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프로게이머 '쵸비', 그리고 인간 정지훈

인터뷰 | 신연재, 남기백 기자 | 댓글: 41개 |



지금까지 정말 많은 선수를 인터뷰 했지만, 유독 인연이 닿기 힘든 선수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쵸비' 정지훈이었다. 그와의 만남은 대부분 경기장에서였다. 길게는 15분, 짧게는 10분이 주어졌고, 대부분 시간에 쫓기며 경기나 대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22년의 막바지, 젠지 e스포츠 사옥에서 '쵸비'를 만났다. 사실 데뷔 초중반까지만 해도 꽤 쉽지 않은 인터뷰이에 속했던 그다. 하지만, 데뷔 5년 차가 된 '쵸비'는 달랐다. 여유가 가득했고, 능청스러움도 겸비했다. '원래 인기가 많으면 피곤한 법'이라는 기자의 농담에 '그래서 제가 만성피로인가봐요'라고 답할 정도로 말이다.



Q. 먼저 2022 시즌을 마친 전반적인 소회를 듣고 싶다.

올 한 해 이룬 게 많긴 하다. 처음으로 LCK 우승도 했고, 롤드컵 4강도 진출했다. 근데, 느낌은 좀 다르다. LCK 우승을 할 때는 정말 내가 실력이 좋았어서 기분도 좋았다. 하지만, 롤드컵에서는 결국 마지막에 경기력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커리어에 신경을 안 쓰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롤드컵을 겪으면서 그 생각에 확신이 들었다. 커리어에 얽매이지 않고 내 실력을 더 중요시해야겠다는 가치관이 확실하게 생겼고,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도록 더 열심히 할 것 같다.


Q. 롤드컵에서 스스로 경기력이 만족스럽지 못했던 건가.

아무래도 게임을 하면서 뭔가 남들과 다른 특출난 게 없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냥 무난한 느낌이라 별로 좋지는 않았다.


Q.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

'항상 라인전을 이기는 선수'라는 타이틀. '최고를 증명할 적기다' 라는 주변의 이야기. 이런 게 나에게는 안 좋게 다가왔던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내 스스로가 그렇게 높게 평가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주변에서 자꾸 띄워주니까 뭔가 더 부담이 됐다. 못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될 것 같아서 원래 하던 도박수 플레이들이 사라졌고, 그로 인해서 아쉬운 모습들이 많이 나왔다.


Q. 롤드컵이 끝나고 시간이 좀 흘렀다. 그런 고민에 대해서는 스스로 결론을 내린 상황인가.

롤드컵이 끝나고 왜 평소랑 다른 그런 모습이 나온 건지 스스로를 돌아봤다. 지금은 생각이 다 정리된 상태고, 앞으로 그런 기대를 마주했을 때 더 잘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Q. 사실 그런 기대는 늘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 가진 재능이 워낙 크지 않나. 라인전, 기본기 등에서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내 실력에 한창 자신이 있을 때는 나도 그렇게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은 접고 다시 쌓아가야 할 차례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건 아니지만, 어느 부분부터 다시 쌓는다는 느낌으로 임하려 한다.





Q. 롤드컵 이야기를 살짝 더 해보면, 개인적으로 8강 젠지-담원전을 정말 재미있게 봤다. 조편성 때 담원이 뽑힌 걸 보고 '지긋지긋'하다고 표현한 것도 웃음 포인트였고.

올해 담원은 만날 때마다 이기긴 했는데, 항상 어렵게 이겼다. 나도 사람이다 보니 인생 좀 쉽게 가고 싶어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담원과는 뭔가 좀 잘 맞물려서 그런 구도가 나오게 되는 것 같다. 상대도 잘하고, 우리도 잘하는 것도 있고, 번갈아 실수가 나오기도 한다.

근데, 보통 풀세트 갈 때는 내가 좀 한두 세트 정도 실수를 해서 간 것 같기도 하다(웃음). 그래도 내가 더 잘해서 이긴 세트도 있을 테니 괜찮다.


Q. 4강 DRX전을 패하면서 한때 동료였던 선수들이 결승 무대에 서고, 우승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솔직히 라이브로 못 보고 그냥 경기 결과만 봤다. 한국 시간으로 아침에 했는데, 나는 그때 깨어있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일어나서 경기 결과를 봤는데, DRX가 이겼다고 해서 '잠이 덜 깼나' 싶었다(웃음). 축하 메시지를 보내고 다시 내 인생을 살러 갔던 기억이 있다.


Q. 이렇게 한 시즌이 끝났다. 개인적으로 1년을 보내며 어떤 점이 가장 크게 달라진 것 같나.

사람 사는 것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다. 내 주변에서 은퇴를 고민하는 사람도 이제 보이고, 실제로 은퇴하는 선수도 생겨났다. 그래서 나중에 은퇴를 하게 된다면 18살 때부터 게임만 하고 살아온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생각을 자주 했다.


