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쉬었군요 ㅎㅎ
저희 잉글랜드의 북해 라이벌 네덜란드 이야기입니다.
네덜란드의 독립은 종교개혁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암스테르담 NPC 에라스무스 (1469~1536)와
함부르크 NPC 루터(1483~1546)가 시작한 종교개혁으로 네덜란드에는 신교가 급격히 퍼지게 됩니다.
당시 네덜란드의 지배자였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5세(1500~1558)는 현재의 벨기에 출신이라
적극적으로 탄합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뒤를 이은 스페인 국왕 펠리페2세(1527~1598)는 카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네덜란드의
신교를 강력하게 탄압합니다.1559년 이복 여동생 마가렛 공주를 네덜란드 총독으로 임명하고
각 주의 대표를 스페인출신으로 임명하자 네덜란드인의 불만은 지속적으로 쌓입니다. 그 와중에
프랑스와의 전쟁을 마친 펠리페2세가 네덜란드로 병력을 투입하자 네덜란드인은 봉기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네덜란드의 독립운동은 본격화하게 되는데, 네덜란드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오라녜 공 빌렘,
에그몬트백작, 호른 백작이 이끄는 네덜란드 독립군이 스페인 군과 맞서게 됩니다. 항상 암스테르담
앞바다에서 전투중인 바다여단의 사령관이 에그몬트 백작으로 나옵니다.

마가렛 총독이 무력진압을 시도하면서 빌렘은 독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합니다. 신임 네덜란드
총독으로 임명된 알바 공 (1507~1582)는 무자비한 공포 정치를 시작합니다. 폭동 재판소를 설치하고
에그몬트 백작, 호른 백작을 포함하여 1만이 넘는 네덜란드 인사를 처형합니다. 알바공의 탄압은 스페인에
대한 반감이 덜했던 네덜란드 남부의 카톨릭 세력마저 반기를 들게 합니다. 알바 공은 뛰어난 전술로
네덜란드 독립군을 격파하였지만 네덜란드의 반발심은 그만큼 늘어납니다.
많은 칼뱅파(신교의 한 갈래) 귀족들이 영국, 독일로 망명하거나 해상을 떠돌게 됩니다.
스페인에서는 이들을 거지들(Geuzen)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이 모여서 '해상 거지단(Zeegeuzen)을
결성하고 스페인 해군을 공격합니다. (이름이 부르기 뭐하지만, 스페인에서 붙인 이름이니 이해를..)
-여기서 해상 거지단은 네덜란드 이벤트중의 바다여단으로 추측됩니다. 실제로는 에그몬트
백작이 처형되고나서 해상 거지단이 등장하지만, 네덜란드 이벤트에서는 바다 여단의 사령관이
에그몬트 백작이고 알바공 함대와의 전투에서 사로잡혀 처형되는것으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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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로 망명했던 빌렘은 1568년 나사우에서 네덜란드의 독립을 선언하고, 이로써 네덜란드의 80년 독립전쟁이
시작됩니다. 영국 엘리자베스 1세의 비호하에 있던 해상 거지단은 스페인의 규탄으로 영국에서 추방되지만,
역효과를 불러일으켜, 해상거지단이 마스강 하구의 브리엘(로테르담 근처)을 함락합니다. 이것은 프랑스의
신교도와 엘리자베스 1세가 네덜란드에 주목하고, 네덜란드의 잔여 세력들이 일어나는 계기가 됩니다.
알바공과 후임인 레스퀸스 총독이 실패하자, 펠리페 2세는 레판토 해전에서 전공을 세운 알렉산더 파르네세
(1545~1592,팔마공)를 새 총독으로 임명합니다. 세비야에 한가로이 앉아있는 이 사람은 장블루 전투에서
네덜란드군을 완파하는 한편, 분리 대응하는 방침을 세웁니다. 신교가 많은 북부를 강압적으로, 카톨릭이 많은
남부를 유화적으로 대합니다. 파르네세 공작은 1585년에 13개월간의 포위공격끝에 앤트워프를 함락시키고
남부 10개주를 완전히 스페인의 치하에 두게 됩니다. (북해에 스페인 영지가 하나 박혀있는 원인제공자 입니다)

파르네세 공작이 북부 7주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는 중에 본국에서는 영국 본토공격을 계획합니다. 파르네세 공작은
스페인 정규군 3만을 이끌고 칼레에서 해군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스페인 해군은 플리머스/칼레해전에서 영국 해군에게
격파당하고, 참패의 원인으로 지목받은 파르네세 공작이 1592년에 분사하자 스페인은 네덜란드에서 영향력을 상실합니다.
이후 프랑스도 스페인에 등을 돌리게 되면서 영,프 양국의 인정을 받아 1596년에 독립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조약이
최초로 체결됩니다. 스페인과는 전쟁을 계속하지만 유럽을 둘로나눈 30년 전쟁으로 흐지부지 되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네덜란드의 독립이 확실하게 인정되면서 전쟁도 마치게 됩니다.
상인의 나라
네덜란드는 인구와 영토가 제한된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1세기만에 유럽 안팎의 강대국으로 부상합니다.
그것은 활발한 해외무역과 금융업으로 경제적 기반을 튼튼하게 다진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볼수 있습니다.
일례로, 1600년 당대 일류 지휘관이었던 마우리츠 나사우의 네덜란드군은 네덜란드군이라 부르기에 걸맞지 않았습니다.
43개의 영국중대, 32개의 프랑스중대, 20개의 스코틀랜드중대, 11개의 왈룬(벨기에)중대, 9개의 독일중대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네덜란드중대는 17개에 불과했습니다. 네덜란드는 육,해군을 통틀어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보다
수가 더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봉급이 규칙적으로 지불됩니다.
스페인의 상황을 보면, 네덜란드가 독립을 선언하기도 전인1557년에 파산을 선언할 정도로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경상수입의 65%가 정부공채의 이자상환에 사용되고 있었고, 경제적인 낙후성으로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립니다.
1640년이 되면 스페인의 항구에 들어오는 상품의 75%가 네덜란드 선박에 실려 올 정도로 의존성이 심각해집니다.
반대로, 네덜란드는 적대국에게 물품을 공급해주면서까지 이익을 구하는 탁월한 상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네덜란드가 유럽의 해운, 외환, 무역 중심지로 발전해가면서 암스테르담의 역할도 커집니다. 금융거래나 제도는
베네치아나 제노바와 같은 기존의 방식과 다른점이 없었지만 네덜란드의 무역규모를 반영하여 고도의 확실성을
가지고 대규모로 투자가 시행됩니다. 이런 이유로 네덜란드 정부는 언제나 공채자금을 동원할수 있었고, 대부분의
라이벌 국가들 보다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됩니다. 또한 국가 부채는 신속하게 상환하였기 때문에 이자율이 고정되어
유럽에서 가장 싼 비용으로 자금을 차입할수 있게 됩니다.
여담으로 말하자면 네덜란드의 상인정신은 지금까지도 주변 국가들과 차이를 보여줍니다. 프랑스나 영국 국민들은
모국어를 애용하고 외국어를 잘 배우지 않는 반면에, 네덜란드 국민들은 외국어를 익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2~3개
외국어를 익힌 사람도 쉽게 볼수있다고 합니다. 또한 네덜란드 축구 1부리그 에레디비지에는 적자구단이 거의 없습니다.
주변 빅리그들이 적자에 허덕이며 운영하는것과 비교해보면 네덜란드국민의 정체성을 쉽게 알아볼수 있는 부분으로
보여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