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용납하지 않는 세계
바다에 퍼진 어둠은 아크라시아의 지도자들을 소집시켰다. 그 원인에 대해 모험가와 니나브가 설명했고, 해결책을 논의하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사태의 결말은 허무했다. 광범위하게 퍼져가던 어둠은 어느새 바다 깊숙이 사라져버렸다. 예측 못할 불안만 남긴 채, 지도자들의 회의도 끝이 났다.
드디어 루는 에버그레이스를 만나게 되었다. 둥지에서 만난 에버그레이스는 여전히 회복 중이었지만 예전의 위엄은 그대로였다. 그는 작아진 루를 보며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본래 그 존재답지 않게, 조금은 큰 웃음이기도 했다.
“허-허, 네 이런 모습이 놀랍구나. 허나 이 또한 네 존재의 사명에 필요한 부분일지도 모르는 일.”
에버그레이스는 회복되지 않은 루의 권능에 대해서는 차츰 돌아오리라고 답했다.
“감당할 수 없는 힘은 파멸만 부를 터이니. 천천히 기다리거라.”
에버그레이스는 돌아오라 했지만 루는 오래전처럼 그에게 다시 한번 부탁했다. 잠시 소녀의 곁을 지키게 해달라고. 에버그레이스는 허락했다. 루가 떠나는 전, 에버그레이스는 몇 마디를 더 남겼다.
“우리는 질서도 혼돈도 선택하지 않는다. 생명의 별을 지키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균형이다. 루, 네가 찾은 이가 균형추가 될지, 재앙이 될지는 계속 두고 봐야 할 것이다. 재앙은 우리에게 용납될 수 없을지니.”
루는 착잡한 마음을 뒤로한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루테란으로 옮겨졌다. 보육원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지내던 마을과 비교적 가까운 곳의 치유시설이었다. 이는 소녀의 뜻이기도 했다. 사제는 보육원장에게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보육원장은 몰래 눈물을 훔치며 침대에 누운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멀리 동굴이 있는 산이 보였다.
루가 찾아갔을 때, 소녀는 겨우 일어나 앉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그나마 루가 소녀를 미소 짓게 하는 유일한 존재였다. 때문에 루는 떠날 수가 없었다.
평소에 소녀는 창밖만을 내다보았다. 루는 소녀가 어디를 보는지 잘 알았다.
이제는 추억과 절망이 공존하는 그곳을.
***
수백 년 전, 세이크리아의 강대한 권력이 무너진 뒤 폐허가 되어 버린 어느 공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세이튼의 새하얀 눈동자가 희번덕거렸다.
“이번에는 확실할 거야. 그러니 가장 강력한 게 필요해. 너도 새로운 혼돈의 신이 탄생하는 건 싫겠지? 바실리오.”
세이튼의 맞은편, 휠체어에 앉은 후드 코트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상처 가득한 얼굴이 드러났다. 잔 상처 위로 한쪽 얼굴에 큰 상처가 남아있었다. 모험가가 남긴 상흔이었다.
바실리오는 장갑 낀 손으로 상처를 매만졌다.
“어째서 그를 먼저 처리하지 않았나? 상대적으로 더 수월했을 텐데.”
세이튼의 미간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바실리오의 손짓이 조롱하는 듯도 했다. 세이튼의 뿔처럼 솟아난 머리 한쪽도 부러진 상태였다.
“카마인이 없으면 녀석을 통제할 수단이 아무것도 없어. 너는 모를 거야. 녀석이 페트라니아에서 어떤 재앙을 불러일으켰는지. 그 재앙이 이곳에서 반복될 수도 있다고. 너도 그걸 바라진 않겠지. 응? 네가 신이 되고픈 세상이 벌써 망해버리면 곤란하잖아.”
세이튼은 제 어깨를 돌아보았다. 맞장구를 쳐줄 쿠크는 더 이상 없었다. 쿠크는 일렁이는 그림자가 되어 아무 말도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닐 뿐이었다.
