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뭐야?" 마코토가 물었다.
"내일 전파음성방송 대본이에요. 제가 고사성어를 소개하는 전파음성방송을 맡게 되다니 정말 기뻐요! 더 요조숙녀다워진 것 같아요!"
"그렇구나! 대단한 왕이네. 3년이나 놀았는데도 순식간에 가장 강한 나라를 만들다니……. 나는 3년 놀면 아무리 노력해도 톱아이돌은 꿈도 못 꿀 것 같아." 하루카가 말했다.
"톱아이돌이 문제가 아니라 몸이 다 굳어서 춤도 못 추지 않을까?" 마코토가 맞장구쳤다.
"아예 잊혀질지도 모르지, 요즘은 3년이면 잊혀지고도 충분할걸. 난 너희들이 충분히 능력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쟨 뭐야?'라고 받아들일 것 같은데. 너희는 3년 쉴 거라느니 하는 말 하지 말아줘." 프로듀서가 너스레를 떨었다.
"에밀리가 고사성어라니……. 정말 의외인 거야. 미키는 그런 거 지루해서 별로인 거야." 조수석에 앉아있던 미키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요즘 제법 화제가 되는 것 같아. 그쪽 PD도 반신반의하긴 했지만, 첫 방송 이후에 에밀리랑 고전의 조합이 잘 어울린다는 평이 많이 나오더라고." 프로듀서가 대답했다. 그는 물론 다른 아이돌들도 미키의 화제 전환에 자연스레 말려들었다.
"저는 처음부터 프로듀서가 잘 고르셨다고 생각했어요! 에밀리는 목소리가 이쁘니깐요, 굉장히 여성스럽다니깐~ 부러워~ 좋겠다~"
"마코토님도 참! 과찬이셔요. 마코토님께서는 늠름하시면서도 듬직하시고 또 무엇보다 정말 귀여우시잖아요!"
"그러고 보니까, 치하야도 내일 에밀리랑 같은 스케줄에 나가지 않아?"
하루카가 옆자리에 앉은 치하야를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치하야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루카에겐 익숙한 반응이었다. '오늘 오후 레슨 계획이라도 짜는 걸까?' 하루카는 그렇게 생각하며, 치하야에게 굳이 되물으려 하지 않고 마코토를 거들어 에밀리를 칭찬해 주었다. 마코토는 '요조숙녀'다움을 추구하는 에밀리의 모습이 꿋꿋하면서도 우아하다면서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가면서 칭찬을 이어갔다. 에밀리는 자신을 추켜세우며 즐겁게 재잘거리는 선배들의 모습에 부끄러워하면서 어쩔 줄 몰라했지만, 얼굴에는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미키는 뒷좌석에서 떠들썩하게 이야기하는 동료들의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새근거렸고, 치하야 역시 석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루카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간간이 치하야를 쳐다보았다. 치하야는 눈도 거의 깜빡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고민이 있는 것 같았다. 하루카는 치하야가 여전히 생각이 많고, 이런저런 걱정 역시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별날 정도로 진지한 성격이 어디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차가 시어터에 도착하자, 프로듀서가 수첩을 꺼내 다섯 사람의 일정을 확인한 후에 뒷좌석에 앉은 아이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치하야는 극장에서 레슨, 하루카는 지난 주에 다 못한 화보 촬영이 남아 있네. 나머지 세 사람은 스케줄 끝이고. 그럼 치하야, 미안하지만 다른 사람들 내려주고 올 테니 먼저 가서 레슨하고 있을래? 아오바 씨 계시니까 열쇠 받으면 될 거야."
"……."
"치하야?" 치하야가 생각에 빠진 채 대답이 없자, 하루카가 치하야의 팔을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앗, 죄송해요, 뭐라고 하셨나요?" 치하야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다른 애들을 먼저 바래다 주고 올게. 치하야, 무슨 일 있어?" 프로듀서가 말했다.
"맞아, 아까부터 혼자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있던데." 마코토도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치하야를 쳐다보았다.
"호, 혹시 제가 너무 경망스럽게 떠들었나요……?"
