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열씸히 그렸...
배경
"언니 왜 내 손을 놓쳤어..?"
불길 속에서 소녀가 말을 걸었다.
너무도 그리운 목소리..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자신의 동생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제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그날의 모습 그대로
"미안해.. 미안해..."
여자는 연신 미안하단 말만 반복했다.
매일같이 꿈에 나타나는 소녀는 그렇게 여자를 쳐다보다 사라진다.
"기다려..! 가지 마 제발... 제발..!"
끝내 울음을 터뜨린 여자는 곧 잠에서 깨어났다.
여자는 이내 눈물을 훔치며 싸늘한 눈으로 돌아왔다.
이미 익숙한 일인 듯 아무렇지 않게 나갈 채비를 하고 방을 나섰다.
왠지모를 엄숙하고 적막한 공기만이 맴돌았다
낯익은 얼굴들이 보이긴 했지만 대화가 오가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때와 별반 다를 거 없는 환경이지만
가족이라고 부를만한 사람은 남아있지 않았다
돌아갈곳따윈 이젠 남아있지 않았다
기억나는건 쾨쾨한 뒷골목
저편에서 들려오는 시장의 북적이는 소리와
그리고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러나 행복한 웃음이 아닌 킥킥대는 시니컬한 목소리
"어이 [이름] 늦었잖아"
'[이름].. 그래 그게 내 이름이었지'
이곳에 모인 아이들의 대다수가 버려지거나, 전쟁으로 부모를 잃거나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나온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자매는 어려서부터 스스로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했다
부모에게 딱히 좋은 기억은 없었기에
부모가 없는것을 별로 개의치 않아했지만
하나뿐인 여동생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또 레타를 데려온거야?"
소년이 툴툴대자 소녀는 소년을 쏘아붙였다
"네 일이나 잘 해"
"언니 난 괜찮아"
[이름]의 뒤로 작은 소녀가 모습을 드러낸다
"흥 방해나 되지 말라고"
소년은 못마땅한듯 보였지만 이내 둘을 받아주었다
아이들은 골목에서 나와 하나 둘 사람들 사이로 섞여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편에서 고함소리가 울려퍼진다
"이녀석들!!!"
시장에서 물건을 구경하던 남성이었다
누군가가 일을 시작했다는 신호다
아이들은 능숙하게 물건을 이리저리 던져받으며 도망쳤다
고함소리가 점차 멀어져갈 무렵
퍽!
하며 한명이 넘어지면서 주머니를 떨어뜨렸다
아이들은 재빨리 그 주머니를 주웠 달아나고있었다
"이 바보야 뭐하고있어! 빨리 도망쳐!"
아이들이 소리쳤다
그러나 넘어졌던 아이는 남성의 손에 잡혀버렸다
"내 돈은 어디로 숨겼어?! 경비대에 넘겨버리겠다!"
남성에게 붙잡힌것은 레타였다
이미 다른 아이들은 저 멀리 도망갔고
남성은 주먹을 치켜들었다
"내 동생에게 손 하나 까딱하기만 해봐!"
[이름]이 남자의 팔을 막아서며 말했다
그러나 어린 소녀의 힘으론 남성의 힘을 당해내진 못했다
[이름]은 이내 길바닥에 뿌리쳐져 넘어졌다
하지만 다시 남자의 앞을 막아섰다
"이 도둑녀석들..혼쭐을 내주마!"
..
코에서 비릿한 피냄새가 난다
눈앞은 반쯤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온몸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남성은 보이지 않았다
"언니 괜찮아? 미안해.. 나 때문에.."
레타는 흙이 묻어 조금 더러워졌을뿐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지만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괜찮아 레타. 아무렇지않아"
[이름]은 아픈 몸을 일으켜 애써 웃어보였다
그러나 레타는 훌쩍임을 멈추지 않았다
"레타, 이거 봐"
[이름]은 품속에서 잘그락 소리를 내며 동전 몇 닢을 꺼냈다
그 찰나에 남성에게서 빼낸 동전이었다
"빨리 가자, 그 멍청한 녀석이 돌아오기 전에"
레타는 그제서야 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레타의 손을 꼭 잡은채로 해질녘 거리의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
"로체스트.. 인근.. 놀.. 움직임이 이상하다...는 보고..."
