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무선(崔茂宣)은 고려 말에 화약 무기를 개발해 왜구를 물리치고 우리 나라 전쟁사에 있어 군사무기의 역사를 바꾼 과학자요, 무장이었다.
최무선은 고려 말에 화약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가 이후 계속해서 화포를 만들고 이를 고려 수군의 전함에 정착하여 왜구를 상대로 진포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대마도 정벌에도 나섰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진포해전은 세계 최초의 함포 해전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다. 서양 역사에서 레판토 해전 이후 함포가 장착된 함대로 해상권을 장악한 국가가 세계를 정복하게 되며, 역사의 주도권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넘어간다. 서양이 동양에 대해 우위에 서게 되는 지리상의 발견과 식민지 침탈의 바탕이 되는 것이 바로 함포 외교이다.
그런데 레판토 해전보다 무려 190년이나 앞서, 최무선은 화포를 선박에 장착하여 적선을 격파하는 함포 해전을 세계 최초로 선보인다.
우리나라의 배가 세계 조선사(造船史)에 있어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선형과 구조가 특이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재래식 배는 그 선종과 연대 여하를 막론하고 동일한 구조 방식 즉 두껍고 평탄한 저판을 밑에 깔고 외판을 붙이고 가룡목을 설치한 방식으로 건조되어 있다.
다른 나라 배들은 용골이라는 배의 등뼈를 기준으로 판자를 붙여 배의 아래가 역삼각형으로 좁혀지지만 우리나라 배는 용골이 없고 밑이 편평한 사각통 모양이다. 이와 같은 선형과 구조를 평저선구조(平底船構造)라고 하는데 김재근 박사는 이런 구조를 가진 배를 통털어 ‘한선(韓船)’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형태의 배는 유럽에서 14∼15세기에야 비로소 나타나는 것을 볼 때 동시대에서 한국의 조선기술이 얼마나 탁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에 들어와 해상활동이 활발히 벌어지자 조선과 항해 기술이 크게 발달했다. 고려시대의 배들은 전투용 군함과 무역 및 대외 활동을 위한 무역선과 조세나 공물을 운반하는 조운선으로 나뉘었다. 조운선은 각지에서 공물로 받아들인 조세미와 진상품을 수도 개성으로 운반하는데 사용하던 배로 초마선의 경우 한강 유역에서 주로 사용하던 배는 적재량을 200섬으로 제한했지만 원래의 초마선의 적재량은 1000섬이나 되는 큰 배이다.
전투용 군함으로 대표적인 것은 대선(大船)과 과선(戈船)이다.
『고려사』에 914년에 ‘태조가 전함 100여 척을 더 건조했는데 그중 배 10여 척은 각각 사방이 16보이며 그 위에 다락을 세웠고 말을 달릴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사방이 16보(1보는 6자)라는 것은 배의 길이가 약 36.6미터나 되며 말이 달릴 수 있었다는 것을 보아 넓은 갑판을 가지고 있는 배임을 알 수 있다.
고려 군선의 우수성은 1268년 원나라와 함께 일본을 원정할 때 증명된다. 『원사』에 원나라의 왕운이 해전에서의 실패에 대해
“태풍을 만나 파도 때문에 서로 부딪쳐 크고 작은 많은 우리 함선들은 파괴되었으나 오직 고려의 군함만은 견고하여 정상적으로 전투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라는 기록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원의 세조가 일본에 원정할 대함(大艦) 300척을 포함한 군용선 900척을 요청하자 고려의 김방경은 배를 중국식으로 만든다면 노동력과 비용이 많이 들고 기일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설계도면으로 배를 만들어야 한다고 이를 관철시켰다. 김재근 박사는 이 당시 고려의 배들은 한선의 구조법과 동일한 것으로 추정했다.
이 당시 원은 군량미 3000∼4000섬을 싣고 바다를 건널 수 있는 배를 요구했는데 군량미가 3000∼4000섬 정도라면 현재의 단위로 약 250∼320톤이 되므로 이 배의 배수량은 400∼500톤이 된다. 그런데 고려에서는 이들 배를 단 4개월에 만들었다는 것을 볼 때 고려의 조선 기술이 얼마나 앞선지를 알 수 있다.
고려 배의 크기는 여 몽 연합함대가 정박했다가 폭풍을 만난 나가사키현 다카시다에서 발견된 700년 전의 침몰선 유물로서도 유추할 수 있다. 배는 바다 속에서 부식되어 사라졌지만 1994년에 소나무 닻이 인양되었다.
이 당시 인양된 닻은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발견되었는데 닻에는 두 개의 돌이 함께 놓여 있었다. 닻돌이라고 불리는 길이 2미터 가량의 이 돌은 닻의 한 가운데 박았는데 두 개 돌의 무게는 무려 338킬로그램이다.
〈KBS역사스페셜팀〉은 닻돌의 재질을 분석한 결과 일본에서는 보기 드문 적색 응회암으로 이 돌의 성분은 전라남도 장흥군 천관산의 돌과 일치했다고 발표했다. 이 배는 천관산의 나무와 돌로 만든 것이다.
인양된 닻을 복원하니 그 길이가 무려 7미터에 이른다. 학자들은 두 개의 닻돌과 닻의 무게를 합하면 약 1톤 가량으로 이를 근거로 배의 길이를 추정하면 30∼40미터가 된다고 계산했다.
