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시대 인벤 에이레네 서버 게시판

전체보기

모바일 상단 메뉴

본문 페이지

이베리아와 신대륙 2부 3장: 카스티야 계승 전쟁

이오라오스
댓글: 4 개
조회: 727
추천: 1
2009-09-01 22:33:12
요즘 바이러스가 걸렸는지 윈도우스가 좀 망가졌는지 아무리 DirectX 를 다시 깔아도 설치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대항온이 안 됩니다. 인도우 비스타 자체가 원래 좀 문제가 많기도 하고, 다 포맷해서 XP 깔까도 생각했지만 뭐 일주일 후에 미국 돌아가고 그전에 여기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한테 제 컴퓨터를 팔기로 했기 때문에 별로 시간이 없을 듯 하네요. 그래도 인터넷 보고 한글 타이핑 하는 것은 문제 없으니까 쓰던 글이나 마저 다 끝맺을 생각입니다. 명성 500짜리 부캐들 많아서 이번 이벤트 땡겼는데, 마음을 비웠습니다...

남미에서 살다보면 이베리아의 기독교 국가들 사이 뿐만이 아니라 그들 이전에 이베리아를 통치했던 이슬람 교도들이 지금의 히스파닉 문화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언어는 물론 건축, 음악, 의상, 축제 등 전 분야에 걸쳐 무어인들의 공헌은 광범위한데 그 영향을 이교도의 산물이라고 숨기고 부끄러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민족들이 융합한 히스파닉 문화의 한 부분으로서 자랑스러워하고 그 역사를 거듭 강조하는 것을 보며 놀라게 되지요. 그라나다를 정복한 이사벨 여왕 또한 무어인들의 이슬람 신앙은 증오했지만 그들의 문화만은 사랑해서 이슬람 양식이 스페인 문화를 더 다채롭게 하는데 기여했다고 합니다. 한 민족의 믿음은 박해하면서 종교를 제외한 그들의 문화는 사랑해서 끌어안고 함께 번영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 신대륙을 개척하면서 에스파니아의 지배자들은 그 질문을 거듭 생각해야 했고 불완전하지만 어느 정도 좋은 성과를 이룰 수 있었는데 분명 수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레콘키스타를 통해 같은 땅에서 이웃하며 사는 무어인들과 대립하고 협력해야 했던 역사적 경험도 한 몫을 했겠지요. 오랫만에 한국 웹에서 좋은 역사 글을 읽어서 아래에 링크합니다. 제가 이제까지 올렸던 글들을 읽으신 분들은 별 어려움이 없이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페이지 위쪽의 두 작은 지도들을 클릭하면 당시 나라와 도시 지명들이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어서 더 쉽게 파악하실 수 있습니다.

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i=1015485

이번 시리즈를 써나가면서 저 자신도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이리저리 닥치는 대로 읽어서 현재 쓰고 있는 내용의 거의 9할 이상을 지난 한달 사이에 깨우칠 수 있었지요. 아무래도 여기 사정상 한국어나 영어 책을 쉽게 구할 수 없고 역시 인터넷이 훨씬 편해서 넷을 통해서 정보를 많이 수집합니다. 역시 어느 언어로 검색해도 위키백과가 가장 방대하고 자세한 역사 분석을 제공하는 편인데 위키 이외에 구글에서 찾는 페이지들은 때때로 괜찮기도 하고 어떤 때는 별로고 그렇습니다. 처음 구글로 이사벨 여왕을 검색했을 때 읽었던 페이지를 아래에 링크합니다. 으음, 처음 읽었을 당시에도 조금 갸우뚱하기는 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정말로 도움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진실을 이해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되는 면들이 없지 않지요. 하지만 그게 꼭 주인장의 공부가 부족하다고만 탓할 수도 없는게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역사 이해 능력이 그 정도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뭐 이렇게 비교하는 게 페이지 주인장한테는 좀 미안한 감도 없지 않지만 이번 시리즈를 통해서 단지 지식만을 전하는 게 아니라 여러가지 새로운 해석법들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제 목적이니까 양해를 구합니다. 참고로 주인장 홈피에서 종교 쪽의 글들은 다 좋은데 특히 영화 “미션” 평론을 추천합니다. 미션에 대해서는 아마 곧 다시 이야기하게 되겠지요.

http://truthway.tistory.com/73

시도해 봤는데 워드에서 더블 스페이스로 써도 여기 붙여 넣기 할 때 띄어쓰기로 나오지 않습니다. 어번에도 긴데 읽기 불편한 거 양해 부탁드립니다.