성체 안 깊은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름]은 잠시 움찔거렸으나
이내 다시 냉정을 되찾고 목소리가 들리는곳을 훔쳐보기 시작했다
그녀와 같은 모습을 한 사람이 정찰에대한 보고를 하고있었다
보다 더 무거운 분위기가 공간을 짓누른다
"놀들이 전쟁을 준비하는 것 같습니다"
"......"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족과 인간의 오랜 전쟁으로 마족이 전투를 준비하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었지만
놀은 분명 철저히 중립의 입장을 고수하는 종족일 텐데
그런 놀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름]의 마음은 이미 냉정이 깨지기 시작했지만 표정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어려서부터 인간병기로 키워진 우리는 명령에 복종할뿐
알 수 있는것도 의문을 표하는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것은 없었다
이곳에 '나'는 없다
그날 밤 [이름]은 깊은 잠에 들었다
...
그날은 유난히 고요한 밤이었다
"쯧..더러운 거지들 같으니.."
지나가던 경비병이 중얼거렸다
그런 취급은 익숙한 일이었다
[이름]은 경비병을 째려보며 그가 골목 너머로 사라지는것을 지켜본 후에야
허름한 마구간의 부숴진 틈 아래로 들어갔다
그날따라 유난히 일이 안풀려 허기진 배를 달래면서
벽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시린 발을 비비며
그렇게 잠이 들었다
곳곳에 핀 곰팡이와 오물 냄새가 섞여 가득한 곳이었지만
어디든 추위를 피해 잘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깊은 새벽 땅을 울리는 굉음에 깜짝놀라 잠에서 꺠어났다
전의 그 고요함은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밖은 혼돈 그 자체였다
마음은 온통 불길로 가득했고 그 사이로 사람과 이형의 그림자가 섞여있었다
사람의 비명소리와 귀가 찢어질듯한 폭발하는 소리 그리고 마족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했다
[이름]은 황급히 레타와 함께 도망가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들리는 비명소리에 정신을 잃을 만큼 두려웠지만
돌아볼 용기따윈 없었다
넘어지고 부딪혀 상처가 났지만 그럼에도 발을 멈추지 않았다
한지 앞도 보이지 않는 자욱한 연기속을 달리고 또 달렸다
이윽고 다리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비명과 함성 소리가 멀어져 갈 때쯤..
'레타.. 레타는..?!'
분명 레타를 잡았던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언제부터 없었던걸까 어디서 잃어버린거지?
[이름]은 멍하니 불타는 마을을 바라보았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지만
가야한다. 아직 저 불길속에.. 레타가..
"레타....레타...!!!!"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왔던 길을 다시 달려가기 시작했다
"왜 내 손을 놓쳤어?"
목이 타버릴듯 따갑고 심장이 터질듯이 뛴다
온몸이 달릴 수 조차 없을만큼 떨리며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럼에도 계속 걸어갔다
'제발...제발.....제발.........'
이미 마족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누군가의 형체조차 보이지 않았다
모든것을 파괴하려는듯 불타오르는 소리 이외엔
거짓말같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왜 날 버리고갔어?"
'미안해......미안해..........'
하늘에서 물방울이 한 두 방울씩 떨어진다
그것은 세찬 비가 되어 뜨거웠던 땅을 식히기 시작했다
곧 마을의 흔적은 칠흑같은 어둠으로 덮혔다
사방엔 타버린 건물들과 무기들 그리고 재가되어버린 사람들...
"우욱..!!!"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이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절규했다
미안해...
얼마나 지났을까
저벅 저벅
희미해진 의식 너머로 발소리가 들린다
눈 앞에는 무장을 하고 후드를 깊게쓴 사람들이 있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몸이 들려지는것을 느끼며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중얼거리는것을 들었다
"지독한 일이군...혼자서 이 끔찍한 기억을 짊어지다니.."
"레타는..."
[이름]은 간신히 입을 열어 말을했다
"생존자는 너 하나였다."
듣고싶지않았던 진실을 마주하자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마족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날 데려가줘..복수..하게해줘..그들에게.."
"복수라.."
