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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빌드를 깎는 노인

바이서파자
댓글: 3 개
조회: 386
2026-10-06 11:03:02

디아블로4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남들이 좋다는 빌드를 찾아다녔다.

유튜브를 켜면 무슨 빌드가 몇 천억을 찍었다고 했다.
커뮤니티에 들어가면 또 다른 빌드가 최고라고 했다.

"이거 하세요. 지금 이게 1티어입니다."

나도 따라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히 똑같이 맞췄는데 남들처럼 강하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나는 이상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마을 한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장비며 위상이며 보석이며 스킬창이며 온갖 것이 널려 있었다.

그런데 노인은 사냥을 하지 않았다.

그저 빌드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할아버지, 뭐 하세요?"

노인이 대답했다.

"빌드 깎네."

"빌드를요?"

"그렇지."

나는 웃었다.

"그냥 좋은 빌드 하나 찾아서 따라 하시면 되잖아요."

노인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퉁명스레 말했다.

"남이 깎은 빌드는 남의 손에 맞는 것이지"

그리고 다시 숫자를 들여다보았다.

나는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며칠 뒤 다시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노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이번에는 장비 하나를 빼놓고 있었다.

"그건 왜 빼셨어요?"

"이거 빼면 공격력은 좀 떨어져"

"그럼 왜 빼요?"

"대신 자원이 안 마르거든."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도 공격력이 높은 게 좋은 거 아닌가요?"

노인이 말했다.

"죽으면 공격력도 소용없지."

참 별난 노인이었다.

며칠 후 또 만났다.

이번에는 스킬 하나를 바꾸고 있었다.

"그 스킬이 더 좋은가요?"

"몰라."

"그럼 왜 바꾸세요?"

"써봐야 알지."

노인은 지하 던전으로 들어갔다.

나는 뒤에서 따라갔다.

첫 번째 방에서 겨우 몹을 잡았다.

두 번째 방에서 노인이 죽었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 제가 말했잖아요. 그냥 메타 빌드 쓰시면 되는데."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을로 돌아와 다시 장비를 만졌다.

위상 하나를 바꾸고,

스킬 하나를 바꾸고,

정복자 보드에서 노드 몇 개를 빼고,

또 몇 개를 넣었다.

그리고 다시 들어갔다.

이번에는 죽지 않았다.

조금 더 빨랐다.

다음날에는 더 빨랐다.

그 다음날에는 내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할아버지, 이제 완성된 거예요?"

노인이 말했다.

"아직 멀었어."

"뭐가 부족한데요?"

"완벽한 빌드라는건 존재하지 않아."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나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았다.

노인이 깎고 있는 것은 빌드만이 아니었다.

자기가 만든 빌드가 어디에서 강하고,

어디에서 약하며,

어떤 상황에서 무너지고,

어떤 순간에 가장 강해지는지를

하나씩 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남들은 숫자를 보고 빌드를 고른다.

노인은 숫자를 직접 만들어 보고 있었다.

남들은 "이게 최고"라는 말을 믿었다.

노인은 "왜 최고인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어느 날 노인이 내게 물었다.

"자네는 왜 디아블로를 하나?"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재미있어서라고 하기에는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고,

강해지고 싶어서라고 하기에는 이미 충분히 강했다.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빌드 깎는 재미로 해."

그리고 다시 빌드를 만졌다.

스킬 하나를 바꾸고,

위상 하나를 바꾸고,

장비를 담금질하고 명품화 했다,

던전에 들어갔다가 나오고,

또 고쳤다.

나는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물었다.

"할아버지, 언제까지 깎으실 거예요?"

노인이 대답했다.

"죽을 때까지 깎아야지."

"그렇게까지요?"

노인이 천천히 말했다.

"빌드는 원래 완성되는 게 아니야."

"왜요?"

"오늘 강한 빌드가 내일 약해질 수도 있고,
오늘 약한 빌드가 내일은 세상을 뒤집을 수도 있거든."

그러고는 다시 마우스를 잡았다.

그날 이후 나는 그 노인을 다시 보지 못했다.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고, 사람들은 또 새로운 빌드를 찾아다녔다.

나도 그들 틈에서 빌드를 찾아다녔다.

그러다 문득, 마을 한구석에 앉아 있던 노인이 생각났다.

그 노인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빌드를 깎고 있을 것 같다.

누군가 묻겠지.

"할아버지, 아직도 깎고 계세요?"

노인은 예전처럼 대답할 것이다.

"응."

"언제까지요?"

노인은 빌드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말할 것이다.

"마음에 들 때까지."


가끔, 그 노인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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