 가능케 한다. 이와 비슷하게 컴퓨터를 이용하면 가상 공간에서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일어날 상황과 조건을 통한 메타 서사를 통해, 이미 일어난 일 혹은 일어났을 법한 사실에 대한 묘사도 가능하다. 게임 문명을 즐기다 보면, 중세시대에 종교전쟁이 일어난다. 종교가 발현되고, 이후 퍼지다가 각 국의 종교가 부딪히면서, 전쟁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현실과 매우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

GTA의 경우에는 거의 현실에 존재하는 도시 그대로의 모습을 구현해두었다. 거기에 차가 없으면 이동이 매우 어렵다. 현재 미국의 경우 거의 모든 곳을 '자동차'로 이동한다. 이와 매우 비슷한 현상을 게임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심시티는 또 어떤가, 설계자 혹은 행정가의 시야에서 볼 수 있는 도시를 간접적으로나마 볼 수 있다. 이 두 사례는 도시라는 테마를 다른 매체가 보여줄 수 없는 부분을 느낄 수 있게 만든 대표적인 예다.

이러한 매체성은, 단지 게임이 다루는 주제와 소재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드러난다. 예로 리그오브레전드는 '모르는 사람'이 모여 함께 즐기는 게임이다. 그 안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 '채팅창'을 사용한다.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고, 괜찮은 의견이 교환되기도 한다. 이는 현재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상이 게임에서도 드러난 사례다. 이 모든 부분은 결국 게임이 '매체'의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현이 가능한 부분이다.






⊙ 매체성은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나? - 매체성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최초의 영화 '기차의 도착'은 등장과 동시에 수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다. 아무런 의미가 없음에도 그저 기차가 움직이는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놀란 것이다. 허나 지금의 영화는 수많은 의미를 내포한 영화,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포르노 같은 영화를 포함한, 다양한 매체성을 가지고 있다.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를 수용자의 높은 참여와 메시지의 중심을 둔 '쿨 미디어', 메시지의 수용에 중심을 둔 '핫 미디어' 두 개로 나누었다. 쉽게 말하자면 보면서 이야기를 서로 나누는 미디어는 쿨 미디어, 집중하면서 생각이 많은 미디어는 '핫 미디어'다. 쿨 미디어는 대표적으로 텔레비전, 만화, 전화가 꼽히며, 핫 미디어는 도서, 영화, 라디오가 여기에 포함된다.

게임은 이 두 미디어의 분류 중 '쿨 미디어'의 정점이라 볼 수 있다. 게임에서는 사람들을 '플레이어'라고 부른다. 즉 연기자가 되어 스스로 참여하는 것이다. 마인크래프트를 보면 플레이어가 직접 개입해 세계를 만든다. 최근에는 게임 내 영상통화도 구현했다. 이는 수용을 넘어서서 창작에 가까운 행동이다. 그래서 '해석'의 여지가 있다. 쿨 미디어의 정점으로서 해석을 넘어, 재창조까지 가는 것. 이것이 바로 게임이 가진 매체의 기능이다.

디스 워 오브 마인의 경우 메시지를 던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케이스다. 예로, 게임 내 주인공의 아지트에 한 꼬마가 찾아온다. 그러고는 어머니가 아프셔서 항생제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항생제는 단 한 개뿐이다. 줄지 안 줄지는 유저의 선택이다. 주지 않았다면, 엔딩에 그 아주머니가 죽었다고 '크게' 언급된다. 즉 게임에 직접 참여하고, 이에 따른 해석의 수용. 이를 통하면 '참여형 뉴미디어'로서 기능이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의 게임은 제작자, 수용자 모두에게 보편적인 관심사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또한, 이런 관심의 여부와 관계없이 '게임'이라는 주체가 지속적으로 새로운 메시지를 만들어 전파되고 있다. 매체성은 주목 받지 못했지만, '매체적 속성'이 유지되는 바람에, 특수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예로, 특정 게임 시장이 가진 페이 투 윈 중심의 매출 구조, 동일한 콘텐츠의 반복, 과도한 확률형 아이템으로 인한 도박성이다. 이 세 가지 요소가 합쳐셔 "게임은 사회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로 귀결된다. 무슨 말이냐면, 위에 언급된 세 요소를 가진 게임이 시장에 출시 될 때, 숨겨져 있는 이미지가 표면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것을 본 사람들의 태도가 부정적이 되면서 게임은 사회에서 좋지 않다라는 의미로 해석되어 버린다.