"그런 거 아니야, 에밀리. 그냥……. 생각을 좀…….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치하야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 뒤 황망히 차에서 내려 극장으로 들어갔다. 하루카는 그런 치하야를 보며 불안감을 느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다. 마코토는 자신이 잘못한 것 아니냐며 안절부절 못하는 에밀리를 달래주었다. 미키는 계속 자고 있었다. 하루카는 치하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프로듀서의 표정을 보고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까지 화기애애했던 차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들은 한 사람 한 사람 헤어지며 평소처럼 인사를 나누었다. 일부러 평범한 척 하며 달라진 분위기를 덮어보려는 무언의 시도였다. 마코토와 미키, 에밀리가 차례차례 내린 뒤, 뒷좌석에 홀로 남은 하루카는 무심코 빈 옆좌석에 손을 짚었다가 무언가가 놓여 있는 것을 깨달았다. 치하야가 앉아있던 자리였다. 라디오 대본이었다. 하루카는 자신도 모르게 그 대본을 눈앞에 들고 제목을 읽었다.
"『아이돌과 함께 보는 말랑말랑 고사성어』 "
제목 밑에는 불비불명(不飛不鳴)이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조그맣지만 또박또박 쓴 글씨였다. '날지 않고 울지 않는다.' 하루카는 치하야가 쓴 네 글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속으로 되뇌었다.
하루카는 '날지 않고 울지 않는 새'라는 말을 들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치하야를 떠올렸다. 처음 발표된 이후 이른바 '대표곡'으로 널리 회자되는 치하야의 노래 『파랑새』의 영향인지, 지금까지도 치하야에게 '새'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다는 것을 하루카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단지 팬들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하루카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팬들이 그랬듯, 하루카도 치하야가 언제까지고 자신이 부르고 싶은 노래를 마음껏 부를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름없는 무명 기획사 소속 아이돌로 함께 시작하여 많은 일을 겪어온 동료로서일 뿐만 아니라, 치하야의 노래를 사랑하는 한 명의 팬으로서의 마음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하루카는 치하야가 웃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즐겁게 노래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언가에 짓눌리듯 무거운 분위기와 경직된 표정을 띠는 것은 하루카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경쟁 기획사에서 치하야의 상처를 들추어내고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던 사건을 하루카는 여전히 잊지 않았다. 하루카는 그 일을 계기로 치하야가 자신의 날개를 옥죄고 있던 사슬을 풀고 지금처럼 날아오를 수 있었다는 점도 알고 있었지만, 혹시라도 또 다른 고민과 번민이 치하야의 날개를 붙잡아 땅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드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날지 않고 울지 않는 새'라는 말을 들었을 때 치하야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하루카의 마음속에 걱정이 가득해졌다.
"치하야가 걱정돼?"
프로듀서의 말에 하루카는 조금 전 치하야가 그랬듯 깜짝 놀랐다. 하루카는 당황해서 얼버무리려고 하다가 이내 관두었다. 프로듀서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한 것인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루카는 치하야의 대본을 다른 물건들과 뒤섞이지 않도록 가방 한켠에 고이 집어넣었다.
"……네, 프로듀서님도 그러시죠?"
"네가 보기엔 치하야가 무슨 고민하는 것 같아?"
하루카는 프로듀서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였다. 방금 한 생각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조금 에둘러 말하는 것이 좋을까. 어쩌면 자신이 괜한 걱정으로 넘겨짚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하루카는 대답을 망설였다.
"물론 네가 오해하는 걸지도 몰라. 나도 마찬가지고. 그래도 있는 그대로 말해주면 좋겠어."
"…프로듀서님, 제가 무슨 생각하는지 어떻게 아셨어요?"
"아마 같은 생각을 해서이지 않을까." 프로듀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가 괜히 지레짐작으로 걱정하는 걸지도 몰라요. 아니, 그런 거였으면 좋겠어요."
"그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 누구나 다 그럴 수 있어. 하지만 그런 지레짐작도 오해도 설레발도 다 받아주는 것이 프로듀서의 일 아니겠냐.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고. 아, 그리고 나 이래봬도 그런 지레짐작도 요즘 꽤 능숙하게 받아넘길 수 있게 됐거든."
