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체력의 나로써는 절대 탈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살짝 실례하도록 할까..
뭐 그리해서.. 어쩔 수 없이 난 하룻밤, 그의 둥지에 살짝 껴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아니..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여긴 꿈 속인가?
어쩌면 어떤 마법사가 보인 환영일지도 모른다. 몹시 취향 나쁜 마법사구나.
정말 끔찍하네. 실제가 아니면 좋겠어.
그래, 꿈일 거야. 꿈이다. 꿈이 아니더라도 이제 이 기분 나쁜 광경은 꿈이다.
봐. 맞잖아? 당장 지금 난 식은땀을 흘리며 내 침대에 누워 있는걸.
왜 요즘 늘 악몽을 꾸는지 모르겠다.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한 여인을 죽이는 꿈이었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단두대에 결박되어 있는 누군지 모를 가련하고 불쌍한 여인의 죽음을 돕는 꿈.
왜 망설임이 없었을까? 난 지금 힘들다못해 슬퍼 울고 싶을 정도로 죄책감을 느끼는걸. 설사 꿈이라 해도..
밤엔 잠조차 자기 힘들다. 더 끔찍한 악몽으로 뒤척거린다. 목이 떨어지는 '쿵' 소리가 너무도 섬뜩하다.
그래서 난 늘 저녁을 먹자마자 잠깐 잠에 든다. 밤에는 일을 한다. 나의 백성들이 보기엔 "잠도 자지 않고 일하는 왕" 이라는 이미지를 심기 좋겠지.
사실 난 성실하지 않은걸. '왕' 이라는 자리가 너무 싫은걸. 저녁을 먹고 나른한 느낌이 들면 그나마 악몽이 적다.
그런데 이젠 그조차 아니다. 오늘로서 작은 행복도 끝인가보다.
몽롱한 기분으로 건물 가운데에 있는 베란다에 나갔다. 베란다라고 해도 창문에 가까운 형태이지만..
밖은 이미 달빛이 밝다. 생각보다 오래 자긴 했던 모양이다. 꿈 때문인지 몸은 피곤에 절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형태다.
갑자기 밖이 시끄럽다. 무슨 일이지?
"크롬."
"예, 폐하."
크롬, 빛의 기사.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올곧은 나의 기사.
어쩌면 내가 여태까지 살아있을 수 있는 것도 크롬의 덕일지도 모른다. 그는 나를 몇 번이고 구했다.
"밖엔 무슨 일이지? 왜 저리 시끄러운거야?"
아차. 또 친구를 대하듯 말해버렸어. 책사에게 혼나겠는걸.
"도둑이 들었다고 합니다. 스카이아를 노리고 들어온 듯 하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폐하는 이 크롬이 지키고 있습니다."
"저기.. 저 사람 말야?"
내가 가르킨 곳엔 한 사람이 달리고 있었다. 까마귀 부리 모양의 모자와 화려한 수트. 확실히 도둑의 이미지인걸.
"예. 확실히 쫓아 낸 듯 하군요."
나는 갑작스레 호기심이 끓어 넘쳤다. 어쩌면 이 호기심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을지도.
하지만 알 수 없는 이끌림이란 이런 것일까? 마치 그 곳에 가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은 느낌.
"내려가보자!"
크롬을 몹시 당황시킨 한 마디였지만 난 확고했다. 꼭 가야 할 거 같아.
도둑의 이미지가 "아름다움"에 가까워서일까. 확실히 멋진, 아니 아름다운 곡선형이었지.
원하는 물건을 주어서라도 이야기를 해 보고 싶은걸. 어쩌다 도둑이 되었는지.. 라던가. 분명 왕으로서의 업무에도 도움이 되겠지.
뒤에 크롬을 데리고 궁의 입구를 나갔다. 행동이 빨라 보이는 그 도둑을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생각보다 간단했다. 도둑은 발목을 삔 듯 절뚝거리며 근처 오솔길을 숨죽여 걷고 있었다.
날 보고 당황한 것일까.
정상적인 도둑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 그 도둑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똑바로 마주쳤다.
당황한 건 나였다. 그는, 아니 그녀는 여자였다.
그것도 아주 아름다운 여자였다. 웬만한 귀족과 황녀들보다도 더더욱 아름답고 품격 있는 외모였다.
이 정도 거리에선 그녀의 향기마저 나는 느낌이다. 달콤한 향기인걸.
"저.."
실패. 라고 얼굴에 씌여 있네. 그렇게도 슬픈 일일까.. 날 만난 일이.
그때였다. 그녀는 다시 뒤로 돌아 도망치려는 찰나, 크롬이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 왕궁 침입의 죄를 물어.. "
아뿔싸, 이 융통성 없는 기사가 검을 들었다. 그녀를 살려야 해!
