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캐로 로헨델 스토리 감상하다가, 갑자기 삘받아서 아브렐슈드의 게르디아 세뇌에는 어떤 배경이 있었을까 제멋대로 상상해서 대충 끄적인 소설이에요
팬픽게시판이 없는줄알고 자유게시판에 올렸는데 찾아보니까 있었네요!
모바일로 복붙한거라 가독성이 안좋을수 있어요
문체는 진지하지만 재미로만 봐주세요!
"엘레노아, 요즘 디그네가 널 찾던데. 숲의 정령들이 이유없이 불안해하는 탓에 원인을 자세히 조사해줄 사람이 필요한가 보더군."
그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알현실 정상의 샹들리에가 반짝거렸다.
"아, 사실 클리포테가 먼저 절 찾아와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탐색을 했습니다만, 해결된 참입니다. 아무래도 제나일의 탁한 마력이..근처로 조금씩 흘러들어오는 게 원인인 것 같아요. 새벽의 탑 마법사들에게 방금 조치해두라 일렀으니, 곧 해결될 겁니다."
"...제나일."
그 단어를 듣자 아제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뭔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눈을 부릅뜨고 계속하라는 손짓을 보이자 엘레노아는 말을 이어갔다.
"네. 이상한 점이라면 몽환 마법의 기운이 조금 느껴졌다는 건데..뭐, 당시 배후에 아브렐슈드가 있었던데다 최근에 침입한 적도 있으니, 이상할 것도 없겠죠.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
"잠깐."
시종일관 비스듬히 기대 있던 아제나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눈은 여전히 엘레노아를 보고 있었지만 곧 그녀의 타고난 마력으로 감지한 새로운 인물에게로 돌리게 될 터였다. 평소라면 신경을 끄고 있었겠지만, 이 익숙한 불청객은 걸음을 서두르고 있었다. 주위에 어른거리는 탁한 마력도 함께였다. 제나일에서 온 중요한...그리고 그 중에서도 나쁜 소식일 것이 분명했다. 그 오염된 땅에서 좋은 소식이라고는 그 때 이후로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여왕님. 계셨군요.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그래. 프라이트. 경비병들의 검문 의례를 무시하는 거만한 태도도 오랜만에 보니 반갑군. 무슨 일로 이렇게 정화 작업도 없이 여기까지 찾아온 거지?"
"무례를 끼쳐 송구합니다. 꼭 보셔야 할 게 있습니다."
"지금 네 손에 달려있는 그 책 말인가?"
"맞습니다. 제나일의 미래에 대해 경고했던 예언가.."
아제나가 나지막히 읊조렸다.
"사무엘."
아제나는 기억을 떠올렸다. 로아룬 광장에 나와 엘조윈의 쇠락과 제나일의 멸망을 목놓아 부르짖던 그 모습을. 처음엔 다급한 외침이었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듣지 않자 점점 광기가 그 자리를 채워갔다.
마지막에는 달의 탑 연구자들을 한명 한명 붙잡은 채 매달렸고, 제나일 폭발 전날 에아달린을 찾아간 것을 끝으로 다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이미 지나간 일은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게 사슬전쟁 이전부터 500년 넘게 지도자로 살아온 아제나의 가치관이었지만, 항상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 의혹을 완전히 떨쳐내기는 불가능했다.
사무엘의 모습을 실제로 봤었던 그 때, 그 말을 한 번이라도 귀 기울여 들었더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제나일은...아직도 평화로운 모습이었을까? 에아달린과 달의 탑 마법사들은...베른이 아니라 그곳에 있었을까? 라는 등의 최후의 미련.
그것은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보고 싶다는 그리움과 교묘하게 얽혀 있었으나, 지혜로운 아제나도 거기까지는 알아챌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자기 자신의 내면을 돌보지 않은 채로 몇 백년의 세월이 흘렀다.
...니나브가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남긴 말도 아제나의 머릿속에 불현듯 떠올랐다.