하루카는 어제 아침 극장 로비에 도착하자마자 프로듀서와 츠무기가 실랑이를 벌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츠무기가 온몸으로 부끄러워하는 티를 내면서 어디론가 가버렸던 모습을 떠올렸다.
"프로듀서님, 옛날에 '그 일' 기억하세요?" 하루카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말을 꺼냈지만,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응, 기억하고말고. 그때는 네 덕이 정말 컸어. 아마 치하야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치하야랑 에밀리가 하는 내일 라디오 방송의 고사성어 말인데요, 그게 왠지 옛날 일을 떠오르게 만드는 단어라서……."
"혹시 치하야가 악몽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까, 그런 얘기구나?"
"네……."
"하지만 그 고사성어는 전혀 다른 내용이잖아? '그 일'과는."
"알아요, 저도 알지만……. 괜한 생각이 자꾸 들어서……."
"너는 치하야를 참 아끼는구나."
"네?! 아, 아니, 그건……. 그러니까……. 그, 아끼기는 한데……." 머리에 매인 리본이 마치 하루카와 한몸인 듯 흔들렸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지. 나도 어젯밤에 갑자기 '만약 내가 프로듀서를 못하게 되면 뭘 하고 살까'라는 고민이 들면서 잠을 설쳤거든."
프로듀서의 말에 하루카는 뒤로 넘어갈듯 놀라면서 그게 무슨 말이냐고 프로듀서를 다그쳤다. 프로듀서는 당연히 그럴 일 없을 거라면서, 치하야가 아니라 너를 달래야할 것 같다고 대답했다. 하루카는 프로듀서가 괜한 소리를 해서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면서 툴툴거렸고, 프로듀서가 웃으면서 사과했다.
"난 그저 예를 든 것 뿐이야. 별로 좋지 않은 예시긴 하지만 말이야. 아마 치하야도 네 이야기를 듣고 똑같이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내 말은, 지금 네가 하는 고민도 스치듯이 지나가는, 그렇지만 그런 것 치고는 심각하게 받아들이곤 하는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거야. 나도 치하야가 고민하는 모습이 신경 쓰였고, 아마도 그 라디오 대본에 관한 것일 거라고 생각하기는 해. 하지만 아마도 네가 생각하는 그런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하루카는 프로듀서가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자 안심이 되었다.
"너도 잘 알겠지만, 치하야는 달라졌으니까. 그 후로도 정말 많은 일이 있었잖아. 39프로젝트가 시작되고, 다양한 음악에 드라마, 영화, 그리고 수많은 공연까지……. 물론 치하야만 그런 게 아니라 너랑 다른 아이돌들도 마찬가지지. 39프로젝트 전에도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많은 게 달라지긴 했지만, 나는 39프로젝트가 너희를 정말 많이 바꾸어 놓았다고 생각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특히 치하야는 아직 좀 고지식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냉정하다고 해야 할까, 그런 면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말 따뜻하고 밝아졌다고 생각해. 『End of the world』 영화 촬영 중에 미키랑 치하야가 에밀리의 노래에 대해 지적했던 거 생각 나?"
하루카는 어렵지 않게 그때 일을 떠올렸다. '파이널데이'가 이끄는 '아웃레이지 군'에게 붙잡혀 강제로 노래하게 된 '아마릴리스'의 노래라고 하기에 위화감이 느껴진다는 지적이었다. 처음 그 점을 지적했던 미키가 갑작스러우면서 짤막하게 말하는 바람에, 에밀리는 물론 자신까지 난처했던 기억이 났다.
"그러고 나서 치하야가 참고용으로 CD를 가져와서 에밀리에게 건네줬어. 자기도 제대로 설명을 못했다면서, 구체적으로 다시 조언을 해주더라구. 아마 그날 밤에 많은 노래들을 들어보면서, 뭐라고 말할지 스스로 정리를 했을 거야. 치하야는 말주변이 좋은 사람은 아니야. 장단점의 문제를 떠나서 그냥 그런 애라는 말이야. 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다시 생각하고 준비하는 그 마음가짐이 나는 인상적이었어. 비록 즉석에서 바로 바로 도움을 주진 못할지라도, 시간을 들여서 최선의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는 모습 말이야. 그건 지금의 치하야이기에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지금의 치하야라면, 분명 무언가 고민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과거에 얽매여 있던 과거의 모습은 결코 아닐 거라고 믿어."
