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을 국부(國父)로 인정하고, 마음속 깊이 존경하고 있는 사람들은 패쓰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으니까요.
抗美援朝 전쟁 - 중국
The Korean war - 미국 등 서방권
민족해방전쟁 - 북한
한국전쟁 - The Korean war의 직역, 일본
조선전쟁 - 일본
625전쟁 - 대한민국
같은 전쟁을 두고 부르는 이름이 참 많습니다.
앞에는 전쟁명 뒤에는 그렇게 부르는 나라겠죠.
즉, 말하자면 625전쟁이라고 부르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는 겁니다.
31절, 815광복절, 516쿠테타, 1212쿠테타, 518민주화운동, 629개구라선언 등등
우리나라에서 유난히 날짜와 연계하여 기념되는 날을 기억하기 좋아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학생들 시험 공부에 도움이 되라고 그렇게 부르는 걸 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북한에서도 31절, 815광복절이 있을텐데, 북한에서는 625전쟁이라 부르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먼저 오해를 받기 싫으므로, 625전쟁이라고 하는 그 한국전쟁을 일으킨 주체가 누구인지 먼저 밝히고 들어 갑니다.
물론, 당연하게도 여러사람이 알고 있는 김일성입니다.
혹설에는 스탈린의 사주다, 마오쩌뚱이 배후다 하지만, 스탈린이나 마오쩌뚱은 오히려 김일성이 강경하게 나올 것을 경계했다고 합니다. 그들도 미국과의 전면전을 원치 않았으니까요. 만일 미국과의 전면전이 전개될 경우 최악의 사태는 핵전쟁이라는 계산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거죠.
그렇다면 왜 김일성은 남침을 하게 되었을까요?
일단, 기본적으로 국제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한국전쟁은 Civil war 즉, 내전으로 보고 있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대표적인 내전이고 그 남북전쟁과 같은 맥락으로 국가와 국가간의 전쟁이 아닌 내전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완전히 다른 국가인 것처럼 각자의 방향으로 발전해 왔지만, 당시 남과 북은 단지 미국의 한 참모가 지도에 그려놓은 북위 38도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각강의 자치정부가 수립되어가는 상황이었죠.
당시 북측에서는 항일투쟁의 영웅이었던 김일성이 대중의 큰 지지를 얻고 있었고, 남측은 춘추전국이었습니다.
그러한 춘추전국 속에서 좌파로 분류되는 남로당 계열은 제거되고, 김구, 이승만의 양대 후보가 떠오르게 되는데,
김구와 이승만 두사람의 상반되는 캐릭터때문에 훗날 대한민국이라 불리우는 남한의 운명이 갈리게 됩니다.
먼저 김구는 잘 알려진 대로 중국 국민당의 장졔스의 라인이라고도 볼 수 있는 사람으로 샹하이 임시정부의 요직을 거치고 항일 독립투쟁에 동참했던 민족주의 계열의 사람입니다.
이승만은 일제강점기 동안 미국에서 망명생황을 하다가, 해방후 귀국하여 미군정의 신임을 얻은 케이스였구요.
말하자면 남한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미국의 구미에 딱 맞는 대리인이었던 셈입니다.
그런 이승만에게 있어 정치적명분이나 정통성을 굳이 따진다면 김구의 존재는 도저히 같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 수 없는 관계였겠죠. 훗날 박정희가 김일성에게 느낌 열등감과 같은 의미였을 겁니다.
다들 알려진 바와 같이, 김구선생은 정적에 의해 암살 당합니다.
대적할만한 정적은 이제 남한 내에 존재하지 않고, 미군정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이승만에 대적할 사람은 한반도 내에서북의 김일성 뿐입니다.
그러나 대중적인 인기는 김일성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역시 스스로 인정하게 됩니다.
그런 이유로 남북한 총선거 제안에 응하지도 못한 것이죠.
1948년이 되어 남북한에서는 독자의 자치정부를 수립하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만들어진 군사분계선을 나름대로 충실히 지켜나가는 듯해 보입니다.
그러나 곳곳에서 다소간의 무력충돌이 있었고, 소위 국지전의 형태로 1948년~1950년 6월 25일 사이에 대략 1500번 가량의 충돌이 발생합니다.
이 국지전적인 무력충돌의 공격자는 남한:북한이 1000:500의 비율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이승만은 공개적으로 북침을 공언하곤 했습니다.
실제로 1949년 당시 군사력에서 북한에 비해 남한이 앞서고 있었기 때문이죠.
-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