------------------------------------------------------------------------------

레콘키스타가 시작되고서부터 마무리되기까지 이베리아의 여러 나라들은 혼인을 통해서 이합집산을 수없이 반복해왔습니다. 물론 저번 글에서 설명했듯이 각 나라의 최고 권력자들끼리 결혼을 통해 연합왕국을 결성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언제나 그렇게 마음먹은대로 되지는 않았죠. 현대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성격 차이라던가 재산 문제 등으로 부부가 갈라지고 도리어 원수만도 못한 사이가 되는 일도 흔했습니다. 왕족들의 경우 그 분쟁이 되는 재산이 국가이고 또한 태어난 자녀들의 양육을 걱정할 필요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헤어질 가능성이 더더욱 컷지요. 그리고 설령 그렇게 사이가 갈라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당시의 열악한 의료실정 때문에 후계자가 살아남아 장성하기 전에 부부 중 한쪽이 사별하며 연합이 해체되는 일도 많았습니다. 기독교 유럽에서도 부부 중 한쪽이 간통을 통해서 사생아를 낳는 일들이 많았지만 동양과는 달리 도덕은 물론 법률적으로도 용인되지 않는 자녀가 단지 부모 중 한쪽 가문만의 지지를 업고 후계자가 될 수 있도록 유력 귀족들이 내버려 둘수 있을리가 없으며, 늘 격무에 시달리며 전쟁 일선에서 군사를 지휘하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왕가의 책무를 생각할 때 결국 일부일처제 아래서는 늘 후계자의 수가 위태롭게 모자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부 중 한 쪽이 사별했을 때 왕이나 여왕이 후계의 안정을 위해 재혼하는 것이 당연히 되었습니다만 역시 이 경우에도 전처 내지는 전남편의 자녀들이 양부모와 그 자손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약 새로 결혼하는 부부 양쪽 다 나라의 계승자들이라면 전처나 전남편의 장성한 자녀들은 계모나 계부가 통치하는 나라하고의 통합을 반대하는 자국 내 분리주의자들의 잠재적인 지지를 기대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 위험 때문에 부부 양쪽이 전부 양쪽 나라의 후계자들인 경우는 드물었고 왕위 계승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한 쪽이 자기 나라의 계승권을 포기하며 배우자의 나라로 시집 내지는 장가를 와서 공동 통치권을 받도록 합의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래서 유럽에서는 중세 이래로 혼인에 따른 통치권과 상속권에 관한 법률들이 오래 전부터 잘 발달해 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게 예나 지금이나 복잡해서 법에 따라 공평하고 원만하게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언제가 비일비재하죠. 대항해시대의 최강모에 히로인이었던 이사벨 1세 또한 그러한 유럽 왕실 후계 다툼의 한복판에 놓여 그 속에서 자라나고 생을 마쳤습니다.

