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을 안보신 분들은. 전편을 보고 오시면 더 재밌게 읽으실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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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inven.co.kr/board/lostark/5337/3348?stype=subject&svalue=카제로스->3화
https://m.inven.co.kr/board/lostark/5337/3442?stype=subject&svalue=카제로스->4화
잿빛으로 물들어가는 심연의 바다를, 카제로스는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걸터앉아있는 이 절벽은 페트라니아의 드넓은 대지가 전부 보이는 몇 안 되는 장소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세계가 어둠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카제로스님. 부르셨습니까?”
그런 카제로스의 뒤로 아브렐슈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을 돌린 채 카제로스가 손으로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치자, 아브렐슈드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카제로스님?”
멍하니 앉아있는 카제로스를 아브렐슈드가 한번 더 불렀지만, 카제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
고통스러웠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서 참을 수가 없었다. 피가 흘러내릴 정도로 두 주먹을 움켜쥐어도 이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앞으로 다가올 전쟁에서 도망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브렐슈드의 기억에 남아있는 자신,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카제로스마저 죽여야 했다. 그것이 최소한의 배려니까. 홀로 남겨진 채 변해버린 자신을 봐야하는 그녀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니까....
“아브렐슈드...”
차라리 그녀에게 말한다면 어떨까. 두렵다고. 다가올 전쟁이, 이 손에 묻을 피가 너무나 무섭다고. 이제 그만 멈추는 것도 괜찮지 않냐고.
“붉은 달을 포기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페트라니아가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어”
사실이었다.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페트라니아를 비추던 붉은 달은 이제 거의 모든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한 줌의 빛으로 혼돈의 권좌를 비출 뿐, 그곳을 제외한 페트라니아의 모든 곳은 점점 이전의, 본래 페트라니아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여기서 점점 커져만 가는 어둠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쩌면 이게 페트라니아의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어. 빛과 질서는 아크라시아의 것이고, 어둠과 혼돈은 페트라니아의 것. 그냥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을, 내가 무리해서 바꾸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 또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페트라니아는 탄생할 때부터 어둠과 혼돈을 안고 태어났다는 것. 그걸 알면서도 페트라니아를 구원하고자 달려왔다. 군단을 통해 질서를 만들고 붉은 달을 만들어 빛을 비추려 했다. 하지만 붉은 달을 포기하고 잠시 멈춰 선 것만으로 순식간에 페트라니아는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마치....이때까지 달려온 것이 다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냥 모두 관두고 너와 함께 그저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어둠이든, 혼돈이든 신경 쓰지 않고 원래 정해진대로 살아가는 것도...”
그렇게, 이미 정해진,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을 핑계로
“아브렐슈드. 페트라니아건, 질서건 생각하지 말고, 나와 함께 도망치지 않을래?”
두려움, 자신의 진짜 속마음을 숨긴 채 그녀에게 도망치자고 애원한다.
“카제로스님...”
카제로스의 말에, 아브렐슈드는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 대체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어둠과 혼돈으로 물든 페트라니아를 누구보다 싫어했으면서, 그 지옥을 누구보다 벗어나고 싶어 했으면서 갑자기 왜 도망치자는 말을 하는 걸까.
“...........!!”
카제로스가 아브렐슈드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그제서야 그의 눈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의 눈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공포로 매워져있었다. 신과의 싸움을 앞두고도 당당했던 그의 눈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본 아브렐슈드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다.
“저는......”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다. 도망치자고, 당신이 이렇게까지 두려워한다면, 차라리 이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저 당신과 함께할 수 있다면 그 어떤 곳에서라도 행복할 것 같다는 말이 목 밑까지 차올랐다.
“그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브렐슈드는 말했다. 그럴 수 없다고.
“어째서?”
“그건....카제로스님이 원하시는 대답이 아닌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망치자는 말에 그렇게 하자고 답해줄 정도로 저는 카제로스님을 모르고 있지 않습니다.”
“내가?”
