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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Endless Waltz] Ep. 1 - 용암의 놀. 2

그락란라우
조회: 697
2012-09-10 20:33:33
  


  수정하기 전에 46kb였는데 하고 나니까 56으로 증가함.




  ?

  어쨌든, 네. 그래요.


  댓글 달라는 구차한 말은 하지 않겠소이다.

  이런 말 했다가 심하게 까인 적이 있어서.

  

  뭐, 내가 못쓰긴 하잖아. 

  아, 글고 미리 말해두지만 다음 건 118kb 입니다. 















 “신참, 정신 차려.”
  마렉은 경직되어 보이는 신참의 어깨를 툭 건들었다. 그러자 그 신참은 조용히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신참과 마렉은 베테랑 레이먼트 헬름을 쓰고 있었다. 용병단에서 지급하는 장비 중 하나인 그 헬름은 사람의 얼굴을 훌륭하게 감춰주는 감투의 역할을 했다. 마렉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리고 앞으로 몇 발자국 걸어갔다. 마렉의 등을 바라보던 신참은 시선을 뒤로 옮겼다. 칼브람 용병단 소속의 용병들이 발리스타를 전진배치 시키며 발리스타용 투창을 하나씩 옮겨오고 있었다. 그들의 손놀림은 빠르고 정확했다. 아주 간결한 손놀림으로 그들은 최대의 효과를 발했다. 
  백여 명의 용병들이 총 12대의 발리스타를 손보기 시작했다. 
  신참은 시선을 다시 종탑으로 옮겼다. 거대한 거미가 종탑을 오르고 있었다.
  “좋아. 몰아넣었어.”
  아이단의 눈에서 평소에는 느낄 수 없던 살의가 풍겨져 나왔다. 그는 주먹을 뿌드득 소리가 나도록 움켜쥐었다. 그리고 손을 들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볼 수 없었지만, 그 옆에 서있던 마렉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철제 건틀릿의 철판이 찌그러져 있는 것을 말이다. 아이단이 외쳤다. 
  “발리스타 전진하라!”
  그의 외침과 동시에 몇 대의 발리스타가 앞으로 전진을 시작했다. 그들은 노련한 손놀림으로 발리스타를 움직였다.
  거대한 거미는 빠른 속도로 종탑을 기어 올라갔다. 그 거미는 덩치가 너무나 거대했다. 일반적으로 집에서 볼 수 있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거미의 크기가 1이라 한다면, 지금 종탑을 오르고 있는 거대한 거미는 그 크기가 수천만 배에 달했다. 
  거대한 덩치의 거미가 다리를 낡은 종탑으로 쑤셔 넣을 때마다 종탑은 기괴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종탑은 사방으로 자신의 몸을 이루고 있던 바위만한 석재들을 흩뿌렸다. 지금 저런 곤욕을 치르고 있는 종탑의 주위에 아무도 없었기에 망정이지 누구라도 그 근처에 있었다간 무너져 내리는 거대한 돌덩이에 압사 당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거미가 종탑의 허리를 휘감기 시작했을 때 마렉이 외쳤다. 
  “종탑으로 올라갑니다!”
  아이단은 살의 가득한 눈으로 거미를 한 번 쏘아보고는 뒤를 한 번 째려보며 말했다. 
  “어서 장전해라.”
  그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발리스타를 장전하던 용병들은 자신의 목 바로 앞에 날 선 칼날이 놓여있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 기분은 그들의 대장을 쳐다보았을 때 극에 달했다. 아이단의 눈동자는 증오에 이글거리고 있었다. 
  아이단의 명령에 마렉은 당황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대장님, 지금 쏘면 종탑이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마렉은 마을의 무녀를 위해서도 지금 쏘는 것은 자제해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저 거대 거미가 죽게 된다면 가장 슬퍼할 것은 그녀였으니까. 하지만 아이단은 그의 애원을 무시해버렸다. 지금 그에겐 어떤 말도 다가오지 못했다.
  “상관없다.”
  너무도 서슬 퍼런 목소리에 마렉은 움찔했다. 그리고 마렉이 아이단의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는 아이단의 눈 속에서 거대한 증오의 응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너무나 거대해서 마렉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그 증오는 긁어내 부스럼을 만들 수조차 없었다. 맨손으로 다이아몬드를 긁어 그것의 부스럼을 얻어 내려는 것과 다르지 않은 행위를, 마렉은 할 수 없었다. 너무도 무의미한 짓이었다. 그리고 그 행위를 아이단이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지만은 않을 듯했다.
  용병들이 발리스타를 장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기계와 같았고 발리스타의 투창이 장전되기 까지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발리스타의 장전이 끝나자 아이단은 팔짱을 풀고 난폭하게 변한 눈으로 거대 거미를 노려보았다. 아이단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발사 준비.”
  아이단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메말라 있었다. 그의 손은 들어 올릴 때와 마찬가지로 매우 가벼웠다.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식은 죽을 떠먹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손이 아래를 향하려던 순간 그의 눈에는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단은 그 모습에 잠시 당황했고 아직도 자신의 팔이 아래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가 정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그 여인은 거의 구르다시피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와 그들의 앞에 서며 외쳤다.
  “잠깐만요!”
  “멈춰라, 어서 멈춰!”
  아이단은 아래를 향하던 팔을 간신히 붙들어 잡고 황급히 대원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그 소녀의 등장에 발리스타를 장전하던 대원들 또한 당황을 금치 못했다. 발리스타의 사수들은 발리스타의 발사대에서 두 손을 조심스럽게 내렸다. 마렉이 크게 고함쳤다.
  “사격 중지!”
  마렉은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는 재빨리 두 팔을 머리위로 들어 올려 그것을 좌우로 거칠게 흔들었다.
  여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발리스타에 손을 가져다 댄 자는 없었다. 마렉이 다급하게 외쳤다. 
  “무녀님, 위험합니다. 비키세요!”
  마렉의 목소리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떨림은 아주 작은 것이어서 마렉과 가까이 있던 아이단을 제외하곤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마렉의 눈과 여인의 눈이 마주쳤다. ‘제발 바보 같은 짓 하지 마. 티이!’ 여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의 작은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아이단이 격노했다.
  “티이, 이게 무슨 짓이냐!”
  그의 목소리는 천둥 같은 파괴력을 가지고 용병들과 여인의 귀를 강타했다. 아이단의 목소리에 티이는 순간적으로 균형 감각을 잃고 쓰러졌다. 마렉 또한 귀를 틀어막으며 비틀거렸다. 멀리 있던 용병들은 그나마 나았다. 그들은 순간적으로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정도로 그쳤다. 티이는 가까스로 자신을 추스른 후에 아이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단 아저씨, 잠시만 시간을 주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저 아인 원래 저렇게 난폭하지 않아요. 제가 얘길 해 볼게요.”
  그러나 아이단은 여전히 메마르고 서슬 퍼런 목소리로 말했다.
  “마을 사람들의 목숨이 위험하다.”
  그의 눈은 마땅히 쳐 죽여야 할 괴물을 바라보는 눈으로 변해 있었다. 그가 날카롭게 날이 선 듯한 눈매로 거대 거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건 더 이상 마을의 수호신이 아니야.”
  그의 눈에 종탑을 오르고 있는 거대한 거미는, 무녀의 수호신도 뭣도 아니었다. 그저 덩치 큰 반드시 죽여야 마땅할 마족일 뿐. 그의 눈이 난폭하게 변하며 티이를 향해 시선을 쏟아부었다. 티이는 그 기세에 눌려 움찔했지만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아이단이 말을 이었다. 
  “괴물일 뿐이다. 그만 물러서.”
  아이단의 목소리는 강압적이었다. 평소의 그에게선 찾아 볼 수 없던 낯설음에 그녀는 눈에 띄게 당황해 했다.
  “하지만, …….”
  티이는 아이단을 바라보았다. 아이단은 소녀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마음속에 키우고 있던 한 마리의 괴물이 점차 조용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단은 약간의 뜸을 들인 후에 입을 열었다. 
  “이번엔 우리에게 맡겨라.”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메말라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제외하면 평소의 그와 별 다름을 느낄 수 없었다. 
  “다시 장전해라!”
  대신 알 수 없는 살의만이 자리 잡고 있었을 뿐이었다.