나의 노력은 허사는 아니었지만 반 실패로 돌아갔다. 크롬의 검이 반달을 그렸다.
"꺄악!"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들린 비명소리. 난 눈을 감아버렸다. 하지만 내가 눈을 떴을때 있던 것은 시체가 아니였다.
아니, 아무것도 없었다.
"실패했군요. 벌 달게 받겠습니다."
"아.. 아니.. 크롬. 짐은 이런걸로 벌을 내린다거나 하진 않아.."
그보다 그녀는 어떻게 된 걸까.
"크롬. 이만 들어가게. 혼자 산책이 좀 하고 싶다."
"하지만.."
"좋아. 명령하도록 하지. 이만 들어가게."
"알겠습니다. 대신 조심하셔야 합니다."
정말 예외가 없는 남자다. 조금 무섭기까지 한걸.
뭐 그렇게 나는 달밤 산책을 하게 되었다. 산책이라기보다는 수색이라는 말이 어울리려나.
어울린다기보단 반드시 수색이라는 쪽일 것이다. 궁궐 전체를 샅샅이 뒤졌다.
분명 어딘가에 있을거야. 설마 죽지는 않았겠지?
난 이때의 감정을 아직 설명하지 못한다. 난 왜 그리도 필사적으로 그녈 찾은것일까?
막 단념하고 돌아가려는 찰나, 비릿한 피 냄새와 아까의 그 달콤한 향기가 묘하게 섞여 코로 흘러들어왔다.
그녀다!
일단 난 왕이기도 하고, 새는 빨리 다가가면 놀란다고 하니 천천히 다가갔다.
"..누구냐, 거기 풀숲에."
식상하다.. 좀더 세련된 말을 해 볼걸 그랬어.
역시 그녀가 맞아. 나무에 기대 반 누워 있듯 쉬고 있었다. 무지 아파 보이는데.
"까마귀 한 마리가 궁에 들어왔다더니 여기 쓰러져있군. 아름다운 까마귀네. 다친 모양인걸."
오옷! 내가 생각해도 멋진 대사야! 이건 대성공이다!
하지만 그녀는
".. 들켜버렸네.. 젠장."
라며, 비참한 얼굴로 날 쳐다볼 뿐이었다. 그야말로 '젠장' 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표정이다.
허나 목숨을 구걸하는 표정이 절대 아니다. 점점 흥미가 가는 사람인데?
"국왕 앞에서 꽤나 무례하네. 당장 짐이 그대를 죽일지 말지도 결정할 수 있는데."
"죽일거면 어서 죽여. 어차피 목숨을 걸고 들어왔다는 생각, 안 해봤어?"
이부분은 내가 생각이 짧았던거같다. 만일 그녀를 알고 있었다면 이런 말은 전혀 하지 않았겠지.
만일 나의 이야기가 소설화된다면 이 대사는 빠졌으면 좋겠다.
"따라와. 여깄으면 진짜 죽을지도 몰라."
"죽일거면 직접 끌고 가시지. 그리고 난 지금 당장 움직일 힘도 없어. 너의 기사가 날 이렇게 만들었거든."
"한 번을 안 져 주는구나. 알았다, 내 직접 업고 가지."
"나에게 져 주지 않는다" 라는 사실이 너무 신기했다. 흥미가 간다. 이 사람과 대화를 더 해 보고 싶다.
난 그녀를 업었다. 난 힘도 좋은 편이 아닌데다 이 옷은 너무 불편해서 낑낑댔는데.. 상당히 불쾌해하는 거 같다.
그래도 넘어지면 창피하니까-
라는 생각에 내 방으로 넘어지지 않고 도착했다. 천천히.. 천천히 그녈 침대에 앉혔다.
그런데 이 방, 자동으로 문이 닫히는데 설마 내가 자신을 성 노리개로 생각하고 있다고 오해하진 않겠지? 순진한 척 해야겠어.
[환자에겐 우선 안심] 이라고 배웠으니까.. 쉽진 않을 거 같다.
일단 구급 상자를 가져오자. 너무 쉽게 가져오면 내 체력은 정상인데 그녀는 무겁다고 생각한다고 오해할까봐 일부러 끙끙댔다.
"봐봐."
"응?"
"상처. 보자고."
완전 당황한 표정이다. 역시 남자의 방에서 상의를 벗는건 거부감이 들겠지.
그 거부감을 줄여주자. 순둥이처럼 행동하는거야.
"치료해줄테니까 보자고. 이래뵈도 어렸을때부터 병원에서 자란 짐이다. 간단한 상처는 치료할 수 있어."
"아.. 아니.. 난.. 그.. 그게 아니라.."
"응? 뭐가 문제라는거지? 그대도 짐처럼 병원을 싫어하는건가?"