이사벨 여왕의 아버지였던 카스티야의 왕은 전처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넷 두었지만 이후 셋은 죽고 엔리케만이 후계자로 남았습니다. 근데 이 엔리케가 십수년 동안 결혼을 했어도 후사를 가지지 못하고 결국 이혼한 아내가 끝까지 처녀로 남아있었다는 게 밝혀져서 만인으로부터 공인받은 고자였다는 게 문제였죠. 아내는 사별했고 아무래도 고자 아들한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은 후계를 생각해서도 조금 곤란, 재혼처를 구하던 왕은 결국 자기 아들 엔리케보다 더 어린 포르투갈의 왕족 이사벨을 데려와서 그 사이에서 같은 이름의 장녀 이사벨과 그 남동생 알폰소를 두게 됩니다. 근데 후처의 자녀들이 장성하기 전에 왕이 그만 죽어버리고 엔리케가 왕이 되어버렸죠. 새로 등극한 고자왕은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계모와 그 아이들을 궁궐에서 쫒아내서 한적한 촌구석에 유폐시키고, 왕궁 속에서 고생이라고는 별로 해보지 않고 살아온 왕비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그만 미쳐버리고 맙니다. 후일 그녀의 손녀 또한 정신병을 앓게 되는지라 유전적인 요인 또한 추정되고 있지만 어쨋든 외지에 시집와서 이리저리 눈치보고 결국 모든 지위를 잃은 그 충격이 어떠했을지를 생각하자면 사실 미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어린 딸은 살아남아 어머니와 남동생을 돌봤습니다. 벽지 산간 초원에서의 삶은 그 아이를 어떤 역경에서도 견딜 수 있는 강한 누님으로 자라나도록 했습니다. 전 왕비가 실성했다는 소식을 듣고 안심한 고자왕은 당대의 유영한 대학에서 학자를 초빙해서 이사벨을 가르치도록 했고, 수녀였던 교사의 가르침에 따라 이사벨은 언제나 책을 가까이 하며 황야에 꿇어 앉아 신의 영광과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기도하는 독실한 카톨릭 교인으로 성장했지요. 유년기의 어려움은 평범하게 컸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두 극단으로 나눕니다. 가난과 멸시를 수치스러워하며 그 힘없던 과거를 부정하려고 사악한 방법으로 권세를 얻고 남들 앞에서 뽐내며 탐욕과 방탕으로 인생을 낭비하는 졸렬한 인간이 되느냐, 아니면 사회의 부조리에 눈을 뜨며 앞으로 이전의 자신처럼 고난받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도록 스스로의 목숨을 다해 백성들을 바른 길로 이끄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던가지요.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고픈 고자왕은 후사를 얻고자 재혼하는데 이 왕비 또한 포르투갈의 공주였던 후아나, 즉 당시 포르투갈 왕이었던 알폰소 5세의 여동생이었습니다. 이웃 포르투갈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략적인 의미도 있었을 듯 하지만 비아그라도 없던 시절에 재혼한다고 해서 고자가 뭐 어떻게 새로운 능력을 얻을 리도 없다는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이 안된 상황이었죠. 여기서부터 쌍화점 영화보다도 더 괴랄하고 비극적인 상황이 연출되는데 고자가 아니라는 거짓을 억지로 증명하고픈 왕이 아마도 사람들 몰래 왕비가 외간남자하고 정사를 가져서 임신하도록 했을 거라고 그렇게 추정된다지요. 근데 고기 먹은 중이 절로 못 돌아가듯이 한참 젊은 나이에 섹스를 맛본 여인이 고자 남편 곁에서 행복하게 지내기는 힘든 일이고, 결국 이리저리 많은 남자들하고 관계를 가지며 왕에게 더 심한 수치감을 안겨준 끝에 결국 수도원으로 쫒겨나지만 거기서도 수도원장의 조카하고 관계를 맺어서 그 사이에서 사생아를 둘 씩이나 더 가지게 됩니다. 전처는 물론 후처하고도 사이가 이러니 후처가 낳은 같은 이름의 딸 후아나가 왕의 소생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래서 왕비가 궁전에서 있었을 때 낳은 딸을 본명인 후아나가 아니라 왕비하고 친했던 벨트란 공작의 소생이라는 의미에서 다들 “벨트라네하”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놀릴 정도였다지요. (벨트란 공작하고 왕이 호모 러브리였다는 심히 쌍화점스러운 주장도 제기되기도 했는데 왕을 반대하는 세력이 주장한 루머이기 때문에 많이 신뢰할만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도 진실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던 왕은 끝까지 후아나가 자기 딸이라고 주장하면서 신하들이 후아나를 차기 후계자로 모시도록 강요했다고 하니 고자로 태어나서 왕이 된 게 이렇게까지 비극적인 일인지 뭔가 처량합니다. 왕이 이렇게 조롱받는 상황에 놓이게 되니 신하들이 사생아 후아나를 받들 수 없다고 반항하며 왕의 이복 형제인 이사벨의 남동생 알폰소를 차기 후계자로 세워야 한다고 들고 일어섭니다. 뭐 하지만 조선시대 유림들처럼 도덕이라던가 정통성이라던가 그런 걸 진심으로 따졌던 건 아니고 다만 왕을 흔들고 새로운 후계자를 지원해서 차기 왕 또한 신하들의 손아귀 속에 쥐고 흔들겠다는 그런 심산이었지요.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중앙의 힘이 제한되어 있고 지방 분권이 발달한 카스티야에서 각 지방의 유력 귀족들이 힘을 합치면 왕권을 압도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귀족들에게 밀려서 마지못해 알폰소의 계승권을 인정한 엔리케,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알폰소가 사망하고 사람들은 고자왕이 이복동생을 독살했을 거라고 의심합니다. 그래도 물증은 없고 이후 누나인 이사벨을 추대하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이미 반란 세력도 주춤해진 터라 이사벨은 계승권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엔리케한테 충성을 약속하면서 “왕의 통치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왕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그 누구도 왕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당시 정세의 불리함을 볼때 고개를 숙이는 것이 현명한 처사였다는 평가도 있지만 과연 그 뿐일까요. 정말로 신의 축복을 받는 지도자라면 굳이 지금 왕을 몰아내는 쿠테타를 일으키지 않아도 앞으로 백성들이 알아서 위대한 군주를 스스로 받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왕좌에 앉아 있는 엔리케 또한 훌륭한 군주라는 이야기가 되나요? 