"…그러면 프로듀서님께서는 치하야가 무슨 고민을 한다고 생각하세요?"
"어떻게 하면 그 고사성어를 '말랑말랑하게' 전할 수 있을까, 뭐 그런 고민이지 않을까? 너도 알지만 지금도 걔는 고지식하잖아. 난 아직도 시호 동생이 학예회에서 부를 곡에 대해서 굉장히 진지하게 설명해줘서 시호가 난감해했다는 일이 잊혀지질 않아."
"말씀을 들으니 조금 안심이 되네요, 제가 보기엔 무척 가라앉아 있어서 말도 걸기 힘들 정도였거든요……."
"반쯤은 희망사항이야. 좀 더 무거운 고민일지도 모르지. 자기 인생에 대한 고민 같은 것."
"바로 그렇게 말씀하시면 방금 제 말은 뭐가 돼요?" 하루카가 장난스레 투덜거렸다.
"중요한 건 치하야의 고민이 아무리 무거울지라도, 그 고민이 걔의 발목을 끌어당기는 어두컴컴한 늪은 아니라는 거야. 오히려 햇살이 밝게 비추어주는 바위산 꼭대기를 향해 오르면서, 자신이 바로 올라가고 있는 건가 잠시 멈춰서 생각하는 것에 가깝다고 할까."
"프로듀서님, 방금 그 비유 있죠. 프로듀서님이랑 안 어울려요." 하루카가 미소를 지었다.
"뭐래, 기껏 생각해서 한 말인데……. 도착했어. 들어가자."
하루카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자신이 괜한 걱정을 한 것이라는 확신을 얻자 마음이 놓인 것이었다. 하루카는 토끼처럼 깡총거리면서 스튜디오로 들어가려다 세 발짝도 못 가고 앞으로 꽈당 넘어졌다. 프로듀서가 혀를 끌끌 차며 하루카에게 다가갔지만, 하루카는 프로듀서가 차 문을 닫기도 전에 용수철이 튀어오르는 것처럼 벌떡 일어섰다. 하루카는 등에 둘러멘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뒤에야 옷을 털었다. 프로듀서는 그런 하루카의 모습을 보고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카, 부탁 하나 할게."
"네! 오늘 저녁에 치하야한테 대본 꼭 전달할게요!" 하루카가 큰 소리로 외쳤다.
"…하루카,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어떻게 알았어?"
"아마 같은 생각을 해서이지 않을까요!" 하루카는 그 말을 남기고 의상실로 향했다.
치하야는 레슨을 마치고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왜 이리 머리가 복잡할까' 치하야는 그렇게 생각하며 짐을 싸던 중, 대본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레슨룸 곳곳을 뒤지고, 시어터 전체를 헤집으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의 대본에 대해 물었지만 답을 들을 리가 없었다. 치하야는 자신이 차에 놓고 내렸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탓하면서 전화를 꺼내들었다. 프로듀서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치하야는 한참동안 핸드폰 자판과 씨름을 벌였다. 성급하게 작성하다가 오타가 나거나, 아예 메시지 기능이 꺼져버리기도 했다. 치하야는 잠시 숨을 고르고 처음부터 메시지를 작성하기로 했다. 치하야가 몇 초 동안 숨을 가다듬고 다시 메시지를 쓰려던 그 순간 전화가 왔다. 하루카였다.
"여보세요?"
"치하야~! 선물이 있어!!"
"…미안해, 나 지금 내일 쓸 대본을 찾는 중이라. 아직 레슨룸에 있어."
"잘됐다! 어디 나간 거 아닌가 싶었거든! 바로 갈게! 산타라구요, 산타!!"
"산타라니 무슨……. 하루카? 하루카?"
갑작스레 걸려온 전화는 치하야가 반응할 틈도 없이 끊어졌다. 그리고 치하야가 메시지의 첫 글자를 다 쓸 틈도 없이 하루카가 문을 벌컥 열고 뛰어들어왔다. 치하야가 하루카를 돌아보는 순간, 하루카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치하야가 황급히 하루카에게 달려갔지만, 하루카는 멋쩍게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일어났다.