  *











  한 사내는 시끄러운 소동이 일어나고 있는 종탑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미처 조취를 취하기도 전에 저 거대거미는 날뛰기 시작했다. 베려고 마음먹었다면 소동이 일어날 근원을 뿌리 채 뽑아버릴 수도 있었으나 사내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지 못 했다는 것이 더 알맞은 표현일 것이다.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려던 차에 한숨 잠을 자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거미가 날뛰면 얼마나 날뛴다고 얕봤던 것이 문제였다.
  ‘젠장, 네베레스가 돌아오면 한소리 하겠군.’
  사내는 시선을 거미에게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 거대거미는 종탑을 오르고 있다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그곳에 시선을 두는 것에는 의미가 없다고 느꼈다. 시선이 살짝 돌아간 순간 그의 눈에 묘한 것이 들어왔다. 남자는 눈에 힘을 주었다. 원래부터 눈이 좋은 편이 아니었건만 저 멀리 있는 사람인지 뭣인지를 판단하기에는 힘을 줄 수밖에 없었다.
  “저건…….”
  흰색 로브가 스르르 움직였다.










  *










  티이는 재장전 하는 발리스타를 막아서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에 용병들은 또 다시 주춤했고, 답답해진 마렉이 그녀를 향하여 말했다.
  “무녀님, 시간이 없어요!”
  티이는 당당하게, 그리고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마렉을 향해 말했다. 
  “마렉, 저를 못 믿나요?”
  마렉은 입을 다물었다.
  “제가 저기로 올라가겠어요. 저 아이는 두려워해요. 무서워하고 있다구요!”
  소녀는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아이단과 마렉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저한텐 그 목소리가 들려요.”
  무녀. 여신의 무녀.
  아이단과 마렉은 고개를 살짝 아래로 기울였다. 그것은 다른 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아이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손 들었다는 심정이었다. 그가 말했다.
  “후……. 알았다. 대신 내가 함께 가마.”
  아이단은 곧바로 마렉에게 지시를 내렸다.
  “마렉, 중대원들과 함께 나를 따라라.”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장님을 따라라!”
  마렉은 바로 몇몇 중대원을 골라냈다. 그들을 골라내는 도중 마렉은 신참을 보았다. ‘어제 들어온 신참인가…….’ 그 신참의 키는 남자로 치자면 작은 축에 속했는데, 여자로 본다면 결코 작은 키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상적인 키였다. 그의 키는 딱 봐도 175센티미터는 넘어 보였다. 신고 있는 신발의 굽을 빼더라도 170센티미터가 넘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어제 들어온 신참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이 없다. 여관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티이는 보지 못했다고 한다. 에른와스는 알고 있을 듯하나 지금 물어볼 수는 없다. 일단 마렉이 그 신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검술이 뛰어나다는 것뿐이다. 그 신참의 모습을 본 것도 극소수였다. 원래는 다수가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나 때마침 브린이 리엘에게 집어던진 불덩어리 때문에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집중되었고 그때 그 신참은 레이먼트 헬름을 썼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직접적으로 그의 얼굴을 본 자는 아이단과 극소수의 단원들뿐이었다. 마렉은 그들에게 신참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참의 모습에 대해 설명하기를 꺼렸다. 성별조차 알려주지 않았는데 별 수 있나? 중대장의 권한을 이용해 협박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황당하게도 그녀의 모습을 본 건 아이단 대장과 마렉과 같은 직급에 위치해있는 자들뿐이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직급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마렉은 하대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이 마렉에게 하대를 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들 모두가 마렉의 스승이며 형이자 누나들이며 인생의 선배인데. 
  중대원들을 고르는 동안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자신을 제외한 중대장 급의 실력자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지금 종탑을 올라가는 거미 정도는 가뿐히 생선회를 뜨는 것 마냥 썰어버릴 수 있었을 터였다. 물론 가볍게 제압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 실력자는 모두 놀러나가고 없다. 마렉 자신이 있긴 하지만, 저 거미를 죽이지 않고 생포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물며 저렇게 미쳐 날뛰고 있는 놈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마렉은 소대장조차 보이지 않는 용병단의 구성에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 거미가 제대로 날을 잡았다. 중대장도, 소대장도 놀러 나가거나 일을 나가 없는 틈을 타 미쳐버린 것이다. 심지어 특수용병도 다 자신의 일로 바빠 마을에 없는 상황. 일반 용병들 틈에서 그나마 뛰어난 자들을 추려내는 일은 꽤 어려운 작업이었다.
  131명. 그 중 마렉의 12중대 소속 중대원은 딱 5명. 2소대의 소대장인 케아라가 있긴 하지만, 그녀는 전투능력이 높기 때문에 소대장 직에 오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나머지 4명은 일반 용병. 허나 일반 용병이라고는 해도 인위의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자들이다. 여하튼 5명을 제외한 나머지 병사들은 각각, 1중대 소속 17명, 5중대 소속 20명, 6중대 소속 8명, 7중대 소속 2명, 9중대 소속 32명, 10중대 소속 27명, 11중대 5명, 14중대 15명이 병력의 전부였다. 이들 모두 마렉의 휘하 부대가 아니다. 그러니 각자의 역량을 알아낼 방법이 딱히 없는 것이다. 
  한참 고민하던 마렉은 결국 한눈에 보기에도 기백이 느껴지는 병사들을 간추렸다. 아이단과 자신을 포함한 총 7명. 거기에 티이까지 합하면 8명이다. 많이 갈 필요도 없었다. 마렉은 병사들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던 신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가자.”
  병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종탑이 눈앞까지 다가왔을 때 신참의 걷는 자세로 마렉은 그가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자와 여자의 골격의 차이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기본적으로 걷는 자세에 차이가 있다. 마렉은 헬름 아래에서 눈살을 찌푸렸다. 
  ‘한마디도 안 해주냐. 이 더러운 자식들!’
  마렉은 돌아가면 그놈들을 얼차려를 시켜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내 하하 웃고선 천천히 종탑을 향해 걸었다. 당연히 그랬다간 자신이 얼차려를 당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같은 직급이건만 상관 모독죄와 젊은이가 자신보다 나이도 많은 사람을 하대했다는 이유로 헬름을 벗겨버릴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렉은 두려움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들 한다고 하면 하는 사람들이니……. 
  거대거미는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불길했다. 종탑의 내부에는 뭔가가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제와서 멈춰야할 마땅한 이유도 없었다. 
  아이단의 지시에 따라 병사들은 티이를 호위하는 자세로 종탑을 향했다. 










  *





 