여기서 우리는 이사벨은 물론 그녀가 살던 당시의 카스티야 사람들이 철저한 기독교인들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알려진 바와는 달리 기독교 유럽권에서 왕권신수설은 중세는 물론 르네상스 이후에도 호소력 있는 논리가 아니라고 생각되어 계몽군주론에 비해서 훨씬 인기가 없었습니다. 루이 14세가 “짐이 곧 국가니라”라고 선언했던 것도 자기가 왕으로 태어나서 선천적으로 누구보다 고귀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자신이 프랑스의 영광을 위해서 밤낮으로 먼치킨처럼 일했던 유능한 군주였기 때문에 스스로한테 자신감이 있었던 거지요. 중국에서처럼 어떤 인덕이나 지혜가 없어도 단지 선왕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백성들이 모두 복종하는 게 사회안정을 위한 충성의 미덕이라고 믿는다면 군소 국가들이 난립하며 경쟁하는 유럽에서는 바로 나라가 망합니다. 그래도 때때로 무능하고 부패한 폭군의 압제에 칼로서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배에 순응하는 게 옳은 일이라고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는데, 주님은 이에 대해서 “벌레들을 잡으려고 밭을 이리저리 헤집지 마라. 잘 익은 곡식들이 다칠까 염려되느니라” 라고 비유로 말씀하셨지요. 폭압에 맞서기 위해서 자기 자신 또한 폭군이 되는 것은 물론 이 세상에 별로 보탬이 못 됩니다. 기독교의 역사관에 따르면 포악한 왕이 압제를 펼치는 것은 그 또한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인내함으로서 백성들 스스로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깨우치게 하고 언젠가 올바른 미래를 건설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라고 하지요. 그래서 선지자 에레미야는 바빌론이 침공해 올때 “우리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의 종 나부가넷살을 사용하셨으니 저항하지 말고 그 환난을 감내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라고 설파했고 주님은 “로마의 황제에게 이 달란트를 세금으로 바치는 게 옳은가”라는 율법학자들의 질문에 “이 금화에는 로마 황제의 얼굴 새겨져 있으니 로마 황제한테 돌려주는 게 당연하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혼만을 그 분께 돌려드려야 한다”라고 답했던 것입니다. 이사벨의 눈으로 보자면 현재 궁궐에서 호사를 누리는 엔리케는 단지 무능하고 방탕한 헤롯왕일 뿐이고 반면에 벽촌 산간에서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는 자신은 인류를 구하고자 황야에서 백성들과 함께 한 그리스도입니다. 왕위계승권을 인정받은 상황에서 앞으로 곧 저 세상으로 갈 고자왕의 의미없는 권위에 바로 맞서서 자신을 따르는 소중한 백성들의 피를 헛되이 할 이유가 전혀 없지요. “너가 살아 있는 동안은 너의 통치를 따른다”는 서약 또한 달리 말하자면 후대에는 당연히 자신에게 정통성이 주어진다는 자신감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고자왕은 이사벨에게 왕위계승권을 약속하면서 앞으로 자신이 승인한 사람하고만 이사벨이 결혼해야 한다고 조건을 답니다. 왕의 권위를 모두 부정하기보다는 어느정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이사벨은 그 조건에 승낙하고, 영악한 왕은 결혼을 수단으로 삼아 이사벨의 계승권을 유명무실하게 만드려고 획책을 꾸밉니다. 지난 글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어떤 남자하고 결혼하든지간에 당시 유럽권의 법률에서 이사벨의 카스티야 계승권은 명목적으로는 확고하지만 실권이 없으면 쿠테타로 왕위를 찬탈당할 수도 있는게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 돌아가는 이치니까 결혼을 통해서 그 권력을 유명무실하게 하면 되는 거지요. 이복동생 이사벨을 몰락한 소국의 왕자나 아니면 왕국의 귀족 내지는 이미 아내를 사별하고 장성한 자식들을 가지고 있는 늙은이한테 시집보내서 남편 집안을 둘러싼 권력 다툼에 말려들게 하는 반면에 딸 후아나는 유력한 주변 나라의 젊은 후계자와 결혼시켜서 연합왕국의 힘을 뒤에 업는 후아나가 실권에서 이사벨을 압도하도록 한다는 게 엔리케의 책략이었습니다. 엔리케의 아버지 선왕 시절에 이사벨은 이미 훗날 그녀의 남편이 되는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자와 혼인이 약속되어 있었습니다만 엔리케는 이 약혼을 취소시키고 후아나를 대신 페르난도와 약혼시키려고 하며 이사벨에게는 나바르 왕과 혼인하라고 하지요. 하지만 페르난도 왕자의 아버지인 아라곤 왕이 반대해서 성사되지 못합니다. 어째서 아라곤 왕이 카스티야와 나바르 사이의 혼인을 거부할 수 있냐고 하면 이것도 꽤나 복잡한 이야기, 사실 아라곤 왕 후안의 장남인 찰스가 나바르 공주하고 결혼해서 나바르 왕이 되는데 후일 후안 왕이 재혼해서 페르난도를 낳고 후처하고 계속 살다보니 전처와의 자식인 찰스하고 왕국 상속 문제로 사이가 나빠져서 골육상쟁 끝에 나바르가 아라곤의 간접적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거든요. (…) 이미 앞날이 불투명한 소국인데다 장성한 사생아들이 많은 아버지뻘의 왕하고 결혼하라는 터무니없는 명령이지만 이사벨이 카스티야를 계승할 위인임을 일찍이 알아 본 아라곤 왕이 후대의 카스티야가 나바르를 지원해서 아라곤을 협동 공격할 가능성을 염려해서 그 혼인을 막았던 거지요. 포기하지 않는 고자왕, 곧 이어 이사벨을 당시 포르투갈의 왕 알폰소 5세와 결혼시키고 후아나를 그 아들인 후안 2세와 결혼시키겠다는 포르투갈과의 겹사돈 계획을 추진하지만 알폰소 5세가 너무 나이 차이가 난다는 이유로 이사벨이 한사코 반대해서 그 또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단지 나이만이 문제였을까요? 훗날 역사에서 드러나듯이 후안 2세는 그 성격이 보통이 아니어서 결코 자기 아버지와 재혼한 후처와의 사이에서의 태어난 아이가 후계를 잇도록 내버려둘 사람이 아닙니다. 게다가 후안 2세 또한 어쨋든 명목적으로는 카스티야 공주인 후아나하고 결혼하니 연합왕국의 후계 구도에서 새 세대를 대표하는 아들 부부가 아버지 부부에 비해 정통성에서도 뒤지지 않고 훨씬 유리하지요. 이건 이사벨더러 스무살 이전에 실권없는 태후가 되서 자기를 미워하는 양아들과 며느리 눈치만 보며 궁궐에서 꼼짝 못하고 늙어죽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입니다. 