병원에서 자랐다는건 거짓말이다. 단지 그녀를 기록이 남는 병원에 데려가면 크롬이 또 날뛸지도 몰라 데려갈 수 없을 뿐.
하지만 내가 힘이 세지 않은건 사실이다. 그녀는 무겁지 않다.
멍하던 그녀는
"흠흠. 너 말이야. 사실 그냥 내 알몸을 보고 싶은 거 아냐? 니 궁녀가 아니라 직접 벗기진 못하는거고. 그래서 이렇게 벗겨보려는거 아냐?"
생각보다 위험한 생각을 갖고 있다. 노출증 환자인지 의외로 보여주고 싶어하는 눈치인데 자세히는 모르겠는걸. 그냥 모른 체 하자.
"? 무슨 말을 하는건가?"
사실 왕이라는 직업 특성상 표정을 숨기는 건 일도 아니다. 하하. 어리석구나. 네가 져 주지 않아도 내가 이겼다.
"아.. 아냐. 알겠어. 부끄러우니까 뒤 돌아봐 줄래?"
"부끄러움이 많은 백성이로군. 특별히 너의 부탁을 들어주도록 하지."
뭐.. 말하지 않아도 돌아봐 줄 생각이었지만. 아니, 노출증 환자였다면 그게 더 민폐일까나?
"됐어. 이제 돌아봐도 돼."
그녀는 나의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딴엔 가슴을 가리겠다고 이런 거 같은데 저게 더 선정적으로 보이는건 나뿐일까?
상처가 드러났다. 엄청난걸..
"무식하게도 베였네.. 크롬도 참 너무하는군. 아무리 도둑놈이라 해도 짐의 백성일텐데.."
"아얏! 아파! 상처는 왜 벌리는거야!"
"아, 실수 실수. 짐도 실수를 할 때도 있는거야."
실은 그냥 피부를 좀 만져보다 실수했을 뿐이다. 어감이 이상한걸. 성적인 이유로 만진 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냥 신기했을 뿐.
음. 음흉한 맘이 없었다고 해도 거짓말이겠지..
뻘쭘한 맘에 약상자를 뒤졌다.
근데 이런 큰 상처엔 뭘 해야하지.. 저런 상처는 처음 보는걸.
"이 약인가.. 아니면 이 빨간 약인가? 둘 중 하나는 맞을텐데.."
"너 잘 못하는거 아냐?"
"아.. 아니다! 짐은 의술에 특히 능력을 보였다!"
환자 안심시키기라는거. 생각보다 힘들다.
아! 생각났다. 우선 소독이었나?
그럼..
"그래! 이 약이 확실할거다!"
정성껏 발랐다. 근데 미처 다 바르기도 전에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앗!"
헐. 내가 무슨 실수한건가?
"뭐 하는거야! 무지 아프잖아!"
"사.. 상처는 이걸로 소독을 하라고 해서.."
음. 좀 아플거라곤 생각했지만 그 정도일줄은. 근데.. 이 여자.. 앉아서 나를 똑바로 보고 있.. 가슴..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앗!"
나도 너무 당황해서 말도 못하다 내가 순둥이 컨셉이라는걸 기억해냈다.
"이.. 이번엔 또 왜 그러는가!"
안정! 안정!
하지만 절망감에 빠진 표정은 안정이 불가능해보였다. 일단 재워야겠는걸.
뒷목을 때리면 잠든다던가..?
빡.
"아야, 뭐 하는 거야!"
헉. 운다.
"지.. 짐의 손이 그리도 아팠는가? 어찌 눈물을.."
"왜! 왜 때렸냐고! 훌쩍. 안 그래도 아파 죽겠는데.."
"누.. 누가 난동을 부리면.. 뒷목을 때리면 기절한다고 해서.."
너무 사실대로 말해버렸나? 이게 더 큰 실수인가?
"사.. 상처 치료는 됐어! 기절시킬 필요도 없어! 나 여기서 나갈게! 그럼 됐지? 우리 오늘일은 없던걸로 하자! 스카이아도 여깄어! 다신 안 넘볼게!"
기분이 상해버렸을까.. 나에게서 도망치려 한다.
왠지 싫어. 그녀와 더 있고 싶다.
"너 못 나가. 에레브 경비가 다섯 배는 삼엄하다. 짐은 말렸건만.."
"내가 대강 나갈 수 있다니까! 그냥 안녕이야!"
"두 번째 문제는.. 이 방은 이 시간 이후로는 안에선 문을 못 연다는거 정도다. 창문도 없어."
"뭐?!"
물론 이건 거짓말. 창문이 없다는건 사실이지만.
사실 속아넘어갈거라곤 생각지 않지만. 그래도 체력이 고갈되어 보이는건 사실이다.
그냥 오늘밤은 여기서 쉬어 갔으면 좋겠어.
의외로 순순히 믿어주네. 역시 그녀도 지친 것일까.