다행스럽게도 이런 모습은 현재 '게임의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 현재 게임 시장은 광고가 티비에서 송출될 만큼, 덩치다 커졌다. 덕분에 나름의 매체성이 영향력을 갖추고 있다. 우리는 이 영향력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1980년대에는 영화를 보러 간다고 하면 '불량 청소년'이라고 낙인을 찍었다. 그러나 지금의 영화는 어떤가? 예로 설국열차를 보고 왔다고 하면, 이 사람을 불량하다고 판단을 내릴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즉 시대 별로 이런 매체를 수용하는 대중의 위치가 다르다. 매체성에 따라 대중에게 어떤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게임이 매체성이라는 부분에 주목하지 않고, 변화하고 있는 현상 그대로를 따라간다면 오히려 대중의 재미만 쫒아 잘못된 방향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심지어 돈에 관련되어 있다면 나중에는 '빠찡꼬'가 되지 않겠나. 아마 지금 게임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우리를 본다면 1980년대 영화 애마부인을 보는 사람처럼 좋지 않게 볼 것이다. 이 시선은 바꾸기가 매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터닝포인트로 게임이 가지고 있는 매체성에 주목해야 한다.






⊙ 매체성- 대중문화로서 게임이 가야할 방향

블리자드의 스타크래프트 2 프로토스는 미국이 지금 가장 많이 고민하고 있는 한 요소를 다루고 있다.바로 '다양성'이다. 미국은 수많은 민족이 모여서 생활하는 다문화 공동체다. 스타 2에서 프로토스는 신경삭을 이용한 칼라 네트워크로 의사소통을 한다. 결국 의식의 공유다. 처음 칼라로의 통합을 거부한 존재는 '다크템플러', 기계로 다시 살아난 '정화자', 아예 다른 궤를 달리는 '이단자'등 다양하다. 그리고 아르타니스는 이들을 모두 품는다. 즉 다양성을 인정하는 게 진정한 통합이라는 사회의 주제를 녹여낸 것이다.

대중들은 재미있는 콘텐츠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문화가 지적(허영심)과 문화적 지위를 인정하게 만들려고 한다. 과거에는 애마부인처럼 말초적인 재미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지금의 대중은 단순한 소비가 아닌 자신의 문화적 증명이 가능할 때 만족도가 오른다.

과거에 나왔던 느낌표에 '책 책 책 책을 읽읍시다.'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책을 중심으로 한 프로그램인데, 이걸 게임에 대비해보자. 과연 이것을 문화로 볼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시장이 더욱 커지기 위해서는 '문화 생활'이라는 범주 안에 게임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게임을 하는 사람의 지위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문화로서의 게임보다 넒은 범주의 개념을 가지고 매체가 아닌 '매체 수용자'라는 지위에 집중하는 개념으로서 말이다. 현재의 서브컬쳐 단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이를 넘어 보편문화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부분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문화로서의 게임플레이가 필요하다. '워너비 문화'로서다. 중독이 아니라는 안티테제만 외쳐서는 그렇게 될 수 없다. 오히려 프레임을 바꿔야 한다. 게임으로서 할 수 있는 더 많은 가능성, 이런 경험을 겪을 수 있는 배경을 형성해야 한다. 그리고 게임을 접하지 못했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도 이것이 게임이야! 라고 할 수 있는 문화로서의 플레이를 지향해야 한다.

먼저 게임의 매체성이 두드러질 수 있는 게임 콘텐츠를 만들어 퍼뜨려야 하고, 이를 통한 대중화를 유도한다. 그리고 게임이 가지고 있는 뉴 미디어로서의 가능성에 대한 게속된 피드백과 매체성을 강조하는 비평이 많아야 한다. 그리고 이 비평들은 제작 - 수용이 일어나는 과정의 상호작용적인 촉매로서 활약해야 한다. 게임으로 세상을 이야기하는 그룹이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야, 게임을 새로운 시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매체성의 확보와 강조는 게임이 대중문화로서의 정체성을 부각 시킬 수 있다. 이는 현재 게임이 처한 위기를 넘어 설 수 있는 방법으로도 활용된다. '내꿈의 정규직'이라는 게임을 보면 구조부터 과거에 볼 수 있는 기업의 문화를 표현하고 있다. 화면에 보면 앞에 있는 사람은 뒷 사람(높은 직급)의 컴퓨터를 전혀 볼 수 없다. 즉 게임이 현재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저 사회적인 맥락을 담는 것이 아니라, 게임이 가진 매체적 특성 안에 인간과 사회를 풀어낼 수 있는 방식들에 대한 고민이 계속되어야, 문화자본으로서의 형성과 동시에 매체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궁극적으로는 뉴 미디어로서의 인정과 이를 통한 가능성, 인류 문화 발전에 필요한 새로운 기제로서 게임이 기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문화자본의 측면에서 사회적 위상을 다르게 정립하며, '게임하는 행위'를 일반적인 대중문화의 범주로 사회가 받아 들일 것이다. 그리고 게임 플레이를 세상을 읽는 또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일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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