늙은 왕한테 시집와서 눈치밥만 먹다가 결국 양아들에 의해서 쫒겨나서 미쳐버린 자기 어머니의 최후를 기억하는 이사벨한테 이런 터무니없는 혼사를 제안했다니 이복동생을 향한 고자왕의 미움이 얼마나 컷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계속 혼인을 거부하는 이사벨한테 이번에는 거의 서른 살 차이가 나는 자기 측근 귀족하고 결혼시키겠다고 한 술 더 뜨는데, 경악한 이사벨은 “제발 이 늙은이와의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라고 하나님께 절규했고 그 기도 때문이었는지 새로운 약혼자는 어린 신부감을 만나러 오는 도중에 맹장염이 터져 죽어버렸다고 합니다. 고자왕은 이제 이사벨을 프랑스 왕하고 권력을 다투고 있던 왕의 동생 노르망디 공하고 결혼시키겠다고 하는데 그가 마련한 혼처들을 분석해 보자면 거의 대부분 당시 정세가 불안정했던 아라곤 근처 나바르나 프랑스 등지로 이복동생을 시집보내서 그녀가 생존을 위해서 발버둥치고 동쪽 나라들이 불안정해지는 틈에 서쪽 포르투갈 왕자를 자기 딸과 결혼시켜서 딸에게 연합왕국의 확고한 왕권을 안겨준다는 계획입니다. 포르투갈이 최선이었던 것은 후아나가 포르투갈 공주의 딸이고 포르투갈 알폰소 왕의 조카이기도 하니까 포르투갈 왕가의 명예를 걸고 후아나를 지켜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겠지요. 어째서 그렇게 이복 여동생한테는 그렇게 몰인정하면서 사실상 자기 핏줄이 섞이지 않은 딸은 그토록 지켜주고자 혼신을 다했을까, 단지 자기가 고자가 아니라 자기 딸의 진짜 아버지라고 남들한테 확실히 보여주고 싶다는 오기였을까요? 하지만 엔리케가 특별히 못되고 어리석은 사람이었다고만 생각할 수만도 없고 사실 저는 고자왕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이복 여동생을 지지하고 후원하는 사람들은 다들 하나같이 자신의 성적 정치적 무능력함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적들입니다. 반면에 딸 후아나의 경우 어렸을 때부터 주변 사람들로부터 벨트란 공의 딸이라고 놀림받으면서 자신이 진짜로 왕의 딸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에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언제나 아버지 곁에서 재롱을 떨고 그만을 의지했을 것입니다. 아내는 자신의 무능력함을 경멸하며 다른 남자를 찾았지만 그녀의 딸은 곁에 남아 더없이 아버지를 우러러보며 따랐으니 인생에 절망밖에 없던 고자왕에게는 후아나만이 삶의 낙이었겠지요.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궁궐에서 그렇게 부녀는 서로만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사벨이 권력을 쥐면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불능이 공인됨은 물론 딸의 출신까지도 부정되며 후아나가 이후 어떤 비참한 인생을 살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엔리케와 이사벨 사이의 악연을 생각하자면 이사벨이 자기 딸을 용서하고 잘 돌봐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였습니다. 서로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 부녀에게는 그들의 적수가 하필 이사벨이었다는 게 불운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라곤 왕도 바보는 아니고 장차 포르투갈하고 카스티야가 연합하면 자기 나라의 미래에 어떤 위협이 될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죠. 고민하던 차에 기다리던 이사벨의 밀서가 도달하고 아라곤 왕은 주저없이 고자왕 몰래 자기 아들과 카스티야 공주와의 혼약을 승낙합니다. 그리고 결혼식장은 대대로 카스티야 왕의 대관식이 열리던 카스티야 북부 고원의 중심지인 바야돌리드, 북부 두에로 강의 지류들이 합류하며 옛 카스티야와 레온 왕국의 사이에 위치해서 카스티야 연합의 권위를 상징하는 그 중앙 고원의 한복판으로 아라곤의 왕자 페르난도가 위험을 무릅쓰고 잠입해서 대관식장에서 장차 카스티야의 여왕이 될 이사벨의 남편됨을 당당하게 선언해야 했습니다. 이사벨을 몰래 아라곤으로 대려가서 결혼식을 치루면 고자왕의 위협에서 벗어나서 안전하겠지만 만약 그렇게 하면 이사벨이 자기 나라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해서 아라곤으로 쫒겨나는 셈이 되니까 자기가 카스티야의 정당한 계승자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이사벨에게는 물론이고 카스티야와의 연합을 통해 아라곤을 안정시키고자 하는 페르난도 입장에서도 결혼하는 원래의 목적를 얻을 수 없겠지요. 약간의 호위병들과 함께 상인으로 변장하고 바야돌리드에 도달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뒤늦게 계획을 알아차린 고자왕이 예비 신랑신부를 잡아들이려고 군대를 보냅니다. 또한 두 사람이 육촌지간이기 때문에 결혼은 카톨릭 법에 어긋나며 따라서 교황의 사면장이 필요하다고 공표를 하지요. 근데 여기서 고자왕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아, 당시 유럽 기독교 사회에서는 육촌간에 결혼하는 게 도덕적으로 터부였구나”라고 믿어버리면 안 되는게 당시 거듭되는 혼인 동맹을 통해 서로 혈연이 이리저리 뒤얽힌 이베리아 왕국들의 왕가 사람들한테 육촌 사이에서 결혼 안 된다고 하면 다들 독신으로 늙어 죽으라고 하는 억지거든요. 고자왕이 처음에 이사벨과 결혼시키려고 했던 나바르 왕도 페르난도의 이복형제니까 이사벨하고 육촌지간이고 나중에 결혼시키려고 했던 포르투갈 알폰소 5세의 경우 오촌지간입니다. 남 트집 잡을 근거도 없는 게 고자왕 자신의 부모님은 사촌지간이지요. 드물게는 삼촌 지간 사이의 결혼도 있었는데 도덕적 정치적 이유로 교회가 반대를 해도 그냥 무시하고 결혼하면 별 실권 없던 교회가 현실에 굴복해서 알아서 사면장을 제공하는데 당시의 관행이었죠. 당대 서양사람들 대다수가 육촌 사이에 결혼안된다 하면 뭐 그런 법이 다 있냐며 황당해하고 또한 윤리가 아니라 권력싸움에서 승리하느냐 아니냐가 혼인의 정당성을 증명하던 시대였는데 불행히도 고자왕의 억지가 이사벨한테는 먹혀들어서 교황의 사면장 없이는 절대 혼인 안하겠다고 신부가 꼼짝을 안합니다. 친한 사이도 아니고 원수가 괜히 트집 잡는데 어째서 걸려 넘어갔던 걸까, 아마도 가정파탄의 저주받은 고자왕 따위한테 조금이라도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된다는 이사벨의 오기였을 테고, 하나님이 정말로 자신을 사랑한다면 반드시 이 결혼을 승낙해 주리라는 철저한 신앙심도 한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이사벨은 내륙 산간 마을에서 수녀의 가르침을 받고 자라난 순박하고 완고한 시골 처녀입니다. 