카제로스의 말에 아브렐슈드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그가 꿈꿔왔던 세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아브렐슈드는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아는 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페트라니아에서 제일 강하고, 그렇기에 모든 것을 누리며 살 수 있었던 사람”
싸움과 살육이 전부인 혼돈의 세계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 약자를 짓누르고 힘의 정점에 군림하며 살 수 있었던 사람.
“하지만 그럼에도 제일 약하고, 누구보다 괴로워하며 살아온 사람”
여리고 여린 마음에, 자신과는 상관없이 이 세계가 고통받는 것을 보며 괴로워했던 사람.
“그저 끊임없이 싸우는 게 전부인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 세계를 구원하고자 한 사람”
본래 그렇게 태어나 모두가 당연하다고 받아들인 이 혼돈의 섹례에, 유일하게 빛과 질서를 가져오고자 끊임없이 달려온 사람.
“그런 당신이....이 세계를 두고 도망칠 리가 없잖아요”
아브렐슈드의 말을 들은 카제로스의 눈이 흔들렸다. 누구보다 자신을 믿고 있기에, 항상 자신의 곁에 있었기에 할 수 있는 말.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얼마나 믿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니야...-
그렇기에 부정하려한다. 나는 네가 믿고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잠깐 멈춰 선 것 만으로, 잠깐 돌아가는 것 만으로 포기할 리 가 없다는 건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페트라니아를 두고 도망친다면 분명 후회할 거라는 걸, 이 세계를 외면하지 못할 거라는 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야!!-
페트라니아를 두고 도망치려 한다고. 죄악을 짊어지는 것이 두려워서, 아크라시아에 이 지옥을 떠넘기는 것을 견딜 수가 없어서 스스로를 포기하고 도망치려 한다고. 나는....네가 믿고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저는 그런 카제로스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무너져 내린다. 빛처럼 자신을 비추는 그녀의 미소가.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카제로스의 결심을 무너트렸다. 품에 안기며 속삭이듯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카제로스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그녀를, 자신의 품에 안긴 그녀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카제로스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두 입술이 포개어지자 아브렐슈드는 놀란 듯이 몸을 움찔했지만, 이내 카제로스에게 몸을 맡기며 눈을 감았다.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를 너무나도 사랑한다. 그렇기에 사라져버릴 기억이라해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추억이라고 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솔직해지기로 했다.
“아브렐슈드.....나도 널 사랑하고 있어.”
그렇기에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 또한 그녀를 사랑한다고. 그 무엇보다 눈앞의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 그녀에게 속삭인다.
“카제로스님이 어떤 선택을 한다 하셔도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스스로 후회할만한 선택만은 하지 말아주세요. 페트라니아를 위해 달려왔던 당신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제가 돕게 해주세요. 당신이 원했던 세계를 곁에서 지켜보는 것이 제 유일한 바램이니, 그것을 이룰 수 있게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카제로스의 고백에 아브렐슈드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포기하지 말아달라고. 나의 꿈을, 내가 원했던 세계를 포기하지 말아달라고.
“응.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게. 아브렐슈드”
차마 스스로를 포기하겠다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도망치고자 한다는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무시하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마지막 부탁을 한다.
“그러니까 아브렐슈드. 나를 잊어줘”
“네......?”
순간 그녀는 직감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 자신의 감정을 숨겨왔던 그가 왜 지금 고백하고 있는 것인지, 왜 그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인지.
“카제로스!!! 그게 무슨”
“미안해. 아브렐슈드”
아브렐슈드가 카제로스를 붙잡으려 했지만, 카제로스는 불꽃이 꺼지듯 눈앞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몸을 옮긴 카제로스는 벽을 붙잡고 주저앉았다. 오늘 하루는 버틸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힘의 대부분을 잃은 붉은 달이 빛을 잃어가는 속도는 카제로스의 예상을 훨씬 상회했다. 어둠을 폭주시킨 뒤 몸에 적응시키는 기간까지 생각하면, 정말로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미련은 없어.”
