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어쩌다 '발번역'이 나오는 걸까?

인터뷰 | 정재훈 기자 | 댓글: 36개 |
대한민국 게임 시장이 꽤 커졌다. 단순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소비 규모가 상당히 커졌으며, 편중되었던 소비 패턴도 꽤나 평준화되었다. 여전히 모바일이 강세를 보이지만, 이제 게이머들은 PC와 콘솔 게임에도 거부감 없이 손을 뻗는다. 그만큼, 해외 게임들의 한국 진출도 이전보단 빈번해졌다. 안 팔리다가 이제는 팔리니까.

다만, 언어 장벽은 해결해야 할 숙제다. "안한글 안해요" 여섯 글자로 드러나는 거부감. 도무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잘 만든 게임이 한국어화가 안 되어 있다면 게이머들도 참고 하겠지만, 그리 알려지지 않은 게임이 한국어도 없이 출시한다는 건 판단 미스다. 게임하면서 영어공부까지 해야 한다면 그걸 누가 할까. 예전처럼 단순한 게임들만 나오는 시절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다 보니 요즘은 어떻게든 한국어를 끼워넣는 게임들이 많다. 퀄리티는 천차만별, 어떤 게임은 국내 게이머도 감탄할 정도로 맛깔나는 번역을 집어넣지만, 또 어떤 게임들은 기계번역만도 못한 수준을 보여준다. 아주 가끔은, 누가 봐도 아는 유명한 게임들도 엉망진창인 번역으로 놀림받는다. '힘세고 강한 아침'부터 시작되는 '발번역'의 역사다.




여기서, 핵심은 '무엇이 문제인가?'이다.

하나의 게임이 번역되어 게이머를 만나기까지, 게임 내 텍스트는 수많은 이들의 손을 탈 것이다. 텍스트를 처음 작성하는 작가부터, 게임을 직접 만드는 개발자, 퍼블리셔, 번역가, 그리고 검수를 담당하는 QA까지. 이 업계가 굴러가는걸 잘 몰라도 이쯤은 상상만으로도 대충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정확히 어디서 문제가 생기는지는 알 수 없다. 결국, 물어봐야 한다.

운 좋게, 과거 인벤과 인터뷰를 진행했던 게임 전문 번역가인 '정향'대표와 자리를 만들 수 있었다. 블리자드 입사를 앞두고 디아블로3의 번역에 참여하고 싶다고 말하던 프리랜서 번역가는 12년이 지난 지금도 게임 번역의 최일선에서 일하고 있었다. 물론, 위치는 변했다. '링고크래프트'라는 번역 전문 업체의 대표가 된 지금, 그녀는 매년 수백 개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게임 번역의 전문가다.

12년 전 인터뷰 기사: [인터뷰] 문명5 한글화의 주인공, 여성 게임번역가 '정향'

그래서 직접 물어보았다. 게임 번역은 대체 어떻게 이뤄지는 거냐고. 그리고 발번역은 어쩌다 나오게 되는 건지 말이다.



▲ 링고크래프트 정향 대표, 양유신 팀장


'게임 번역'의 파이프라인

"번역 업계를 분류하면 총 세 가지로 나뉘는데, 게임은 그 중 산업 번역에 해당해요"

정향 대표가 말했다. 번역 업계는 영상과 출판, 산업으로 나뉘는데, 게임 번역은 이 중에서도 산업 번역의 영역에 들어 있다. 이를 구분하는 기준은 바로 요금 체계. 출판 번역은 번역한 원고를 200자 원고지에 옮길 경우 몇 장이 나오냐에 따라 요금이 책정되며, 산업 번역은 텍스트의 단어 수에 따라 비용이 책정되는 형태다. 수입 물건에 붙어 나오는 영양 성분표나 해외 기업 홈페이지의 한국어 페이지 등이 모두 산업 번역의 영역에 들어간다.

영상 번역은 기준이 살짝 다른데, 텍스트의 양이 아닌 영상의 러닝 타임에 따라 1분 단위로 비용이 책정된다. 대사가 없는 다큐멘터리나 살색 소음만 들리는 성인 동영상? "개꿀이라 하더라고요" 정향 대표가 말했다.



▲ 대사가 적어 '개꿀(?)'이라는 다큐멘터리 번역

게임 번역을 수주하는 경로는 여러가지다. 중간에 일감을 중개해주는 에이전시도 존재하며, 가끔은 개발사나 퍼블리셔가 직접 접촉을 해오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계약을 하고 나면 번역에 필요한 텍스트를 전달받고 본격적으로 작업을 하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업무 시간에 맞춰 진행할 경우 하루에 약 2천 단어 정도가 번역된다. 물론, 이 양은 필요에 따라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

텍스트를 전달받고, 이를 번역하는 과정은 정석이 없다. 게임에 쓰이는 텍스트의 양이 정형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게임은 수천 단어 내외에서 업무가 끝나기도 하고, 어떤 게임은 수십 만 단어의 텍스트가 사용된다. 문제는, 촉박한 시일 내에 엄청난 양의 텍스트를 번역해야 할 때다.