중국에서도 광동이나 복건 등의 남해안 사람들은 상재에 밝지만 정치 윤리는 전무하고 반면에 북부 내륙 농민층들은 그 반대로 이윤을 모르지만 혁명 정신이 강해서 큰 정치가들이 많으며, 미국에서도 뉴욕이나 로스엔젤레스 등 해안 도시주민들은 외국 문화를 잘 받아들이지만 내륙 시카고 주변 대평원 농민들은 성경 벨트라고 하는 골수 기독교인들로서 미국의 폐쇄적 전통을 고집하는 공화당의 텃밭을 형성한다고 합니다. 그토록 오랜 기간동안 이사벨을 두려워하며 적대했는데 고자왕이 이복동생의 성격을 몰랐을리가 없죠. 언제 고자왕한테 잡혀서 어떻게 방법 당할지 모르는데 공주는 그렇게 세속의 상식과는 동떨어진 고집을 부리니 아마 그 때 페르난도 왕자는 적진 한복판에서 똥줄이 탔을 겁니다. 하지만 고자왕의 군대가 들이닥치기 직전 기적적으로 교회의 특면장이 도착하고 두 사람은 교회의 보호 속에서 혼례를 올립니다. 나중에서야 그 특면장이 톨레도 대주교의 위조본이라는 게 드러나는데 나중에 교황 자리에 오르는 아라곤 출신 매독돼지 로드리고 보르지아 추기경이 재빨리 손을 쓴 덕분이라고 하지요. 교황청 내의 여러 이익집단들이 이 결혼을 승인하냐 마느냐를 놓고 격론을 벌이고 정식으로 교황 사인 얻어서 사절을 보낼 때까지 기다리면 이미 늦습니다. 그리고 로드리고 보르지아가 누구냐면 돈으로 추기경들을 매수해서 교황 자리에 오르고 자기 자식들에게 줄 봉토를 획득하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임은 물론 자기 친딸하고 동침해서 그 사이에서 딸을 낳는 그런 인간이니 사면장 문서 위조 쯤이야 밥 먹듯이 쉬운 일입니다. 근친상간을 즐기는 추기경이 손을 써서 육촌간의 혼인이 교회의 이름으로 허락된 셈이니 이를 신학적으로 해석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어떤 악인도 그 분의 큰 권능을 위해서 사용하신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시대의 대세를 막을 수 없었던 고자왕은 결국 오년 후 세상을 떠나고, 후아나에게 왕위를 넘긴다는 유언을 남기지만 국내의 어느 누구도 이사벨보다 나이도 훨씬 어리고 출신이 의심받는데다 배후에 지지세력도 없는 후아나를 받들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포르투갈의 알폰소 왕이 조카를 구하고자 전면에 나섭니다. 목숨을 다해 후아나를 지켜주겠다고 멩세하면서 후아나와 결혼해서 포르투갈과 카스티야의 연합왕국을 이루어내겠다는 폭탄선언과 함께 군대를 진군시키고, 알폰소 왕의 개입과 함께 카스티야의 삼분의 일에 이르는 친 포르투갈계 세력들이 우후준순으로 이사벨에게 반기를 들어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됩니다. 당시 후아나의 나이는 열 세 살인데 알폰소 왕은 사십 삼 세, 사랑하는 미성년의 조카 딸을 지키고자 삼촌이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싸운다는 이 헨타이 망가스러운 멋진 전개를 보고도 카스티야 귀족 상당수가 포르투갈 편에 선 것을 보면 반대로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육촌하고의 결혼을 위해서 교황의 허락이 필요하다고 기다린 이사벨이 얼마나 고지식한 여자인지를 가늠할 수 있지요. 일반적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좀더 넓게 생각하자면 해안가의 포르투갈과 내륙고원의 카스티야가 얼마나 다른 기질을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도 있고요. 여기서 유럽에서의 친족 결혼법에 대해 다시 생각하자면 그 가장 큰 근거가 되는 성경 구약 모세오경의 율법을 살펴봤을 때 남자가 그의 고모나 이모와 결혼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형제자매의 딸와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은 없고 실제로 현제 유태인 사회에서 사촌과의 결혼을 터부시하는 일은 없다고 합니다. 이슬람권과 유럽을 비롯해서 세계의 다른 많은 사회들에서도 사촌간의 결혼은 때때로 상당히 권장되었던 게 부부 양쪽의 부모들이 형제자매간이어서 부부간 성격불화나 유산분쟁을 원만히 해결하는 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잠재적인 안전을 생각할 때 근친혼에 의해서 후손들의 잠재적인 유전적 결함이 약간 높아질 위험 또한 감수할 수 있으니까요. 사촌간이라면 가끔씩 가문들끼리 모여 파티할 때 몇번 마주치며 이야기하는 정도니까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아서 연애 감정이 싹트기도 좋고요. (조상신 숭배와 성씨의 영광이라는 이상한 관념에 사로잡혀서 부계쪽으로는 팔촌은 물론 동성동본 혼인도 안 되면서 모계 쪽으로는 사촌간 결혼도 가능했던 동아시아 유교권은 희안한 사례, 그러니까 유림 할아버지들이 도대체 대화가 안 통하고 자기 이익만 수호하려는 영감탱이들 취급을 받는 거지요.) 중세 카톨릭 세계에서 7촌 이하 결혼이 교회의 허락을 받아야 했던 것은 엄밀히 말해서 유태-기독교 문화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고대로부터 내려온 게르만 족의 전통 혼인법이 중세 이후 유럽을 통치해야 했던 카톨릭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경우인데 로마 제국 붕괴 이후 거의 부족 사회 수준으로 붕괴했던 암흑세기 유럽에서는 자기 부족의 생존을 위해서 친족간이 아니라 다른 부족 사람들과 가능한 한 많은 연결고리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족외혼이 권장되었던 거지만 레콘키스타가 거의 끝나가던 르네상스 초기 세계에서는 이미 그와 같은 사회적 필요성이 거의 유명무실해졌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중년의 삼촌이 미성년의 조카를 신부 삼는 것은 당시 사람들한테도 인류 보편적 상식 차원에서 역시 참 뭐시기했는지 이사벨 진영에서는 여러 의미를 담아서 알폰소 왕을 “늙은이”라고 부르며 조롱했다고 하지요. 필자는 유교 전통 주의자가 아니라 기독교인이고 또한 당시 알포소 왕 아니면 누구도 후아나를 구해 줄 사람이 없었는데 그런 맥락을 무시하고 약자를 비난하는 건 필자의 취향에 심히 반하는 일이기 때문에 도덕적 판단은 하지 않겠습니다. 흐음, 솔직히 말하자면 “알폰소, 그대야말로 진짜 사나이다!” 라는 심정일까요? (…) 물론 이야기를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런 드라마가 또 없지만 서로 창끝을 맞대어야 했던 당사자들, 특히 고모 이사벨과 조카 후아나 두 사람 모두 더없이 착잡한 심정이었겠지요.