"넌 운명을 믿지 않지, 아제나. 그렇지만 내가 아는 한 딱 하나 유일하게 남는 진실이 있다면, 그건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는 거야.
난 확신해, 그래서 기다려야 해."
아제나는 이어서 생각했다. 운명이라고? 그 말대로라면, 사무엘의 연설은 애초부터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 예언이 사실이라면 애초에 아무도 믿지 않아 제나일이 몰락하는 것까지 예언에 포함되어 있어야 하니까. 어차피 운명의 굴레 안에 있을 거라면 우리의 노력은 어떤 의미가...
"아제나."
이난나의 목소리가 아제나의 머릿속에 울렸다.
"프라이트가 기다리고 있어요."
"...알고 있다. 영혼을 전승 받지 못해 그 누구도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지 않았지. 근데 그자가 이제 와서 어쨌다는 거지?"
프라이트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 거리더니 목소리를 낮추고는 거의 들리지 않을 것 같이 말했다.
"이 이후로는 매우 긴히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달의 탑 유적지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엘레노아, 수고해 줘서 고맙다. 디그네에게는 내가 직접 말해주도록 하지. 가서 쉬어라."
"감사합니다."
"여기인가?"
"맞습니다. 먼저 여기 이걸 보십시오. 새로운 사무엘의 필사본이 발견되었습니다."
"예언에 대해 적혀 있었나 보군."
"물론 그렇습니다만, 중요한 건 놀랍게도 두 번째 예언이 적혀 있었습니다. 저희와 다르게 여왕님은 따로 대조할 필요 없이 바로 알아보실 수 있을 테니, 직접 읽어보시지요."
...그녀가 곧 칼의 인을 떼니 강이 솟아오르고 산이 가라앉았다. 하늘이 붉게 물들고 땅은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죽이고 서로의 목을 조르고 피가 피를, 폭풍이 산불을 낳는다. 모두가 공포에 떨며 자신을 배신할 이웃 뒤에, 언덕과 들판에 숨는다.
다음 불의 인을 떼니 타오를 수록 어두워지는 불이 물을 뒤덮고 땅을 짓이긴다. 마침내 구름을 집어삼킨 화마의 혓바닥이 달을 휘감고 태양을 가린다. 대낮이 그림자보다 어두워지고 현자는 재갈을 물고 죄수는 족쇄를 벗는다.
다음 눈의 인을 떼니 계속해서 새로운 꿈이 등장하며 주위의 모든 곡식이 시들고 의복이 찢어지고 벽이 녹슨다. 끝내 땅의 권세 잡은 자는 쓰러지매 붉은 꼬리 달린 기사가 왕관을 창에 걸고 찬탈자에게로 향한다. 찬탈자는 불타고 있으나 또한 웃고 있으며 눈이 가려져 있고 심장은 새카맣다. 마침내 자기 심장을 뽑아 여인을 조각한 뒤 그 왕관을 씌우고는 이윽고 다른 모든 것과 함께 재로 돌아가려 한다. 그 조각상은 이윽고 스스로 눈을 뜨고 움직이더니...
"...굉장히 알아보기 힘든 고대 실린 상형문자가 마력으로 쓰인데다, 이 뒤로는 유실되어 있군. 짐작 가는 바가 있나?"
"지금 복구 인력들이 열심히 찾아보고 있지만, 보십시오. 이 부분은 원래 있었던 부분이 아닙니다. 여길 보면 기존에 있었던 부분과 이 부분만 이음새가 다릅니다. 조악하게 붙여져 있는데다 마력이나 마력도구를 써서 봉합한 흔적이 있습니다."
아제나는 그 말을 듣고는 마치 연인의 옷자락 촉감을 느껴보려는 실린처럼 약간의 마력을 담은 채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래. 근데 이 페이지...다른 부분과 다르군. 내구성, 특히 마력에 대해서 강하다. 물리적으로는 얊지만 아주 정교한 구조로 되어 있어. 특수한 재료를 넣은 것 같은데."