"조심해야지……. 아무리 실내지만 막 넘어지면 위험하다고 몇 번을 말해?"
"미안……. 빨리 선물 주고 싶어서 서둘렀지 뭐야."
"정말이지……. 선물이 뭐길래 그래?"
하루카는 대본을 내밀었다. 치하야는 놀란 표정으로 대본과 하루카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하루카는 치하야의 표정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의기양양해졌다.
"후후후……. 어때? 하루카산타 반갑지?"
"크리스마스는 10달이나 남았는데 왜 산타인 거야……."
치하야가 쿡쿡 웃자, 하루카 역시 함박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사이좋게 손을 잡고 극장을 나왔다. 미사키도 퇴근했기에, 두 사람은 극장에서 마지막으로 나온 사람들이었다. 하루카와 치하야는 둘 다 웃는 표정이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하루카는 치하야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것을 질문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고, 치하야는 평소처럼 조용히 걸었다. 하루카가 집으로 가는 전철을 타는 역 앞에 도착했을 때, 하루카는 여느 때와 같이 인사를 하려던 치하야를 불러세웠다. 치하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그 고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봐도 돼?"
"……이 대본에 나오는 것 말이야?"
"꼭 대답해주지 않아도 돼. 난 그냥……. 에밀리가 그 고사성어에 대해 얘기했을 때부터 네가 뭔가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무슨 일 있나 걱정도 되고……. 미안해, 치하야."
"아니야, 미안하긴……. 걱정해줘서 고마워." 치하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고사를 들었을 때, '나는 과연 그런 새가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 고사성어에 나오는 왕은 일부러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은 거였다고 생각해. 3년 동안 누가 충신이고 누가 간신인지 등을 낱낱이 파악하기 위해서 말이야."
"공부 많이 했구나, 역시 치하야다워." 하루카는 프로듀서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고 속으로 안도했다.
"그리고 그 왕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능력에 대해 확신이 있었을 거야. 단 한 번의 날갯짓만으로 누구보다도 높고 멀리 날 수 있다는, 단 한 번의 울음으로도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 수 있다는……. 그렇지 않다면 신하의 수수께끼에 그런 대답을 하지는 않았겠지. 나는 능력이 있다는 것 자체보다도 그런 자신감에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왜?"
"나는 아직까지도 내가 가야할 길은 어디인지, 내가 지금 하는 것이 과연 최선의 선택인지 고민이 돼. 부끄럽지만, 이미 한참 전에 똑같은 고민을 했던 적이 있었어. 지난 시어터 정기공연 때 말이야. 그때는 '그저 높이, 그저 멀리' 날아가는 것이 내 길이라는 결론을 내렸어. 그게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내가 지금 그러고 있는 것일까 다시금 의구심이 들었을 뿐이야. 라디오 대본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
"넌 잘 하고 있어! 지금까지 계속 높게, 멀리 날아왔잖아! 네가 한 번 노래하면 청중들이 항상 놀라워했잖아! 내가 옆에서 보고 들었는걸!" 하루카가 외쳤다. "내가 보장할게. 이 하루카산타가 말이야!"
"…산타 말고 아이돌 하루카의 보장은 없어?"
치하야가 살짝 웃어 보였다. 하루카는 그런 치하야를 잠시 쳐다보다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럼 믿을게. 다른 누구도 아닌 동료가 보장해준 거니까."
생일글 쓰려다가 충동적으로 이야기 형식으로 선회했는데,
별 구상 없이 생각나는대로 막 쓰다보니 시간은 오래 걸리고 글은 늘어지는 것 같네요
12시가 넘어가니까 뭔가 마음이 급해지는 바람에 뒤로 갈수록 글이 날림이 되었습니다만
어쨌거나 치하야 생일 기념 축전 삼아 시도해봤습니다.
한 번 날면 누구보다도 높이 날고 한 번 노래하면 누구보다도 멀리 울려퍼지는
아이돌로 남아주길 바라면서 치하야의 생일을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