단지 카스티야와 포르투갈, 아라곤 뿐만이 아니라 아라곤과 앙숙 사이인 프랑스가 후아나 편에 서고 프랑스의 지배에 반대해서 싸우는 부르간디 공국이 이사벨 편에 선 국제전쟁으로 확산되었는데 프랑스의 압력을 두려워한 교황이 알폰소와 후아나 사이의 결혼을 승인함으로서 포르투갈의 편을 들어줍니다. 정통성은 인정받았고 포르투갈 국력이 열세이기는 해도 배후에 프랑스라는 강대국이 지원하니까 후아나 진영도 거의 이사벨 진영과 대등한 상황이지요. 하지만 거의 맞먹는 전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알폰소 왕은 카스티야 깊숙히 진격해서 수도를 탈취하지 못하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포르투갈 국경 근처에서 수비전 만을 주고 받다가 결국 카스티야 내부의 반란 세력들이 하나하나 와해되는 탓에 전혀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맙니다. 하지만 알폰소 왕이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자에 비해서 군사적 재능이나 경험이 아래였다고 할 수도 없는 게 젊은 시절 세우타 근처의 무어인 땅들을 성공적으로 정복해서 “아프리카누스”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또한 숙부인 항해왕 엔리케의 원양 개척을 지원해서 포르투갈의 세력권을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까지 넓힌 유능한 왕이었으니까요. 아마도 소국 포르투갈을 안정적으로 지켜낸 왕으로서의 오랜 경험이 카스티야 진격에서는 오히려 발목을 잡았던 게 아니었을까요? 영토와 인구가 네배 이상인 카스티야에 둘러싸여있는 포르투갈 입장에서는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 무모한 공세가 아니라 적은 군사로도 대군에 맞설 수 있는 요새 수비전에 주력해야 합니다. 또한 적진 깊숙히 들어갈수록 아무런 지원없이 고립되는 북아프리카 이슬람 전선 공략전에서도 보급이 되는 해안가 요새를 중심으로 추이를 관망하면서 적이 약해지는 틈을 타서 조심스럽게 작전을 전개하는게 정석이지요. 카스티야 진격은 이와는 정 반대여서 적 수장의 통치에 반대하는 작은 토후들이 전국 각지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수도에 가까이 진격하면 할수록 더 많은 지원을 이끌어내며 전세를 유리하게 몰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포르투갈의 안전을 최대한 도모하면서 카스티야에게서 조금 양보를 받아내는 게 아니라 적을 완전히 격파하고 후아나를 카스티야 여왕으로 세우는 것이 목표라면 제갈량이 장안으로 북벌하듯이 소극적으로 나아가서는 안 되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톨레도를 향해 내달려야 하는 거죠. 만약에 알폰소 왕 자신이 후아나와 결혼하지 않고 고자왕이 계획했던 그대로 아들 후안을 그녀와 맺어줘서 젊은 황태자가 전선에 나서도록 했다면 아마 전쟁이 다른 양상으로 흘렀을 지도 모릅니다. 아무래도 젊은이가 중년보다는 말이라도 더 잘 달릴거고 경험이 없는 저돌적인 무모함이 도리어 장점이 될 수 있었을 거니까요. 그리고 훗날 역사를 통해 확실히 드러나듯이 아들 후안이 아버지 알폰소보다 더 명석하고 광폭해서 전쟁 지휘관으로 더 어울립니다. 하지만 당시 후안은 이미 수년전 자기 사촌인 레오놀하고 혼인이 맺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알폰소가 후아나하고 결혼해서 늙은이 소리를 들어야 했던 건데 그 점에서 황태자가 이사벨과 결혼할 수 있도록 그때까지 결혼시키지 않고 기다렸던 아라곤 왕이 훨씬 외교를 잘 했습니다. 카스티야의 정국이 아직 유동적인 상황에서 어째서 알폰소는 이사벨이나 페르난도보다도 더 어린 자기 아들 후안을 그렇게 서둘러 결혼시켰던 건지 그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글쎄요, 아마도 황태자 후안 자신이 유럽 내륙이 아니라 아프리카 너머 저 대양으로 포르투갈의 미래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복잡한 카스티야의 정세에 말려들고 싶지 않아서 레오놀하고의 결혼을 선택했던 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후일 왕비가 되는 레오놀은 현명하고 상냥한 여인이어서 포악한 후안 왕이 얻을 수 없었던 인망을 많이 메꾸어 줄수 있었으니 역시 배우자를 잘 선택한 후안 왕의 안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죠. 이유와 어쨋든 유부남이 된 황태자는 절대로 육지에서 싸우지 않고 서아프리카 제해권 수호에만 전력을 집중합니다. 후아나가 이사벨을 상대로 승리해서 자기 아버지하고 함께 연합왕국을 성립시키고 후계자를 낳는 경우 왕위 계승권에서 자기한테 이익이 될 일이 없으니까 절대로 육지에서 아버지를 도우면 안 되죠. 그 결과 아버지의 육군은 지지부진한 전선에서 세력을 조금씩 잃어가는 반면에 아들이 이끄는 해군은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함대들에 맞서서 계속 승리하며 포르투갈의 제해권을 지켜냅니다.