  종탑에는 낡은 문이 하나 있었다. 그 문은 너무 오래되고 낡아서 살짝 건들기만 해도 앞이나 뒤로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재질이 나무이기 때문에 녹이 슬지는 않는다. 하지만 썩고 문드러지며 벌레가 가끔이지만 문을 갉아먹기도 한다. 그 벌레들은 거의 문을 몇 번 갉아먹다 보면 맛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만 두긴 하지만 그것을 깨닫기 전에는 열심히 갉아먹는다. 무슨 맛인지 한 번 물어볼 수 있다면 물어봐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선택지일 것이다.
  아이단은 낡은 문을 발로 걷어찼다. 문은 아이단의 모든 체중이 실린 다리를 막아내지 못했다. 문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가 떨어졌다. 그는 가장 먼저 종탑의 내부로 들어와 사방을 한번 훑어보았다.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뒤를 바라보며 손짓했다. 아이단의 손짓에 이끌려 무녀를 제외하고 여섯 명의 병사들이 종탑의 내부로 들어왔다.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자 아이단은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전진하기 시작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모퉁이를 돌게 되었을 때 아이단은 모닥불을 피웠던 흔적을 발견했다. 모닥불은 주인 없이 꽤 오랫동안 홀로 타고 있었던 듯했다. 
  무릎을 구부리고 모닥불의 잔해를 뒤적이던 아이단은 타버리지 않고 남아있던 종이 쪼가리를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는 그 타지 않고 남아있는 종이쪼가리를 뒤로 돌려보았다. 그 종이에는 ‘네베…….’ 라고 적혀있었다. 아이단은 의아해하며 종이쪼가리를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아이단은 똑바로 섰다. 그 뒤 그는 헬름의 앞을 열어젖혔다. 철컹 소리와 함께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얼굴에는 짙은 수심이 가득했고, 그의 눈동자는 맹수의 그것을 보듯 난폭했다. 아이단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를 따라 다섯 명의 병사들과 무녀 또한 걸음을 옮겼다. 
  두 번째 모퉁이를 돌게 되었을 때 선두에 서 있던 아이단의 눈에 기묘한 물건이 들어왔다.
  “잠깐! 모두 정지.”
  아이단은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그는 자신이 보았던 것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아래로 내렸고 곧 자신이 보았던 것을 찾아 낼 수 있었다. 그것은 작은 해골 장식이었다. 사람의 두개골 모양은 아니었다. 예를 들자면 개의 머리뼈와 비슷했다. 아이단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마족의 징표…….”
  그의 눈이 다시 살의를 띄었고 개의 머리뼈에 새겨져있는 마족의 징표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지 않고 있던 찰나 그의 머릿속에 문득 묘한 생각이 들었다. 이 개의 머리뼈 같은 장식물은 아마도 놀 종족의 것일 것이다. 놀 종족은 마족이 아니다. 그런데 마족의 징표가 찍혀있다?
  “여기에 왜 이런 것이…….”
  생각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뒤편에서 무녀가 비명을 질렀다. 아이단은 황급히 그녀를 뒤돌아보았다. 아이단은 그녀의 모습이 기묘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집게손가락을 펴 앞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이질감은 무어라 말하기 힘든 것이었고 아이단의 시선이 그녀의 집게손가락을 따라 앞으로 옮겨졌을 때 그 이질감은 참으로 부정하기 힘든 현실이 되어 있었다. 그는 순간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내가 이렇게 둔했던가?’
  몸이 굳은 시간은 1초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동안 열 개가 넘는 화살이 그의 몸에 틀어박혔다. 살갗을 뚫고 근육을 찢으며 뼈를 부수는 그 고통에 아이단은 잠시 동안 멍하니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또 다시 여덟 개가 넘는 화살이 그가 두르고 있는 철판 위에 틀어박혔을 때 그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매복이 있다! 전원 전투태세!”
  마렉은 아이단의 몸에 틀어박히는 스무 개 가량의 화살을 똑똑히 보았다. 그가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서도 반응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매복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며, 그의 대장이 몸에 박힌 화살을 보며 멍하니 그것들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화살들을 보며 왜 저것들이 대장님의 몸을 뚫고 들어가 있을까란 생각을 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아이단은 고꾸라진 뒤였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마렉이 외쳤을 때는 이미 늦었었다. 
  마렉의 눈에 보인 것은 아이단을 포함한 여섯 명의 칼브람 용병들이 화살에 맞아 바닥을 피로 적시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이단과 달리 병사들의 반응은 재빨랐다. 화살에 맞긴 했어도 급소는 피했다. 
  그가 뒤를 돌아보았던 지극히 짧은 시간, 네 발의 화살이 그에게 날아들었다. 마렉은 두 눈을 번뜩이며 그 네 발의 화살을 모조리 방패로 밀쳐냈다. 화살 한 발 한 발이 그의 방패와 부딪힌 그 순간 마렉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위력은……, 놀(gnoll)이군.’
  숨을 돌리기도 전에 다시 여러 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그는 날아오는 화살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방패를 집어던져 세 발의 화살을 떨어뜨리고 허리춤에서 칼브람 용병단에서 지급하는 롱소드를 뽑아 눈앞으로 집어 던졌다. 롱소드는 정확하게 포인트를 번뜩이며 날아가 화살을 날린 ‘놀’ 한 마리의 목구멍에 틀어박혔다. 피하려는 자세를 취했지만 마렉이 던진 칼이 놀의 움직임을 뛰어넘는 속도로 날아갔다. 피가 뿜어져 나왔다. 
  마렉은 한 번 집어 던진 칼은 필요 없다는 듯 거들떠보지도 않고 등에 메고 있던 롱해머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있는 힘껏 휘둘러 다가오던 두 마리의 놀의 머리통을 부숴놓았다. 다가오던 두 마리의 놀은 재빨리 몸을 뒤로 눕히며 마렉의 공격을 피하려 했다. 허나 마렉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두개골이 깨지고 뇌수가 튀어나오는 상황을 눈으로 보는 것도 잠시 마렉의 몸은 제각기 의지를 가지고 있는 듯이 움직였다. 왼쪽 발이 앞으로 나가며 철퇴를 휘두르던 놀의 복부를 걷어찼고 그와 동시에 롱해머를 쥔 왼손을 휘둘러 활의 시위를 당기려던 놀의 팔뼈를 박살냈다. 자유로워진 오른손은 건틀릿 속에서 튀어나온 비수를 검을 들고 휘두르려는 놀의 미간에 정확하게 박아 넣어 주었다. 하삼에게 배웠던 기술은 어디에서나 쓸모가 있었다. 마렉은 그대로 몸의 각 부위를 회수한 후 롱해머를 있는 힘껏 집어던졌다. 그의 해머는 날아가 몸을 숨기고 있던 놀 한 마리의 가슴을 찌그러뜨려 놓았다. 동시에 몸을 붕 띄우고 팔뼈를 부러뜨렸던 놀의 머리를 발등으로 걷어찼다. 으르렁거리며 자신의 팔을 부러뜨린 마렉에게 복수하기 위해 달려들던 놀은 이빨이 다 깨져나가며 두개골에 큼지막한 구멍이 뚫리게 되었다. 
  눈앞의 위협을 대강 처리한 마렉은 날아오는 화살을 가볍게 몸을 틀어 피한 뒤 허리춤의 벨트에서 6개의 단검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날렸다.
  신기(神技)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세 개의 단검은 일직선으로 회전 없이 아주 빠르게 날아갔고 다른 세 개의 단검은 적당한 회전을 하며 뛰쳐나오려던 놀과 숨어있던 놀의 머리와 심장에 파고들었다. 이것으로 대충 정리가 끝났다 생각한 마렉은 자신이 가장 다루기 편하다고 생각되는 무기를 두 다리의 각반 속에서 꺼내들었다. 그가 각반 속에서 꺼내든 것은 길이 30센티미터의 단검 두 자루였다. 20센티미터 길이의 칼날과 10센티미터 길이의 손잡이로 이루어져있는, 가드와 폼멜이 없는 형태의 단검이었다. 그는 그 두 자루의 단검을 꽉 움켜쥐고는 아이단이 쓰러져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그때 즈음 용병들은 자신의 몸 곳곳에 박힌 화살을 뽑아내고 있었다. 
  쓰러져있는 아이단과 병사들로부터의 거리가 약 세 걸음 즈음 남았을 때, 마렉은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아이단 대장과 무녀를 데리고 당장 철수하자는 내용이었다. 용병들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을 때, 마렉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거의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적의를 가진 대상을 탐지하는 능력에 있어서는 칼브람 용병단 전체를 통틀어 세 번째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마렉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돌아보는 동시에 두 단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무엇인진 모르지만 거대한 충격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기에 가능한 동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날 하나의 폭이 2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양날 도끼가 그의 두 자루의 단검 위에 포개어지며 거대한 충격을 만들어냈다.