"맞습니다. 결정적으로, 그 종이는 달의 탑에서 자체적으로 개발했던 자료 보관용 종이입니다. 아니, 기존에 로헨델에서 사용되던 종이와는 재료도 다르고 제작법도 달라 아예 다른 용어를 써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던 참이었다는 기록이 그 재질의 기록지로 쓰여있습니다."
아제나는 그 특이한 '종이'를 여전히 살펴보고 있었다.
"가공뿐만 아니라 기록도 마력이나 마력도구로 해야 하는 모양이군. 대신 솜씨만 좋다면 수정이나 봉인이 상상 이상으로 쉽겠어. 밤보족이라면 모르겠지만 이 정도라면 최소한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꽤 알려졌을 법도 한데, 왜 들어 본 적도 없는거지?"
"그건...그 제품이 작은 마력 실험 폭발 사고가 잦게 일어나던 멸망 직전의 제나일에서 필요성을 느끼고 개발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프라이트의 목소리가 갑작스레 힘이 빠지고 대신 슬픔이 들어찼다. 마치 체념한 듯, 아니면 한탄하는 듯 한 목소리였다.
"결국 시제품 이후 정식으로 세상에 나오지는 못했죠. 사무엘이 구한 것도 바로 그 시제품이었을 겁니다. 종이 자체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모두가 두려움에 휩싸였던 그 당시 제나일과 관련된 것이라면 모두 폐기되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선 흔적조차 찾아보실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제작법의 대부분이 그 재질로 온전히 보관되어 있으니 조금만 연구한다면 이어서 생산할 수도 있었지만, 새벽의 탑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마치 부정한 흉물이나 되는 듯 무시하고 거들떠보지도 않..."
"그만. 결국 무슨 말을 하려는 지는 알았다. 이 페이지는 제나일 폭발 직전에 쓰인 것이고, 결국 사무엘의 여러 필사본 중 아마 이 책이 유일하게 이 부분을 갖고 있는 책일 거라는 뜻이군. 그런데 지금 뒷부분이 사라져 있고."
프라이트의 체념은 급기야 분노로 바뀌었지만, 그걸 표출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그는 애써 평정을 되찾은 뒤 빠르게 다음 이야기를 시작했다.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그러면?"
"사무엘은 항상 특이하게도 자신의 모든 기록에서 빠짐없이 본인이 풀어낸 핵심을 먼저 적어놓고 꿈의 내용을 뒤에 상세하게 서술했습니다. 꿈의 내용을 아예 기록하지 않는 경우도 흔했죠.
그런데 이건 반대로 사무엘의 의견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의 직관으로도 해석이 불가능했거나, 아니면 최소한 소실된 뒷부분에 적혀 있었을 겁니다. 어느 쪽이든 뭔가 달라졌습니다. 이건 전혀 다른 내용의 예언입니다. 새로운 멸망이라는 겁니다."
"비약일 수도 있다. 제나일의 문물을 사용했다는 건 그 문물이 개발되게 된 배경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일 수 있어. 난 꿈추적 전문가는 아니라 정확하진 않겠지만 내용 역시 기조를 같이 하는군."
'음...제 생각은 다른걸요.'
선잠에서 깬 이난나가 불현듯 정신에 끼어들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그렇다 쳐도...여기 이 세 번째 묘사는 이상하잖아요? 이런 내용은 전혀 새로운걸요. 전문가가 아니어도 알 것 같아요.'
'이난나. 그건 나도 알지만, 꿈, 그리고 그중에서도 몽환과 관련되어 있는 건 원래 통일성이 없고 이해하기 힘들게 되어 있어. 개별적인 이미지보다는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해야 해.'
'그렇다 해도 이건...'
"내용이 확연히 다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프라이트가 마치 이난나의 목소리를 듣고 맞장구치는 것 같다는 느낌에 그 오랜 세월 살아온 아제나도 잠깐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이어진 내용이 더 큰 불쾌감을 주자 그런 생각은 빠르게 잊혀졌다.