마지막으로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그녀에게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
눈가에서 흘러내리는 눈물과 함께 그는 미친 듯이 웃었다.
“미안해 아브렐슈드....”
자신의 가슴을 움켜잡으며, 카제로스는 마지막으로 내뱉었다.
“너와 함께하지 못해서”
쿠웅ㅡ!!!!
자신의 모든 혼돈의 힘을 한 곳에 끌어모아 폭발시키자, 혼돈의 기운이 어둠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빛으로 정제한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지만, 그는 전신을 타고 들어오는 혼돈의 기운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페트라니아를 구원해야 해-
그의 여정은, 그의 유일한 소망으로부터 시작됬다.
-이 고통받는 세계를 정화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죽여야만 해-
세계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같은 세계의 일원인 혼돈의 존재들을 몰살시켰다.
-아직도 부족해. 진정한 질서를 위해서는 우리를 비춰줄 빛이 필요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빛이, 이 페트라니아를 비춰줄 빛이 필요했다.
-어째서.....어째서 안 되는거야? 내 목숨을 바쳐도......이룰 수 없는거야?-
빛을 만들기 위해 붉은 달을 만들었지만 실패했다. 목숨을 깍아내도 영원히 빛나는 태양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빼앗으면 됩니다. 카제로스님-
아브렐슈드의 목소리가 들린다. 결국 페트라니아의 질서를 위해서는 빼앗을 수 밖에 없다고.
-그렇다면 또 얼마나 죽여야 하는 거야?-
그리고 빼앗기 위해서는, 또다시 죽여야한다.
-더 이상 죽이고 싶지 않아- -아크라시아를 지옥으로 물들이고 싶지 않아-
-너무 고통스러워- -얼마나 더 피를 묻혀야 하는 거야?-
-대체 얼마나 더 죽여야 페트라니아를 구할 수 있는거야?-
온갖 사념이, 절망이 밀려들어온다. 더 이상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그의 마음은, 이를 극복할 수 없었다. 아니, 극복해서는 안된다. 이 혼돈을, 이 절망을 받아들여야 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거지?- -나만 이렇게 괴로운거야?-
-대체 왜 이 세계는 이렇게 태어난거야?- -더 이상 고통받고 싶지 않아-
-왜 우리에게는 빛을 나누어주지 않는거야?-
물밀 듯이 흘러들어오는 사념에 카제로스의 정신이 오염되기 시작했다. 고통받았기에 구원하고자 했던 그의 신념은, 왜 이런 세계에서 태어났는지에 대한 원망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왜 그들만 빛을 소유하고 있는거야?- -왜 페트라니아를 방관하는거야?-
-왜 우리만 고통받아야 하는거야?- -어째서 함께 행복할 수 없는거야?-
-아크라시아는 우리를 버렸어- -그들만 행복하면 다야?-
-우리도 빛을 원해- -그들은 우리의 고통을 몰라-
페트라니아가 혼돈으로 태어났듯이, 아크라시아 또한 그저 질서로 태어났을 뿐이다. 하지만 이미 몸에 차오른 혼돈과 어둠은 점점 아크라시아를 향한 증오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아크라시아를 침공해- -그들에게 우리의 고통을 알려줘-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그들보다 우리가 빛을 위해 훨씬 더 희생해왔어-
-아크를, 빛을 아무런 대가 없이 누린 그들은 자격이 없어-
“으아아아악!!!!!!!!!”
이제 완전히 혼돈에 잠식된 그의 정신이 조각나 사라지기 시작했다. 엄청난 격통이 밀려들어오면서 의식이 희미해져갔다. 이대로......이렇게 사라지기 직전.
“아니야!!!!!”
마지막으로 들려온 사념의 목소리만큼은, 인정할 수 없다. 카제로스는 점점 혼미해져가는 정신을 붙들고 소리쳤다.