  다리가 휘청거렸고 얼굴에 있는 모든 구멍에서 피가 쏟아졌다. 힘의 차이가 너무나 명백했다. 마렉은 단검과 자신의 육체 주위에 두르고 있던 마나를 모두 회수했다. 방금 전까지 처리했던 놀 병사와는 격이 다른 힘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가 가진 모든 능력을 동원해야만 했다.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힘을 내며 도끼를 밀어내는 마렉의 모습에 도끼의 주인은 흥미롭다는 듯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마렉의 모든 힘을 쥐어짜낸 발악을 우습다는 듯이 더 큰 힘으로 찍어 눌렀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도끼가 짓누르는 힘이 얼마나 거대하던지 마렉의 폐는 충격파로 인해 찌그러져있었다. 폐는 도저히 공기를 받아들일 상황이 아니었다. 
  도끼는 마렉의 힘이 완전하게 고갈된 후에야 그를 좀 더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도끼가 그의 단검에 가하던 강력하고 거대한 힘은, 축 처진 마렉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힘을 회수했다. 낮은 으르렁거림이 종탑 내부에 울려 퍼졌다. 
  ‘중압!’
  무식하리만치 강력한 중압이 종탑 내부를 찍어 눌렀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자들은 모두 기세에 눌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렉은 모든 물체가 여러 개로 보이는 상황에서 사람의 형상을 가진 것들을 발견했다. 그는 ‘저게 뭐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후 사람의 형상을 가진 것들은 검고 거대한 도끼에 닿더니 사라져버렸다.
  물체가 여러 개로 보이던 마렉의 눈이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되었다. 그나마 몸 안에 남아 있던 마나를 쥐어짜내 시력을 회복한 것이다. 죽기 전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는 확인해야 한다. 
  무자비할 정도로 휘둘러지던 전체 폭 4미터를 넘는 크기의 도끼는 새하얀 얼음에 막혀 금발의 무녀와 용병 하나의 목을 잘라놓지 못했다. 마렉은 얼음의 방패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신참과 티이의 모습을 보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 뒤 마렉은 졸도했다. 
  검은 도끼를 휘두르던 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방이 자신의 공격을 완벽하고 깔끔하게 막은 것에 대한 만족감인 듯했다. 한쪽 폭만 2미터를 넘는, 전체 폭 4미터를 넘는 도끼는 허공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그리고 그 도끼가 도는 것을 멈췄을 때, 도끼날 아래에서 칠흑같이 어두운 털을 가진 놀의 얼굴이 나타났다. 
  “크르르…….”
  검은 털의 놀은 기쁨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을 얼굴위로 띄워 올리며 새하얀 얼음 방패 뒤에 숨어 있는 두 여자로부터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런 검은 털을 가진 놀의 곁으로 회색 털을 가진 놀이 걸어 나왔다. 
  검은 털의 놀과 회색 털의 놀은 나란히 섰다. 그들은 덩치가 엄청났다. 키만 해도 2미터를 넘었고 벌어진 어깨는 성인 남자 세 명의 어깨 길이를 합쳐놓은 것과 같았다. 
  회색 털의 놀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리고 그 순간 그 놀은 정말 번개 같은 속도로 뛰쳐나갔다. 검은 털의 놀은 못 말리겠다는 투로 가슴팍을 벅벅 소리가 나도록 긁었다.
  회색 털의 놀은 투명한 얼음의 방패가 사라지자마자 무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놀 종족의 특성답게 약자에겐 관심이 없었다. 그의 목표는 얼음을 이용해 방패를 만들고, 검은 털의 놀의 공격을 막아냈던 용병이 무녀를 지키기 위해 더 힘을 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무녀를 향해 돌진한 것이다. 성인 남성 크기를 자랑하는 검과 메이스가 놀의 손으로부터 뛰쳐나왔다. 
  티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검과 메이스는 수차례 티이의 머리 위로 떨어졌고 그때마다 천둥이 직접적으로 세상을 갉아먹는 소리가 들렸다. 티이는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기 때문에 그나마 안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격을 받는 그는 그렇지 않았다.
  회색 털의 놀의 공격을 수차례 받자 몸의 피로 또한 피로지만, 부딪칠 때마다 들리는 귀를 찢는 천둥 같은 소리 때문에 그는 주저앉았다. 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눈앞에 뿌옇게 흐려졌고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가 한동안 일어나지 않자 회색 털의 놀은 그 거대한 신장을 구부려 그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 놀의 뒤에서 검은 털의 놀이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인간, 힘든가?”
  그 놀의 말은 완벽한 인간의 말이었다. 티이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귀가 들리지 않아 그의 말을 듣지 못했던 용병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땅바닥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과. 인간, 기백……?”
  회색 털의 놀은 뒤를 돌아보며 놀어(語)로 말했다.
  “야, 벨. 고의가 아니라 그, 뭐지? 어쨌든 미안하다고 해줘. 나도 모르게 덤볐다고.”
  검은 털의 놀은 땅에 구멍을 낼 것 같은 기세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회색 털의 놀은 하하 웃었다. 
  “저 멍청이가 미안하다고 말해달라는군.”
  검은 털의 놀은 회색 털의 놀을 바라보며 무어라 놀어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회색 털의 놀은 발끈 화를 내며 무기를 치켜들었다.
  “야, 나 때문이란 거냐?”
  “그럼. 네놈이 내려가 보자고 해서 내려온 거다. 조용히 죽은 척 한다는 계획이 틀어져버렸으니 어떻게 책임 질 생각이냐.”
  “야야, 어차피 이딴 짓 한다고 싱글이 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단 거 알잖아. 거기다 놀 수장 두 놈이 웬 인간 한 명한테 푹찍 쓱싹 당했다는 걸 믿을 거 같냐? 걔들이?” “흐음…….” “자아. 내가 그래서 그랬잖아. 이런 귀찮은 방법 쓰지 말고 첨부터 걍 정면으로 붙자고.”
  “딤이나 렘이 가만히 있을 것 같나? 셋과 둘은 아무리 봐도 전력으론 비교조차 안 된다. 그리고 하나는 성역의 필두다. 난 그와 결판을 내고 싶다는 거다.”
  “누가 뭐래? 진짜 혼자 복날 개 패듯이 깨져놓곤 말이 많네.”
  “그건 어릴 때 이야기지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 거기다 너도 어릴 땐 엄청 깨졌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건 과거의 일일 뿐이오!”
  “나도 마찬가지거든?”
  검은 털의 놀과 회색 털의 놀은 서로 티격태격 말로 싸우기 시작했다. 한참 후에야 그들은 티이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뭔가, 인간.”
  검은 털의 놀이 말했다. 그의 눈은 흑색의 안광을 내뿜고 있었다. 티이는 뒤로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물었다.
  “다, 당신들은…… 누구, 신가요?”
  회색 털의 놀이 인간의 언어로 말했다.
  “호김, 나, 모르지 아니하다? 알려 못 줘.”
  “……말 하질 마라. 알려 못 줘가 대체 무슨 말이냐? 제때 인간들 말 배워놨으면 이런 일 없잖나? 도대체 어릴 때 뭘 배운 거냐? 네놈 머리통엔 뇌수가 들어갈 자리에 곰팡이가 가득 끼어 있는 것 같구나. 이 멍청한 똥강아지야.”
  “뭐? 죽다, 너!”
  “어눌한 인간 어 쓰지 말고 덤벼라 멍청아.”
  “이, 개[犬]새끼가!”
  “너 마족어는 할 줄 아냐?” 
  “야!”
  “모르지? 그럴 줄 알았어. 따라해 봐. Meutsiakepeo Kateureun Betut.”
  “……뭔 말인데?”
  “믓시아케페오 카트른 베툿. 개병신 또라이 새끼.”
  “이 새끼가?
  두 놀은 서로를 향해 주먹다짐을 하기 시작했다. 주먹이 서로의 얼굴을 향해 호를 그리고 날아가 부딪친 순간 충격파가 종탑을 뒤흔들었다. 놀들이 서로를 죽이기 위해(그들 기준으로는 가볍게 노는 수준이었지만, 티이의 눈에는 죽이기 위한 것처럼 보였다.) 싸우고 있을 즈음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부여잡고 쓰러졌던 용병이 몸을 일으켰다. 검은 털의 놀이 휘두른 주먹에 맞아 송곳니가 하나 부러진 회색 털의 놀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는 유창한 놀어로 말했다.
  “내가한다 벨.”
  “빨리 끝내.”