남자는 잠시 뜸을들인 후에 말을 이어갔다
"..에린을 알고있나? 여신께서 강림하시면 고통도, 슬픔도, 배고픔도 없는 세상이 온다고 하지
우린 사명을 위해 움직인다. 복수같은 개인적인 감정은 허락되지 않아"
"그런건...믿지않아"
"상관없다. 그것이 너의 운명이라면 좋든 싫든 운명대로 될것이다.
...그러나 우리와 함꼐 하고싶다면 먼저 그 감정부터 다스릴 필요가 있겠군.."
...
"젠장..."
아직 동이 트지않은 새벽
악몽으로 잠에서 깬 [이름]은
애써 잊고지냈던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후로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 날의 기억은 여전히 그녀를 괴롭혔다
'에린.. 그걸 위해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고 싸워왔건만..
여전히 그런 일이 반복되고있단말인가..'
[이름]은 자신의 일에 회의를 느꼈다
그때와는 달리 누군가를 지킬 힘도 생겼건만..
위협이 올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게 화가났다
"여전히 믿지 않나?"
어두운 복도에 스산한 바람이 부대끼는 소리와 함께
저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속에서 보았던 그 남자였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나이 든 모습이었다
"..[일족의 검] 님이시여.."
[이름]은 자세를 낮춰 고개를 숙였다
"그때의 기억인가?"
"..그때 절 데려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형제들에 대한 신뢰도 신에 대한 신앙심도 없는 [이름] 은 일족에서 겉돌았지만
그럼에도 [일족의 검]은 그녀를 받아들였다
훈련을 통해 감정을 숨기는법을 익힌 그녀였지만
여전히 마음속에선 마족에 대한 증오가 꿈틀거렸다
"예언자님께서 네 존재를 예언하셨기 때문이다."
예전과 달리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였지만
여전히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어가던 널 발견한것은 우연이 아니다.
네가 무엇을 하던 모든것은 운명에 따라 흘러갈 뿐..
나 역시 의문을 품었었지만 사명을 따랐을뿐이지."
'운명이라.. 내가 여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는 것 조차 운명의 일부란 말인가
그 운명이란것에 얽매여 자신조차 속박하는게 당신이 믿는 여신인가..!'
[이름]은 마음속으로 남자를 책망했지만
남자는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이미 알고있다는듯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오늘밤은 달이 졌군.."
흔들리는 촛불아래 남자의 그림자가 흔들리며
남자는 어둠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이내 [이름]은 뭔가 결심한듯 그녀의 무기를 챙겼다
'여신조차 할 수 없다면.. 내 손으로라도..'
남자의 말대로 달이 뜨지 않아 빛 한 점 빛추지 않는 어두운 밤
그녀는 형제들의 눈을 피해 성체 밖으로 사라졌다
그것을 조용히 지켜보던 로브를 덮어쓴 남자는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그것이 너의 운명이라면.."
..
얼마 뒤
로체스트 인근의 숲에서 법황청의 병사들이 수색을 하고있었다
벌써 며칠째 수색중이었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들이 찾는것은 보이지 않았다
"..."
그들의 머리 위에는 말 없이 그들을 지켜보는 [이름]이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심호흡을 한 후 오른손의 단검을 고쳐잡았다
잠시 후
법황청의 병사들은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땅에 고꾸라졌다
목뒤에 박힌 단검을 뽑아내며 가죽으로 만든 팔보호대로 칼날에 묻은 피를 닦아내었다
그러나 잠시 숨 돌릴 틈도 없이 멀리서 다른 병사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그들이 도착했을때 [이름]은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젠장.. 이대로는 안돼..'
벌써 며칠씩이나 계속되는 추격에 [이름]은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이대로라면 위협을 막기도 전에 자신이 먼저 쓰러질게 분명했다
어딘가 신분을 감출곳이 필요했다
그러던중 콜헨이라는 작은 마을의 용병단에서 용병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게되었다
법황청의 눈을 피해 숨어들기에 적합하다 생각한 [이름]은
터덜터덜 콜헨으로 향해 걸어갔다
'레타.. 지켜봐줘.. 다시는 그 참극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반드시 지켜보이겠어
그것이 내가 너에게 속죄할 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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