“빛을 누리는 데 자격 같은 건.....필요 없어!!!”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의지를 내뱉었지만, 그것뿐이었다. 이미 그의 인격은 조각나 파괴되었고, 사라지기 직전 내뱉은 단말마일 뿐이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하지만 사념의 목소리와 함께, 카제로스를 옥죄던 고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것뿐만 아니라 점점 망가져가던 정신도 맑아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자신이 있던 곳의 풍경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백색의 텅 빈 공간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말로, 빛을 누리기 위한 자격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너는.....”
사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자, 이때까지 보지 못한 대악마가 서있었다. 그 악마를 보자마자, 카제로스는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넌.......나구나”
-그래. 난 너다. 카제로스-
올곧게 검을 휘두르던 두 팔은 비정상적으로 길어졌고, 머리의 두 뿔은 카제로스의 뿔보다 훨씬 더 커져있었다. 그에 맞게 거대해진 덩치를 가진 악마의 모습은 사슬전쟁에 기록된 대악마 카제로스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네가 완성되었다면, 나는 사라졌어야 했을 텐데.....어째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거지?”
-찰나일 뿐이다. 너는 지금 이미 사라지고 있는 중이고, 아주 잠깐 남아있는 시간동안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이지. 그러니 이 잠깐의 시간동안 ‘나’였던 너에게 묻고 싶다.-
대악마가 손가락을 튕기자 주변의 풍경이 순식간에 혼돈의 권좌로 바뀌었다. 카제로스의 자리였던 권좌에 앉은 대악마는 카제로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혼돈과 어둠에 물들었다고 해도, 나는 너다. 기억도, 신념도 일치하지. 이 페트라니아를 구원하고 빛과 질서를 가져오는 것.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것 또한 다르지 않아. 하지만 너의 마지막 한마디는 이해할 수 없더군. 어째서 빛을 누리기 위해 자격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빛을, 질서를 누리기 위해 자격이 필요하다면, 그 순간 빛을 누릴 수 없는 자들이 생겨나게 되. 그렇게 된다면 누군가는 또 이 페트라니아와 같은 지옥을 겪어야만 한다고. 나는 이 페트라니아의 지옥을 없애기 위해 이때까지 싸워온 것이지 누군가에게 이 지옥을 넘기기 위해 싸워온 것이 아니야.”
수 없이 말해온 그의 신념. 누구보다 이 지옥을 증오하기에 이 지옥을 없애기 위한 것이지, 이 지옥을 떠넘기기 위해 달려온 것이 아니다.
-나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너는 아크라시아와의 전쟁에서 도망치고자 한다는 것도. -
“...................”
-그 소원은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빛이 존재한다면, 그림자 또한 존재하기 마련이지. 빛과 어둠, 질서와 혼돈은 필연적으로 동시에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거다. 그렇다면 누가 빛을, 질서를 누려야 할까?-
그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카제로스를 보며, 대악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답하지 못하는 구나. 또 다른 나여-
“그렇다면, 너는 빛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카제로스의 물음에 대악마는 자신의 주먹을 쥐어보이며 그에게 말했다.
-그건 누가 더 간절한가. 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페트라니아는, 그리고 너이자 나인 카제로스는 빛과 질서를 위해 끊임없이 싸워왔고, 수 없이 많은 피를 흘리며 달려왔지. 그에 비해 아크라시아는? 그들이 빛과 질서를 누리기 위해 노력한 것이 무엇이 있지? 그저 태초부터 정해진 이 불공정한 역할에 따라 빛을 누리고 질서 속에서 살아가며 어둠과 혼돈 속에서 고통 받는 페트라니아를 방관한 그들에게 빛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
-이것이 내가 도망치지 않을 수 있으며, 아크라시아를 벌할 수 있는 이유다. 이룰 수 없는 소원을 두고 죄악감에 빠져 도망치는 네 녀석과는 달리, 나는 죄악감에 빠지지도 않으며 그들에게 당당히 혼돈을 선사할 수 있는 것이다. 네 녀석들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고. 아크라시아에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이유다.-
대악마의 말을, 카제로스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으니까. 아브렐슈드, 그리고 페트라니아의 대부분의 악마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페트라니아를 방관하고, 아무런 노력 없이 빛을 누리고 있다고. 그들을 벌하고 빛을 되찾아줄 존재로 카제로스,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대악마는.....페트라니아가 바라는 이상적인 카제로스의 모습이었다.