그 사이에 아라곤 왕은 프랑스로 밀사를 보내 아라곤이 부르고뉴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피레네 북쪽의 로우시온 지방을 프랑스에 양도하는 조건으로 프랑스가 포르투갈을 지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냅니다. 바르셀로나와 몽펠리에 사이에 있는 로우시온 지방은 지리적으로는 프랑스에 좀더 가깝지만 언어나 문화는 카탈로니아 권이어서 수세기동안 계속 영토 분쟁이 있어왔는데 우선은 프랑스에 양도를 하지만 훗날 연합왕국의 힘이 더 강하졌을 때 다시 스페인령으로 회복하지요. 처음 진격에서 패배하고 포르투갈로 돌아온 알폰소 왕도 프랑스로 찾아가서 다시 지원을 요청하지만 이미 원하는 목표를 다 얻어낸 프랑스가 등을 돌리고, 낙담해서 포르투갈로 돌아오지만 고국에서는 아들 후안이 정변을 일으켜 왕의 자리에 올라 있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아들이 아버지에게 반발했던 것 같지는 않고 다만 아버지가 무사히 살아 돌아오지 못해서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반란 세력들이 고개를 들 가능성을 염려한 아들이 임시로 정권을 잡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버지가 돌아오니까 아들이 환대하며 왕위를 돌려드렸지요. 아들이 서아프리카 해상에서 승리한 덕에 얻은 금괴를 사용해서 다시 군대를 일으키고 카스티야로 진격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지지부진, 프랑스가 전쟁에서 빠지니 당시 나폴리를 영유하고 있던 아라곤 왕국이 더 두려워진 교황은 이미 사면장으로 허락했던 알폰소와 후아나 사이의 결혼을 불법이라고 선포합니다. 전쟁이 카스티야 영토 내에서 행해졌고 또한 알폰소 왕이 위험한 진격을 삼가한 탓에 카스티야에 비해서 포르투갈의 손실은 미약했지만 그래도 목숨을 다해 지켜주겠다고 한 조카한테 면목이 없게 되어버렸으니 더 이상 살 희망이 없어져 버린 알폰소 왕은 아들에게 왕위를 양도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가 시름시름 앓다가 이년 후에 국민들의 통곡 속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새 세대의 주인공이 된 세 젊은이 왕, 포르투갈의 후안과 카스티야의 이사벨, 아라곤의 페르난도가 모여서 평화협정을 맺는데, 알폰소 왕과 후아나의 결혼은 없었던 일로 하고 이사벨과 페르난도 사이의 장녀가 포르투갈 후안 왕의 장남과 훗날 혼약하도록 하며 독신이 된 후아나에게는 두가지의 선택이 주어집니다. 일년 전 이사벨하고 페르난도 사이에서 태어난 한 살짜리 장남하고 미래에 결혼하던가, 아니면 수녀원으로 은퇴해서 평생을 독신으로 보내던가요. 이사벨 측에서는 후아나가 다른 나라의 후계자와 결혼하는 경우 다시 처참한 내전이 반복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두가지 선택 이외에는 어떤 조건도 허용해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후아나 입장에서 보자면 갓난아기하고 결혼을 약속해서 궁궐에서 원수들을 시부모로 모시는 것보다는 차라리 수녀원에 유폐되어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그렇게 죽어버리는 게 차라리 속편하지요. 포르투갈의 보호 속에서 리스본에 있는 수녀원에 들어가서도 이사벨보다 더 오래 살며 계속 지인들과 활발히 서신을 주고 받았다고 하는데 죽을 때까지 고모를 카스티야 여왕으로 인정치 않고 쓰는 편지마다 여왕 후아나라고 사인을 했다 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부정하는 조카를 과연 고모는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포르투갈의 음란한 왕비가 간통해서 낳은 출신이 불분명한 재앙의 씨앗이라고 경멸했을까요? 시어머니가 되어 그 아이를 마음껏 구박하고 싶었던 마음이었을까요?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사벨은 마음이 넓고 상대의 심정을 헤아릴 줄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이사벨이나 후아나 두 사람 모두 포르투갈에서 카스티야의 늙은 왕에게로 시집 온 젊은 비운의 포르투갈 왕비들을 어머니로 둬서 태어났을 때부터 성년이 되기까지 단 하루로 자신의 권리를 완전히 인정받지 못하고 불안과 고독 속에서 살아와야 했습니다. 같은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한 쪽만 살아남을 수 밖에 없었던 도플갱어였달까, 그래서였는지 이사벨이 낳은 장녀는 이사벨이었고 조약이 채결된 그 해에 낳은 차녀는 후아나라고 이름짓지요. 이사벨의 어머니 이름이 이사벨이었고 페르난도 어머니 이름이 후아나였기는 했지만 이베리아에서 딸들에게 줄 수 있었던 이름이 그 둘 밖에 없었던 건 물론 아니고 상식적으로는 피하고 싶었을 이름을 바로 그 해에 새로 태어난 자기 딸한테 붙여 주었다는 것은 역시 자신과 조카 사이의 비극적인 인연을 생각한 애절한 마음이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차녀 후아나는 어머니를 비롯한 수많은 스승들로부터 특별히 엄격한 교육을 받아 이베리아의 모든 언어들은 물론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열살 이전에 마스터하고 승마에도 뛰어난 절세의 천재소녀로 자라나지만 훗날 바람기 많은 남편 때문에 마음 고생하고 궁중 권력 다툼에 스트레스 받다가 할머니였던 이사벨처럼 미쳐버려서 아버지는 물론 남편, 아들에 의해 계속 유폐당하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어머니 이사벨에 의해 수녀원으로 유폐당했던 사촌 후아나의 저주였을까요.

Lv3 이오라오스

모바일 게시판 하단버튼

댓글

새로고침
새로고침

모바일 게시판 하단버튼

지금 뜨는 인벤

더보기+

모바일 게시판 리스트

모바일 게시판 하단버튼

글쓰기

모바일 게시판 페이징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