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황금빛이 사라진 자리에서
아침이 되었다.
루는 전날 카멘이 만들어준 용돈(?)을 물고 동굴 밖으로 나섰다. 왠지 더 가라앉아 보이는 그를 위해 달콤한 과자라도 가져다줄 생각이었다. 경쾌한 걸음으로 마을까지 달렸다.
너무 일찍 나온 탓일까. ‘뻥콘’ 가게는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상태였다. 루는 일단 소녀를 마중하러 이동했다. 뒤를 밟는 존재도 모르는 채, 소녀가 오가는 길로 향했다.
곧 뒤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루?”
되살아난 이후, 자신의 진짜 이름을 불러준 자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니나브!]
루는 금붙이도 내뱉고 단숨에 달려갔다.
[니나브. 이곳에서 너를 다시 만나다니 꿈만 같구나. 어떻게 알고 찾아온 게냐.]
루는 밝은 표정으로 니나브의 주위를 맴돌며 깡충깡충 뛰어댔다.
니나브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맺혔다.
“루, 정말 루가 맞구나.”
니나브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루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곧, 무릎을 굽혀 앉으며 푸근하게 루의 목을 끌어안았다.
“네가 이렇게 살아나다니. 너무 기뻐.”
[나도 반갑구나. 운명이 돌고 돌아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널 만나다니.]
니나브는 눈물을 닦아내며 루를 다시 보았다.
그녀는 눈물 반, 웃음 반인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루, 왜 이렇게 귀여워졌어.”
루는 오동통한 제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지금은 많이 컸다지만, 환생 이전의 루는 산만큼 거대한 존재였다.
[깨어나 보니 이 몸이더구나. 내 권능도 아직 돌아오지 못했고.]
“설마 말도 못 하는 거니? 루.”
가디언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니나브였지만, 새끼염소인지 사슴인지 모를 귀여운 소리로만 들렸다.
[이런. 안타깝게도 너와 소통할 영력이 아직 부족하구나. 조금만 기다리거라.]
“네가 이렇게 작아진 건, 역시 에버그레이스에게 문제가 생겨서일까?”
[뭐! 에버그레이스님이 어찌 되셨는가. 그분께 무슨 일이 일어난 게야?]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니나브는 루의 표정을 보며 의문을 잘 파악했다.
“에버그레이스가 페트라니아에서 돌아오지 못했어. 혼돈의 가디언들이 위협하는 데도 그의 기운이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아.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그래서 다른 동료들과 함께 에버그레이스를 구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중이었어.”
[이럴 수가. 그런 것도 모르고 난….]
루는 털썩 주저앉으며 귀를 축 늘어뜨렸다.
니나브는 위로하듯 루의 보송한 콧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나는 네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 네 희생 덕분에 우리가 무사할 수 있었잖아. 우린 곧 페트라니아로 갈 거야. 조금 위험한 선택이지만, 에버그레이스를 도울 방법을 드디어 찾았어.”
그 방법은 엊그제 카마인과의 만남으로 가능해진 일이었다.
에스더 중에서도 몇몇이 우려를 표했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루가 놀란 눈으로 벌떡 일어났다.
[뭐? 내가 도울 일은 없는가. 미력하나마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 하겠다.]
“걱정되겠지만, 그곳은 너무 위험해서 이렇게 작은 너를 데려갈 순 없어.”
루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런 때에 내가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다니. 아, 에버그레이스님.]
“걱정하지 마, 루. 우린 반드시 돌아올 거야. 에버그레이스와 함께.”
니나브가 일어섰다.
“루. 이럴 게 아니라, 루테란 성으로 갈래? 페트라니아까지 함께 갈 수는 없겠지만 너를 그냥 이렇게 두고 갈 순 없어. 일단 루테란 성으로 가면 널 안전하게 돌봐줄 수 있을 거야. 원한다면 엘가시아로 가도 좋아. 함께 가자.”
니나브의 권유에 루는 선뜻 나서려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가봤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뿐더러, 소녀와 카멘에게 인사라도 전해야 했다.
…카멘?
루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표정을 보며 니나브도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왜 그래. 루. 무슨 일 있어?”
[니나브. 먼저 돌아가거라. 나는 다른 볼일이….]
더 설명할 틈도 없이, 루는 뒤돌아서 재빠르게 뛰어갔다. 멀어지는 루의 뒷모습을 향해 니나브는 작게 중얼거렸다.
“루. 또 만나. 꼭 에버그레이스를 구해서 돌아올게.”
니나브의 작별 인사는 굳은 다짐이기도 했다.
***
루는 동굴까지 헐레벌떡 뛰어갔다.
[카멘, 그대…헉헉…페트라니아에서 언제 왔는가? 헉헉, 혹시 에버그레이스님의 상황에 대해…헉…아는 게 있는가?]
후드의 그림자 속에서 그가 눈을 떴다.
“…….”
[부탁일세. 말해주게나.]
루는 그의 앞까지 바짝 다가갔다.