“어쩌면, 본래 카제로스였던 것은 내가 아니라 너였을 지도 모르겠군.”
-이제 그렇게 될 것이다. 또 다른 나여-
“그렇다면,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카제로스의 말에 대악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깊이 생각해두었던 것. 인격을 바꾸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하는 것. 아브렐슈드가 떠올라 잠시 멈칫했지만, 카제로스는 대악마에게 말했다.
“나를, 바뀌기 이전의 카제로스를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줘”
-물론 그렇게 할 것이다. 군단장들을 포함한 악마들이 나와 너를 혼동한다면 통제하기 힘들테니, 페트라니아의 모든 기억 속의 너는 사라지고 지금의 나로 덮어 씌워질 것이다. 하지만....괜찮은 것인가?-
괜찮은 것인가. 라는 대악마의 말에 카제로스는 피식 웃었다. 눈앞의 대악마 또한 나다. 인격은 달라졌을지라도 카제로스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카제로스. 그렇기에 그가 무슨 의미로 그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괜찮......을 리가 없잖아.”
그가 싸워왔던 것, 그가 추구했던 것.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 페트라니아의 수많은 악마들, 그리고 자신을 도와왔던 군단장들,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여자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다. 카제로스라는 존재 자체가 이 세계에서 지워진다. 그것을 어쩔 수 없다며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만 해. 또 다른 너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페트라니아를 위해서, 그리고 그녀를 위해서 반드시 나는 사라져야 해. 그래야만.....상처받지 않을테니까”
-.......-
카제로스의 말을 들은 대악마는 조용히 자신의 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손에 검붉은 혼돈의 기운이 모여 원형의 구체를 이루었다.
-이 안에, 너에 대한 이 세계의 모든 기억이 담겨있다. 이 구를 부수면 너가 원하는 대로 너는 이 세계에서 완전히 잊혀지겠지. 허나......그렇게 하지 않겠다.-
“뭐.....?”
대악마에 말에 카제로스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 또한 권좌에 앉은 채 그저 카제로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의 적막이 흐르고, 대악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너를 기억하마-
“...........”
-나 또한 너지만, 나만은 과거의 또 다른 내가 존재했었다는 것을 기억하마. 너가 이 페트라니아를 구원하고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고, 피를 묻혔는지 내가 기억하겠다. 나는 너와는 달리 혼돈에서 만들어진 존재이지만, 너의 기억을 기둥삼아 페트라니아를 구원하겠다는 의지만큼은 내가 잇도록 하겠다.-
대악마의, 아니. 이젠 카제로스인 그의 말에 잊혀져가는 한 남자는 미소 지었다. 다른 것을 몰라도 그 또한 페트라니아를 구하겠다는 신념 하나만큼은 나와 같다고 생각한 남자는 그제서야 웃으며 사라질 수 있었다.
“페트라니아를 부탁해. 카제로스”
-설령 이 전쟁에서 패배한다 할지라도. 페트라니아에 빛과 질서가 찾아오는 그날까지 포기하지 않겠다. 그러니, 이제 사라져라. 과거의 망령이여-
카제로스의 말과 함께 검붉은 구가 폭팔하며 혼돈의 기운이 페트라니아 전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이곳은 심상공간이지만, 바깥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 수 있었다. 손끝에서부터 점점 가루가 되어 사라져가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잊혀질 한 남자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나왔다.