바실리오는 불편한 웃음을 흘렸다.
“뭔가, 착각하는가 본데. 나는 단지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재설계하는 것뿐이네.”
세이튼의 인상이 더 험악하게 변했다.
“그거나, 저거나. 게다가 난 약간의 원한도 남았거든. 그게 우리의 힘이 될 거다. 네가 신에게 품은 원망처럼.”
***
루테란의 국경이 습격받았다. 이에 실리안은 직접 기사단을 이끌었다. 습격의 주체는 산적으로 위장한 황혼의 잔당이었다. 상황은 빨리 정리되었고 생각보다 피해는 적었지만, 실리안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왜 갑자기 국경을 습격했는지 명확히 밝히진 못했다. 다만, 어딘가로 눈길을 돌리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실리안은 곳곳으로 정찰대를 파견했다. 그리고 한 정찰대의 소식이 끊겼다. 수색 끝에 정찰병의 시신 한 구를 수습했다.
그림자와 신성력의 흔적.
정찰대의 경로도, 불길한 예감도 일전의 그 마을을 향했다.
실리안은 바로 군대를 소집했다. 이 소식을 들은 모험가도 급히 달려왔다. 실리안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동안 내가 너무 안일했네. 황혼, 어둠의 흔적, 어둠의 창, 그림자까지. 심상치 않은 보고가 반복되었음에도 고요함에 속아 더 큰 재앙을 낳을 뻔했어. 내가 진즉 대처했더라면.”
실리안의 표정에는 약간의 자책도 섞여 있었다. 모험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위로했다.
네 잘못이 아니다. 원인은 황혼과 그림자들이다.
“고맙네. 하지만 그대의 위안에 마음을 놓을 수는 없지. 나는 내 할 일을 해야 하네. 황혼이든, 그림자든, 카멘이든. 루테란의 영토를 침범한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할 거야. 절대 묵과하지 않겠네.”
카멘이란 이름이 나오자 모험가의 표정도 심란해졌다. 루의 해명이 있었지만, 이전의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 악마에 대해선 모험가도 다소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위험한 존재란 건 변함이 없었다.
왜 그곳을 노리는 걸까?
“그동안 보아온 보고서만으론 납득할 만한 접점이 없었네. 이제부터 제대로 알아봐야겠지.”
내가 먼저 알아보겠다.
“고맙네. 그대에겐 언제나 신세만 지는군. 일단은 가장 가까운 인근의 주민부터 대피시킬 생각이네. 조만간 루님도 이곳으로 모셔야 할지도 모르네. 그 인연이 있다는 소녀도 함께.”
실리안은 애써 웃었지만, 그 안의 근심을 모험가는 잘 알았다.
모험가는 급히 일전의 마을로 향했다.
모험가가 도착한 마을은 물론, 인근의 성까지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저 산에 무서운 악마가 나타났다는 소문이었다. 카멘이라는 악마가.
***
얼마 전, 고요한 동굴 앞에 어둠이 내려섰다.
재앙은 그대로 멈춰 있었다. 바람조차도 없었다. 그저 동굴 앞에 서 있을 뿐이었다. 고요 속에 해가 뜨고 졌다. 그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는지도 알 수 없을 어느 날, 해가 질 무렵이었다. 재앙의 뒤로 누군가가 나타났다.
긴 은발의 검사.
카단은 검을 든 상태였다. 눈앞의 재앙도 검을 들고 있었지만, 누구도 먼저 움직이진 않았다. 그렇게 두 존재가 우두커니 선 채, 밤이 되고 해가 떴다.
카멘은 여전히 등을 돌리고 있었다. 다시 해가 질 때쯤에야,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지 않는군.”
투구 너머의 음산하고 어둡게 울리는 목소리는 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카단의 시선에 힘이 들어갔다. 경계보다도 의문에 가까웠다. 카단도 입을 열었다.