  *










  회색 털의 놀의 공격은 집요했고 한 번 한 번의 공격이 모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형태였다. 두 손에 나눠 쥔 검과 메이스는 그의 의지에 따라 혹은 그의 두 팔의 의지에 따라 움직였다. 
  움직임에 군더더기는 없었으며 단 한 번도 끊이지 않고 연속적인 공격을 펼치는 그 회색 털의 놀의 모습은 무기를 다룰 줄 모르는 티이의 눈에도 매우 아름답다고 비춰졌다. 이런 회색 털을 가진 놀의 공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는 용병의 모습 또한 춤을 추는 듯했고 놀이 휘두르는 두 무기의 향연보다 더욱 더 아름다웠다. 그저 피하기만 할 뿐인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티이는 알지 못했다. 
  회색 털의 놀의 검과 용병의 검이 수차례 일방적으로 섞이게 되었을 때의 충격파는 엄청났다. 귀 바로 옆에서 천둥이 울리는 듯했기 때문에 티이와 용병은 정상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짧지 않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놀의 공격은 예리했다. 절대 필요 없는 공격은 하지 않았고 피하지 못하거나 막지 못하면 치명상을 넘어 바로 죽음까지 직결되는 매서운 공격이었다. 그는 같은 놀이 보기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놀이 아닌 용병이 보기에는 짜증이 솟아 터지기 일보 직전의 얼굴로 보였다. 그는 두 눈을 감았다. 눈이 감기는 것을 볼 수 있었던 자는 검은 털의 놀 뿐이었다. 회색 털의 놀은 신나게 웃으며 지금 상황을 만끽하고 있었다. 
  ‘꽤 단단한 검이로군.’ 
  검은 털의 놀은 자신의 털을 만지작거렸다. 복슬복슬 한 것이 어릴 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잠을 잘 때나 날이 추울 때는 확실히 편하지만, 비가 올 때나 습기가 많이 찬 날 같은 경우는 매우 역겹게 느껴지는 털이기도 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저 회색 털의 놀이 부러워진다. 그의 털은 매우 뻣뻣했다. 습기에도 축축해지지 않고 비를 맞아도 젖지 않는 그의 털은 같이 알고 지내온 나날 동안 부럽지 아니한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졸렸다. 검은 털의 놀은 하품을 했다.
  회색 털의 놀은 용병이 공격 의지를 가질 때 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뒤에서 털을 만지작거리며 하품이나 찍찍 해대는 친우는 그가 느끼고, 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없었고, 볼 수 없었다. 그 자신조차 방금 깨달았을 정도인데, 저 멀리 떨어진 위치에서 서로의 무구를 부딪쳐 보지 않고서는 깨닫기 힘든 것이었다. 
  ‘흠.’
  헬름 안쪽의 눈동자와 눈을 마주친 순간 회색 털의 놀은 볼 수 있었다. 용병의 원래 눈은 새하얗다는 것을. 헬름의 안쪽에서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를 보았을 때 그는 그가 여자란 것을 잠시 인식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번뜩이는 것이 그의 인식에 장애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회색 털의 놀은 흥미를 느꼈다. 
  인식의 장애를 느끼는 것은 지금 그의 힘이 짜부라져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중 그는 검은 털의 놀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그는 털을 만지고 있었다. 저 복슬복슬한 털은 추울 때나 잠을 잘 때는 정말 편하다. 그러나 문제는 비가 올 때, 습기가 찰 때 등이 있다. 
  회색 털의 놀은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기 힘들었다. 그래서 말했다.
  “인사, 너 한 아르겐, 열다 눈? 아니다 오나?”
  검은 털의 놀은 만지고 있던 털을 순간적으로 잡아 뽑을 뻔 했다. 급작스럽게 움켜쥐었기 때문이며 그 때 들어간 힘은 강철판을 맨손으로 찌그러뜨릴 수 있는 힘이었다. 검은 털의 놀은 말도 안 된다고 뇌까렸다. 하지만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의 친우인 저 회색 털의 놀이 내린 결론이다. 평소에 헛소리를 잘하고 약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약간이 아니라 많이 문제가 있다. 그렇지만 전투에 관해서는 헛소리를 하지 않는다. 놀답게. 싸움에 죽고 싸움에 사는 종답게. 
  검은 털의 놀은 허허 웃었다. 
  회색 털의 놀은 평소에는 문제가 많다. 그러나 그것은 평소 즉, 일상생활에서의 문제이지 싸움과 전투, 전쟁에서의 문제가 아니다. 놀 종족 전체가 그런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놀이니까. 
  회색 털의 놀은 본능을 가장 짙게 가지고 태어났다. 본능적으로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자를 찾고, 본능적으로 강자를 찾으며, 본능적으로 싸움을 한다. 그것은 그에게 내린 놀 종족의 최고이자 최대의 축복이었으며 모든 놀 종족이 부러워할 만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런 본능과는 다르게 식물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검은 털의 놀과 그 외의 수장들이나 아는 후일담에나 나올 만한 진실이었다. 이런 궁극의 본능을 가진 회색 털의 놀이기 때문에 싸움에서 느끼는 감정만은 특별한 것이었다. 그가 ‘유물’을 본 것이라면, 그것은 확실히 ‘유물’일 것이다. 절대적으로 빗나가지 않는 육감. 그는 그것을 가지고 있다.
  레이먼트 헬름 아래에서 그녀가 입을 열었다. 
  회색 털의 놀은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에 기운차게 대답하지 않았다.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른 종족인 그가 느끼기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그는 눈을 날카롭게 떴다. 동시에 검은 털의 놀 또한 회색 털의 놀과 같은 것을 느꼈다. 회색 털의 놀이 검은 털의 놀을 돌아보았다. 검은 털의 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시간이 구르기 시작했군.’
  ‘영광인데.’
  그들은 키득거리곤 다시 시선을 그녀에게 옮겼다. 호흡이 안정되어가는 것이 보였다. 
  회색 털의 놀은 기쁜 눈으로 자신보다 30센티미터는 작은 인간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칼브람 용병단의 롱소드를 놓았다. 그녀가 놓은 검에 두 놀은 정신이 팔리진 않았다. 
  그녀가 놓은 검은 힘없이 나무 바닥으로 추락했다. 회색 털의 놀이 기쁜 듯이 미소 지었다. 검은 털의 놀은 여전히 못 말리겠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녀가 쥔 검이 휘둘러졌을 때도 그들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종탑이 내부가 투명한 얼음으로 가득 찼다. 
  