"애초에 이 종이는 마력 폭주 속에서 기록의 장기 보관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표지 안쪽에 이미 그런 처리가 되어 있어 책 전체가 보호받고 있지만 그 중에서 딱 이 부분만 특별히 이렇게 쓰였다는 건, 시기를 고려했을 때 이미 늦어버린 것 같은 제나일의 멸망 다음의 누군가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겁니다, 여왕님!"
"천천히 고려를 해봐야..."
그러나 프라이트는 다급함으로 흥분한 나머지 어조가 격해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여왕의 말을 중단시키고 자기 주장을 쏟아냈다.
"고려할 문제가 아닙니다. 폭발로부터도 살아남은 기록이 어디로 갔겠습니까? 분명 누군가 뜯어내 제거한 겁니다. 몽환군단장의 목표가 제나일 다음엔 어디겠습니까? 제나일에서 하던 실험을 아직도 하는 곳이 있답니까? 필시 분명 로헨델과 엘조윈의 몰락을 얘기하는 겁니다. 대체 뭘 망설이시는 겁니까? 두번 다시 제나일의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지금 당장 조치를 취해야..."
"그만!"
아제나가 단번에 프라이트의 말을 끊었다.
"네가 오만하고 무례한 고집불통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만, 이 정도로 경솔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지금 누구 앞에 서 있는지 잊은 건가?"
"...죄송합니다. 저는..."
"무엇 때문에 이런 옛 유물에 집착하는 지 알 것도 같다. 오랜 기간 제나일의 참혹한 잔상을 지켜봐 온 너라면 민감해질 수 밖에 없겠지. 결국 로헨델을 위한 마음에서 그런 거니, 이번 한번은 이해하겠다. 단,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멍청한 언행을 보인다면, 응당한 처벌이 있을 거란 것만 명심해라."
"...알겠습니다."
'온전히 진심으로 반성하지는 않는군. 여전히 반신반의하고 있어.'
아제나는 낯빛만으로 속내를 알아차렸지만 굳이 지금 다시 다그칠 필요는 없었다. 고집이 세면서도 판단력이 흐려진 인물. 이 어리석은 실린의 손에서는 우선 문제를 떨어트려 놓아야 한다.
"일단 이 문제, 그리고 관련된 모든 자료는 내게 넘겨라. 내가 적임자를 찾아 직접 조사하지. 나와 당사자만 알고 있을 테니, 너도 이제 잊어버려. 네가 있을 곳으로 돌아가라."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말입니까?"
"그래. 게르디아. 네가 이제부터 이 사건을 맡아줘라. 할 수 있겠나?"
권유지만 명령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게르디아는 해야만 했다. 제나일을 밥 먹듯 드나들며 참상을 가장 오래 지켜봤고, 때문에 관련된 지식에 대해서 줄줄이 꿰고 있는 실린. 당시 사건의 생존자인 제나일 실린들과의 소통이 가장 원활하고, 정보를 얻기 용이한 인물. 숨겨진 마법적 지식이 있다면 손쉽게 알아낼 만한 마력을 보유하면서도 탁한 마력의 힘에 저항할 정도의 정신력이 보장된 고대 정령의 계약자. 예언의 배경이었던 제나일이 증발하고 당사자들은 베른인이 되어버린 지금은, 적임자로 불지킴이 게르디아가 유일했다.
또한 그는 여왕이 로헨델에서 가장 신뢰하는 부하 중 하나이기도 했다.
"물론입니다. 이런 일을 맡겨주시니 영광입니다. 책임지고 전말을 알아내겠습니다."
"그래. 잊지 마라. 너가 탐색할 건 과거의 예언이 아니라 예상되는 미래다.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중요하지만 그녀가 정확하게 어떤 미래를 본 건지가 더 중요해. 단독행동하지 말고, 뭔가 면밀히 확인해야 하거나 힘을 써야 한다면 정말 긴급하지 않은 이상 나를 불러.