Q. 인간적으로 한 단계 성숙해지는 과정이었을까.

인간적으로는 성숙해졌는데, 프로게이머로서 보면 본업 외에 다른 데에 생각이 팔렸던 거다. 되게 모순적이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Q. 어떻게 살아갈 지 결론은 내렸나.

뭘 하고 살아갈 지보다는 어떤 마인드를 가질 것인지, 그리고 내 삶을 바라보는 관점을 어떻게 가져야 할 지에 대한 생각만 대충 정리했다.

좀 큰 일이 눈 앞에 닥친다 하더라도 당장 죽는 게 아니라면 나중엔 어차피 잘 넘어가고 잘 살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이제 심오하게 생각하고 사는 것보다 웃으며 현재를 즐겁게 사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나는 그 생각의 반대점에 서있던 사람이라 아직은 적응하는 중이다.





Q. 이제 다시 본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서머 개막 직전에 젠지와 재계약을 발표했는데, 거의 매년 팀을 옮겼던 것과는 다른 행보라 이유가 궁금했다.

말해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팀 옮기는 걸 별로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삶에 변화가 크게 생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2021 시즌에도 나는 당시 소속 팀과 재계약을 할 생각이 있었다. 다만, 조건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라서 젠지로 오게 되었다. 젠지에서는 조건이 맞았고, 굳이 팀을 옮겨야 할 필요를 못 느꼈다. 나는 원래 있던 팀에 계속 있는 게 편한 사람이다. 재계약을 보고 주변에선 놀랄 수 있겠지만, 내 기준에서는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다.


Q. 시즌 도중 재계약은 어떻게 보면 불안한 면도 있다. 차기 시즌 로스터가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 없고, 특히 젠지는 나머지 멤버들이 모두 계약이 만료되는 상황이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이건 팀의 선수와 내가 계약하는 게 아니라, 나와 팀 간의 계약이다. 다른 선수와 게임을 하고 생활하는 건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이고, 다른 선수가 팀과 계약을 할지 말지는 그들의 비즈니스다. 나는 선수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다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나와 팀 간의 계약 조건을 가장 우선순위로 봤다.


Q. 2022 시즌 젠지는 그간 '쵸비' 선수가 몸담았던 팀과는 성격이 좀 달랐다. 어깨의 짐을 덜어줄 팀원이 여럿 있었다. 실제로 그 차이가 느껴졌나.

차이가 있다면, 2022년은 경기를 할 때 뭔가 좀 재미가 없었다. 보통 승리를 위해 팀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플레이 방향성을 잡는다. 그 과정에서 해야 할 것들이 주어지는데, 그게 줄었다. 원래는 좀 더 많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LoL에서 딜러 하다가 서포터 하는 그런 느낌이다.

나도 이런 생각이 들지 몰랐다. 이번에 깨달은 거다. 그래서 다음 시즌에는 내가 좀 더 해야 할 일이 있을지 찾으려고 한다. 굳이 인게임적인 요소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Q. 마침 봇 듀오로 신인 선수들이 들어왔다. '딜라이트' 선수야 3년 차이긴 하지만, '페이즈' 선수는 이제 데뷔를 앞두고 있다. '쵸비' 선수의 역할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환경인 것 같은데.

그 부분에 있어서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직 스크림 전(인터뷰 시점 기준)이라 그렇다. 처음부터 잘할 수도 있는 거다. 같이 해보기 전에 그 사람의 능력치에 대해 평가하는 건 별로 내 스타일은 아니다. 해봐야 알 것 같다.


Q. 팀원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어가 보면, '피넛' 선수와는 2년 연속 미드-정글로 뛰게 됐다. 이전까지 함께한 정글러에 비해 경험이 풍부한데, 그 차이가 실제로 느껴지던가.

확실히 플레이스타일부터 다른 게 인게임에서 느껴진다. 그리고, 남들과 다른 그 스타일로, 항상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판단하고 플레이 한다. 나도 그런 플레이에 맞춰줄 수 있도록 미드라이너로서 초반에 라인 위치나 압력을 조절하면서 플레이 하고 있다.





Q. '피넛' 선수와의 미드-정글 호흡은 잘 맞는 편이라고 생각하는지.

같이 잘한 점도 많고, 어떤 부분이 잘 안 맞았는지 생각도 나고 그렇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미드-정글의 호흡이라고 하는 이 표현이 존재하는지 의문이 든다. 그냥 서로 잘하면 되는 게 아닐까. 부족하면 뭔가 호흡으로 그걸 메우면서 맞춰나가는 건데, 상대적인 게임에서 호흡이라는 게 존재하는 지 의문이다. 그냥 서로 잘하면 좋은 결과가 나오는 그런 게임인 것 같다.

예를 들어, '캐니언' 선수와 '쇼메이커' 선수를 보면 진짜 그냥 둘 다 잘해서 호흡이 좋아 보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플레이를 보일 때가 많았다. 실제로 서로 호흡이 잘 맞아서 그런 플레이가 나오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개인적인 느낌은 그렇다. '페이커' 선수도 같이 하는 정글러가 엄청 많이 바뀌었는데, 미드-정글 플레이로 주는 압박감은 늘 동일했다.


