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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무제. 배틀그라운드의 한 장면.

달없는밤 | 댓글: 2 개 | 조회: 3139 | 추천: 4 |


스폰 지점. 주변에 아무렇게나 서있고 달리고 뛰는 사람들.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 우리를 가둔 철창의 문이 열리기 만을.
철창은 하늘에서 열렸다.
낙하산을 멘 채 우리는 중력에 몸을 맡긴다. 공기가 낙하산을 밀어올리면 원하는 방향을 향해 몸을 흔든다.
조금이라도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

각오는 되어 있었다. 적을 마주치면 반드시 죽이리라고. 하지만 아무도 없으리라 확신하고 들어선 2층 집에서 머리 위로 발소리가 둔탁하게 들려온 순간, 내 머리는 새빨간 경고 알람으로 마비되었다.
'도망쳐, 무서워, 살고 싶어.'
둔탁한 발소리가 계단을 향해 다가온다. 본능적으로 계단 아래에 몸을 감췄다. 그리고 조용히 쥐고 있는 권총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방금까지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한 주제에 언제 그랬냐는 듯 무서운 집중력이 나를 장악했다.
숨을 멈추고 기척을 완전히 지웠다. 적은 방심한 상태. 근거리라도 정확히 조준만 한다면 권총 한 자루로 확실히 적을 죽일 수 있다.

쿵쿵쿵쿵, 조심성없이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 죽음을 향한 드럼롤, 카운트다운. 적이 계단에서 곧장 출입문을 향하려 할때 나는 적의 뒷통수에 권총을 갈겼다. 탕, 탕, 탕, 탕, 탕, 탕. 6발 짜리 리볼버. 탄창은 적지만 화력은 발군.
적은 피를 쏟으며 확실히 쓰러졌고, 얼른 다가가 그의 맥박을 확인했다. 틀림없이 사망했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놈의 1레벨 방탄조끼를 벗겨 입고 베낭을 뒤졌다. 수류탄, 에너지 음료, 붕대, 구급상자까지 있네? 열심히 그러모았구만, 이 놈.
얼른 피묻은 베낭을 한쪽 어깨에 짊어지고 죽은 이가 떨어뜨린 SMG를 집어들었다. 순간 희미하게 콘크리트 위를 밟는 군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즉시 바닥에 엎드렸다. 옆에 피를 줄줄 흘리는 구멍 뚫린 시체가 있든말든 상관없었다. 내 본능은 그저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뭐든 하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이대로 시체 옆에 있다간 정말 시체가 되기 십상. 나는 베낭을 도로 시체 옆에 놓아두고 서서히 팔꿈치로 기어 아까 숨어있던 계단 아래로 기어들어갔다. SMG에 장전된 탄환은 30발. 여차하면 짧은 추격전 정도는 가능하리라.
물론 그럴 담력은 없었다. 나는 저 기척의 주인공과 전혀 마주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만약 그가 시체 옆에 놓인 베낭을 뒤지는데 정신이 팔려있는 상태라면...기회를 놓칠 마음은 없었다.
단 한번의 전투로 나 자신의 성향을 깨달았다. 나는 기회주의자다. 정면으로 적을 결코 맞서려 하지 않지만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 적을 처리하려고 한다. 비겁자다. 상대의 눈이 아닌 등을 본 채 죽인다. 겁이 나니까,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으니까.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전장에 서기 전엔 결코 몰랐던 내 본모습. 앞으로 이 살육을 되풀이하면 나는 얼마나 더 내 진짜 모습을 알게 될까?

두려움 대신 오싹한 기대감이 가슴을 채웠다. 분명 방금의 전투로 아드레날린이 치솟았기 때문이리라. 결코 자신의 어둠을 파헤치고 싶다는 생각 따위 하면서 흥분한 게 아니다!
내가 무슨 허튼 생각을 하고 있든 적은 성실히 내게 다가왔다. 사냥감이 덫에 놓아둔 먹이를 물기를 기다리는 사냥꾼의 심정. 동시에 사냥꾼이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제발 그저 지나가주기를 바라는 사냥감의 심정. 극과 극에 있는 감정이 만나 내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심장 박동만큼은 마치 내 것이 아닌 것처럼 고요하기만 하다.

새로운 적이 흡사 야생동물처럼 민첩하게 현관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재빨리 벽에 붙는다. 익숙한 몸놀림. 딱 봐도 숙련자. 이성은 이 싸움이 절대적으로 불리할 것이라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손가락은 언제든 방아쇠를 당길 수 있게 완벽한 태세를 갖추고 있다. 곧 다가올 전투가 기대돼서 견딜 수 없다는 듯 제멋대로.
온화한 봄날. 속옷만 입고 자도 감기 걸리지 않을 포근한 날씨. 하지만 마치 머리를 냉장고에 집어넣은 것처럼 사고 회로는 싸늘하다. 적이 눈 앞에 놓인 시체와 베낭을 번갈아 본다. 나는 기계적으로 눈 앞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을 좇는다. 단 한 순간의 기회를 잡기 위해.
-삐걱
베낭을 집어올리기 위해 적이 무게중심을 한쪽 발에 둔 순간 마룻바닥의 나무판자가 신경질적으로 울렸다. 그 소리는 내게 '쏴라, 죽여라'라고 말하는 듯 했다. 나는 번개처럼 몸을 일으켜 적에게 돌진하며 그 목소리에 기꺼이 화답했다.
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30발이 똑같은 간격으로 쉴새없이 철저하게 적의 몸을 유린했다. 극심한 반동을 우악스럽게 왼쪽 손목으로 받아내며 모든 탄환을 다 쏟자 SMG는 언제 그랬냐는 듯 침묵했다. 이제 눈 앞에 두 구의 시체가 놓였다.

나는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새로운 시체가 가지고 있던 라이플을 집어들고는 피에 절은 베낭을 들쳐맸다. 탄창이 빈 SMG는 허리춤에 꽂았다. 첫 승리의 영광을 거머쥔 리볼버는 반대편 허리춤에.
충분히 귀를 기울여 주변을 살핀 후 나는 집 밖으로 나섰다. 이 집엔 이제 볼 일이 없었다. 여긴 이미 지나간 죽음 뿐이다. 내겐 새로운 죽음이 필요하다. 그 죽음이 나를 성장시켜 주리라.

Lv21 달없는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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