  *










  누군가가 종탑의 입구를 향해 터트린 붉은 폭죽을 보고 종탑 안으로 박차고 들어간 용병들은 사방이 투명한 얼음으로 뒤덮여 있는 것을 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놀라는 것도 잠시, 그들은 죽기 직전인 아이단과 기절한 상태의 마렉, 두 조각으로 나뉜 용병들의 시체를 보고 사태를 파악했다. 시체는 모두 네 구. 종탑에 들어갔던 자들이 모두 여덟 명이었으니, 두 명은 살아있다는 말이 된다.  
  아이단과 마렉을 치워놓고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동료의 시체를 짊어지고 종탑으로 나온 용병들은 다시 들어가기 위해 무기를 정비했다. 그들이 발걸음을 옮겼을 때 종탑의 입구를 향해 무거운 돌덩어리들이 마치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용병들은 얼굴을 구기며 떨어지는 돌덩어리에 맞아 죽지 않기 위해 종탑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1층에서 봤던 것과 다르게 2층에는 놀의 모습이 눈에 띄게 적었다. 티이는 신참 용병이 지시하는 대로 그의 뒤에 바짝 따라붙었고 그는 다가오는 놀 병사를 향해 칼을 빠른 속도로 휘둘렀다. 하지만 네 명의 놀 병사들 중 단 한명도 거꾸러뜨릴 수 없었다. 
  결국 네 명의 놀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재빠르게 위를 향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그는 롱소드를 칼집에 간단한 동작으로 꽃아 넣고 티이를 두 팔로 번쩍 들어올렸다. 처음에는 의외로 무거운 몸무게에 주춤한 듯 보였으나 이내 그 무게에 익숙해진 순간 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자신을 잡아끄는 손길에 익숙해지지 못했던 티이는 그녀의 품에 안기자마자 편안함을 느꼈다. 이상한 일이었다. 
  3층으로 올라가기까지 질리지도 않고 달라붙는 놀 병사를 떨어뜨려 놓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용병이 발을 헛디뎌 티이를 안은 채로 엉덩방아를 찧었을 때 무기를 꽉 움켜쥐고 다가오는 놀을 보며 티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신참은 지금부터 자기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예측조차 하지 못하는 듯 무심한 눈길로 달려오는 놀을 바라보았다. 
  두 명의 인간을 향해 달려가던 놀 병사들은 종탑이 무너질 듯 휘청거리자 중심을 잡기 위해 잠시 멈춰서야 했다. 그리고 때마침 거미가 날뛰던 덕분에 천장이 무너졌고 놀 병사들은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는 천장을 보며 악귀처럼 얼굴을 구겼다. 천장이 놀 병사를 덮쳤다. 
  천장은 아슬아슬하게 티이와 신참을 빗겨갔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티이는 먼저 일어 선 신참이 내민 손을 붙잡았다. 
  “이제 거의 다 왔어요!”
  티이는 계단을 가리키며 숨을 헐떡였다. 올라오던 도중 티이는 자신이 신참에게 짐이 된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티이는 자신의 발로 걸을 것을 주장했다. 3층을 지나 4층에 이르렀을 때 티이는 거의 탈진상태가 되어 있었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돌덩이와 무너지는 바닥을 피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뛴 결과였다. 4층에 올라오는 동시에 티이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티이가 숨을 고를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안전한 자리가 없나 주위를 살피던 신참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너지기 직전의 종탑에서 안전하게 쉴 수 있는 자리를 찾는 건 불가능했다. 자신을 위해 고생하고 있는 칼브람 용병단의 용병을 위해서라도 티이는 지금 당항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을 때 어느새 다가온 용병이 손을 내밀었다. 티이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종탑의 내부가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흔들림은 거셌다. 덕분에 썩어 문드러졌던 4층의 나무 바닥이 대부분 아래로 떨어져 나갔다. 나무 바닥들은 이제 자신들의 할 일은 끝났다는 듯이 무관심하게 지면을 향했다. 
  거센 진동 때문에 티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다시 쓰러졌고 그녀는 휘청거리는 몸을 붙잡기 위해 롱소드를 허리춤의 칼집에서 다시 뽑아들어 벽에다 냅다 꽂았다. 벽에 꽂은 무기에 몸을 맡기던 용병도 결국은 몸이 휘청거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내 신참 또한 바닥에 엉덩이를 찧게 되었다. 그는 아픔을 호소하지는 않았다. 허나 입 밖으로 새어나오는 신음소리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고통이 아물어갈 즈음 그의 시선은 티이를 향했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티이의 모습을 보았다. 정황상 종탑을 석재가 보기 좋게 떨어져 나와 그녀의 후두부를 강타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티이에게 다가갔다. 후두부를 만져보니 출혈이 심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작은 혹이 나있는 정도로 그친 것이 다행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는 티이의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가 느껴져야 하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서일까. 하지만 의문을 품고 있던 것도 잠시 뿐이었다. 다시 종탑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종탑이 흔들리기 시작한 순간 신참은 티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먼저 한 번 안아 본적이 있기 때문에 그녀를 들어 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쓰러진 티이를 안아들고 걷기 시작했다. 뛰려고 마음은 먹고 있었지만 종탑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티이를 안아들고 뛴다는 것은 눈 먼 벽돌에 맞아 비명횡사하기에 딱 좋았다. 
  얼마 걷지 않아 그들은 나무판자를 이어 붙여 만든 조잡한 길을 만나게 되었다. 재수가 좋으면 옆에 보이는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길이었다. 무어라 투정부릴 시간도 없이 그는 눈앞에서 둔기를 들고 달려오는 두 명의 놀 병사를 발견했다. 2층에서 만난 네 명이 전부가 아니었던 듯했다.
  그들을 향해 티이를 안고 있어 묶여버린 두 팔을 대신해 그나마 자유로운 발을 날렸다. 왼쪽에서 다가오던 놀의 손목을 발로 차 그가 들고 있던 무기를 공중으로 붕 뜨게 만들었다. 무기가 갑자기 하늘로 치솟아 올라도 그 놀은 멍하니 치솟아 오르는 무기를 바라보고만 있진 않았다. 오히려 무기가 날아갈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거친 포효를 내지르며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다리에 스치듯 맞은 것뿐인데 손뼈가 나가버린 것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주먹을 쥐는 순간 느껴지는 고통에 잠시 주춤거렸다.  
  놀의 광적인 육탄 돌격에 그는 멈칫했고 그 짧은 순간 놀의 이빨이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꼼짝없이 얼굴을 뜯어 먹히겠다고 생각한 그때, 강렬한 번개줄기에 휘감긴 용병단 롱소드가 소리보다도 빠르게 날아들어 놀의 얼굴을 반으로 갈라버린 뒤 종탑을 뚫고 하늘 멀리 날아갔다. 이 엄청난 위력에 다른 한 명의 놀 병사는 칼이 날아온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맞았냐?”
  짙은 검은 녹색 로브의 사내가 손을 이용해 눈 위에 지붕을 세우며 말했다. 
  “예. 맞았습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용병이 답했다. 로브의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리가 너무 멀고 워낙 투검술은 전병이라 던질 때도 반신반의하며 던졌다. 아무리 그래도 셀피드 같은 투창의 대가가 아닌 이상 종탑에서 4백 미터는 떨어진 곳에서 정확하게 맞출 수 있을 자신감을 갖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던지기 전까진 반신반의 했어도 결과가 좋으니 상관할 일은 아니다. 그리고 놀은 아직 하나가 더 남아있다. 지금 무녀를 안고 있는 저 용병의 힘으로는 놀 병사와 일대일로 싸운다는 것 자체는 죽음으로 직결하는 지름길이다. 그리고 케아라 때문에 저 신참 얼굴도 못 봤는데 벌써부터 죽으면 안 된다. 그녀의 얼굴을 본 아이단이 둘도 없을 만큼 아름다운 여자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말 믿을 만한 정보다. 
  “칼 남은 거 하나 더 줘봐라.”
  로브의 사내가 전체적으로 어두운 녹색 계통의 용병복을 입고 있는 사내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들고 있던 롱소드를 칼집에서 뽑아 로브의 사내에게 넘겼다. 사내는 롱소드의 힐트를 붙잡음과 동시에 그것을 집어던졌다. 
  녹색 로브의 사내 곁에 서 있던 세 명의 병사는 똑똑히 보았다. 그의 몸에서 피어오른 번개의 역장이 순식간에 그가 쥔 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이번에도 다시 소리보다 몇 초 빠르게 날아온 또 하나의 롱소드가 오른편에서 칼을 휘두르던 놀의 몸을 둘로 쪼개며 종탑을 관통했다. 엄청난 양의 전류가 눈앞에서 섬광처럼 번쩍였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두 번이나 칼이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칼이 날아온 방향에서는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었고, 칼이 종탑의 중추를 꿰뚫고 관통한 덕분에 진동은 더욱 심해졌다.
  “어어, 저거 왜 저러냐?”
  “대장님이 너무 세게 던지신 것 같습니다.”
  녹색 로브의 사내는 멋쩍은 동작으로 콧구멍을 후볐다. 의도치 않게 종탑의 수명을 줄였지만, 도와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남아있는 칼이 더 이상 없었다. 로브의 사내는 종탑으로부터 시선을 뗐다. 
  옥상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 티이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머리 뒤쪽에 볼록 튀어나온 혹을 만지작거리며 울상을 지었다. 티이는 그녀에게 감사해하며 같이 마지막 계단을 뛰어 올랐다. 그녀들은 곧 옥상에 도착하게 되었다.
  옥상에 올라가와 보게 된 것은 거대한 흰 거미가 종탑을 기어오르는 모습과 거미를 향해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는 12발의 거대한 화살이었다. 거미는 종탑을 박살내며 올라가던 도중 날아온 발리스타용 화살에 맞아 추락했다. 
  종이 걸려 있는 한쪽 벽면을 완전히 무너뜨리며 옥상 위로 추락한 거미는 괴성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여러 개의 눈동자가 옥상으로 갓 올라온 티이와 신참의 모습을 보았다. 거미는 몸에 박힌 화살이 주는 고통을 분노로 바꾸며 그들에게 돌진했다. 
  자신들을 향해 달려들고 있는 집보다 더 큰 거미의 모습은 이제 막 옥상으로 머리를 내민 두 여자에겐 바람직한 인상을 심어주지 않기에는 충분했다. 거기다 한 명은 거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들에게 다가온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거미가 앞발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내려쳤다. 티이는 앞발을 들어 올린 거미를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거미가 징그럽고 무섭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소에 거미를 보면 피하고 몇 시간 동안은 거미가 지나간 자리에 가지 못하던 여성이 취한 행동과는 정반대였다. 그녀는 검을 들어올렸다. 막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충분히 시선을 돌릴 수단은 되었다. 
  앞발은 아주 빠른 속도로 티이의 뒤편의 바닥을 때려 부쉈다. 바닥이 박살나며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고 종탑은 다시 한 번 더 휘청거렸다. 
  거미는 괴로운 듯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기괴한 포효를 내뱉으며 거미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용병이 휘두른 칼에 눈 하나를 잃은 덕분이다. 그런 거미의 모습을 바라보던 티이는 입을 꽉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그 거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이제 괜찮아.”
  티이의 얼굴은 매우 편안해 보였고 그로 하여금 거미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미친 것처럼 날뛰던 거미는 티이가 다가오자 점차 얌전해지기 시작했다. 티이가 거미에게 다가가 손으로 거미의 입가와 피가 흐르는 눈동자를 어루만지자 거미는 완전히 아까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앞발을 움츠렸다. 
  “많이 놀랐지?”
  티이는 조심스럽게 거미의 입가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티이의 눈에 거미가 한결 나아진 얼굴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이 보였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제 안심해도 돼.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마치 예전과 같은 순한 모습으로 돌아간 거미는 그녀의 말에서 느껴지는 푸근함에 마음을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묻는 말에 답했다. 
  “왜 그랬니. 말해봐. 왜 그렇게 놀랐어?”
  티이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거미는 이제야 자신이 있을 곳을 찾은 모습으로 몸을 땅에 눕히려 하고 있었다.
  “누가 그랬다구? 누가……”
  거대 거미의 이변을 알아차린 이는 두 사람 모두 다였다. 거미는 갑자기 폭주하기 시작했다. 
  뒷이야기를 알고 있는 것인지, 하늘에서 구슬픈 빗방울이 떨어져 땅을 뒤덮기 시작했다. 