[제발 도와주게. 에버그레이스님께 무슨 일이 생겼네. 그대는 강대한 힘을 갖고 있으니 도움을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절박한 표정.
카멘, 그에게는 낯선 표정이었다. 그의 앞에 선 자들의 표정은 대부분 공포와 절망, 그것이 아니라면 광기 어린 숭배뿐이었다. 그것들을 벌레 보듯 관망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더러 신념을 보인 자들도 있었지만, 그의 무료함을 달래주기에도 역부족이었다. 단 하나를 제외한다면.
카단.
그가 떠오른 것도 오랜만이었다.
이 가디언은 제 일도 아니건만 생사의 갈림길에 선 것처럼 다급해 보였다.
[그대는 페트라니아에 대해 잘 알지 않은가. 에버그레이스님을 위해 부디 힘을 보태주게.]
마침내 카멘이 굳었던 입을 열었다.
“가디언. 에버그레이스가 너에게 무슨 의미인가. 그가 무엇이길래 스스로 이리 몰아가는가.”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에버그레이스님은 나의 창조주일세. 당연하지 않은가.]
“너와 같은 피조물인 바르칸은 그를 등지지 않았던가.”
바르칸이란 이름이 나오자 루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혼돈의 가디언을 이끄는 수장이자, 형제. 그리고 루를 죽인 가디언이기도 했다.
[바르칸은 아크라시아의 생명들이 균형을 망친다 생각했었네. 게다가 카제로스의 미혹에 넘어가….]
루는 입을 꾹 다물었다. 눈앞의 존재가 그 카제로스의 군단장 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존재였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다. 다행히 카멘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너의 창조주가 네게 죽으라 한다면 따를 텐가.”
[에버그레이스님이 그런 명을 내리실 리 없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분이 옳다고 판단된다면 난 즉시 따르겠네.]
“너는 이미 한 번 죽지 않았던가.”
[난 내 의무를 다했을 뿐이네. 그것은 나의 창조주, 에버그레이스님이 주신 이성과 내 의지로 판단한 것일세.]
카멘은 깍지 낀 손을 풀고는 팔짱을 끼었다.
“후회하지 않는가? 그 결과가 지금의 네가 아니냐.”
[내 오랜 친구를 위해서 기꺼이 감수한 일이네. 그것이 아크라시아를 위한 일이기도 했고. 내 선택에 후회는 없네.]
카멘의 금빛 눈동자가 천천히 루의 시선과 마주했다.
루의 맑고 푸른 눈동자 속에 비친 것은 그 자신의 실루엣이었다.
“…본능만 남은 짐승이 되더라도, 너는 그리하겠는가?”
루는 눈에 힘을 주었다.
[난 짐승이 아닐세! 힘은 없지만, 본능만 남은 것도 아니네. 난 내 의무를 기억하고, 의지도 갖고 있다네. 나는 가디언일세! 그건 변함이 없지.]
루는 곧 놀란 표정이 되었다. 의도와 달리 감정이 섞여 크게 나갔다.
그걸 카멘의 면전에서 내뱉었으니.
걱정과 달리 그는 고요했다. 언제나처럼 침묵이 이어졌다.
잠시 후에야, 그가 짧게 답했다.
“…그렇군.”
차분하던 그의 목소리였지만 왠지 더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인 듯도 했다. 루의 기대와 달리, 그는 후드 속에서 눈을 감았다.
“…물러가라. 가디언.”
[하지만….]
“물러가라.”
단호한 언성이었다.
루는 고개를 숙이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터덜터덜 동굴 입구까지 걸음을 옮겼다. 뒤를 돌아보면 카멘은 어둠 속 그림자에 묻혀 실루엣으로만 보였다. 루는 그를 처음 마주한 날처럼 동굴 경계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후에 소녀가 찾아왔고, 시무룩한 루를 보며 걱정스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도 루의 귀는 내내 축 처져있었다.
***
다음 날, 루는 삐쳤다.
종일 고개를 숙이고 투레질을 해대며 한숨만 푹푹 쉬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시무룩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런 루를 보며 소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누누. 어디 아파?”
소녀가 루를 위해 좋아하는 당근을 잘라주고 양배추도 잔뜩 내어 주었다.
루는 투덜거리면서 다 먹었다.
또 다음 날.
루는 카멘의 입장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에버그레이스님과 그는 적에 가까웠다. 아니 그냥 적이었다. 500년 전, 사슬 전쟁 때는 에버그레이스님과 직접 대적하기도 했다. 니나브를 비롯해 에스더들과 계승자, 모두가 그와는 적이었다.
앙금이 해소된 상태도 아니다. 그가 선뜻 나설 수 없는 까닭도 있을 것이다.
루가 배탈이 나서 끙끙 앓으며 내린 결론이었다.
사흘째.
루는 자신이 정말 에버그레이스를 도울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에버그레이스님.]
이를 보고 소녀가 깜짝 놀라 동굴 아저씨를 찾았다.
“아저씨. 누누가 아파요. 치료받으러 가야 할 것 같아.”
소녀의 걱정에도 동굴 아저씨는 별 반응이 없었다.