이럴 때는 여러 번역가가 하나의 게임을 공동으로 작업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툴'의 유무가 매우 중요해진다. 같은 뜻을 번역해도 다른 단어를 사용하게 될 수도 있고, 문체가 달라질 수도 있으며, 대사를 번역할 때 화자가 상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 버릴 수도 있다.



▲ 번역 전문 툴인 memoQ

'링고크래프트'의 경우 '메모큐'라는 유료 프로그램을 사용한다. 구글 시트처럼 무료로 활용할 수 있는 툴도 있지만, 아무래도 번역 전문 툴을 활용하는게 실수를 줄이는 길이다. 일반적으론 지원되지 않는, 번역에 맞춘 편의 시스템이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짧은 프로젝트의 경우 하루 만에 끝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스팀 상점에서 볼 수 있는 게임 소개 페이지가 좋은 예다. 현지화도 비용이 소모되기 때문에 한국 진출이 처음이거나, 여유가 없는 개발사들은 소개 페이지만 번역을 맡기고 게임 내 번역은 기계 번역으로 퉁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 이런 게임 소개 페이지는 하루 만에 끝나는 프로젝트다

번역의 기준 언어는 기본적으로 영어가 된다.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출시된 게임도 번역 시엔 영문으로 번역된 텍스트를 받는 형태다. 영어와 비슷한 어순을 따르는 언어가 많기에 언어 구조적으로 용이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아마 다음에 나올 이야기에 대한 충분한 사전 설명이 되었을 거다. 이 과정 곳곳에서, 번역가가 어찌 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너무나 많다.



그래서 '발번역'은 왜 생기는가?

"억울한 경우도 꽤 많겠어요?"

내 질문에 정향 대표가 침묵했다.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냥 아무 말도 없었으면 좋겠다고. 게임 번역과 관련해 뭔가 글이 나오면 일단 긴장부터 하게 된단다. 번역이 잘 됐으면, 아무 말도 없는데, 말이 나오는 건 십중팔구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거니까.

"발번역 사례 중 대부분은 업계 사람이라면 아마 보는 순간 어쩌다 저렇게 된 건지 이해할 거예요."

정향 대표가 말했다. 대표적인 발번역 사례 중 하나인 '워크래프트3'의 "누구? 저요?"의 경우 화자가 누군지를 전달받지 못했을 거라 말했다. 번역 씬에서 자주 일어나는 문제인데, 스트링 넘버나 화자를 모르는 상태로 대사만 보고 번역을 해야 하는 일이 상당히 자주 일어난다. 보통 이럴 때는 앞 뒤 번역문을 전부 다 보면서 맥락을 짚으려 하지만 그마저도 어려운 상황이면 그냥 가장 무난한 '요'체로 번역하게 된다.



▲ 아마 화자를 모르고 번역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오역 사례

물론, 그 와중에 기막히게 상황을 때려맞추고 찰떡같은 번역을 해내는 경우도 있다. 정향 대표는 이걸 '궁예질'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는데, 앞뒤 맥락을 하나도 모르고도 내용을 때려맞추는 거다. 가끔은 이게 완전히 들어맞아 의도치 않게 제대로 된 번역이 되는 경우도 있단다.

'아이템 발견'의 Found가 '설립'으로 번역되거나, 15% 할인의 'Off'가 '끄다'로 번역되는 경우 역시 비슷한 예라 할 수 있다. 맥락 없이 그냥 저 단어만 번역해 달라고 오는 경우엔 가장 그럴싸한, 혹은 자주 쓰이는 단어로 번역할 수밖에 없는데, 그대로 넣으면 '아이템 설립'과 '15% 끄다'가 되어버린다.

문제는 이게 해결이 쉽지 않다는 것. 일반적으로 현지화가 이뤄지는 시점은 게임 출시를 두세 달 앞둔 상황이 되는데, 이 때는 개발사가 마무리 작업에 몰두하며 크런치를 달리는 경우가 많아 문의 피드백을 넣어도 제대로 답변을 받을 수가 없다. 개발사 직통으로 일을 해도 이런 상황인데, 중간에 에이전시나 퍼블리셔가 끼게 되면 일이 더 복잡해진다. 결국 장님 코끼리 짚듯 '궁예질'을 반복하며 일을 해야 하는데 이런 경우가 생각보다 매우 빈번하게 일어난다.



▲ '발사'가 화재 경보가 된 것도 아마 앞 뒤 맥락 없이 텍스트만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례

어떤 때는 중국에서 개발한 게임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영어로 된 번역문을 기준으로 작업을 할 때도 있었는데, 같은 의미가 네 개의 다른 단어로 번역되어 있거나, 대화문이 순서 없이 섞여 있어 번역보다 추리와 유추로 일을 진행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단다. 한-영 번역은 단번에 이뤄지는 경우가 많기에 오역이 비교적 적지만, 다른 외국어를 한국어로 번역은 몇 단계를 거치면서 의미가 왜곡되거나, 오역이 벌어지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쯤 되면, 맥락 없이 번역하는 과정을 왜 '궁예질'이라 표현했는지 알 법하다.