여기 내 증표다. 힘을 결속시켜 두었으니,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을거다. 엘레노아에게도 일러 두었으니, 과거의 흔적이 필요하다면 그녀를 불러. 단, 그녀에게 무슨 정보를 공개할지는 내가 정한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게르디아를 떠나보낸 아제나는 한숨을 내쉬고 머리속에 마지막 과제를 떠올렸다.
제나일.
이 지긋지긋한 단어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게 반갑지 않았다.
하지만 아제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언제까지고 방치할 수는 없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단지, 신목 엘조윈의 힘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 여전히 축복받은 대지를 먹여살릴 정도는 되지만, 로아룬 다음으로 큰 도시이자 산맥 하나 크기였던 그 폐허의 거대한 파멸과 붕괴를 전부 되돌리기란 이제 불가능에 가깝다.
가능하다 해도 그건 제나일과 엘조윈을 교환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도자로서 그런 선택은 내릴 수 없었다.
게르디아는 알현실을 나가며 문제의 예언서를 펼쳤다. 그리고 그도 보았다.
프라이트가 자신도 모르게 경도된, 원래 저작자가 아닌 것만큼은 분명한 누군가가 마력이 너무 강한 사람은 보지 못하도록 영악하게 설계해 놓은 수많은 도형과 마법진들. 아제나는 복잡한 설계도에서 완성의 형태를 읽어내는 데에 익숙했지만, 그런 사람은 좀 더 의미없어 보이는 변두리의 낙서에는 눈을 감은 것이나 다름없는 법이다. 환자의 몸에서 화살촉을 빼내기 위해 수술하는 의사가, 그 근처 살갗에 그려진 문신에 무슨 외국어가 쓰였는지 번역하려 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 낙서를 적어 놓은 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아제나에게서 게르디아에게 이 책이 넘어갈 거란 건 자명한 사실이기도 했지만 그 누군가의 예상 범위 안에도 들어 있던 것 같았다.
오랫동안 제나일을 지켜봐 온 건 프라이트와 게르디아뿐만이 아니었다.
'....아크.'
그 방법밖에는 없었다. 엘조윈에 숨긴 지혜의 아크 라디체. 루테란과 약속한 아크의 안전을 위해서 아크의 존재는 모두에게 숨겼지만, 더 지체했다간 위험해질 게 뻔했다. 고대 정령들의 가호가 여전히 엘조윈을 보호하고 있지만 500년 만에 빛의 기둥이 올랐고, 악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항구에서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이미 루테란 왕국에서는 아크가 발견되었다고 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곧 힘을 둘러싼 전쟁이 벌어질 건 예언이나 예측 따위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영원히 안전할 수는 없다. 아크...그리고 어쩌면 그걸 지키는 아제나와 이난나의 목숨도.
'하지만...정말 먼 옛날 할족과 라제니스의 대전쟁 이래 아크의 힘을 개방한 건 사슬전쟁 때 루테란 한 명이었어. 난 이제 과거의 일곱 별 에스더도, 루테란과 같은 운명의 영웅도 아니야. 내 부름에 응답하긴 할까? 아니, 애초에 아크 하나의 힘으로 가능하긴 한 걸까?'
'하지만 지금 하지 않으면...영영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그 책을 처음 들여다본 당시 게르디아의 생각이 어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뒤돌아선 게르디아의 정신에는 분명 섬뜩한 야심의 살기가 스쳐갔다. 그러나 근심에 잠긴 아제나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게르디아의 눈에서 빛나던 종말의 전조를.
그는 드디어 찾아온 절호의 기회, 자신의 소망을 실현할 때를 스스로 부수려 하고 있었다. 책에 집중하는 동안, 로헨델의 지도자가 왜 자신에게 그 책을 주었는지 생각해 볼 여유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이미 길을 잘못 들게 되었음을 스스로도 모른다는 점이 가장 잔인한 부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