“누구 말이지?”
“…모두.”
카단은 그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동굴의 입구가 보였다. 카멘은 계속 그곳만을 보는 듯했다. 카단은 루와 모험가에게 들은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아브렐슈드가 남긴 말도.
카멘이 기다리는 것은 어쩌면.
“어째서 루와 그 소녀를 살려뒀지?”
“…….”
“이곳에서 루와 그 아이와 지낸 건 무엇 때문에….”
“…에보니.”
카단의 의문이 커졌다.
“……?”
또 잠시간의 침묵 끝에 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아이 이름…에보니다.”
“…….”
카단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검을 물렸다. 빛과 함께 카단의 검이 자취를 감췄다. 상대에 대한 어떤 의심도 가라앉았다. 하지만 카멘이라는 존재만으로도 아크라시아에는 재앙이 될 수 있었다.
카단은 시선을 달리하며 입을 열었다.
“떠나라.”
“…….”
“아크라시아는 너를 용납하지 않는다.”
카멘은 여전히 동굴을 보고 있었다. 석양에 물든 동굴의 입구만 보였다. 그 너머에는 어둠만이 있었다.
아니, 하나가 더 있었다.
카멘의 손이 움직거렸다. 상흔이 남아있을, 지금은 건틀릿에 가려버린 손이.
카단은 미간에 힘을 주며 예의주시했지만, 상대는 더 움직이지 않았다.
정적 끝에 나온 카멘의 대답은
“…싫다.”
였다.
용납은 카멘, 그 자신이 하는 것이었다.
“물러가라. 카단.”
투구에서 단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카멘은 검을 옆으로 내뻗었다.
카단은 잠시 긴장했다. 하지만 그에게서 살기를 느끼진 못했다.
순식간에 동굴 일대에 어둠의 장막이 쳐졌다. 카단은 재빨리 뛰어오르며 장막에서 빠져나왔다. 어둠의 장막이 능선 위로 번졌다. 그는 멀리 떨어진 절벽에 내려서며 어둠의 벽을 바라보았다.
카단의 눈빛에 막연한 불안감이 감돌았다.
***
실리안은 난처했다. 황혼과 그림자의 흔적을 따라 군대를 이끌고 마을에 왔을 때, 군대가 마주한 건 마을의 자경단이었다.
“우린 사제님들과 악마를 잡기 위해 모였습니다.”
“내 가족이 그 악마 때문에 죽었소.”
“어째서, 그 악마를 잡으려는 사제들과 싸우겠다는 겁니까?”
카멘이란 악마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 이들이었다. 황혼은 그들을 선동해 이미 방패로 삼고 있었다. 그 사이 황혼의 사제와 기사들이 동굴로 향하는 경로를 장악했다.
항의하는 민중을 향해 실리안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대들은 모르는가. 저들은 우리 영토를 침입한 침입자다. 그들은 구원자가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카멘이란 이름에 사람들의 증오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의 복수를 해줄 자가 왕이 아니란 실망이 더 커질 뿐이었다. 신의 대행을 자처하는 거짓 사제들과 신성 기사들의 만행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세이크리아의 정식 사제단이 도착하려면 아직 더 기다려야 했다.
***
두 모름 청년과 장년의 '말 안하기' 대결은 카단 승!
개인적으론 카멘이 더 말을 안할 거 같지만. 흐름상...
자료와 설정, 탈고할 때, AI를 활용했었는데,
바실리오의 대사와 행적을 싹다 입력하고 얘 목적이 뭘까? 했을 때 나온 대답이...
'신이 떠난 세상의 새로운 설계자'였습니다.
루페온에 대한 감정에 대해선 의견이 조금 갈렸는데, 나는 원망쪽이라 생각했습니다.
혹은 바실리오가 안타레스가 아닐까 생각도 듬.
여름에 나올 라사모아 때는 바실리오의 정체나 목적이 드러날까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