  *










  “이런 곳에서 무얼 하고 있나?”
  남자는 나뭇등걸에 걸터앉아 종탑의 상황을 보고 있는 사내를 보며 말했다. 
  “보면 모르나? 구경중이다.”
  사내는 종탑에 시선을 고정한 채 회색 로브의 남자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한참 종탑의 상황을 구경하던 검은 로브의 사내가 말했다. 
  “네베레스는 어디 있나.”
  회색 로브의 남자는 대화상대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대화를 이어나가려는 검은 로브의 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답했다. 
  “서북부에.”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쉰 검은 로브의 사내가 말했다. 
  “벤샤르트의 정신은 붕괴 직전까지 가있다. 도대체 이 상황에서 그 녀석은 뭘 하고 있는 건지…….”
  “……네가 손을 썼으면 이런 일은 미연에 방지할 수 있던 것 아니었나?”
  사내는 헛기침이 하고 싶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회색 로브의 남자가 미친 것처럼 종탑 위에서 날뛰고 있는 거미를 보며 말했다. 
  “어떻게 할 건가?”
  “잡아야지. 물론 생포는 아니다. 죽인다. 난 거미를 싫어하거든.” 로브의 사내는 종탑 위의 거미를 바라보며 설레발을 쳤다. “이 행위에 대해 불만을 가진다면 ‘침묵의 기사’들에게 전해라. 너희들의 여신에게는 관심 따위 없다. 네베레스의 부탁에 의해서 너희들을 도와주고 있는 것이라고.”
  회색 로브의 남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로브의 사내는 나뭇등걸에서 일어나며 엉덩이를 털었다. 그의 허리가 곧게 펴졌다. 그는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다 문득 그의 눈에 기묘한 것이 들어왔다.
  “어?”
  남자의 시선이 사내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움직였다.
  “왜 그러지?”
  회색 로브를 뒤집어 쓴 남자의 물음에 검은 로브의 사내는 피식 웃었다. 회색 로브의 남자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투로 대답하지 않는 검은 로브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회색 로브의 남자는 결국 검은 로브의 사내가 시선을 종탑으로 고정하고 구경하는 자세로 나서자 답답한 마음을 지우지 못한 채 입맛만을 다시며 종탑으로 시선을 옮겼다. 
  종탑에서는 거대한 흰 거미와 칼브람 용병단 소속의 용병으로 보이는 자가 대립하고 있었다. 회색 로브의 사내는 검술이 뛰어나다며 칭찬했지만 검은 로브의 사내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스승을 두었던 모양이군. 문제는 몸이 그 검술을 못 받아들였다는 것 정도일까. 뛰어난 검술이지만 저자와는 맞지 않는 듯 보이는데. 잠깐, 이제 보니 여자로군. 여자한테 저런 검술을 가르쳤으니 동작이 매끄럽지 않고 힘이 없지. 남부 검술이군. 남부 여자들이 무섭긴 하지.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나?”
  회색 로브의 사내는 지금 무슨 말을 하냐고 얼굴에 써넣고 있었다. 검은 로브의 사내는 이정도 쯤은 간단한 해석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리고 문득 그는 회색 로브의 사내들이 모두가 다 검과 마법을 병행할 수 있는 실력자들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이 로브의 사내는 순수한 마법사다. 무기를 다루는 것에 있어서는 초보자와 다를 바 없는 자다. 그런 자를 앞에 두고 자신만이 아는 지식을 낱개 형식으로 내뱉었으니 이해하지 못 할만도 하다. 검은 로브의 사내가 말했다.
  “자세히 설명해줄까?”
  회색 로브의 사내는 손을 들어 절레절레 흔들어보였다.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기에 검은 로브의 사내는 “그런가?” 라며 어물쩍한 자세를 취해보였다.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바보처럼 종탑을 바라보았다. 정적은 길었고, 지루했다. 참다못한 회색 로브의 사내가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이봐, 벤샤르트를 이렇게 두고만 볼 건가?”
  검은 로브의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한 번 쳐다보고서 다시 시선을 종탑으로 옮겼다. 회색 로브의 남자가 다시 무어라 말을 하려 했을 때 그가 말했다.
  “뭐 어떻게 하길 원하는데? 지금 당장 죽일까? 아니면 네가 저 거미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 줄까? 대답해라. 너 원하는 대로 해주마.”
  회색 로브의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네베레스가 이 사내에게 도움을 구하는 처지라지만 이렇게 하대 받자 기분이 상했다. 
  네베레스는 이 사내에 대한 것을 어느 누구에게라도 발설하는 것을 꺼렸다. 심지어 그들 중에서 가장 존경받는 자의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일로 추방당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네베레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회색 로브의 사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검은 로브의 사내를 노려보고 있을 때 종탑에서 시선을 떼고 있지 않던 그가 놀랐다는 느낌이 묻어나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아르겐?”
  “왜 그러지?”
  “……뭐 그냥, 그런 게 있지. 둘 다 얼굴을 비추는군.”
  “……?”
  검은 로브의 사내는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침묵의 기사의 시선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대답해 줄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닫았다. 이어서 그는 다시 종탑을 바라보았다. 
  회색 로브의 사내가 짜증을 느끼고 있을 즈음 그걸 예지한 검은 로브의 사내가 폐 가득 공기를 채웠다가 내보내며 말했다. 
  “비밀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이 즐겁다는 말이야. 그리고 이건 딱히 비밀도 아니지. 자네들 성채에 있는 그 커다란 도서관 좀 이용하는 게 어때? 짱구는 바닥에 굴려서 닦으라고 있는 거지 수건으로 닦으라고 있는 물건이 아니란 거 모르나?”
  “흠흠.”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한 사내는 종탑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검은 로브의 사내를 쳐다봤다. 종탑에 흥미를 끄는 사람이라도 있는 것인지 그의 시선은 종탑에서 고정된 뒤 떨어지지 않았다. 하릴없이 그의 옆에 서서 종탑을 바라보던 회색 로브의 사내는 검은 로브의 사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얼음이…… 아직 자고 있군. 뭐 그렇지만 좋은 구경거리는 될 거다.”
  턱짓까지 해가며 종탑을 가리키는 사내에게 답하기 위해 회색 로브의 사내는 그가 턱짓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거대한 거미와 대치중인 투명한색의 칼과 방패를 들고 있는 용병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꽤 먼 거리였지만 회색 로브의 사내의 눈은 그가 들고 있는 무기가 평범한 강철로 만들어진 무기가 아니라는 것을 뚜렷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종탑을 바라보고 있던 사내가 불쑥 말했다.  
  “벤샤르트의 처리는 종탑에서의 일이 끝난 뒤에 한다.”
  회색 로브의 사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자 검은 로브의 사내가 말을 덧붙였다.
  “시체 처리는 너희가 알아서 하라고. 난 거미 진짜 싫어해.” 