“아브렐슈드.......”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그녀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미안해.....그리고 사랑해”
심연에서 태어나 페트라니아를 위해 달려온 자. 혼돈의 세계에서 질서를 찾고자 신에게 맞서고, 끝내 승리하여 불완전한 질서를 가져온 자. 빛으로 이 페트라니아를 비춰 완전한 질서의 세계를 만들고자 하였지만, 이룰 수 없는 꿈에 절망하고 빼앗아야 한다는 죄악감에 짓눌려 결국 포기하고 도망친 자.
심연의 군주, 카제로스는 그렇게 이 세계에서 잊혀졌다.
“아아아악ㅡㅡ!!!!!!!!!!!!!”
정신없이 카제로스를 찾아다니던 아브렐슈드는 갑자기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마치 누군가 머릿속을 뒤집는 것처럼, 참을 수 없는 격통이 이어졌다.
“이.....이건 대체 뭐야.....?”
자신의 기억이 사라지고, 새로운 기억이 밀려들어왔다. 그녀가 모르는 누군가가 기억 속에서 새롭게 자리잡기 시작했다.
“카제로스.....?”
카제로스와의 기억. 하지만 그 기억 속에 있는 카제로스는 그녀가 알고 있는 카제로스가 아니었다. 전혀 다른, 별개의 존재가 점차 카제로스의 기억 속에서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브렐슈드. 나를 잊어줘-
순간, 마지막으로 카제로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불안이 의심으로, 그리고 의심이 지금 이 순간 확신으로 변하고 나서야 아브렐슈드는 카제로스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안돼ㅡㅡ!!!!!!!!!!!!!!!!!!!!!!!!!!!!!!!!!!!!!!!”
모든 기억이 하나둘 카제로스가 아닌, 심연의 대악마로 덮어 씌워져 간다. 그녀가 함께했던, 사랑했던 카제로스는 점점 기억에서 사라져 잊혀져가기 시작했다.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안돼ㅡㅡ!!!!!”
-나와 함께 이 세계를 구원해보지 않겠어?-
카제로스와 처음 만났던 기억이, 사라져간다.
-내게 힘을 빌려주지 않겠어?-
그의 손을 처음 잡았던 순간이, 잊혀져 간다.
“싫어.....싫어 카제로스. 제발 내게 돌아와줘.....제발....”
잊혀져가는 기억을 붙잡고 절규하는 아브렐슈드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브렐슈드”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아는 그의 목소리에 아브렐슈드는 고개를 들며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카제로스가 서 있었다.
“아아..........”
익숙한 검붉은 기운. 위용을 뿜는 두 뿔. 대악마의 걸맞은 그의 몸은 그녀의 기억 속에 카제로스였
“아아아아악ㅡㅡㅡㅡㅡㅡㅡㅡ!!!!!!!!!!!!!!!!!!!!!!!!!!!!!!!!!!!”
머리를 뒤흔들며 부정한다. 하지만 이미 덮여 씌워진 기억이 눈앞의 악마가 카제로스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아니야. 당신은 카제로스가 아니야ㅡㅡㅡㅡ!!!!”
“아니. 내가 바로 네가 원했던 카제로스다.”
“뭐.....?”
카제로스의 말에, 순간 아브렐슈드의 기억 속에서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단 한번만....우리를 위해서, 이 페트라니아를 위해서 악마가 되어주지 않겠어?-
“설마.......”
“그래. 네가 원했기에. 아브렐슈드 그 누구도 아닌 네가 원했기에 그 녀석은 자신을 포기할 수 있었던 거다. 페트라니아의 진정한 빛과 질서를 원하는 너의 소망에 답하기 위해 그 녀석은 스스로를 포기하고 악마가 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면......카제로스는 나 때문에 사라진 거야?”
“그래. 그러니까 네년에게는 슬퍼할 자격이 없다. 네가 원했던 것이니까”
“아하하.......아하하하하”
카제로스의 말에 아브렐슈드가 힘없이 웃었다.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며 미친 듯이 웃었다.