과거 '블리자드'의 번역 퀄리티가 좋았던 이유는 이 맥락 정보를 충실하게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향 대표와 양유신 팀장은 둘 다 블리자드에서 번역 업무를 맡았던 바 있는데, 당시엔 게임을 구석구석 플레이하면서 QA를 진행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상적인 현지화 환경에 가까웠다고 할까?

"비용 문제도 있고, 아무래도 현지화는 게임 개발에서 조금 벗어난 잔가지라는 프레임도 있으니 어쩔 수 없죠"

정향 대표는 이런 상황을 두고 단순히 '개발사의 문제다'라고 일축하지는 않았다. 게임 개발씬의 전반적인 인식부터가 현지화와 번역은 게임 개발 자체보단 중요도가 낮은 업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한계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게임을 정말 모르는 번역가가 일을 맡는 경우도 있다고 덧붙였다.



▲ 반대로 이건 FPS게임에 조예가 없거나 밀리터리 지식이 부족한 번역의 사례일 것이다



'게임 번역가'에겐 무엇이 필요한가?

그럼에도, 좋은 게임 번역은 필요하다. 게임 개발만큼 중요하진 않지만, 그렇게 개발된 게임을 게이머에게 100% 전달하기 위해서는 의미의 왜곡 없는 번역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매우 드물게는, 번역이 게임을 더 좋게 만들기도 한다. '초월번역'이라는 단어가 괜히 생긴 말이 아닐 테니까.

다행이라면, 게임 번역가의 길을 가고자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일 테다. 국내에는 이미 아마추어 게임 번역 단체도 상당수 존재하며, 게임 번역가의 길을 걷고자 어학을 공부하는 이들도 꾸준히 존재한다. 정향 대표도 많은 젋은 프리랜서 번역가들을 만나 함께 일을 해봤는데, 과거 인벤과 인터뷰했던 기사를 보고 이 길을 선택했다는 이들이 많아 때때로 놀라기도 한단다.

게임 번역가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업계 선배로서 게임 번역을 꿈꾸는 이들이 갖춰야 할 소양에 대해 묻자 정향 대표가 말했다.

"영어와 게임, 결국 이거죠. 영어를 모르면 일을 못하고, 마찬가지로 게임을 몰라도 일을 못해요"

게임을 모르면 애초에 작업 자체가 불가능하다. 정향 대표는 단언했다. 예를 들면 이런거다. 게임을 잘 아는 이들이라면 'Health'라는 단어만 봐도 체력을 뜻한다는걸 알지만, 게임을 모르는 번역가들은 이를 건강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정향 대표가 만나본 프리랜서 번역가들 중에도 이런 경우가 많았단다. 이 경우, 번역은 되지만 이 과정에서 발생한 오역을 검수하는데 시간이 더 들기 때문에 사실상 작업이 불가능하다 말했다. 유리와 불리의 차원이 아닌, 가능과 불가능의 영역에 해당하는 일이다. '다키스트 던전'의 오역 사태도 아마 비슷한 사례일 것이다. 이미 출시된 후 한국어화가 진행된 게임이니 게임만 플레이해봐도 알았을 테니 말이다.



▲ 둘 중 하나라도 잘 안되면 이렇게 되어버린다

하지만, 실제로 게임 번역가를 꿈꾸며 오는 이들의 경우 이런 문제는 거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대부분 게임을 좋아하는 이들이 게임 번역가를 꿈꾸기 때문에 게임에 대한 지식 부족이 문제인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영어가 좀..." 정향 대표가 말했다. 게임을 좋아하고, 게임 관련 업무를 하고 싶어 게임 번역가를 하려는 이들은 많은데, 번역이라는 작업에 대한 이해나 영어 자체의 수준이 모자라는 경우가 더 많단다.

더불어,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도 정향 대표의 걱정이었다. 성향이 맞는 이들에게 게임 번역은 매우 즐거운 일이지만, 이 또한 프로의 업무다. 충분한 사전 지식과 마음의 준비 없이 흥미만으로 달려들 만큼 만만한 업계는 아니라는 뜻이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그렇다면 게임과 영어 외에, 게임 번역가에게 가장 중요한 소양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정향 대표가 말했다.

"가장 중요한 건 책임감이죠. 관심이 있고 재미있어 보인다 해서 섣불리 시작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게임과 언어를 좋아한다면 참 오래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맡은 프로젝트는 제대로 해내야 한다는 책임감이 중요해요. 다들 AAA급 게임의 번역을 하고 싶다며 문을 두드리지만, 실제로 오면 자잘한 인디 게임부터 캐주얼 게임, 심지어 성인물이나 카지노 게임들도 작업해야 해요. 이런 게임들을 담당해도 날림으로 하지 않고 끝까지 책임감을 가질 수 있어야 아마추어를 넘어 프로 번역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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