  *










  티이는 그녀가 들고 있는 무기를 보았다. 투명했다. 
  1층에서 검은 털의 놀과 회색 털의 놀을 향해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것들이었다. 티이는 몇 년 전 그것과 비슷한 검을 본적이 있었다.
  투명한 얼음의 검. 칼브람 용병단에 속해있는 ‘이류엔 세르실리아’라 불리는 특수용병이 사용하는 검은 지금 눈앞의 여인이 들고 있는 것과 같이 투명했다. 그 투명한 검은 주변 사람들에겐 ‘얼음 칼’ 혹은 ‘무식한 몽둥이’라 불렸다. 그러나 정작 그 검을 사용하는 그녀는 그녀 자신의 검을 ‘결빙의 검’이라 불렀다. 얼음의 검과 무슨 차이가 있냐고 물으면 세르실리아는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이기만 했다. 오직 그 물음을 던질 때에만 볼 수 있는 다이아몬드 같은 미소를 보기 위해 얼음의 검이란 어감과 결빙의 검이 무엇이 다른지 묻는 자들이 수두룩했다. 원채 미소를 잘 보여주지 않는 그녀였지만 그 화제가 나올 때마다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벤샤르트가 앞발을 휘둘렀다. 그녀는 숙련된 암살자가 단검을 집어던지는 것 같은 속도로 날아오는 앞발을 투명한 얼음방패로 막아냈다. 방패의 길이는 그녀의 가슴부터 발목까지 가릴 정도로 컸다. 한눈에 보기에도 전혀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방패는 공격을 흘릴 수 있도록 굴곡이 져있었다. 요컨대 타원형의 방패였다. 그리고 그 투명한 방패의 중앙에는 투명한 새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독수리인지 매인지 알기 어려운 조각이었다. 
  앞발을 이용한 공격이 막히자 벤샤르트는 분노 속에서 재차 공격을 가했다. 이번 공격은 방금 전에 방패로 막았던 것과는 달랐다. 방패를 부수기 위해 날리는 무거운 공격을 일부러 맞아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방패를 집어던진 뒤 왼손에도 오른손에 들고 있는 칼과 똑같은 형태의 검을 쥐고서 벤샤르트의 앞발을 쳐냈다. 
  앞발과 작은 인간이 쥔 무기가 맞부딪쳤을 때 벤샤르트는 앞발이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을 무시하고 그대로 공격을 이어 붙이려던 순간 그는 앞발이 무거워졌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꼈다. 그리고 그 무거워진 느낌의 앞발에 인간의 칼질이 재차 가해졌다. 그러자 갑자기 가벼워진 앞발의 무게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앞발을 들어올려 그것이 어떻게 되었는지 쳐다볼 필요도 없었다. 눈동자들을 아래로 살짝 굴리기만 하면 부서진 얼음 파편 속에서 뒹굴고 있는 앞발의 파편을 볼 수 있었다. 부서진 앞발에 대한 고통보다도 다시 한 번 더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앞발이 부서진 것을 확인한 순간 벤샤르트는 더 거세게 날뛰기 시작했다. 벤샤르트는 투명한 얼음 칼을 쥐고 있는 용병에게 돌진했다. 돌진하는 힘이 얼마나 강했던지 그가 조주 없이 내달렸음에도 옥상의 발판은 초토화가 되었다. 벤샤르트의 광폭한 돌진을 보며 막아냈다가는 몸이 박살날 것을 짐작한 그녀는 막는 것보다 옆으로 구르는 선택을 했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옳았다.
  벤샤르트는 돌진한 순간 온 몸에 순백의 빛을 휘감고 있었고 그 빛을 곁눈질로 살짝 바라본 순간 그녀는 그것이 위험한 힘임을 직감했다. 아까까지와는 확연히 달라진 파괴력에 그녀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속도도 두 배는 더 빨라졌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동요하는 것도 잠시, 거미가 뒤돌아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왼손으로 들고 있던 방패를 집어던졌다. 방패는 벤샤르트의 눈 하나를 찌그러뜨려 놓았고, 벤샤르트가 눈이 뭉개진 고통에 괴로워하며 하나 남은 커다란 앞발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시작하자 그녀는 빠르게 몸을 굴려 벤샤르트의 공격범위에서 벗어났다. 그리고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칼마저 벤샤르트를 향해 집어던졌다. 허나 날아간 칼은 벤샤르트가 들어올린 앞발에 맞아 저 멀리 튕겨나갔다. 
  벤샤르트가 눈을 보호하던 앞발을 내리자마자 그녀는 3미터를 넘는 투명한 얼음의 창을 집어던져 벤샤르트의 머리를 꿰뚫었다. 창은 벤샤르트의 미간 정중앙에 꽂힌 것처럼 보였다. 짧은 한숨을 내쉬며 양손에 칼과 방패를 쥔 여성은 이상한 것을 보았다. 분명히 거미의 머리통에 창을 집어던져 꿰뚫었을 터인데, 지금 보이는 거미의 머리통에는 창처럼 보이는 어떤 것도 박혀있지 않았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찰나, 벤샤르트의 앞발이 그녀를 후려쳤다. 
  그녀의 몸은 세 배 이상 빨라진 벤샤르트의 앞발이 가하는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마 넋을 놓고 있던 그대로 하나 남은 앞발에 허리 부근을 공격당했다면 그녀는 즉사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벤샤르트의 앞발이 그녀의 몸에 닿기 직전에 그녀의 몸에선 얼음이 돋아났다. 
  앞발에 맞은 순간 그녀의 몸은 발로 찬 축구공처럼 날아가 종이 걸려 있던 한쪽 벽을 무너뜨렸다. 종탑의 끝에 달려 있던 거대한 종이 곧 떨어질 것처럼 흔들렸다. 하지만 벤샤르트는 그런 것에는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앞발에 맞은 여자가 죽지 않았다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벤샤르트는 무너진 돌무더기에 깔려있는 여자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해 다가가 앞발을 들어올렸다.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예를 들 거리조차 찾아 볼 수 없었다. 신기하게도 그녀가 쓰고 있던 헬름은 그런 충격에서도 그녀의 머리를 지켜줬다. 무슨 철을 사용했는지 헬름만은 놀랄 만큼 단단했다. 머리가 띵 했으며 손가락은 반 마디 이상 구부릴 수 없었다. 
  눈앞이 절반은 하얗고 절반은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하반신과 상반신이 따로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그녀는 노랬던 세상이, 하ㅤㅇㅒㅆ던 세상이 차츰 색을 가져가는 것을 보며 명치 부근에 툭 불거져 나온 붉은 나무판자를 의아하게 내려다보았다. 붉은 나무판자는 이 종탑을 짓는 데 쓰인 것 같지는 않았는데…….
 시력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되자 붉은 나무판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복부를 뚫고 나와 있었다. 왜 이것이 자신의 복부를 뚫고 나와 있는 것인지 고민하고 싶었지만 머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고, 고통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순간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지금 이 상황자체가 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증거로 그녀는 점차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복부의 통증이 머리끝까지 올라갔고 부러진 발가락과 정강이뼈의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통증이 느껴지자 좋지 않은 느낌 속에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철 조각이 기도를 틀어막아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오른손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있어야할 손가락과 손바닥이 보이지 않았고, 대신 얇은 철판이 팔뚝 중간을 뚫고 튀어나와 있었다. 자신의 팔이 어디로 갔고, 이 철판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해 의문을 가지고 있던 여자는 움직이기도 힘든 오른쪽 팔은 내버려두고 왼쪽 팔을 들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을 만져보기로 했다.
  오른손을 움직이기 힘든 것처럼 왼손도 움직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오른쪽과는 달랐다. 몸에 힘이 빠진 것도 있지만, 왼손은 뱃속에서 쏟아져 나온 내용물에 짓눌려있었기 때문에 움직이기 힘든 것이었다. 왼손을 터져버린 위장에서 흘러나온 위액에 범벅이 되어 있는 창자 틈에서 끄집어냈다. 그리고 느릿느릿 얼굴을 향해 가져갔다. 
  헬름이 머리를 보호하고 있다고 여겼던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허나 반절만 착각이 아니었을 뿐이다. 
  그녀의 얼굴 절반은 헬름의 보호를 받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반대쪽 얼굴은 헬름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문제는 헬름이 날아가지 않고 남아있어준 덕분에 헬름과 함께 반쪽 얼굴도 찌그러져버렸다는 것이었다.
  헬름은 벽과 충돌했을 때 일부가 박살나 튕겨져 나갔다. 그리고 튕겨져 나가지 않은 헬름은 찌그러지며 그녀의 반쪽 얼굴을 완전히 짓이겨놓았다. 
  반쪽 얼굴이 전장을 누비고 다닌 베테랑 용병이라 하더라도 끔찍하다는 감정을 느끼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망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흉측하게 짓이겨진 얼굴 따위는, 상대적으로 멀쩡한 반대쪽 얼굴에 의해 완전히 빛이 바랬다. 남아있는 반쪽 얼굴이 가진 미모가 짓이겨진 반대쪽 얼굴 또한 아름답게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순백에 가까운 은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세계를 모두 젖게 만들려는 듯 시원하게 떨어지고 있는 빗줄기와 까만 구름의 무리가 태양이 내리쬐고 있는 빛을 모두 차단했지만, 그녀의 머리카락은 빛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죽을 때가 되면 과거가 보인다고 말들 많더니, 순 거짓말이다. 그녀의 눈에는 과거는커녕 현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흰 거미, 벤샤르트의 모습을 제외한 모든 것은 그녀의 시선 속에서 탈락했다. 
  반만 남은 얼굴에, 반만 남은 입술에 짓는 미소가 너무 외로워 보이고, 애잔했으며, 매혹적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위쪽을 향했다. 하나 남은 눈에는 피곤함이 가득했다. 눈물은 없었고, 절망이란 것도 없었다. 그저 피곤함이 가득한 눈으로 까만 것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아름답다. 
  정말 아름답다. 
  분노로 머릿속을 가득 채운 채 앞발을 내려찍는 벤샤르트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붉은 눈은 절반 이상 감겨있었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편했다. 
  ‘지쳤어.’
  ─뭐가?
  ‘몰라. 그냥 지쳤어.’
  ─그래?
  ‘응…….’
  ─자려고?
  ‘졸려.’
  ─해도 안 떨어졌는데, 좀 이른 것 같지 않아?
  당신도 나 잠이 많은 거 알면서. ……잠깐만. 누구야?
  ─난 아직 안 지쳤어. 
  누구야?
  ─뭐, 넌 지칠 만도 하지. 
  뭐, 뭐야. 누구야?
  ─계속 찾아다니다 보면 지치는 것도 당연하지. 반대로 기다리는 쪽은 여력이 남아돌거든. 밥 먹고, 운동하고, 죽다 보면 언젠가는 네가 찾아오잖아. 하는 거 없지. 
  무슨 소리야?
  ─이참에 쉬라는 거지. 
  “이젠 내가 찾을 차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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