한편 이원식은 고려 대선의 크기를 25∼30미터로 추정했다. 대선의 크기로 볼 때 전투병 60명, 선원 30∼40명을 포함하여 모두 90∼100명 정도가 승선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옛날 수군이 해전을 하는 데는 세 가지 전술이 있었다.
하나는 선수 수면 하에 뾰족한 衝角(ram)을 달고 적선의 옆구리를 찔러 침몰시키는 충파 전술이다. 이 전술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사용된 전법으로 19세기 초엽 트라팔가 해전에 이르기까지 서양에서는 오랫동안 사용됐다.
그런데 김양기 박사는 ‘고려 군선의 선체는 고대(高大)하고 선면(船面)은 철조각령(鐵造角令)으로서 적선을 충파(衝破)하게 되었다’라는 글을 근거로 이 군선이 과선이고 선수에 철각(鐵角)을 붙어 적선을 충파하였다고 보았다. 배머리에 달린 철각(鐵角)은 상대측 함선에 배를 맞대고 적선에 뛰어올라 백병전을 벌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상대방의 배에 접근하여 배머리의 철각(鐵角)으로 적선의 흘수선 아래를 받아 침수되도록 치명상을 입힌 후 적과 싸우는 독특한 전법을 적용할 때 효과적이므로 철각이 배의 윗부분에 있으면 적의 배를 부수기 어렵기 때문에 배의 아래쪽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학자들은 커다란 통나무를 대고 그 앞에 철로 쇠를 덧씌워 뿔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와 같은 전술은 동양에서는 고려가 처음으로 사용하였고 이후 거북선으로 이어진다.
박치기용으로 배를 만들기 위해서는 단단한 배를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한선은 강도를 높이기 위해 배의 겉판이나 밑판을 소나무로 만들었다. 소나무는 여름에 만들어진 단단한 세포가 나이테 속에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배의 겉판을 만드는 침엽수 중에서 다른 어떤 나무보다 단단하다. 또 한선은 척추에 해당하는 용골이 없고 밑이 편평한 평저선이므로 강도를 보강하기 위해 두꺼운 판자를 사용했다.
그렇다고 모두 소나무로 만든 것은 아니다. 박치기에 알맞도록 주요 부위는 보다 강한 나무로 보강했다. 박상진 교수는 주로 참나무, 가시나무, 녹나무 등을 사용했는데 그 중에서도 전투배의 선미는 진목(眞木) 즉 참나무를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참나무는 1제곱센티미터에 500킬로그램의 압축 강도를 견딜 만큼 단단하고 질기다. 또 다른 참나무 종류인 가시나무(상록수 참나무 무리 중 따뜻한 남해안 및 섬 지방에서 자람)는 더 단단한 나무이다. 반면에 일본의 산에는 소나무가 드물고 주로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자란다. 이들은 곧고 빨리 자라는 잇점은 있으나 무르고 약하다. 이런 나무로 아무리 배를 크게 만든다해도 한선의 소나무 배와 박치기했을 때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더구나 왜선은 전투선 자체도 한선보다 작았기 때문에 충격은 더욱 컸다. 칠천량 전투(1597)를 묘사한 일본인들의 기록에 이를 잘 보여준다.
‘조선 배는 우리 배보다 비교가 안 될 만큼 크다. 그래서 조선 배에 바짝 달라붙어도, 자루의 길이가 두 칸이나 되는 창으로 미치지 못하니 배에 뛰어드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한선은 왜선에 비해 배의 규모도 큰데다가 튼튼하였으므로 군함과의 싸움은 당초 상대가 되지 않았다. 꼭 정면 박치기가 아니고 측면 박치기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한선을 만들 때 배의 너비 방향을 고정하고 가룡목이라는 가로 버팀목을 썼는데, 이 역시 참나무와 가시나무였다. 근본적으로 한선은 재료부터 왜선에 비해 우수했기 때문에 임진왜란의 해전에서 왜선이 배가 맥을 못 춘 것이다.
둘째는 적선에 접근하여 기어올라 백병전으로 적선을 송두리째 점령하는 보어딩(boarding) 전술이다. 이는 육전과 백병전에 능한 나라가 좋아하는 전술로 로마가 이 방법으로 카르타고 해군을 제압했으며 유명한 해적들이 약탈할 때 사용하는 것도 주로 이 전법이다.
고려 말의 왜구와 임진왜란 때 왜수군이 채택한 기본전술이지만 이 전술의 문제점은 일단 적함 안으로 침투해야만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왜군이나 여진의 해적들은 백병전에 능숙하므로 재빠르게 적선에 다가가 배에 기어올라가는 육박전에 치중했지만한국은 아예 적들이 배에 기어오르지 못하는 배를 건설하는데 주력했다. 그 결과 태어난 것이 고려의 과선과 임진왜란 때의 판옥선과 거북선 등으로 왜군의 배에서는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고 왜군 스스로가 실토했을 정도이다.
마지막으로는 적진에 접근하되 밀착하지 않고 화포나 화전 등 장거리 무기를 발사하여 적선을 분멸(焚滅)시키는 전법이다.
이 전술이야말로 한국 수군의 장기이다. 당시 조선 수군이 무장하고 있는 화약무기는 왜보다 월등하게 성능이 우수했다. 간단하게 말해 화포의 사정거리도 길고 명중률도 높았으므로 조선 수군의 입맛에 맞게 먼 거리에서 집중적으로 화포 등을 발사하여 적을 괴멸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