“대체 왜......대체 왜에에ㅡㅡㅡㅡㅡㅡㅡㅡ!!!!!!!!!!!!!!!!!!!!!!!!!!!!!”
가슴을 부여잡고 그녀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 이미 그가 아닌 그를 향해 눈물을 쏟아내며 절규했다.
“내가 원한 건 그런 게 아니었는데.......당신이 죽어 버릴까봐. 죽어서 내 곁에서 사라질까봐 무서웠던 건데. 내가 원했던 건.....이런 게 아니었는데.”
그가 사라질까봐, 붉은 달을 붙잡고 점점 피폐해져가는 그가 정말로 죽을 것만 같아서 그에게 애원했던 건데.
“.........차라리 죽여줘”
아브렐슈드는, 눈앞의 카제로스를 바라보며 애원했다.
“페트라니아의 빛도, 질서도 다 필요 없어. 그가 없다면.....내가 사랑했던 카제로스가 없다면 다 아무 필요 없어. 그러니까....제발 날 죽여줘. 카제로스.”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 아브렐슈드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미 삶을 포기한 자의 미소. 더 이상 살아갈 의지를 잃은 그녀를 본 카제로스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향해 가져갔다. 그리고..
“그건 허락할 수 없다. 아브렐슈드”
“뭐.....?”
“넌 몽환군단장이자 이 페트라니아 최고의 책략가다. 너처럼 유능한 인재를 잃을 수는 없다. 하지만 걱정하지마라. 그와 관련된 기억은 모두 사라질테니까. 그저 지금처럼 저항하지 말고 받아들이면 된다.”
그녀가 움직이기도 전에, 카제로스는 그녀에게 닿은 손에 힘을 불어넣었다. 한층 더 거대한 혼돈의 힘이 그녀를 덮치면서 그녀의 기억이 순식간에 덮여 씌워지기 시작했다.
“아아아악ㅡㅡ!!!!!”
간신히 붙잡고 있던 기억들이 순식간에 사라져간다. 기억 속에 카제로스가 모두 찢겨 사라지고, 그 자리를 눈앞의 카제로스가 대신한다. 그와의 소중한 추억이 없었던 일로 사라지고, 눈앞의 카제로스와 있었던 일로 각색된다.
“싫어.....절대 잊지 않아. 절대로 그 사람을 잊지 않을거라고!!!”
절규하며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잊지 않기 위해, 그녀를 사랑했던, 그리고 그녀가 사랑했던 그를...
“아.....?”
누구였더라....?
“기억이.....나질 않아...”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 속에서 미소지어줬던 그의 얼굴은 백지가 되어 사라지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그에게서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나도 널 사랑하고 있어.-
“아....”
카제로스와의 마지막 기억마저, 서서히....
“제발. 이 기억만큼은 제발ㅡㅡㅡㅡ!!!!!!!!!!!!!!!!!!!!”
기억 속 사진에서 찢겨 나가는 그의 얼굴을, 그의 목소리를 붙들고 놓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그와의 마지막 순간을. 세상에서,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애원하고, 빌고, 저항한다. 하지만 그런 아브렐슈드를 카제로스는 감정 없는 눈으로 바라보며 그녀를 향해 더욱 자신의 힘을 불어넣었다.
“아아.......”
마지막 기억마저 사라져버린 아브렐슈드의 눈동자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랑했던 카제로스가 담겨있던 그녀의 두 눈동자는, 차디찬 흰자만이 남아 허공을 바라보았다.
“감정이 완전히 죽어버린 것 같지만 오히려 그 편이 더 낫겠군. 새로 태어난 것을 환영한다. 아브렐슈드”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브렐슈드를 보며 카제로스는 만족한 듯이 미소 지었다. 창백한 두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아브렐슈드의 눈가에서 마지막 눈물이 흘러내리며,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카제로스를 향해 몸을 일으켰다.
“몽환군단장 아브렐슈드. 위대한 심연의 군주이신 카제로스님을 따라 아크라시아에 마지막 혼돈의 예언을 실현시키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