언제나처럼 어둠에 묻혀 있을 뿐.
나흘째, 루와 소녀는 같이 울고 있었다.
“아저씨 누누를 치유사한테 데려가요. 누누가 이러다 죽으면 어떡해. 밥도 못 먹어서 배가 홀쭉해졌어.”
루의 배는 여전히 통통했다. 하루에 양배추 다섯 통을 해치우던 아기염소가 며칠째 세 통밖에 못 먹었으니 큰일이었다. 물론 당근과 순무는 별도였다.
“이러다 누누가 죽으면 어떡해. 아저씨 펫이잖아. 누누랑 치료하러 가요. 안 그럼 내 친구가 없어지잖아. 으아-앙.”
무심한 아저씨 대신 소녀가 데려가 보려고 했다. 꼬리를 잡고 끌어봤자 송아지만 한 루가 움직여 주질 않았다.
“아저씨. 빨리. 누누가 아프잖아. 으아-아앙.”
[에버그레이스님. 내가 어찌.]
야속한 동굴 아저씨는 오늘도 고요했다.
온종일 울다 눈이 퉁퉁 부은 소녀가 동굴 아저씨를 원망하며 돌아갈 때쯤, 루가 엉거주춤 일어나 소녀를 배웅했다.
그날, 울다 지친 루는 일찍 잠이 들었다. 꿈에서 에버그레이스님이 나왔다.
산보다 거대하고 웅장한 황금빛 그분이 무어라 말씀하시는 듯했다.
“…일어나라. 가디언.”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루는 반쯤 감긴 눈으로 겨우 목을 들었다. 시커먼 후드 망토의 누군가가 옆으로 지나갔다. 아직 깜깜한 밤이었다. 어린 몸은 잠에서 깨는 것도 일이었다.
루는 비몽사몽 그의 뒤를 따랐다.
루가 동굴 밖으로 나오자 카멘이 검을 소환하고는 허공을 갈랐다. 공기가 깨지듯 균열이 가더니 검푸른 공간이 열렸다. 루는 아무 의심도 없이 그 공간으로 들어섰다.
몰아치는 핏빛 바람에 루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메마른 절벽 아래, 수많은 혼돈의 가디언이 들끓고 있었다. 루는 다급히 절벽 끄트머리까지 달려갔다.
혼돈의 가디언이 계승자와 에스더, 연합군을 에워쌀 만큼 가득했다. 지도자가 없는 빛의 가디언들은 힘을 전혀 못 쓰고, 일부는 혼돈의 가디언으로 물들기도 했다.
[안 돼. 이럴 수가.]
카멘이 루의 곁으로 다가왔다.
“페트라니아에서 바르칸이 태초의 어둠을 깨웠다. 그때부터 에버그레이스는 혼돈에 잠식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아는 마지막이다.”
어찌 보면, 루의 질문에 그가 처음으로 답해 준 것이었다.
다만 그 내용이 너무나 절망적이었고 상황도 심각했다. 루는 저 아래 전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페트라니아로 향할 수 있는 인원은 제한적이었다. 때문에 각국의 병력도 많지 않은 상태였다. 계승자와 에스더들은 카마인이 열어준 포탈을 수호하며, 끝없이 밀려오는 혼돈의 가디언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를 보며 루는 안절부절못했다.
[이대로 가다간 니나브와 계승자가 에버그레이스님께 가기도 전에 큰일이 나겠네.]
루가 이리저리 내려갈 곳을 찾았다. 카멘은 그런 루의 움직임을 잠시 지켜보았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저 작은 가디언은 필사적이었다.
그가 어둠의 검을 바닥 위에 세웠다.
“…잊었는가. 가디언. 그 어둠의 주인이 누구인지.”
루는 동작을 멈추고 카멘을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루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느새 저 하늘 위로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검은 구름은 모험가와 에스더, 혼돈의 가디언이 뒤엉킨 전장까지 덮어갔다.
그가 검의 끝으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크립트론.”
동시에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루는 진동을 느끼고 자세를 낮췄다.
진동은 점점 거세졌다. 루와 카멘이 서 있던 절벽이 검은 기운과 함께 솟구쳐 올랐다. 이어 주위의 바위산들도 함께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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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립트론은 바라트론에 맞춰 고대그리스어에서 따온 말입니다.
바라트론 어원도 AI한테 물어보니 알려 주더랍니다.
바라트론의 뜻을 보니, 무슨 구덩이라던데
영화 300의 디스 이즈 스파르타~하던 그 구덩이가 생각났습니다.
이동한 곳이 알데바란의 바다 그 어딘가쯤의 대륙이지 않을까 합니다.
스토리 공개를 더 기다렸다가 좀 더 보고 쓸까 했지만.
어느 정도 스토리가 공개되길 기다리려면 최소 반년,
뭐라도 건덕지가 나올라면 1년은 기다려야 할 듯해서
아직 열정이 남아있을 때 그냥 쓰다 보니 두리뭉실한 표현을 많이 쓸 수밖에 없더라고요.
업로드 주기를 수, 목으로 할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