Q. 심오한 이야기다. 다른 LCK 팀의 완성된 로스터도 확인했을 것 같은데, 어떤 팀들이 좀 경계 되나.

T1, 한화생명e스포츠, 담원 이렇게 세 팀이 강해 보이더라. kt 롤스터도 멤버 보니까 세다는 생각이 들고. 2023 시즌이 선수들 입장에서 가장 치열하다고 느껴질 것 같다.


Q. 젠지 역시 리빌딩을 거쳤는데, 강팀으로 꼽은 세 팀과 비교해 어느 정도 위치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나.

아직 해보지 않아서 알 수는 없지만, 뭔가 3등 안에는 들지 않을까 싶다. 진짜 잘 안 풀리면 4등. 그 아래로 떨어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내가 못하면 떨어질 수 있겠지만.


Q. 그러고 보면, '쵸비' 선수가 강팀으로 꼽은 팀은 내로라하는 미드라이너를 보유했다. '페이커', '쇼메이커', '제카' 모두 올해도 롤드컵에서 증명했다. 같은 미드라이너로서, 각 선수의 플레이 스타일 차이가 좀 느껴지는 지도 궁금한데.

솔직히 스타일의 차이가 확 드러나는 지는 않는 것 같다. 게임의 허점을 특히 잘 파고드는 선수가 있다는 것 정도는 느껴지는데, 스타일의 차이는 잘 모르겠다. 보면 진짜 잘하는 선수와 잘하는 수준에 오기까지 부족한 선수, 그 사이에서 차이가 나는 거지, 스타일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Q. 최고점에 오른 선수는 모든 능력치가 다 발달해서 스타일의 차이는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뜻인가.

모든 능력치가 잘 발달된 것도 맞지만, 잘하는 미드라이너들을 보면 기본적으로 공식 같은 게 있다. 그 공식을 지키는 사람과 안 지키는 사람, 이게 잘하냐 못하냐의 경계선인 것 같다.





Q. '데프트' 선수와의 인터뷰가 생각이 난다. '데프트' 선수가 잘하는 선수는 특유의 '스텝'이 있다고 했다. 그것과 비슷한 느낌인 것 같다.

내가 원딜은 아니라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말하는 공식은 기본적인 게임 이해도에서 시작되는 라인 이해도다.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행동하는 사람이 있고, 그냥 때리다 보니까 상황이 만들어지는 사람도 있다. 항상 상황을 만들려는 사람, 어쩌다 상황을 만드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고 생각한다.


Q. 그럼 그 기준으로 봤을 때, 최근 솔로 랭크서 눈에 띄는 신인이나 아마추어가 있던가.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제카' 선수가 솔로 랭크에서 '나는준일하다'라는 닉네임을 사용할 때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 지금 너무 잘하고 있다. 그 이후로는 그런 느낌을 주는 새로운 인물은 만난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솔로 랭크에서 좀 잘친다 싶어서 닉네임 보면 영어를 막 섞어 뒀거나 바코드 모양이다. 누군지 확인할 때마다 항상 '루키' 선수였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신인이나 아마추어가 더 기억에 안 남는 것도 있는 것 같다.


Q. 정점에 올랐던 베테랑 선수들이 여전히 잘하는 느낌을 주기도 하는 것 같다. '쵸비' 선수도 내년이면 벌써 데뷔 6년 차더라. 신인 시절의 '쵸비'와 지금의 '쵸비', 어떤 점이 제일 다를까.

그냥 살아온 세월이 다른 게 가장 크지 않을까. 그때의 내가 살면서 겪고 배운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거니까. 나라는 사람이 바뀐 거는 없고, 내가 살아오면서 변한 것들만 있는 것 같다.

인게임적으로는 뭔가 LoL에 대해 아는 건 많아졌는데, 움직임이 예전 같지 못한 느낌이다. 예전에는 진짜 집중력도 좋고, '이걸 피해?'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했었는데, 요즘에는 이제 '이걸 맞네' 하는 그런 상황이 가끔 나오더라(웃음).


Q. 근데, '쵸비' 선수 01년생이지 않나.

요즘 젊은이들 치고 올라오는 거 보면 나도 이제 젊은이 축에 끼기에는... 일반인의 눈에는 젊은이지만, 이곳에서는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내가 좀 정신과 몸이 남들보다 빨리 늙나 보다.


Q. 그럼 더 늙기 전에 인터뷰를 마무리 하도록 하자(웃음). 차기 시즌에 임하는 목표와 각오 들려 달라.

목표는 항상 똑같다. 인간적인 나도 행복해지고 싶고, 프로로서 활동하는 나도 좋은 성적을 내고 싶다. 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은 욕심을 실현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다.

그리고, 내가 원래 남한테 의지를 안 하는 스타일이다 보니까 항상 무덤덤한 편이었다. 근데, 이번에 부진했을 때 팬분들이 계속 응원해주는 모습을 보니까 되게 고맙고, 앞으로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열심히 해서 더 좋은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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